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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 이원호
3권
---- 차 례 ----
1. 태풍 전야
2. 배신
3. 사면초가
4. 무법자 타운
5. 보스들의 결단
6. 서울과 시베리아의 3월
7. 외로운 사나이
1. 태풍전야
박미정이 김상철의 실종소식을 안 것은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초순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검찰의 소환요구서가 접수된 지 10여 일 후여서 그동안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녀는 시베리아에서 보내온 팩스를 읽다가 금방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팩스는 유장석이 보내 온 공문이었다.
임차지에서 근무 중이던 김상철 과장이 차량과 함께 실종되었는데 아무래도 늪지에 빠진 것 같다는 짧은 내용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은 한과장의 책상 위에 공문을 내려놓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황망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자 지나던 직원들이 힐끗거렸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비어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벽에 이마를 붙인 박미정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떨며 잔뜩 소리를 죽였으나 입에서는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비서실의 한과장은 박미정이 놓고 간 공문을 읽다가 자리에서 솟구쳐 일어섰다. 허둥거리며 이남호에게로 다가간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실장님, 시베리아에서 공문이‥‥‥」
그는 공문을 읽는 이남호의 표정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윽고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안 됐군, 이 사람.」
그는 길게 한숨을 내려쉬었다.
「이리떼가 많은 곳인데, 그곳은.」
그날 오후부터 실종된 김상철이 이리에 잡혀 먹혔다는 소문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박미정은 그 이튿날부터 일 주일간 휴가원을 내고는 행방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휴가여서 한과장이 여러 번 집에 연락을 했지만 시골에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행태를 부리는 직원이 있었으므로 한과장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박미정의 모친 이연희 여사는 50대 중반이었지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깔끔한 용모의 부인이었다. 아파트 근처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여사는 안인석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에 전화했던 안인석 씨 맞지요.」
「예, 어머님, 접니다.」
그들은 초면이었지만 안인석이 여러 번 전화를 했던 때문에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마주앉아 차를 시키고 나자 이여사가 입을 열었다.
「회사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안인석 씨는 친구 되니까 내가 보자고 했어요.」
「예, 저도 궁금했습니다. 갑자기 휴가를 낸 것도 그렇고 연락도 안 되고 해서.」
「글쎄, 나도 속이 상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울기만 해서.」
「지금 집에 있습니까?」
이여사가 머리를 저었다.
「점심때 지나서 내가 시장간 사이에 나갔어요. 부산 외삼촌한테 바람 쐬러 간다고 쪽지를 남겨두고. 다행히 조금 전에 부산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외삼촌 집에 왔다고,」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안인석 씨는 모르세요?」
「저는 잘‥‥‥」
「김상철 씨라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 되지요?」
「예, 제 친굽니다.」
「그 사람하고 가까워진 것 같던데‥‥ 매일 그 사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예 그런데 그 친구는 시베리아에 있는데.」
「연락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저는.」
「걱정이 돼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도무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회사 직원한테 넌지시 물어봤더니 몸이 아프다고만 하면서 휴가를 냈다는군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걱정이 돼서 집안이 어수선해요.」
박미정의 가족은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 하나에 보험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로 네 식구라고 했다. 이여사는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으나 신통한 답을 못 얻자 오히려 더 답답해진 얼굴을 하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안인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S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룹 비서실의 재무팀 소속인 김영광은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수화기를 귀에 댔다.
「예, 재무팀 김영광입니다.」
「김선배, 접니다. 백해근이요.」
「어, 너냐? 아침부터 웬일이야?」
백해근은 고등학교 후배이다. 그가 지난 겨울 입사했을 때 동창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선배님, 바쁘시겠지만 뭘 좀 물어봐도 되겠지요?」
「그래, 물어라, 물어,」
컴퓨터에서 손을 뗀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끔 후배들로부터 받는 이런 전화는 귀찮기도 했지만 우습기도 했다. 그들은 그룹 비서실을 청와대 비서실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증세가 심한 것은 신입들이다.
「선배님, 김상철이 아시죠? 김상철 과장.」
백해근의 말에 김영광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왜?」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시베리아지, 어딘 어디야? 그런데 너, 김 과장 잘 알아?」
「아니, 잘 모릅니다. 제 친구의 친구가 되는데‥‥ 선배님, 제 친구가 김과장한테 꼭 좀 연락을 해야겠다고 해서요.」
「누군데? 그 친구라는 자가.」
「안인석이라고 제 대학동창인데요.」
「선배님, 김과장 전화번호나 아니면 팩스번호라도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그건 곤란해.」
「아니 왜요?」
이맛살을 찌푸린 김영광이 잠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회사기밀이 아니다. 이미 비서실은 물론 관련부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이었고 검찰에도 통보가 된 것 이다.
「김과장은 실종되었어. 며칠 전에.」
「예? 실종요?」
「그래. 시베리아 늪지에서 말이야.」
「죽었어요?」
「그건 몰라. 그러니 네 친구한테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해.」
「아아, 예.」
「그리고 괜히 김과장 가족에게 이런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 회사에서 연락이 갈 때까지는 말이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선배님.」
「내 입장 난처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그랬다간 너하곤 끝장이야. 알았어?」
그날 오후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간 안인석이 해운대의 조그만 호텔에 묵고 있는 박미정을 만났을 때는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안인석을 보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호텔 앞의 찻집으로 가자는 그의 제의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한참 후에야 커피를 가져다 놓았는데도 제각기 딴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박미정이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이야기 듣고 왔어?」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아 있을 거야. 난 그놈을 믿어. 죽을 놈이 아냐.」
「‥‥‥」
「아아, 왜 내 주변에서는 이런 일만 일어나지.」
그 순간 안인석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종업원이 지나면서 힐끗거렸지만 그는 흐르는 눈물을 가리지 않았다.
「네가 비서실에 있으니 더 잘 알 것 아냐? 늪지에서 실종되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왜 나한테 진즉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너만 알면 되는 거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지만 외면한 채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을 거야. 난 며칠간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 조금 정리가 돼. 아마 상철 씨는 소환을 피해서 행방을 감추었을지도 몰라.」
「소환을 피하다니?」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친 안인석이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일이 있어. 검찰에서 소환시키라고 했거든.」
「어떻게 된 일인데?」
「나, 피곤해.」
박미정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상체를 의자에 기대었다.
「며칠 동안 별로 먹은 것이 없어.」
「난 내일 서울로 올라갈 거야. 다시 회사에 나가서 기다릴 거야.」
「검찰에서 무엇 때문에 상철이를 소환하려는 거야? 자세히 말해.」
그러자 잠시 안인석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검찰에서 살인혐의로 소환장이 왔던 이야기를 하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살인혐의라고? 누구를? 왜?」
「직원이야.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래도 난 기다릴 거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들을 거야.」
이제 박미정은 김상철이 실종되지 않고 모습을 감추었다고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인석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연속적인 충격으로 박미정과는 달리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 조퇴하고 내려 왔어?」
그녀가 묻자 안인석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당연한 일을 왜 묻느냐는 시선이다
「그럼 내일 아침 나하고 서울로 올라가. 첫 비행기로.」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낸 박미정이 그에게 내밀었다.
「얼굴 닦아. 지저분해.」
찻잔을 내려놓은 강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유장석이가 여러 지역을 조사했는데 거주환경이 좋은 곳 몇 군데를 사진으로 보내왔어. 하지만 내가 눈으로 직접 봐서 결정할 작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연내에 거주지를 기공하면서 조선족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일 작정이야. 내년쯤이면 직원의 가족은 일부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저녁을 마치고 서재에 마주앉은 그들의 화제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임차지에 관한 것이다. 임차지 이야기를 할 때의 강회장 분위기가 언제나 밝았으므로 강용식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다. 방문이 열리더니 약그릇을 든 강미현이 들어섰다.
「김진모 교수가 연락해 왔다는 보고는 들으셨습니까?」
강용식이 묻자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어. 우린 그런 사람이 필요해. 학자라도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이야.」
「직급은 상무급으로 하고 연구소장 직책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유전을 발견했던 김진모 교수는 교직을 떠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는 이제 임차지의 연구소장이 되어 자원을 발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강용식이 소파의 한쪽에 앉아 있는 강미현을 힐끗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약그릇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자세였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버님, 그럼 언제 떠나실 겁니까?」
「다음 주에 가겠다. 이젠 지난번하고는 상황이 다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기부에서 실종확인을 하려는 모앙입니다. 임차지로 직원을 보내겠다고 해서 이실장이 거절했다는군요.」
「그런 망할 놈들 같으니.」
강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희들이 뭔데 남의 땅에 들어와? 유장석이한테 단단히 말해 둬야겠군.」
「이실장이 이미 조처했을 겁니다.」
약그릇이 비워지자 강미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이번에 가실 적에 제가 따라가면 안 돼요?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그쪽 자연을 필름에 담아오고 싶어요. 회사 홍보효과도 있고, 또‥‥‥」
「얘가 무슨‥‥‥」
강용식이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강회장은 눈을 껌벅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젠 근대직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말로만 들은 광대한 땅에 대해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더한 선전효과도 없을 것 같아요.」
강미현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천천히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럴 때도 되었다, 이젠. 그럼 준비해라.」
「꼭 마음에 드시는 작품을 만들겠어요, 할아버지.」
서재를 나온 강미현은 약그룻을 가져다 놓고는 응접실에 앉아 TV를 보았다. 건성으로 화면만 보던 그녀는 한참 만에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과일을 깎아들고 서재로 들어섰다. 강회장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은 강미현은 소파의 한쪽에 앉았다. 어렵기로 하면 아버지보다 열 배는 더한 할아버지였지만 이해의 폭이 그만큼 더 컸으므로 어려운 이야기는 그가 더 낫다.
이윽고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응,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느냐?」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할아버지.」
「말해라.」
「저, 김상철이라는 사람 정말 실종되었어요?」
그러자 강회장이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네가 그놈에 대해서 잘 알겠구만.」
강미현의 해독으로 여러 번 암호전화를 주고받은 것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은 큰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인지 강회장은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미현은 김상철이 실종되었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래, 그놈은 실종되었다. 이실장은 그놈이 늑대한테 잡혀 먹혔다고 믿는 모양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
「그건 나도 모른다.」
강회장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이 없었던 거지, 그놈은.」
「‥‥‥‥」
「재주도 좋고, 기회도 잡았던 놈이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은 모양이야.」
「너도 이제 스물다섯이지?」
「네, 할아버지.」
강회장이 나이를 집어 말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놀란 그녀가 머리를 들었으나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이남호 실장은 회의실로 내려와 두 사내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가 회의실에서 손님을 맞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어서 직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는 장관이 방문을 해도 사무실의 소파에서 맞아들이는 성격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이남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곳은 우리가 개발을 하고 있지만 러시아 영토지요.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행위는 러시아 사법당국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못 된단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검찰 수사관이었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은 심재택이다. 수사관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40대 후반으로 눈매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 사내였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임차지에는 러시아 경찰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법권을 행사할 러시아 기관도 없고, 근대에서 조직한 자위대가 경비를 하고 나름대로 치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남호가 힐끗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재택이 하바로프스크에 있었고 고태성이 그의 부하로 활동했다는 것도 안다. 김상철의 말에 의하면 심재택은 고태성과 함께 신해복을 죽인 인물이다.
「잘 아시는데, 우리 그러면 원칙대로 하십시다.」
이남호가 다시 검찰 수사관을 향해 말했다.
「한국은 아직 러시아와 범인 인도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당국에 수사협조는 의뢰할 수 있을 거요. 러시아 당국에 의뢰하세요. 그러면 일이 수월해질 테니까.」
「협조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남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예. 협조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 수사관이 러시아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범인을 잡아갈 수는 없지요. 아마 러시아 정부가 그것을 알면 그 수사관은 러시아 경찰에게 잡혀갈 것이고 그것은 곧 국제 문제가 되겠지요.」
「‥‥‥」
「더구나 김상철이는 실종이 되었습니다. 직원을 살해했다는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실종된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 넓은 땅에서 말이오.」
「실장님.」
심재택이 입을 열자 이남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구, 이제 말씀을 하시는군. 그래, 듣겠습니다.」
「증인은 바로 접니다. 김상철이 고태성을 살해했다는 증거를 내놓은 사람이 바로 나란 말씀입니다.」
「그래요?」
「고태성은 살해되기 직전에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김상철에게 쫓기고 있다고 했어요. 살해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직후에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
「난 직업상 통화는 녹음을 하지요. 특히 외국에서 작업을 할 때는 더욱.」
이남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저는 김상철이가 왜 자기 부하직원을 죽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심과장께서는 그 이유를 아시오?」
「그건 모릅니다.」
「그리고 근대 직원인 고태성이가 왜 안기부 간부인 심과장께 전화를 했을까요? 근대의 다른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말이오.」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자 이남호가 허리를 세우더니 일어날 채비를 했다.
「유감이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더니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간에 비서실의 한성문 과장은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있었는데 마주보고 앉은 것은 강미현이다.
「이것 참, 기획에서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대던 한성문이 강미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획의 홍보부장이 고부장 맞지요?」
「네, 고세훈 부장님이세요.」
「그렇다면 강과장께선 고부장 밑에 계시겠구만.」
「네, 제가 모시고 있어요.」
「입사한 지는 얼마나 되십니까?」
「미국에 있다가 온 지 일 년 조금 못됐어요.」
그러자 한성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유학파로 특채된 직원쯤으로 아는 모양인지 그의 태도가 다소 느슨해졌는데 강미현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근대기획 내에서 자신이 회장의 손녀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머지않아 노출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회장의 손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싫은데다가 자신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고 싶다는 자신감으로 기획의 사장과 몇 명의 핵심 간부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내년쯤이면 전 그룹에 소문이 퍼질 것을 그녀도 예상하고는 있다.
한성문이 물었다.
「그런데 그 실종사건의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겁니까? 그리고 언론은 어디까지 알고 있습디까?」
「저한테는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셔야겠어요. 그래야 언론에 관한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한성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야 대외비도 아닙니다. 조금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이죠? 그, 김상철 과장이란 사람.」
「살인혐의를 받고 있어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료를 살해했다는‥‥그래서 검찰의 소환장이 와 있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실종이 된 겁니다. 임차지에서 공문이 온 걸 보면 늪에 빠져 실종이 되었다고 했어요, 그 근방은 이리떼가 많다고도‥‥‥」
「살인한 동기는요?」
「그건 모릅니다. 그저 용의자라고만.」
「회사에서는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지요?」
「실종처리를 하고 있어요. 임차지에선 실종통보가 온 후로 연락이 없습니다. 그래서 ‥‥」
「언론에서 살인혐의나 검찰소환 같은 이야기가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나도 고부장한테 따로 당부를 할 테니까.」
「그건 알아서 하세요. 그런데 살해되었다는 직원은 누구죠?」
「고태성이라고 김상철 씨 소속 직원이죠.」
「트럭에 친 교통사고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한성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힐끗거리고 있었으므로 강미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실종이나 살인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눈물을 닦은 김민희는 수건을 접는 것에 온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귀퉁이를 맞추고 반으로 꺾고는 다시 사각형으로 정성들여 접었다. 학교 근처의 카페 안이다. 밤 10시가 되어 있었지만 카페 안은 음악과 손님들의 소음으로 떠들썩했다. 이정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민희야, 실종되었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 없어.」
「그래. 회사 직원도 그렇게 말했어.」
코가 막힌 김민희가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비관 안 해.」
「그럼 술이나 먹자.」
이정훈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복학생으로 김민희의 애인이다.
그녀가 김상철의 실종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 3시 경으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보호자로 되어 있는 이모를 찾던 근대직원은 이모가 외출했다고 하자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임차지에서 실종되었는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짧은 내용이었고 자세한 것은 모른다면서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달 말쯤 회사에서 보상금이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던 김민희는 겨우 다이얼을 눌러 이정훈을 불러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였기 때문이다.
이모는 그 소식을 들으면 떠들썩하게 울기부터 할 것이 뻔했고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이다.
술잔을 들어 단숨에 삼킨 김민희가 흐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그렇게 사라질 사람이 아냐.」
벌써 몇 번째인가 되풀이하는 소리였으나 이정훈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민희야.」
「하지만 아버지한테는 어떻게 말해야지?」
「말씀 드리지 마라, 당분간.」
「만일 오빠가 정말로 그렇게‥‥‥」
「재수 없는 소리 말라니까.」
빈잔에 술을 채워준 그가 술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기다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네가 기운을 차려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아버지가 대전 교도소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가 접근해 왔을 때 김민희는 그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그것이 그들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김민희에게 같이 면회를 가자고 조르고 있었지만 아직 같이 간 적은 없다.
「오늘은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술잔을 든 이정훈이 다짐하듯 말했다.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야. 네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자 김민희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술기운이 겹쳐서인지 흐느껴 울었으므로 옆자리의 손님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카페를 나온 것은 11시 가 넘어서였다. 김민희는 부축하려는 이정훈의 손을 뿌리치고는 꼿꼿한 자세로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너, 괜찮아? 토할래?」
따라 걷던 이정훈이 묻자 그녀는 하얗게 된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그들은 택시 정류장에 섰지만 택시는 멈춰 서지 않았다. 차량들은 속력을 내며 그들 앞을 지나갔다. 가끔 합승 택시가 멈춰 섰지만 방향이 다르자 요란한 엔진 소리를 뱉으며 사라졌다.
「빌어먹을.」
주위를 둘러본 이정훈은 이곳에 택시 승객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꼼짝 않고 서 있는 김민희의 어깨를 잡았다.
「민희야, 길 건너서 타자.」
건너편에는 빈 택시가 여러 대 지나고 있었다. 앞쪽을 바라본 채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이는 김민희를 보고 그는 몸을 돌렸다. 건널목은 50미터쯤 아래쪽이었다. 대여섯 걸음 아래쪽으로 걷던 이정훈은 무심코 머리를 돌려 옆을 보았다.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던 김민희가 없다. 다시 뒤쪽으로 머리를 돌린 그는 순간 입을 딱 벌렸다.
「민희야!」
정신이 반쯤 나간 김민희가 차도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민희야!」
온몸을 굳힌 그가 다시 악을 쓰듯 소리쳤을 때 두 개의 불빛 가운데 그녀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거리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에 이어서 충돌음이 났고 김민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이정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이제 거리에는 차들이 모두 멈춰 서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북쪽 20킬로 거리에 있는 김스크 마을은 조선족 20여 호가 모여 사는 곳으로 그들 사이에는 김일성 마을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 며칠간 묵고 갔다는 이유 때문인데 어느 집에서 묵었냐고 물어보면 모두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이름이 남아 있는 것만 보아도 김스크 마을은 북한과 관계가 깊었고 북한 공작원이 마음 놓고 묵을 수 있는 아지트 중의 하나였다.
김상철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이금철의 권고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시내의 호텔이나 여관에 묵을 형편도 아니었다. 아무르 호텔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다가 인투리스트에는 오성그룹 직원들이 공공연하게 정보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종자가 된 상황에서 그들에게 발견된다면 당장에 회사가 불편해지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김스크 마을에 묵은 지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장국진이 지프를 몰고 그가 묵고 있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국도에서 낮은 산맥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2킬로쯤 들어간 곳에 세워진 마을이다. 비포장도로여서 지프의 바퀴는 흙물에 젖어 있었다. 지프에서 내린 그가 김상철에게로 다가왔다.
「김과장님, 이번에 다시 조선족 500명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각 기능별 모집 인원을 장인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북한 쪽과의 연락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당가에 있는 나무벤치에 앉았다.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세워진 집이어서 산 밑을 흐르는 개울물이 바라보였다. 장국진이 발밑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앞쪽에 모여 있는 서너 마리의 닭을 겨누고 던졌지만 빗나갔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문득 그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김상철에게 깍듯한 경어를 쓴다.
「어떻게 하다니?」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기만 할 거냔 말이오.」
「매일 저녁 주인 영감님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어. 밀주 맛도 괜찮고.」
돌멩이를 집은 장국진이 닭을 향해 던졌지만 또 빗나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일만 이사와 장국진밖에 없다.
「직원들은 모두 과장님이 늪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압니다. 철저하게 비밀로 한 것은 좋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건 나도 숨이 막히누만.」
장국진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 올 때에도 몰래 와야 합니다. 한 이사한테도 비밀로 하고 온단 말이오. 과장님과의 접촉을 될 수 있는 한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단 말입니다.」
「당연하지,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유 전무님하고는 어떻게 이야기가 된 겁니까? 이렇게 숨어 있기만 하라는 거요?」
「당분간은. 그동안 회사에서 해결해 보겠다고 했어.」
「해결은커녕, 모두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장국진이 다시 집어던진 돌멩이에 이번에는 닭 한 마리가 맞아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이번에 새로 온 과장은 마음에 안 들어. 그놈은 매일 한 이사와 무슨 쑥덕공론을 하는지 나하고는 얼굴 맞대기도 힘듭니다. 그놈도 아마 나에 대한 감정이 마찬가지겠지만.」
「너밖에 없어. 지금 북한 쪽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글쎄, 날 믿지 않는 것 같은데‥‥ 과장이나 한 이사도 말이오.」
말을 멈춘 그들은 한동안 앞쪽의 골짜기와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장인규가 찾아온 것은 오후 2시경으로 점심을 마친 김상철이 개울가에 나와 앉아 있을 때였다. 산을 등진 위치여서 마을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쪽은 두리번거리며 오는 것이 그를 찾는 모양이었다. 이젠 여름이어서 밝은 색 바지에 단화를 신고 긴팔 셔츠를 입은 간편한 차림이다. 언제나처림 머리를 뒤로 묶어 올렸으므로 긴 목과 둥근 얼굴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울가에 와서야 그녀는 건너편에 앉은 김상철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낚시하러 가셨다고 해서.」
골짜기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장인규는 개울에 박힌 바위들을 가볍게 뛰어 건너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낚싯대만 가져왔을 뿐으로 낚시를 한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가 묻자 장인규는 머리를 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야기나 하려고.」
「하긴 이러고 있는 나한테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아침에 장국진 씨가 다녀갔다면서요?」
「누가 또 재빠르게 보고를 했군.」
「모두 김 선생을 보호해드리려는 거예요.」
장인규가 숨을 돌리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답답하군요. 이곳은. 앞뒤가 막혀 있어서.」
「근대 쪽에서는 무슨 대안이 있다던가요?」
「실종자한테 무슨 대안이. 사후 정리만 남았을 뿐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고 개울물 소리와 뒤쪽에서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바람이 침엽수의 윗가지를 흔들고 지났으나 그들한테는 닿지 않았다. 장인규가 낚싯대를 들더니 낚싯대 끝으로 개울물을 건드렸다.
「솔직히 말하지요. 우린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은 이제 상황을 파악했으리라 믿고 말하는 겁니다.」
「‥‥‥」
「지금 근대에서 당신은 처치 곤란한 짐이에요.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김상철 씨가 영영 사라져 주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낚싯대를 내려놓은 그녀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자신이 소모품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겠지요. 이제 근대에서의 당신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럼 당신이 새 역할을 준다는 거요?」
메마른 소리로 김상철이 묻자 그녀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절실하게 당신을 필요로 하니까, 큰 역할이 되겠지요.」
「근대를 배신하고 말이요?」
「그쪽이 먼저 배신한 것 아녜요? 실종자 처리를 하고는 이미 완벽하게 당신의 기록을 지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장국진도 당신을 몰래 만나러 오지도 못할 겁니다.」
「아까 내가 당신을 보호한다고 했지요? 누구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상철이 얼굴을 펴고는 웃었다.
「머지않아 북한 쪽이 마스크를 쓰고 근대직원인 체하면서 날 치러 올 것 같군.」
「아마 근대 쪽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당신을 쏠 것 같은데.」
「내 역할이 뭐요?」
「우리 쪽의 근대 창구‥‥아마 당신도 마음에 들 겁니다.」
「당신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들이 당신을 이용한 만큼 당신도 그들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어요. 사실 당신은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요?」
김상철이 불쑥 손을 뻗어 장인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놀란 듯 눈을 치켜뜬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날 위해서 옷을 벗을 수가 있소?」
장인규가 그의 손을 떼어내려는 듯 어깨를 흔들었다.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이손, 치워요.」
「이런 경우는 예상 안했나?」
이제 김상철의 두 손은 그녀의 양쪽 어깨를 쥐었다.
「당신을 지금 강간하겠어. 선택의 여지는 당신도 없단 말이야.」
김상철의 힘에 눌린 장인규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구두가 벗겨져 떨어졌고 어느 사이에 벨트가 풀려진 바지가 내려갔다. 그러자 겨우 한 손이 풀린 장인규가 손을 휘둘러 김상철의 뺨을 쳤다. 그 순간 김상철의 주먹이 날아왔고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그녀는 사지를 늘어뜨렸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장인규는 아랫도리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팬티까지 벗겨진 하체는 알몸이었으므로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김상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찾아 입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에 침입당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를 악문 장인규는 구두를 찾아 신고는 개울에 발을 적시면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
한일만 이사가 김상철의 실종소식을 들은 것은 점심을 마친 후였다. 사흘 만에 다시 찾아간 장국진에게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실종자가 실종된 사건이라 당황했다.
「이거 야단났는데.」
한일만이 찌푸린 얼굴로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으나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한 애들도 정말 모른다는 거야?」
「그들도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나한테 물어보던데요.」
「숨겨두고 그런 것은 아닐까?」
「글쎄요. 그것은‥‥‥‥」
장국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한일만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전무가 알면 난리를 치겠는데‥‥ 이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서서 찾아봐야겠어. 잘 알겠지만 소문나지 않게 말이야. 김상철이는 이미 실종된 사람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김상철이가 회사에 불만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회사에서 처리해줄 텐데 말이야.」
「이거 곧 회장님도 오실 텐데 신경이 쓰이는구만 그래.」
한일만의 방을 나온 장국진이 아래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조병기 과장이 손짓을 했다.
「장형, 나 좀 봐.」
그는 김상철 대신으로 서울에서 파견된 근대 경력 10년차의 고참이다
「한 이사하고는 무슨 얘기야?」
편치 않은 얼굴로 그가 묻자 장국진이 머리를 저었다.
「별것 아니오. 이번에 보내질 인력관계 때문에,」
「인력 관계가 어쨌다구?」
「혹시 북한에서 보내진 빨갱이가 섞여 있지 않느냐고 물었소.」
그러자 준위에 있던 사원 두어 명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장국진이 제 입으로 빨갱이 소리를 하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병기는 가는 눈을 찌푸리며 웃지 않았다. 그는 장국진이 한 이사와 접촉을 하면 언제나 심기가 불편했는데 소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일 그자들한테 가서 서둘러 달라고 말해, 다음 주 중에는 보내야 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이사를 만나고 오면 나한테 보고를 해줘. 당신은 직장생활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데 그렇게 해야 되는 거야.」
「그렇게 하지요.」
주위의 사원들은 제각기 분주한 척 일하며 딴전을 피웠지만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장국진은 자리에 앉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 있는 파벨의 저택은 2층 시멘트 건물로 도로에서 1킬로쯤 들어간 숲 속에 세워져 있었다. 물론 파리야킨의 대저택에 비교하면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이었지만 이제 이곳은 권력의 중심이다. 집 앞에 늘어선 수십 대의 차량과 들락이는 사내들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리야킨은 이미 잊혀진 인물이 되어서 그의 유가족을 찾는 사람은 없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김상철이 파벨의 방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섰다.
「김,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잘 왔어.」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들은 소파에 마주앉았다.
「북한 쪽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나한테 온 것을 근대 쪽에서는 아나?블라디보스톡
「그들도 모릅니다.」
「하긴 그쪽에 보고할 상황도 아니지.」
탁자 위에 놓여진 보드카 병을 든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한 잔 하겠나?」
「주십시오.」
잔에 술을 따르고 제각기 한 모금에 삼킨 그들은 잔을 내려놓았다.
「살인혐의를 받고 있다던데, 근대에서 손을 쓰고는 있겠지?」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
「동료 직원이었다고 들었는데.」
「안기부 정보원이었지요. 그자는 그날 밤에 저와 행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파벨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쪽 아지트에 숨어 있다가 나온 걸 보면 그쪽도 불안했던
모양이군. 잘 왔어. 이곳이 자네한테는 제일 적당한 은신처야.」
「‥‥‥‥」
「내가 숙소를 마련해주지. 이곳은 안전해. 마음 놓고 지내도 돼.」
「고맙습니다, 파벨 씨.」
「근대 쪽에 나하고 같이 있다고 이야기해도 상관없어. 한국 정부가 알아도 문제될 것이 없고. 그렇지, 참‥‥」
생각났다는 듯이 파벨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서울에 있으니 그건 곤란하겠군.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자네 생각대로 하게, 그것은.」
「이제 서울에 내 가족은 없습니다. 」
잠자코 바라보는 그를 향해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제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제 장례를 치렀다는군요.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답니다.」
「저런, 정말 안 됐네, 김.」
파벨이 찌푸린 얼굴로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기운을 내게나, 김.」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닙니까? 보드카 몇 병만 더 마시면 더 기운이 날 겁니다, 파벨 씨.」
어제 김상철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이모의 집을 지키던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학교 선배라면서 김민희를 찾는 그에게 장황하게 사건을 설명해주다가 감정에 벅차 울먹이기까지 했다. 장례를 치르는 마당에 난데없는 남자 선배가 나타나 민희를 바꿔달라니 기도 막혔을 것이다. 김상철 이모를 통해 김상철 가문의 내역도 알고 있는 터여서 외국에 나가 있다는 김상철의 걱정도 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김상철은 파벨이 따라주는 보드카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우나를 하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아직 아무 소식 없어?」
자리에 앉자마자 안인석이 물었다. 회사 근처의 경양식집 안이다.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아직, 그대로야.」
「그대로라니?」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그러자 안인석이 혀를 찼다. 이틀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김민희의 장례를 도맡다시피 해서 끝낸 그였다. 놀란 이모네는 민희 애인 이정훈에게서 들은 대로 안인석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한 탓인지 그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 실장이 빈소에 찾아와주기까지 한 걸 보면 많이 생각한 거야.」
박미정의 말에 안인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책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면 되느냔 말야. 민희는 근대가 죽였어.」
안인석이 양주병의 마개를 거칠게 뜯고는 잔에 따랐다. 그는 반쯤은 넋을 잃고 있는 이정훈에게서 김민희가 무엇 때문에 폭음을 했고 어떤 상태에서 차도로 들어갔는지를 모두 들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들만 불쌍하지.」
술을 삼킨 안인석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상철이 수색작업은 하고 있는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그 자식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 일을 알면 ‥‥‥」
박미정은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다가 집어 들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이 실장에게 김민희의 사고 사실을 알린 것은 그녀였다. 놀란 이 실장이 그날 저녁에 빈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다시 박미정을 만나자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도 자신과 김상철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든 박미정은 안인석의 얼굴을 보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본 것이다. 빈소에서 손님을 맞으면서, 묘지에 김민희를 묻으면서 수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아온 터였으나 박미정은 가슴이 메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그에게로 내어 밀었다.
「그만해, 인석 씨.」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도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만 울어. 그리고 그만 마시고,」
「상철이가 불쌍해.」
수건을 가로채듯 받아 쥔 그가 얼굴을 닦았다.
「그 새끼, 차라리 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다음날 아침, 회장실로 들어선 이남호는 강회장 앞으로 다가가 섰다.
「회장님, 아직 김상철의 행방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국진을 시켜 가볼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게 했습니다만.」
서류에서 시선을 든 강회장은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한 놈들도 찾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 그쪽으로 넘어간 것 아닐까? 내 생각엔 그럴 가능성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 쪽에서는 김상철이 연락해 오지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라,」
「제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알까?」
「전화를 했다면 알겠지요. 하지만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강회장이 찌푸린 얼굴로 앞자리에 앉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 애인이라는 놈의 입을 막아. 회사에서 실종통보를 해서 그 애가 비관했다는 얘기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도록 하란 말이야.」
「조처했습니다.」
「어쨌든 안 되었어, 김상철이.」
「유전무가 매일 연락을 해옵니다. 김상철이한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자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로선 그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야.」
「김상철이 회사에 반감을 품게 된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더구나 동생 사건까지 알게 된다면‥‥‥」
그러자 한동안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강회장이다.
「그놈, 어쩌다가 안기부한테 꼬투리를 잡혀가지고서‥‥ 운이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회장실을 나온 이남호가 자리에 앉자 주춤거리며 테이블 앞에 선 것은 박미정이다.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실장님, 이번 시베리아 출장에 제가 빠졌는데요.」
「음, 그런가?」
이남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출장인원이 많아서 내가 조정을 시켰어. 그래서 거기도 빠진 모양이지.」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하바로프스크 지사와 이번에 통신관계로 회의를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도 모두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통신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곧 위성통신으로 대체될 것이니까.」
얼굴에 웃음을 띤 이남호가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가서 고생만 할 테니 한과장만 따라가도 될 거야. 맡은 일에 책임을 갖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
「염려하지 말고 한 과장한테 맡겨.」
이남호가 시선을 내렸으므로 박미정은 머리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서류를 뒤적이던 이남호가 힐끗 시선을 들어 박미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가늘게 숨을 내려쉬었다.
사흘 후, 전세비행기 한 대가 백여 명의 승객을 싣고 하바로프스크 공항에 착륙했다. 강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기자들, 거기에다 이남호가 인솔한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도착한 것이다. 강회장과 이남호 등은 숙소로 들어갔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인투리스트 호텔의 3개 층을 차지하고 여장을 풀었다. 이제 이곳도 여름이어서 아무르 강가에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시내구경을 하고 온 강미현이 콤소몰 광장 근처의 숙소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4시였다. 이제 그녀는 회장의 손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2층에 있는 회장실로 들어섰다.
차를 마시고 있던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사람들에게 광대한 땅과 천연자원만을 보여줘서는 안 돼. 그것을 개척하는 근대 일꾼들을 부각시키고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심어주도록 해야 한단 말이다.」
앞자리에 앉은 그녀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기자들이야 있는 그대로 찍고 취재하더라도 넌 그런 자세로 사진을 만들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근대시는 아마 세계에서 제일 깨끗하고 현대적이며 넓은 도시가 될 것이다.」
그는 임차지 중심부에 건설될 도시의 이름을 근대시로 결정해 놓았다. 동부 시베리아에 인구 2백만이 상주할 도시가 건설되는 것이다.
「조선족 노동자들이 벌써 만 명 가깝게 임차지로 보내졌다. 아마 올해 안에 노동자들만 3만 명이 될 거야. 그 거대한 역사의 장면을 찍으면 국민들이 감격을 할 것이다.」
강회장의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조그만 반도에서 정권다툼으로 밤낮을 보내는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난 국민들에게 보여줄 선물이다. 우리가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누구 덕분인지를 국민들도 알게 될 거야. 국민들 자신의 노력과 경제인들의 공로지. 정치인들이 도와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남호가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한일만이다.
「회장님, 말씀 드릴 일이‥‥‥」
이남호의 시선이 강미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아. 말해 봐.」
강회장이 말하자 그들은 나란히 섰다.
「장국진이 없어졌습니다. 담당 과장한테는 어젯밤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했다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습니다.」
이남호의 말을 한일만이 이었다.
「김상철이 실종된 후로 근무태도가 불성실했다고 담당과장이 말합니다만 제 생각엔‥‥」
그가 말을 멈추자 강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 생각에는 어쨌단 말이야?」
「김상철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해서요.」
「김상철이와?」
「예, 그자는 김상철이의 심복입니다. 그래서.」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혹시 북한 쪽으로 돌아간 것 아니야?」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자는 돌아가면 중형을 받는다고 제 입으로도 말했습니다.」
「그럼 잡혀간 것 아니냔 말이야.」
「그자는 우리 쪽의 중요한 연락원이고 그들로써도 필요한 자였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회장님.」
머리를 든 강회장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넌 나가 있거라. 그리고 자네들은 자리에 앉아.」
이제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어서 조금 전의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단층 시멘트 주택 안이다. 값싼 재료로 만들었지만 단단하고 단순한 구조의 서민용 주택이었으므로 김상철과 장국진이 생활하기에는 적당했다. 특히 어제 아침에 이곳에 도착한 장국진은 대만족이었다. 달러를 들고나가 베료스카에 가서 잔뜩 쇼핑을 하고 들어온 그가 물건을 꺼내면서 김상철에게 말했다.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되겠시다. 아예 조선족 여자 하나씩 잡아서 우리 둘이 이곳에 눌러앉아 삽시다.」
점심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강회장은 아침에 시베리아로 떠났겠군.」
김상철이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군에서 헬기를 여러 대 빌리는 모양이었는데 아마 근대의 헬기까지 합해 행차가 장관일 거요.」
「조선족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강회장은 사장단에다 기자들까지 합해 백 명도 넘는 수행원을 데리고 왔습디다. 거기에다 이번엔 손녀까지 데리고 온 모양이오.」
「우리야 이젠 그자들한테서 잊혀진 사람들이지만. 나는 더 이상 미련이 없시다.」
파벨은 김상철에게 자신의 보좌역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좋게 표현하면 비서였다. 그는 근대와의 관계에서 김상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김상철이 머리를 들고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이실장을 만나야겠어.」
프라이팬에 고깃덩이를 넣고 기름에 굽던 장국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실장을 왜요?」
「내가 북한 쪽의 모함에 걸려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장국진은 프라이팬을 주방위에 내려놓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과장님이 고태성을 처치하라고 그들에게 맡긴 것은 사실 아니요?」
「그렇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김상철이 부릅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를 내 귀로 들어야겠어, 이실장이나 회장한테서.」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도.」
입맛을 다신 장국진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있었다면 진즉 조처를 했을 거요. 이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만나고 돌아오겠다.」
김상철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장국진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좋시다, 같이 갑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요. 심재택이도 와 있다고 하니까.」
아무르 호텔의 커피숍에 앉아 있던 심재택은 다가오는 고정문을 보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 그들은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전세비행기 편으로 오신 거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정문이 묻자 심재택이 코웃음을 쳤다.
「자리가 있어도 내주지 않았을 걸? 근대 놈들은.」
「아직도 실종된 김상철이는 못 찾았다고 하던데.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어떻게 되기는? 그래서 내가 다시 이곳에 온 것 아니요.」
주위를 둘러본 고정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대의 일꾼으로 뽑혀서 돈을 벌려면 북한 공작원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까?」
「글쎄, 나도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심재택의 말에 고정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 상주하다시피 머물고 있으면서 정보원들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안기부 요원보다 정보가 빠르면 빨랐지 늦지는 않다. 고정문은 심재택이 정보요원으로서의 자존심으로 아는 척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에서 노동자 모집을 할 때 북한에서 온 공작 요원들에게 취업신청서를 내면 된다는 거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북한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받는답니다. 그러기만 하면 100% 취업이 된다는 거요.」
「이제까지 만 명 가깝게 임차지로 보내졌는데 아마 서약서를 쓰고 떠난 사람들이 반도 넘을 것이라고 합디다.」
고정문이 만나자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말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른 침을 삼킨 심재택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자존심을 내세워 빙빙 돌려 물을 여유도 달아났다.
「그렇다면 근대와 북한 쪽 놈들이 서로 비밀 협상을 맺었단 말인가?」
그가 묻자 고정문이 말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근대에 취업신청서를 내면 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데 서약서를 쓰고 나면 100% 취업이 된다니 말이오. 근대와 무슨 묵계가 있지 않고서야‥‥‥」
「그 신청서를 받는다는 놈들은 일정한 거처가 있다고 합디까?」
그러자 고정문이 머리를 저었다.
「그자들은 조선족 몇 명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겁니다. 일정한 거처는 없고 어떤 때는 공회당에서 접수를 했다가 때로는 북한과 가까운 조선족 마을 한 집에서 일을 한다는데‥‥」
「이것, 큰일이군.」
심재택이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내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대는 끝장이야.」
「신중하게 조사하셔야 할 겁니다. 나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듣고서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래서 심과장을 만나기만을 기다렸던 겁니다.」
「김상철이가 내 부하를 죽인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탁자의 한끝을 노려보며 심재택이 말했다.
「북한 놈들과의 관계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김상철이의 실종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실종이 아냐. 이제는 나도 확신이 섰어. 근대 놈들은 김상철이를 숨겨두고 있는 거야.」
다음날 아침, 강회장 일행이 헬기 14대에 나누어 타고 임차지로 떠난 후이다. 헬기 착륙장에서 돌아온 한일만은 긴장이 풀린 나른한 몸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회장이 옆에 있는 동안은 음식도 제대로 넘어가는 것 같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자리에 앉는 그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이사님, 대기실에서 장인규란 여자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인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한일만이 눈을 치켜떴다. 그가 장인규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김상철과 장국진, 또는 조과장을 통해서 접촉했을 뿐으로 그가 만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대기실로 들어서자 밝은 색 정장차림의 장인규가 혼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20대 후반의 미인이다.
「갑자기 찾아와 놀라셨군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장인규가 말하자 한일만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잘 오셨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중요한 일이라 제가 직접 찾아왔어요. 시내에서 뵐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정보원들 눈에 더 띌 것 같아서.」
「하긴 그렇지요. 이곳은 한국인들로 들끓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일만은 그녀가 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이것을 들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러면서 장인규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소형녹음기였다.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은 그녀는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심재택과 고정문의 대화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어제 아무르 호텔 커피숍에서 안기부의 심재택과 오성그룹의 고정문 부장이 나누는 이야기지요.」
그들의 대화 도중에 장인규가 설명을 했다.
「오성그룹은 정보수집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점점 굳어져 가는 한일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인규가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녹음기의 스위치를 껐다.
「하지만 안기부는 어떤 증거도 증인도 찾지 못할 거예요. 우리한테 서약서를 쓴 조선족들이 안기부 요원한테 사실을 말할 리도 없고. 왜냐하면 그들보다 우리가 가깝게 있거든요.」
「‥‥‥‥」
「하지만 이걸 듣고 나서 느끼셨겠지만 문제는 김상철입니다. 그자가 실토하면 근대는 치명상을 입게 될 거예요.」
「‥‥‥」
「살인을 한 것도 북한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다고 심재택이가 당장에 추정하는 것 보세요. 만일 김상철이가 근대를 걸고 넘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일만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김상철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그쪽도 모르십니까?」
「찾고는 있어요. 하지만‥‥」
머리를 든 장인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는데 그는 근대 쪽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 되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는 이렇게 있을 바에는 정부쪽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떳떳하게 살겠다고 제 부하한테 말하기도 했습니다.」
「‥‥‥」
「그가 우리한테도 몸을 숨긴 것은 당연합니다. 아마도 근대나 우리가 자신을 제거해서 입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그럴 리가.」
「조치를 취해야 됩니다. 우리 쪽도 알아서 손을 쓰겠지만 근대에서도 ‥‥」
가방에 녹음기를 챙겨든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사업을 위해선 희생을 각오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헬기가 삼림지대인 타이가 지역을 지나자 이제 툰드라 지역이었다. 동토에도 여름이 찾아와 늪지는 초원이 되어서 푸른 풀이 자라나고 있다.
헬기 위에서 필름을 돌리던 유기사가 연신 탄성을 뱉아내더니 유전지대가 보이자 입을 딱 벌렸다. 이제 유전지대 옆쪽에는 거대한 주거지역이 건설되고 있는 중이었다.
「장관입니다, 강과장님. 이곳에서 영화 한편 찍으면 좋겠는데, 대작으로.」
그는 영화감독이 꿈인 사내였으니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보자 그런 말이 나을 법도 했다.
헬기가 개척단 본부 옆의 착륙장에 내리자 경비 완장을 찬 두 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각각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차림이었고 가슴에는 근대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강 과장이십니까?」
앞장선 사내가 물었으므로 강미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저는 경비단의 박 대리입니다. 여기 계실 동안은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부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오후에 회장님께서 기자단에게 유전을 공개하실 계획입니다. 그때 동행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 왔습니다.」
박 대리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그녀가 회장의 손녀인 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거 경호원까지 붙여주다니.」
유기사가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강 과장님 따라다니면서 이제야 제대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 시간에 유장석은 본부의 단장실에서 강회장과 이실장을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밝은 것은 강회장의 기분이 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장단과 기자단들이 자연의 웅대함에 압도당하는 것을 보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일 북단기지까지 다녀오면 이 땅이 얼마나 광활한지 실감하게 될 것이야. 대한민국 5천만을 모두 이주시켜도 남을 땅이니까.」
소파에 등을 기댄 강회장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북단기지는 본부에서 5백여 킬로 북쪽에 위치한 툰드라 지대였다. 헬기로 날아가도 도중에 한 번 연료를 공급받아야 한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유장석이 말하자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근대시와 근대 임차지는 세계지도에 남게 되었다. 모두 자네들의 공이야.」
「아닙니다. 모두 회장님의 선견지명과 과감한 개척정신 덕분이지요. 저희들이야 잔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이남호였고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회장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가?」
「김상철이 문제입니다.」
이남호가 얼굴을 굳혔고 강회장도 똑바로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인데?」
「그 사람을 구제해 주십시오. 제가 듣기에는 행방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회사에 큰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나도 알아.」
「앞으로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유 전무.」
이남호가 그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고는 강회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도 신경을 쓰고 계시니까 그 일은 우리한테 맡겨요.」
「알겠습니다.」
시계를 내려다본 강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유전으로 가볼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군.」
유장석과 이남호가 따라 일어서자 그는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안기부장을 구워삶아서라도 그놈 혐의는 벗길 테니 유 전무는 걱정하지 말아. 알았나?」
「예, 회장님 .」
「회사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회사가 책임을 져 줘야 직원들이따를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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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요
즐독하였습니디ㅡ
감사...
즐독~~~~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독.하고있읍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보고있다가 연재가 잠시 중단되니
더 고마움이 느껴지네요 ㅎㅎ
넘 오래 기다립니다
즐감요~~~ ! 감사합니다.
계속 올려주세요
궁금합니다. 계속 줄독 할수 있게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나다 잘보가갑니다.
ㅈㄷ
즐감요~^^
잘 읽고 갑니다~!
즐감
잘 읽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