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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 정취암, 율곡사, 지곡사, 심적사, 내원사, 대원사 사천시 : 다솔사 하동군 : 양천암, 한산사, 국사암 구례군 : 백련사, 구층암, 화엄사, 죽림정사, 수미정사
정취암 정취암(淨趣庵)은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78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정취암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일명:둔철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한다 하여 옛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었다.
율곡사 율곡사(栗谷寺)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1034번지 정수산(淨水山)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다. 정수산은 척지산(尺旨山)이라고도 했다.
율곡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전하는 사적이 없어 확실한 연대를 밝히기 어려우나 절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국시대인 651년(진덕여왕 5) 원효 대사가 창건하고 통일신라시대인 930년(경순왕 4)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창건이후 고려시대의 내력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대웅전 기단 앞에 고려시대 유물로 생각되는 석조물이 남아 있어 당시에도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율곡사는 척지산에 있다.(栗谷寺在尺旨山)”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해 현재의 정수산은 예전에 척지산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많은 사찰이 불타버렸는데 율곡사의 피해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2002년의 보수공사에서 목부재의 연령측정 결과 1592년 이전에 벌채된 것이 없는 점과 대웅전 바닥 하부에서 출토된 탄화 목편과 불탄 와편(瓦片)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인해 대웅전이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684년(숙종 10)에 괘불탱을 조성하였고, 1728년(영조 5) 괘불탱을 중수하였다. 이어서 1746년 대웅전을 중수하고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다. 1854년(철종 6) 대웅전 지붕의 기와를 바꾸고 향로전을 중건하였으며, 1870년(고종 7) 현당(玄堂)을 중건하였다. 이어서 1897년(고종 34) 대웅전을 중수하였다.근대에 들어와 1961년 관음보탑을 조성하였으며, 1964년과 1976년에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최근에는 1978년에 요사를 옮겨 짓고 사찰 주변을 정비하였으며, 1986년 대웅전과 삼성각을 보수하였다. 1990년과 1997년에도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에 관심당을 고쳐 짓고 2000년에 대웅전 마루보수와 현당을 고쳐 지었다. 2001년 대웅전 포벽보존처리와 2002년에는 대웅전 해체보수와 석축정비를 하고 2003년 삼존불 개금불사를 하였다. 자료출처:전통사찰관광안내
지곡사 지곡사(智谷寺)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 772-5번지 유산(楡山)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지곡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사찰이다. 통일신라 법흥왕 때에 응진 스님이 창건하여 절 이름을 국태사(國泰寺)라 하였고,고려 광종 대에 선종(禪宗) 5대산문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최근 지곡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8~9세기 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위와 같은 이야기를 뒷받침하였다. 지곡사는 일제강점기인 1913년을 전후하여 폐사 되었다가, 근래 옛 지곡사 산신각 자리에 중창하여 옛 지곡사의 전통을 이어 받아 법등을 밝히고 있다 자료출처:전통사찰관광안내
경남 산청군 심적사 심적사는 산청읍 내리 웅석봉 아래 위치하고 있다. 산청 경호강에서 시원하게 래프팅을 즐기는 풍경을 따라 웅석봉 심적사에 갈 수 있다. 천왕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백두대간 줄기는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에 이른 다음 방향을 동으로 틀어 왕등재와 깃대봉을 거쳐 경호강에 닫기 직전에 웅석봉이 솟구쳐 있다. 지리산의 영장선상에 있는 웅석봉 아래에 심적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의 여맥 웅석봉은 지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산으로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처럼 보이고 지리산을 막아선 듯 버티고 서서는 산청읍을 한번 휘감아 흐르는 경호강에 물을 보태주고 있다.
웅석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보통 산청읍 내리 심적사 아래에 있는 지곡사에서부터 선녀탕으로 해서 정상에 올랐다가 내리에 있는 저수지 앞으로 내려온다. 산청읍에서 남쪽 군립공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10분쯤 가면 지곡사 주차장에 닿는다. 지곡사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은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는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야외 수영장과 같다. 이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면 웅석봉으로 가는 길이 나오고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을 계속 따라가면 심적사가 산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내원사
대원사
하동군 양천암 양천암 무학대사가 하동과 사천을 양쪽으로 거느리고 솟아난 봉명산 다솔사에서 어느 날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니 천왕봉에서 뻗어 내리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모으고 있는 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을 손으로 가리키고 한달음에 달려가 터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고 양천암(陽川庵)이라 이름하였다. 무학대사가 절터를 잡고 보니 좌우 양쪽으로 화정리 천왕산 정상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만들어 낸 계곡이 있었다. 그리하여 양천암이라 이름하고 양쪽 계곡에 상선암과 동축암을 함께 세웠다고 한다. 지리산의 여맥 하동 하정리 산세가 수려한 천왕산 중턱에 들어서 있는 양천암은 세월의 무상함만큼이나 옛것이 한 줌의 흙이 되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옛것이라고는 중정 한 편에 모아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에 불과해 보이는 깨진 기왓장과 도자기 조각들만이 안타까운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자료출처:전통사찰관광안내
사천시 다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03년(신라 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개창하면서 영악사(靈岳寺)라 했다. 636년(선덕여왕 5) 자장(慈藏)이 사우 2동을 짓고 다솔사(陀率寺)로, 다시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영봉사(靈鳳寺)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숙종 때에 큰 중건불사가 행해졌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1748)를 비롯해 적멸보궁(寂滅寶宮)·응진전·명부전·선실·요사채가 있다.
한산사 위치^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41 문의/안내^ 한산사 055-883-3379 중국의 한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하동 악양면 고소성 아래에 있는 한산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한산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국사암 규모 목조와가 1동 이 국사암 본당은 시날 선덕여왕 21년(772)에 처음으로 창설한 것으로, 그 뒤 문성왕 때 진감선사가 중건하여 이 곳에 계셨다고 하여 국사암이라 전한다. 그 구조는 정면 6간, 우측 6간, 좌측 4간의 총 62.2평의 ㄷ 자형 건물이다.
국사암 본당은 시날 선덕여왕 21년(772)에 처음으로 창설한 것으로 그 뒤 문성왕때 짐감선사가 중건하여 이곳에 계셨다고 하여 국사암이라 전한다. 관음전, 극락전이 있었으며 무너지기 직전에 1983년 중수 보수하여 현재 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례군 백련사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후손으로 하곡 정제두로부터 당시 이단시되던 양명학을 배웠고 백하 윤순에게는 글씨를 배웠다. 원교는 51세 때인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돼, 처음 회령에 유배된 후 다시 진도로 이배되었다가 결국 절해고도인 신지도로 옮겨 생을 마쳤다. 그는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소론계 강화학파의 사상가였으며 스승 백하로부터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였다. 본래 원교는 젊어서 불교에 심취했지만 회령에 유배되어서는 중옹 이광찬과 조카 이충익이 유학을 등한시하고 불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 배불론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천불전>·<침계루>·<해탈문>, 구례 천은사 <지리산천은사>·<극락보전>·<명부전>,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명부전>·<만경루>, 고창 선운사 요사 <정와>·<천왕문>,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설선당> 편액 등 유배지 일대의 많은 사찰에 글씨를 남긴 것을 보면 배불 운운 한 것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의 진의는 아니었던 듯 싶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은 액판을 세로 두쪽으로 나누어 걸었는데, 공포가 촐촐히 자리잡고 있는 다포게의 건물이어서 마땅히 걸 자리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편액은 1760년 소실된 전각을 원담 윤철(圓潭 允哲) 등이 2년여에 걸쳐 중창하면서 때마침 근처 신지도로 이배돼 온 원교에게 부탁하여 쓴 글씨일 것이다. 용이 힘차게 틀어 오르는 듯 노건(老健)한 필치가 돋보이는 행서로 오랜 유배 생활의 회한이 담겨있다. 고창 선운사 요사에 걸려있는 <정와> 편액은 가로 두 판의 수수한 변죽에 “원교(圓嶠)”라는 두인과 “이광사인(李匡師印)”이라는 방인이 찍혀 있다.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원교가 신지도에 이배된 1762년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글씨 쓰기를 쉰 적이 없다고 하는 원교는, 종래의 반듯한 글자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장법을 구사하는 이러한 행서를 즐겨 썼는데 이는 주자학에 젖은 평면적 사고로부터의 일대 전환이었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구층암(화엄사부속암자)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연기조사가 창건 . 초기 해회당 (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웠고 그 후에 선덕여왕 12년(643)자장율사, 헌강왕1년(875년) 도선국사가 증축하였는데 통일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우면서 큰사찰을 세우면서 큰 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규모가 웅대하고 우아하여 지리산 8대 사찰중 제일 큰 사찰일 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불교문화의 요람지로 동양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을 비롯한 국보4점과 보물5점,
구층암은 화엄사에 딸린 암자이기 때문에 그 역사 또한 화엄사의 역사에 편입되어 서술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화엄사사적>(1697; 1924) 및 <봉성지>(1800)를 보면 신라 경덕왕 때에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라 하였으니, 여기에는 구층암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의 화엄사 경내 및 산중 암자, 인근 마을에까지 이르는 각종 유구들을 조사해 보면, “대사8 속암81” 내지 “8원 81암”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구층암은 늦어도 신라 경덕왕 때에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나아가 <화엄사사적>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하는 각종 전각, 당우 및 암자의 이름을 그 위치까지 지정하여 예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구층암은 “봉천원(奉天院)”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구층암의 역사는 <구층대상량문>(1937)과 <봉성지>(1800), <중수구층암기>(1899), <화엄사사적>(1924)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구층암은 1647년에 중창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연도는 2차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향후 비공개 자료인 여러 중수기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개된 여러 자료의 정황상 1647년 무렵에 중창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1772년에 봉암장로 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한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0년에 간행된 <봉성지>에서는 화엄사 속암으로 ‘구층’과 ‘봉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바, 1849년의 <봉천암중창기>는 임진난 이후 최초 중창이 아니라 대규모 중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로 ‘구층’과 ‘봉천’을 언급하는 사료들은 풍부하므로 현재의 구층암 사역은 17세기에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남 구례군 화엄사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에서 오신 연기 존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리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각황전과 석등을 비롯한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들은 화엄사의 역사와 전통을 장엄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의 커다란 산세를 주변에 두르고 있는 화엄사는 아름다운 산새소리, 철마다 바뀌어 피는 꽃과 나무, 수려하고 웅장한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소리로 인해 극락세계를 상상하게 합니다. 해마다 많은 탐방객들이 화엄사를 찾는 이유는 이처럼 이름난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보기 위해서이자 또한 화엄경에서 그리고 있는 꽃으로 장엄된 부처님 세계로 인도된 불법의 세계를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화엄사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불법의 깨침의 세계를 더욱더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효 이야기 입니다. 4사자석탑과 공양석등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4사자3층석탑은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전설을 담고 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 73과를 모셔와 연기조사의 공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탑으로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인 탑모양은 연기조사께서 편단우견 우슬착지한 자세로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데, 왼손으로 찻잔을 들고 찻잔 위에 여의주를 받쳐 어머니에게는 진리를 공양하고 부처님에게는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不二)의 경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수행자에게는 용맹정진과 반야의 힘을, 불효자에게는 효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이 쌍탑을 꼭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죽림정사 전통사찰이라 소문이 있는데 사찰에 도착하여 부처님 삼배올리고 사찰내를 살펴보았으나 절에대한 연혁이나 아무런 소개도 없는 사찰입니다 작고 아담한 사찰이란 느낌이 든다 절마당에서 바라본 경치가 일픔입니다.
전남 구례군 수미정사 등록된 사찰 소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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