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신년(新年)주일 목회자료.
순 서
A. 주현절(Epiphany)의 의미와 기원
1. 주현절의 기원과 역사
1. 주현절의 의미와 기원
2.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의 분리
3. 주현절과 대림절의 관계
4. 예전 색깔 및 주현 절기
5. 주현절의 신학적 의미
6. 주현절(Epiphany)의 예배와 설교
B. 주현절의 기도
주현절 후 첫째 주
주현절 후 둘째 주
C. 신년주일 설교
“새 시대, 새 소망 그리고 새 마음"(신년주일 설교-1)
“주님처럼 살수 없을까?”(신년주일 설교-2)
"새해 새결심"(신년주일 설교-3)
D. 신년주일 요약설교
“새해를 맞으며 명심해야할 두 가지 진리”(설교-1)
“만물을 새롭게”(설교-2)
“새로운 피조물”(설교-3)
E. 신년주일 예화자료
"새로운 결단"(예화-1)
"새로운 변화"(예화-2)
"새로운 삶"(예화-3)
"새로운 자아"(예화-4)
"새로운 피조물"(예화-5)
"새 출발"(예화-6)
"생명의 기도문"(예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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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현절(Epiphany)의 의미와 기원
성탄절이 예수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춘 절기라면 주현절은 예수님의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교회력에서 성탄절보다도 더 역사가 오래 되었고, 기독교 초창기에는 부활절, 오순절과 더불어 3개 절기의 하나였던 주현절이 그 동안 무시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에서 주현절에 대한 인식이 약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력 중심의 예배보다는 세상의 달력에 의지하는 행사 중심의 목회에도 원인이 있어 보인다. 더욱이 주현절의 시기가 연초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되고, 연말과 연초의 세상적인 감각과 분위기에 따른 예배에 치중하다 보면 주현절의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의 예배의 중요성이 많이 인식된 상황에서 교회력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의 회복 중 주현절이 갖는 의미와 의의를 회복해야 한다. 본 소고는 주현절의 기원과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주현절의 신학적의미와 주현절의 필요에 대한 설교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1. 주현절의 기원과 역사
교회력에 있어서 부활절을 축으로 하는 Easter Cycle과 크리스마스를 축으로 하는 Christmas Cycle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크리스마스 사이클의 기원은 부활절 사이클의 시원만큼 빠르지 않고, 그 기원도 고대 이스라엘의 절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절기는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의미가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교회력에 있어서 부활절과 함께 매우 중요한 절기가 되었다. 주현절의 절기(1월 7일)는 오늘날 크리스마스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현절은 크리스마스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고, 초대 기독교사에 있어서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현절은 초대 교회력에 있어서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세기 후반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1. 주현절의 의미와 기원
Epiphany라는 용어의 기원은 동방에서 유래했다. 그리이스어인 epiphaeia는 라틴어로 'manifestio, appearance, 그리고 adventus'으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동방 언어의 의미로 "현현(Manifestation), 출현(Appearance), 강림(Coming)"의 뜻을 담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사용함에 있어 '현현'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언급한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예수의 세례,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였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셔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요 2:11)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특별히 초대교회에서는 종종 이 날을 하나님의 현현일 즉 "The Theophany"라고 불러서 몇몇 동방 정교회에서는 계속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고, 요한복음 서두에 이를 밝히고 있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 분을 나타내 보이셨다."(요 1:18)
또, 주현절의 의미는 "나타남"을 뜻한다. 빛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에게서 보인다는 뜻이다. 역사가 흐르면서 주현일은 현현 축일(Feast of Manifestation), 빛의 축일(Feast of Light), 그리스도 출현의 축일(Feast of Appearing of Christ), 세 왕의 축일(Feast of the three Kings) 등과 같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현절은 통합적인 축일로서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120-140년경에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켜진 절기로 예수의 수세를 축하하는데 기원을 둔다. 1월 6일은 본래 동지로서 태양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교도들의 축일을 기독교인들이 주현일로 대체한데서 연유되는데, 통합적인 주현절 축일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로 선택되면서 예수의 수세일과 나누어졌다. 동방교회는 주현절을 예수의 세례라는 견지에서 축하하기를 계속하였다. 동방교회로서는 예수의 세례가 더 중요했는데,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이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4세기 경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에 대한 관용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신학적 분위기는 종말론적인 미래의 신학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분위기였다. 이 당시 널리 퍼졌던 양자설 이단(Adoptionist Heresy)은 사실상 예수님의 육적 탄생을 영적 탄생(수세)과 분리하게 하는 촉진 작용을 하게 되었다. 양자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는 탄생부터 신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기독교가 고대의 역사적인 종교로서 예수의 출생을 기념하는 절기를 지킴으로써 보수적인 종교의식을 가진 로마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서 기독교는 정통 기독교로 강화되었고, 예수가 세례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니,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변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성육신을 부인하는 아리안 주의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있었다.
2.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의 분리
주현절이 크리스마스와 분리되는 상황은 부활절과 비슷하다. 부활절과 같이 주현절도 4세기에 분리되어졌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12월 25일 태어났다는 새로운 절기인 크리스마스에 대한 언급이 A.D. 354년 문서들 가운데 있다. 이 날이 312년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지켜졌고, 336년쯤에는 로마에서 지켜진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점차로 크리스마스의 절기는 주현절 축일의 일부를 계승했다. 크리소스톰도 386년 안디옥에서 주현절에 대하여 언급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날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날이고, 세례수를 거룩하게 한 날이다........ 그러면 왜 이 날이 주현절이라고 불리는가? 왜냐하면 이 날은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현현 되어 태어난 날이 아니고, 그가 세례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는 사람들이 그를 모르고 있었다."
1월 6일에 지켜진 주현절은 동방에서는 예수의 수세 기념날로 알려져 있고, 서방 유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신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념하는 날로 기억되었다.
부활절 사이클이 분리되어진 것과 같이,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을 분리시켜 지키게 된 것은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 생애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들의 기념일을 지키려는 소망 때문이었다. 성경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날짜나 세례 받은 날짜,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방문한 날짜를 언급한 곳이 없다. 1월 6일과 12월 25일의 날짜는 고대 이집트나 로마 달력에 따르면 각가 동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것과 같이, 크리스마스는 동지를 나타난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현존하는 이교도 잔치에 대한 대용으로 지켜졌다.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에는 항상 어두움을 정복한 빛의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한다. 반면 이 날들은 예수가 죽으신 날에 대한 전통을 추정하여 죽으신 날과 임신의 날을 일치시키려는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 이리하여 성탄절은 4세기 말 주현절과 완전히 분리되어 교회력에 자리잡게 되었고, 주현절의 기념으로 예수의 탄생을 떼어냄으로 새로운 강조점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 외에 주요주제로서 동방박사의 방문,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그리고 그리스도의 변형과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적인 현현이 기념되었다.
3. 주현절과 대림절의 관계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은 Easter Cycle 의 Lent 기간과 같은 준비 기간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A.D. 380년 스페인의 공의회에서 "12월 17일부터 주현절인 1월 6일까지는 반드시 교회에 출석해야 된다."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것은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 자체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대림절에 대한 예시적인 선례였다. 5세기경에는 주현절을 위한 40일의 준비 기간이 가울 지방에서 지켜지고 있었다. 이것이 사순절과 평행을 이루었고 오늘날의 대림절이 시작될 때 쯤 시작되었다. 결국 로마는 12월 25일에 앞선 네 번째 주일에 대림절이 시작되는 기간을 채택하게 된다.
2-5세기 기간에는 예수의 수세를 그의 영적인 출생 사건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채택된 사건이고, 그가 하나님의 수준과 능력으로 고양된 사건이라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세 기념일을 크게 생각하고 육신 출생의 정확한 날짜에 대하여는 비교적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4-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라틴어 설교들에서는 "그가 그 날에 동정녀에게 서 태어났든지 아니면 세례에서 다시 태어났든지 간에 1월 6일이 그의 태어난 날"이라고 선포된다.
'대강' 혹은 '대림'이라 함은 라틴어인 Adventus의 번역어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상의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 또는 그 기다림의 시기를 뜻하는 말이다. 교회 전례에서 대림절은 세 가지 참 뜻을 진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이 세상의 탄생하는 그리스도의 성탄축일 즉 첫 번째 오심에 대한 분비이고 둘째는 종말에 다시 오시는 성자의 기다림과 심판에 대한 대비이며, 셋째는 교회에서 성자의 재림을 위해 길을 닦는 구속과 속죄 등 마음의 준비이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기억하고 묵상하며 기다리는 기간이다.
대림절의 교회 전례는 크게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로 나뉘어진다. 갈리아 전례는 4-6세기 경 비잔틴 동방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로 1월 6일이 성탄축일이었고, 그 준비시기로서의 대림기간도 훨씬 길었다. 당시 갈리아 지역 교회에서는 성탄축일에도 부활 축일처럼 세례식이 베풀어졌기 때문에 예비 신자들은 이 시기에도 부활절 사순절처럼 11월 11일 다음날부터 40일 동안 왕으로 오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로마에서는 고유의 전승을 따라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축일을 경하하다가 점차 이 축일을 준비기간을 설정하였다. 대강절 4주가 확정된 것은 6세기 말이다. 12세기 경에야 비로소 로마 전례에도 속죄와 종말의 그리스도 재림 준비 서서히 유입되어 서서히 성탄축일 전 4주간의 대강절 기간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4. 예전 색깔 및 주현 절기
주현절은 환희와 빛의 날이다. 동방박사들과 그들의 예물의 이미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현현의 절기는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심과 가나 혼인 잔치의 이미지가 나타나야 한다. 주현절, 주님의 세례일, 그리소 산상 변화일에는 빛, 영광, 승리 및 축하를 나타내므로 흰색을 사용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세 날 이외의 날에는 녹색이 사용된다. 녹색의 빛깔은 성장을 의미한다. 주현절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을 점점 더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한 주일 한 주일 더 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점점 더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주현절기는 교회력에서 일상적인 시간으로 분류된다. 일상적인 시간의 첫 번째 시기는 주현절 후 주일들로 불리는 시기이고, 좀 더 긴 두 번째 시기는 오순절 후 주일들로 불리는 시기이다.
주현절은 매 7년마다 여섯 번 주중에 있게 된다. 1월 6일 후 주일은 주현 후 둘째 주일(Sunday after the Epiphany)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주현 후의 주일 수는 부활절 날짜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게 된다. 즉 부활절이 일찍 오면 현현절은 짧아지고, 부활절이 늦게 오면 현현절은 길어진다. 초기에는 현현절의 길이가 3주에서 10주까지 되었는데 6세기부터는 주현절이 길어야 6주일로 제한되었다.
이 절기는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주님의 수세일로,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주일, 즉 주현절기 마지막 주일을 주니의 산상 변화 주일로 정하고 있다. 이제 주현절의 절기는 6주일에서 9주일까지 이른다. 1970년 새로운 성구집과 달력이 나옴에 따라 이 절기가 9주간으로 길어지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그것은 이전에 사순절 전의 절기(Pre-Lenten Season)로 지켰던 3주간이 주현절의 한 부분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5. 주현절의 신학적 의미
주현절의 신학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두 하나님을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과 관련된 것들로서 그리스도의 출생, 예수님의 수세,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첫 기적을 가르치고 있는데,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이다. '현현'이라는 말의 뜻이 보여주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분명히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는 절기가 주현절이다.
주현절의 첫 번째 신학적 의미는 Incarnation이다.
빛으로 오신 주님은 구원 역사의 중심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Incarnation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점점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기념인 크리스마스보다 먼저 지켜진 주현절이 Incarnation 신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현현의 이러한 신학적인 영향은 교회의 예배 생활에 더 크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두 번째 신학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2세기 말엽에 이집트에서 주현절이 성육신과 세례의 축일로 지켜졌다면 각각의 기념에 대한 영지주의 태도는 이 축일의 내용과 비슷한 신앙의 태도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성육신의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세례는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세례를 통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영지주의의 기독론을 본다고 하면, 역설적으로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해야 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는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수세시 하늘로서 성령이 임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세 번째 신학적 의미는 Incarnation과 관련된 영광의 신학적(Theology of Golry)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요1:4)는 증언은 "하나님 아들의 영광의 현현"의 주제이다. 요한복음 전반부에 나타나는 "우리는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든지 "빛이 비치다"라는 용어들은 현현의 뿌리로 드러낼 수 있다.
네 번째 신학적 의미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산상 변모를 통하여 "변화"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낡은 유대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기독교 복음의 포도주로 변화딜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Incarnation한 예수를 만나 세례를 통하여 성화되는 신학적 의미를 부각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선교 신학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동방에서 예물을 가지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방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 이방 세계까지 퍼져야 할 선교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6. 주현절(Epiphany)의 예배와 설교
1. 예배
주현절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신 가장 기쁘고 즐거운 절기이다. 교회는 예배 공간을 밝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주현절은 빛과 광채의 날"이기 때문에 흰색이나 황금색, 밝은 노랑색 등의 사용하여 장식을 하고, 예배 분위기도 기쁘고 밝게 진행해야 한다. 주현절을 위한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인사
찬송
기도
찬양(Gloria in Excelsis, or Te Deum, or canticle)
제 1독서(사 60:1-6)
시편(시 72:1-14)
제 2독서(엡 3:1-12)
알렐루야 송, 찬송, 또는 교송
복음서(마 2:1-12)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성찬 초대와 평화의 인사
봉헌
대 감사기도
주기도문
성체분할
잔의 현시(Presenting the Cup)
성찬 참여
성찬 후 기도
찬송
축복 또는 기도로 폐회
후주 또는 절기 음악연주
주현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한다. 이 날은 성탄절 12일을 마치고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God's Word)의 현현하신 절기이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현현을 선포하고, 그 앞에 우리는 기쁨으로 경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의 분위기는 밝고 기쁨에 차도록 하여야 한다. 예배 공간은 밝은 분위기가 되도록 하며, 동방박사의 경배와 선물을 장식하거나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 가나의 혼인잔치 등의 이미지를 표현하도록 한다. 예전 색은 주현일과 세례주일, 그리고 산상변화 주일은 흰색을 사용한다. 흰색은 빛, 기쁨, 성결함 등을 상징한다. 또한 주현절은 세례를 위해서도 좋은 날이다. 설교 후 세례를 베풀어서 그 의미를 기리는 것도 좋으며, 성만찬도 함께 갖도록 한다. 음악은 성가대나 회중 찬송 모두 주현절 절기에 맞는 곡을 선정하여 부르도록 하고, 기악이나 성악곡 등도 절기에 맞도록 한다. 그러나 주현절 예배는 너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하여, 그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의미를 전달하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2. 설교
주현절에 읽어야 할 성서일과에는 중요한 용어들 '계시', '현현', '나타나심', '비추심', '빛', '영광' 등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어야 할 성서적인 계시에 중심되는 개념들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신약성경의 기독론의 기본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 사건의 계시적인 양상을 비유나 직접적인 묘사로 인용한 것들이다. 이 계시적인 기독론은 교회력에서는 대림절에서부터 주현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면 주현절에 선포될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절기에서는 먼저 기독론적인 현현(Christological Epiphany)의 메시지, 교회론적인 현현(Ecclesial Epiphany)의 메시지, 그리고 사도적인 현현(Apostolic Epiphany)의 메시지가 준비되어야 한다.
1) 약속의 성취에 대한 메시지
기독론적인 현현의 메시지로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약속의 성취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가 '오실 메시아'로 보여지듯이 하나님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예표로서, 즉 모세와 같은 예언자(prophet)의 모습으로, 노아와 같은 남은 자(remnant)의 모습으로, 요셉과 같은 고난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다윗의 가지를 통하여 오실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 절기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을 가지고 선포해야 한다.
2)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특히 주현절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전해 주어야 한다. 예수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 '어두움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의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었다'(마4:16)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갈릴리를 시작으로 비추었다. 이 빛은 세상 속으로 확산되어질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빛이요, 온 인류를 구원할 소망의 빛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교회가 세상의 빛이다.
다음으로 주현절을 통해 설교자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거센 물결 앞에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에게 교회는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교회론적인 현현의 메시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는 선포에서 시작된다. 이 메시지는 생활 스타일이 분명하게 실현되어지는 교회의 계시적 특성의 해석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누가가 언급하는 본래의 것들에 4가지 복을 추가하고 있다. 이 첨가되어진 복들은 더 적극적인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자비를 보여주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과 화목하게 하고 의에 주린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됨을 통해 세상에 빛 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교회가 '별처럼 빛나야 한다'(빌2:15)고 주장하면서, 고린도교회는 거짓된 회중주의와 편협된 지방색으로 교회의 모습을 떠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이 세상의 유일한 기독교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다른 공동체들과 공통적인 삶을 나누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임을 메시지로 보여주어야 한다. 멀리 이방에서 천문학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 교회는 그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도 교회의 덕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함을 선포한다.
(목회정보200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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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주현절의 기도
"주현절, 그리스도께서 이방세계에 나타나신 날"
오,하나님! 주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주의 구원에서 외인 되었던 우리 이방의 족속, 어둠의 땅에게도 별의 인도함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주를 알았사오니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에베소서 3:1-12 마태복음2:1-12
그 옛날,
동방의 박사들을 아기 예수 누우신 구유로 이끄셨던 우리들의 아버지,
주께서는 오늘도 또한 그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또, “인자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시던 주님의 약속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오, 주여 기도하오니 모든 민족과 족속들이
주를 알고 사랑하며 경배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주여, 감사하오니
성경이 우리를 향하여 열려있는 나라,
교회가 우리를 환영하면서
양심의 자유, 예배의 자유와 의사 소통의 자유가 있는 땅에서
우리가 믿음 생활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도우사,
우리가 주 안에서 누리는 이 큰 기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주 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
깊은 어두움 가운데 헤매면서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자유가 억압당하는 땅,
아직도 믿음의 자유가 없이 어둠의 땅에서
쇠사슬로 고난 당하는
어둠의 땅과 많은 민족이 있다는 것 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여,
저 어둠의 땅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되,
그 외로움 가운데서 위로하여 주시고
온갖 위험 가운데서 모호하시며
낙담과 실의에 빠진 전도자들에게
결코 꺼지지 않는 소망을 주시고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두고 오지로 들어간 선교사들에게는
주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에서 느끼는 참 기쁨을 주옵소서,
또한,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곧 주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는 사람들을 돕는 이들에게도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피곤하지 않는 가운데
사랑으로 필요를 따라 공급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주를 알고 사랑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하시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에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케 하시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주의 온전하신 통치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현절 후 첫째 주
오, 주님! 주께 비오니 그 크신 긍휼과 인자하심을 따라 불러주신 주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우리에게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또한 아는 그것을 이루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은혜와 권능으로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이름만 영화롭게 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로마서12:1-5 누가복음2:41-52
오,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아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를 지켜 주시되,
우리로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약한 비겁함과
진리를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게으름과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없게 하는 편견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완고함과
진리를 찾아 애쓰지 못하게 하는 교만으로부터
구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를 모면하게 하여 주시되,
무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우둔함과
주의 권고하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만함과
주의 모든 견책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는 허영심과
진리의 영,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문을 닫아거는
마음의 문빗장을 제하여 주옵소서.
오,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우리에게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는 힘과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를 지켜 주시되,
우리의 목적을 너무 쉽게 바꾸어 버리는 의지의 연약함과
우리를 엄습하는 유혹에 너무 쉽게 항복해 버리는 유약함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어 버리는 나태함과
시작은 해 놓고 마치지 못하는 인내력의 부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주여, 또한 우리를
평탄한 길, 쉬운 길 가기만을 좋아하는 마음,
육신의 안일만은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의 영혼은 죽이지 못하고
다만 육신만을 해칠 뿐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주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지 못하는 미약한 마음으로부터
지켜주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명하신 바를 온전히 이루어 드릴만한 힘과
주의 뜻을 밝히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현절 후 둘째 주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능력과 지혜로 온전히 주관하시는 전능하시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 주의 백성들의 기도에 긍휼히 귀를 기울여 주옵소서. 주의 백성들에게 그 사는 날 동안 오직 주의 평화로 넘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오하옵나이다. 아멘.
로마서12:6-16 요한복음2:1-11
평화의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주의 평강을 주옵소서.
주의 평화를 이 세상에 보내 주옵시되,
이 땅에서 전쟁의 위협을 거두어 주시고
모든 나라들이 서로 우애하며
주께서 왕이 되시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시는 거룩한 가족으로
연합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민족간의 장벽도 없고,
정치적 분열도, 피부색의 차이도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휘장도 없고, 벽도 없이
오직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갈 힘과 용기,
지혜와 믿음, 은총을 주옵소서.
아버지여, 주의 평화를 우리의 나라에 보내 주옵시되,
당파보다는 나라를 세워 가는 정치로,
그 어떤 이념, 사상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이 세워지게 하시도
모든 의심과 불심들이 제하여진 건전한 경제를 세워주시고
산업 역군들에게 기술자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그 하는 일에 결코 부끄러움도, 후회함도 없는 마음을 주옵소서.
고용주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근로자들에 대한 책임을 알게 하시고
근로자들은 고용주들에 대한 의무를 알게 하시며
피차간에 형제애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선을 이루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 안에 주님의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의 형제들과 화평한 가운데 살게 하옵시고
증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우리의 혀와 성급한 기질에 주의 재갈을 물려주옵소서.
우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게 하시고
나쁜 기억들을 제하여 주시며
우리 마음 가운데 인색하지 않는, 풍족한 마음을 주시옵고
증오심이 사라지고 온전히 형제 사랑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큰 평강의 마음을 주소서.
우리를 괴롭히는 걱정거리를 제하여 주시고
더욱 주를 신뢰하게 하시고
우리를 혼란케 하는 의심을 제하여 주시고
우리의 믿는 바, 확신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욕망,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그릇되게 하는 욕망을 제하여 주시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순간 순건을 주께 복종케 하시고
주를 섬기는 즐거움으로 만족케 하옵소서.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불화와 소외감을 거두어주시고
사죄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참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이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William Barclay의 “절기기도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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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신년주일 설교
“새 시대, 새 소망 그리고 새 마음"(신년주일 설교-1)
성경 : 창2:8-20, 12:1-3, 마5:1-12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나 승리하고자 합니다. 패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자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은 잘만날 때 옵니다. 부모를 잘 만나고 스승을 즉 사람을 잘 만나고 시대를 잘 만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참신을 만나야합니다. 아담은 참신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의 인물입니다. 그는 에덴의 관리자요 주인으로 모든 부의 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도 시대도 바람직하지 못하였으나 그도 참신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끊임없는 약속과 축복 속에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팔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을 우리는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새 시대,새 소망 그리고 새 마음의 장을 엽시다.
1. 생각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꿉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자신의 주인공이요 시간의 주인공이요 물질의 주인공이요 자연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답게 살도록 생각을 바꿉시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니 창조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관리하게 하셨으니 소유주답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살도록 생각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습니다. 행동은 환경을 만듭니다. 환경은 삶의 승패의 장입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환경을, 창조적인 생각은 창조적인 환경을 만듭니다. 나의 생각을 음란, 방탕, 절망, 패배, 무절제, 자포자기, 연약 그리고 병약함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축복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잘못된 생각에서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잘못된 환경, 잘못된 사람을 떠났습니다. 갈대아 우르 월신 숭배의 본고장이요 우상장사로 이루어진 부모의 환경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과거를 벗어났습니다. 미래지향적이요 축복 지향적이었습니다. 바꾸어진 그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모든 축복의 출발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마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성령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성도들 중심으로 이웃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바꾸어 나갈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목표를 분명하게 바라보십시다.
목표란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것, 되고자 하는 것, 갖고자 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녁의 중심점입니다. 하나님은 목표를 가지고 세계를 우주를 역사를 그 가운데 인생을 창조하셨습니다. 목표를 마음에 그리고 그 목표를 바라볼 때 목표는 점차 크게 다가오고 마침내 목표는 자신의 것이 되고야 맙니다.
좋은 목표는 이미 좋은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반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좋은 목표는 축복의 절정이요 성취입니다. 성공 그 자체입니다. 목표를 구체화하고 그 좋은 목표를 바라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 반을 이룬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의 주인공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좋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데로 그 성격과 운명이 규정되었습니다. 좋은 이름을 붙인 목표를 바랍시다. 축복의 이름을 붙입시다. 잘되는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상속하셨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동서남북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을까요?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부풀었을까요? 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목표가 그의 삶의 축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무자한 그에게 하나님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의 자손이 무수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가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분명히 하고 바라봅시다. 그러나 잘못된 목표를 바라보면 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롯의 처가 소돔성을 뒤돌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분명한 목표 소원할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교회의 덕을 드러내고 이웃의 영혼을 구원할 때 그것은 당신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다웁게,축복의 근원다웁게 삽시다.
모든 인물에게는 그 신분에 합당한 언어와 행동을 그리고 습관과 생활이 있습니다. 실로 왕은 왕답게,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해진 신분은 없습니다. 모든 신분은 자유입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자신의 처신과 의지를 따라 변화 무쌍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도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살았던 방법은 비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았고 역경가운데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바르게 살았기에 그들은 포로민이면서도 바벨론의 지도자요 히브리 족속의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허물 때문에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에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해결하여야할 현실적 문제, 무능력, 건강에의 염려 이 같은 모든 곤고함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 계시고 나를 축복의 근원으로 선택하셨음을 믿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비밀이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 다웁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고난가운데서라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라도 팔복의 인물이요 팔복을 나누는 복의 근원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성공의 새해를 주심을 감사합시다. 승리의, 영광의, 축복의 새해를 주심을 감사합시다.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나는 축복의 근원이다>고 선언하면서 생각을 바꾸고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자녀 다웁게 축복의 근원다웁게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시다.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첫 주일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신년 원단에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시대에 새소망을 가집니다.새마음을 가집니다.
아무쪼록 금년에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근원다운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고,
새롭게 변화된 자아상을 온전히 이루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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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처럼 살수 없을까?”(신년주일 설교-2)
이사야53:1-12
새해를 시작하면서 송구영신예배를 끝내고 하루를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학생들의 워싶연습을 보기도하고, 영상실 공사현장을 보기도 하고,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해가 새롭게 시작되는데, 한살 더먹는데, 세월이 또 이렇게 흘러가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때리고, 가슴을 스치고, 그리곤 줄기차게 떠오는 것은 금년엔 “어떻게 살까?” 였답니다. 그 생각이 맴돌다 밤늦게 “그래, 주님처럼 살순 없을까?” 였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신앙의 지표랄까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었죠. 토마스 아켐퍼스가 “주님을 본받아”란 책을 저술하여 여러 가지로 주님처럼 살수 있는 비결을 말했다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53장이 바로 그 진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처럼 살수 없을까?”라고 물으면서 시작하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처럼 여겨짐은 바로 이 질문 속에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신앙의 진실한 대상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1. 주님은 모양이 없었습니다.(1-2)
주님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린 사진을 통하여 여러 모양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양을 나름대로 상상하여 신비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연한 순같습니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습니다.
그는 모양이 없습니다.
그는 풍채도 없습니다.
그는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는 흠모할 형상이 아닙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과연 주님이 이럴할진대 누가 주님을 믿고 따랐을까?
“Super Star, Jesus Christ"에서 주님을 노래하길 Hit man이라고 했던가요. 이것은 그분의찬란한 모습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과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이해가 빠를지도 모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은 세상에 내노라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와 위화감을 가지게 하거나,거리감이 있게 하시지 않으시고 지극히 평범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 사이에서 구분없으신 모습을 가지셨음을 깨닫습니다.
그가 평범이하의 모습이었기에 보잘것 없는 우리가 그를 바라보고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고,그와 허물없이 사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가 미남이시고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미모를 가지셨다면 우린 그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그분은 우리 안으로 쉽게 걸어들어오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가 보잘것 없으신 모습이기에 그분을 우리 곁에 쉽게 머물게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그분은 원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이 구태여 특이한 모습일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보잘것 없으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품어실 수 있었습니다. 아름답지 못하셨기에 아름답지 못한 우리를 품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도 주님처럼 삽시다. 어떻게 삽니까? 못난 맛에 삽니다. 별볼일 없는 맛에 삽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맛에 삽니다. 당당하지 못한 맛에 삽니다. 아무 것도 아닌 맛에 삽니다. 누구에게도 내어놓을 수 없는 나의 추한 맛에 삽니다. 한없이 한없이 보잘것 없음을 곱씹어면서 사는 인생이 바로 주님의 모습으로 승화된 모습입니다. 이렇게 삽시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멸시받고 천시 당하였습니다.(3-4)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서러움이 무엇일가요? 없는 서름입니다. 부모없는 서름,형제없는 서름, 친구없는 사름, 이웃없는 서름, 돈없는 서름, 명예없는 서름, 배경없는 서름, 힘없는 서름, 각가지 환란가운데 어디든지 도움을 구할데가 없는 서름, 별볼일없는 서름 등등 서름도 서름도 각가지입니다. 이같은 서름은 결국은 세상에서 멸시 천시받는 요인이 됩니다.그런데 주님은 멸시받았습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무도 그를 인정하여 주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여 간고와 질고를 겪으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받는 그를 돌보아줄 이가 없었습니다. 그를 귀히 여기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철저히 홀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당할 멸시와 천시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겪을 각가지 서러움을 아시고 그가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는 하염없이 아래로 추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정받고, 존경받고,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해에 주님은 “나처럼 살아라.” 하십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멸시와 천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시다.높임받기 보다, 존경받기 보다 낮아보여짐으로 상대를 높이고 위하는 삶을 삽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철저히 낮아지는 삶을 실행합시다. 그리하여 한없이 섬기고 위하는 삶을 삽시다. 주님이 인정하여 높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면 추락합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나를 하염없이 낮추시면 주님처럼 높아질 것입니다.
3. 주님은 고통 당하셨습니다.(4-5)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대속적인 고통을 직접 당하심ㅇ로 우리에게 특별한 건강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대신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대신 하나님에게 매를 맞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때문에 고난 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그분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입니다.
그분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에게 치료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대신 이같은 고통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부모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친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부도 ,자식도 이렇게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셨습니다.
금년에 주님은 우리더러 “이렇게 살아라.” 하십니다.
주님처럼 그대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기에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은 것부터 실천에 옮깁시다. 무엇부터 할까요?
참는 것부터 합니다. 그리고 짐을 대신 져주는 것부터 합시다.
나의 고통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맙시다.
나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맙시다.
모든 것을 내탓인양하고 삽시다. 내탓(because me)이라고 했던 요나처럼 삽시다. 그리고 다름 사람의 고통을 내가 지려는 공동책임의식을 자기화합시다.
다른 사람의 책임을 내가 지려합시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내가 대신합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가 나눕시다. 내가 대신 땀을 흘리고 무거운 대신 지고 가는 사람이 주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인간의 고통이 사라지는 환희가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고요? 이것이 주님처럼 사는 사람의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는 삶” 이것이 바로 기독자적인 삶입니다.
4. 주님은 말씀 한마디 하시지 않았습니다.(6-9)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한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묵묵히 골고다를 향하여 무거운 심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이 심문을 받으실 때도 그리고 채찍에 맞으실때도 그분은 침묵하셨습니다.
생각이 없어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입이 없어서 말씀하시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길에 말씀이 필요없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행동으로, 그분의 고통 당하시는 몸으로 그분은 무한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수없는 말씀이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향하여 토하여 나오신 것을 아는 이가 깨달은 자요, 거듭난 자요, 참된 성도일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그릇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멋대로 살아 죄악을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의 그릇됨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가 당할 곤욕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형벌받을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금년에 주님은 침묵하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 하십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축복하시고자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5.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10-12)
이 세상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없으며 누군가의 일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람일지라도 궁극적으로 누군가를 위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들을 위하여, 직장에서는 그 직장을 위하여, 사회 속에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응분의 댓가를 지불받습니다. 댓가가 지불된다고 하여도 역시 누군가를 위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에 의하여 “때가 차매” 이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보내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를 지도록 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분의 섭리적인 인생, 그 과정에서 상하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10) 하나님의 소원은 바로 인생에게 있었고 주님은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에 의하여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도록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으로 이러졌다는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 주님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속건제물이 되어주길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자기영혼의 수고를 자청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람들의 죄악을 담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행하신 것입니다. 한마디 핑계도, 한마디 불평도 없으시고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도 다른 방법을 제안하시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바로 주님의 기본이었습니다.
금년에 우리도 주님처럼 나의 주장을 포기합시다.
모든 핑계를 포기합시다.
나의 의지를 포기합시다.
오직 하나님의 소원대로 행하는 우리가 됩시다.그리할 때 우리도 주님처럼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하시니라>
순종으로 주님은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범죄자 중 하나같이 다루어졌지만 사실은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항상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주님처럼 완벽하진 않아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사는 새해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처럼 살 순 없을까?” 에 대한 대답은 “살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연약한 육신이 이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살기 위하여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바로 이 시간이 새출발의 시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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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새결심"(신년주일 설교-3)
성경 시편18:1-6
아침마다 성산일출봉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릅니다.영주산 자락에 걸려 넘어오르는 아침 태양을 시작으로 하루는 시작됩니다.한낮 중천에 떠있는 태양은 하루를 그립니다.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한라산 자락으로 서녁 깊은 능선을 붉게 물들이고는 태양은 멀리 사라져 버립니다.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보는 일출과 하루 그리고 일몰의 광경입니다.
아침마다 매일이 새롭습니다.마찬가지로 신년 원단에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며 새로운 날이 한층더 새로운 것입니다.2006년은 이제 지나간 날이요,저물어 버린 태양입니다.새로운 2007년이 동터오른 아침에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갖고 새로운 해를 가슴 활짝 열고 맞이합니다.
“새로운 시작” 가슴 벅찬 용어입니다.이는 출발을 말합니다.잘 준비된 출발은 과정과 결과에 좋은 열매를 기대하게 합니다.그래서 새해 새아침에 우린 준비합니다.그리고 출발선상에서 멋진 스타트를 합니다.
이제 시작하면서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며 만사에 섭리자이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먼저 사랑을 고백합시다.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편18:1-3)”
한해의 시작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마땅합니다.왜냐하면 그가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린 원론적인 신앙삶에 최선을 다합니다.원론은 정도입니다.정도는 바른 길입니다.바른 길은 삶의 진실한 지침입니다.지침은 나침반입니다.나침판은 방향입니다.방향은 삶의 성공을 가늠하는 것입니다.성공은 긍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진실한 만남에서 결판나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원론은 기차의 레일과 같아서 목적한 삶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원론을 무시하면 탈선입니다.탈선은 파멸입니다.파괴입니다.붕괴입니다.결과는 자포자기입니다.멸망입니다.그러기에 원론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삶에 원론은 무엇입니까?
1. 말씀을 열심히 먹는 것입니다.
말씀은 양식입니다.잘 요리된 음식은 영양가도 좋고 건강에 유익하듯이 말씀은 영을 살리는 것이요 오늘의 삶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합니다.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합니다.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게 합니다.나자신을 깨달아 알게 합니다.양심을 비추는 거울인 것입니다.말씀은 나를 살리는 생명입니다.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4: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무엇보다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호흡이 없으면 죽습니다.죽은 자는 숨쉬지 않습니다.기도가 없는 성도는 이미 가사상태요 아니면 사망상태인 것입니다.신년 원단에 우린 긴급히 우리 자신에게 인공호흡을 시켜야할지도 모릅니다.인공호흡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효과적입니다.능력있는 삶을 사는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살기 위하여 필요한 일입니다.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자가 되어야 합니다.살기 위하여 죄를 토설하고 내 영혼 삶에 성령을 깊이 맞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요 그는 산자가 아닙니다.기도하면 성령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십니다.그리고 구하는 바를 넘치게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그런고로 사랑의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뜻에 의지하여 열심히 기도합시다.응답받을 것입니다.“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5:14,15)
3. 성도 간에 아름다운 교제 친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우린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행2:42-47)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자리에 크신 은혜♪♬
하면서 노래하는 우리가 유무상통의 전통을 회복하며 사랑과 선행으로 만나고 모이고 할 때 진실한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자녀들의 화목한 삶에 아버지 하나님의 흐뭇한 마음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가정을 회복합시다.하나님의 가정의 가솔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시게 하는 자녀가 됩시다.
화목한 성도들 화목한 가정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5:16,17)“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
그리고 열심히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없는 정도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4,25)
4. 복음의 산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좋은 것을 말하고 전하는 것이 사람다운 일이요 인지상정인 것입니다.물건도 값싸고 좋은 곳을 알려주고 음식도 맛난 곳 분위기 좋은 곳 알려 주고 병든 자에게는 좋은 약사 의사가 있는 약국 병원도 알려주고 이렇게 함께 사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알고도 알려주지 않는 다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그리고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입니다.내세의 확증입니다.현세의 축복입니다.과거의 용서입니다.현세에서 용기와 담대함과 삶의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병든자에게는 치유요 건강이요 온전한 삶입니다.실패한 자에게는 소망이요 확신이요 용기요 그리고 성공의 지름길입니다.그리스도는 철학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생명의 씨앗입니다.이 씨앗이 있는 자는 살아납니다.소생합니다.그러기에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은 복음인 것입니다.
전도는 잘얻어 먹은 거지가 못얻어 먹은 거지에게 잘얻어 먹은 곳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가르쳐 주지 않으면 죄입니다.가르쳐 주지 않으면 몰라서 죽는 사람의 피값을 치루어야 합니다.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그런고로 내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축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5. 주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일하는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일합니다.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땀흘립니다.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요.그 땀은 가족을 위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세상을 위합니다.결국은 타인을 위한 나 자신의 삶을 발견합니다.남을 위하여 존재하는 나 자신을 일찍 발견하고 깨닫는 사람이 진실한 삶에 그만큼 한발자국 나아가 있는 사람입니다.냉정하게 나만을 위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을 위하여 멋진 계획을 세웁시다,이것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요 우리의 환경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나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실제요 실천인 것입니다.이것이 선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6:9,10)
이것이 목적있는 삶입니다.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고 타인의 유익을 위한 삶이 우리의 목적이 될 때 이것이 진실한 삶의 자세요 진정한 원론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10:31-33)
결론입니다.
새해입니다.늘 듣는 말씀일지라도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결심으로 새로운 출발을 합시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좋은 출발을 하는 청지기가 되어 결산의 날에 칭찬을 받읍시다.(눅16:1-3)하나님은 나를 지켜 보십니다.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앞에서 행하여 그의 은총을 나날이 누립시다.“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렘애3:40,41)
원론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장을 받읍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18: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적인 축복이 넘치는 새해 새결심 새출발을 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았다는 새로운 간증이 넘쳐나길 소원합시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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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신년주일 요약설교
“새해를 맞으며 명심해야할 두 가지 진리”(설교-1)
성경본문: 눅2:21
신년은 미래를 설계하며 여러 가지 새로운 결심을 다지는 날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며 삶속에서 무엇을 성취해야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그러나 삶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앞날을 설계할 대 일반적으로 미리 내다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1.시간은 날아간다.
A.본문
기묘한 아기가 출생한 이루 8일째가 되었다. 이제 영원하신 분이 시간 계속에 들어와 사시게 된 것이다. 그의 날수와 연수가 이제 보통사람들의 그것과 같이 계산되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비교적 짧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서 33년 동안 육체로 거하셨으며, 이날은 그의 33년의 생애 중 처음 8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B.적용
구주 탄생의 이후 8일째가 되었다고 하는 이 복음 진술은 얼마나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가?
이 진술은 우리가 시간이 날아가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을 일깨워 준다.
신정에 얼마나 적절한 주제인가! 우리의 지상 생애의 또 한해가 지나갔다. 한해가 얼마나 빨리 굴러가 버렸는가!
356일이 얼마나 빨리 굴러가 버렸는가!
어린 시절, 특히 청소년기에는 시간이 날아가는 것을 그렇게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몸에 익히게 되고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게 될 때에는 시간이 날아가는 것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시편90:4-6,10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 가버린 날들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과연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날들은 충실하게 살아있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2.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A.신년을 맞으며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의 아름다운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아름다우신 이름이 지나간 해 내내 우리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지상의 상황은 항상 변한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동일하시며 그의 긍휼과 은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
B.본문은 우리에게 그가 이 날에 할레를 받았다고 말씀해 준다.
우리 자녀들이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크리스찬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자녀들도 할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던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아기 예수께서 할례 받아야 할 필요가 무엇이었는가? 그는 죄가 없었다. 그는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깨끗하고 성결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율법에 복종시키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다른 자녀들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처럼 할례를 받으셨다. 율법의 주인이요, 제정자이신 분이 율법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완수하고자 함이었다.(참조, 갈4:4-5)
C.그는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듯이 새해에도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또한 공급해 주신 것이다.
본문에서 개 아기가 받은 이름은 “수태하기 전에”천사에 의해 계시된 이름이었다. 전에 천사가 계시했던 대로 아기의 이름이 지어졌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도 기억하신다. 그의 말은 결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과연 그는 그의 모든 은혜로운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Homiletic Studies in Homiletic Magazine
<Harald F.J. Ellingsen의 복음서 설교연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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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새롭게”(설교-2)
성경본문: 계21:5
1.장래의 신자의 상태
성경은 신자의 부활한 삶의 모습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티고 있는가? 신자의 상태와 지위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집, 밝고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우리의 집은 죄와 슬픔의 세계 안에 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저주아래 신음하는 세계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세계는 새 집이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집과는 완전히 다른, 완전히 새로운 집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이전 것들”-죽은, 슬픔, 질병, 죄, 유혹, 불행, 비참함-우리에게 무거운 짐이었던 모든 것들, 우리를 괴롭히고 화나게 하는 모든 것들, 이 낮고 천한 땅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고 비탄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갈 것이다”
2.우리가 변화할 것이다.
장소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새로워져야 한다.
그곳에 죄가 들어갈 수 엇다면, 질병과 지치는 것과 연약함이 없는 곳이라면, 이런 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없는 것들이라면, 우리도 몸과 영혼이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실존의 상황아래 살게 될 것이다.
가사성은 불멸성에 그 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썩어질 수박에 없는 우리의 체질은 썩어지지 않는 것으로 변화할 것이다.
3.이일이 이루어지는 방법-하나님의 점진적인 사역에 의해
본문은 이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준다. 본문은 이일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설명한다.
“보좌 위에 앉은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은 새롭게 하노라”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점진적인 사역이다.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끝이 있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하늘에서 완성되는 사역이다
그러나 그 사역은 땅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사역은 땅위에서는 부정확하고 부족한 모습은 면할 수 없다. 땅위에서의 사역은 고통스러운 사역이요, 수고와 어려움이 뒤따르는 사역이다. 하늘에서 그 사역은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그와 같이 될 것이다.
E.V.Hall, the Waiting Saviour,p.103.
<Nicoll의 요약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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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설교-3)
성경본문: 계21:5
1.참 종교의 두 가지 요건
인간의 관심과 충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인간에게 적합한 종교라야 한다.
그 종교는 인간의 합법적이고 순전한 본능을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악을 억제하고 인간 안에서 보다 거룩한 욕구를 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적어도 종교는 인간의 정당하고 순전한 본능을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신앙은 이 점을 탁원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다.
기독교는 인간 안에서 죄 또는 악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대적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의 본성을 왜곡시키지는 않는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욕구를 끊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악에 대해서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성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와서 인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루면서 인간에게 철저한 자리통제를 요구한다.
2.기독교는 인간의 두 가지 본능-곧 과거에 대한 본능과 미래에 대한 본능을 충족시켜 준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닌 몇 가지 본능을 충족시켜 준다. 이 본능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생활은 소위 “현재”라고 부르는 작은 순간들에 얽매어 있다고 한다. 과거는 우리가 차악할 수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현재의 순간이다.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현재에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도 절연되어 있다는 의미라면 그 말은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우리는 회상이라는 법칙에 의해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소망이라는 법칙에 의해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나이가 들수록 회상의 시간이 늘어나고, 젊을수록 소망이 강하다. 그러나 소망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본능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와 함께 간다. 이 두 가지 본능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의 자격이 없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본능을 무도 충족시켜 준다. 성서의 말씀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미래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2-1.미래에 대한 소망의 충족,
미래가 되면, 우주의 보좌위에 앉으신 분이 절망의 고통 속에 가라앉아 가는 자들에게 이렇게 외치실 것이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기독교는 소망의 본능을 충족시킨다.
2-2.과거의 회상본능을 충족시킴,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본능이 있다. 그것은 옛것들을 사랑하는 본능이다.
기억은 끊임없이 과거를 향한다. 새로움에 관하여 말하는 말씀들이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기지 않았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들겠다. 내가 너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주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옛것들에 집착하는 본능을 억누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대한 애정을 탈취해가지 않으시면서 젊은 시절의 신성함을 잊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옛 시절의 활력과 힘을 우리에 되돌려 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탈취해 가지 않으신다. 계시록에서 가장 웅장한 일들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과거와 접촉하는 것을 그대로 보전해 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Bishop Boyd-Carpenter, Penny Pulpit, New
Series
<Nicoll의 요약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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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신년주일 예화자료
"새로운 결단"(예화-1)
어거스틴이 바닷가를 거닐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을 했읍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자기 앞에 어느 어린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앉아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읍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기 앞에 파놓은 조그마한 구멍에 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너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바닷물을 다 퍼서 여기 넣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깨달았읍니다.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다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로 했읍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본 것은 환상이었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했느냐 이것이 문제지 합리적이냐. 이치에 맞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쪽이 사실이냐 그것만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읍니다. 오셨으면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것이 가능하냐 아니냐. 내 마음에 드느냐 안드느냐. 이치에 맞느냐 안맞느냐가 무슨 상관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묻지 말고 믿어야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격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읍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말라.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입니다. 우리에게 좀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판단이 다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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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변화"(예화-2)
프레드라는 청년이 일하던 오래된 한 프레드 생선구이 요리집이 있었읍니다. 녹슨 탁자, 때묻은 벽지와 틈이 군데군데 벌어진 양탄자가 일차대전 이후부터 있는 그대로였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창에 붙은 글귀였읍니다. '주인이 바뀌었읍니다.' 가게 이름도 바뀌었읍니다. 프레드릭 생선전문 레스토랑이 되었읍니다. 프레드는 여전히 일을 했지만 권한이 없어졌읍니다. 그는 그대로 고용된 상태였으나 일의 성격이 변경되었읍니다. 요란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되어가는가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읍니다. 새로운 주인이 그 건물을 한번 죽 돌아보았읍니다. 그는 모든 구석 구석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곳까지 살폈읍니다. 사람들은 프레드에게 바꾸어야 할 부분 부분들을 가리키고 있는 새 주인을 볼 수 있었읍니다. 갑작스런 대청소였읍니다. 낡은 식탁들은 던져졌고, 새로운 벽지를 바르고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읍니다. 그래서 전보다 훨씬 더 청결해졌읍니다. 똑같은 장소였지 새로운 변화가 생겼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집에 들어오시면 그러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자 경영자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창에는 '주인이 바뀌었읍니다'라는 글귀가 붙여졌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구석 구석 돌아보시게 됩니다. 우리 삶의 구석에는 주님의 눈에 보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구석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떠한 것도 주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손가락을 들어 바꾸어야 할 것들을 즉각적으로 가리키십니다. 그리고 보다 더 밝은 환경을 만드셔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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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예화-3)
어느 교회 젊은 집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읍니다. 그래도 명색이 집사라는 사람이 담배도 끊지를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질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고심하다가 금년 여름휴가를 기해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철원에 있는 모 기도원에 들어 갔읍니다. 자기 생각엔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담배를 끊을 작정이었읍니다. 그런데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남들 다 받았다고 날뛰는 성령도 못받고 담배는 여전히 피고 싶어서 숲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읍니다. 그런데 피우긴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왕에 결심하고 올라온 걸음이니 도중에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기도중 갑짜기 “내버려라 내버려라”는 음성이 들려 오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뭘 내버리라는 걸까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보니 바지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더랍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에 집어 던졌읍니다. 그리고 다시 바위 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읍니다. 한탄강 물과 함께 떠내려간 담배갑과 라이터처럼 그의 희미하고 흔들렸던 지난날의 신앙생활도 함께 떠내려갔읍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그에게 찾아 왔고 그는 찬송하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읍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날부터 담배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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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아"(예화-4)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상가가 불로 인해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재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며 “안됐군! 끝장이군!”하고 말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 그 잿더미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어 서서 한 푯말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잿더미 위에서 내일부터 다시 시작할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용기에 탄복하여 동정적으로 그 물건들을 팔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보다 더 사랑을 받았고 곧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오늘 거룩한 이 시간 우리의 주인이 바뀌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귀신이 나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면 오늘 십자가에 귀신을 못박으십시다. 지금까지 절망이 나를 억누르고 있어서 한숨으로 살았다면 그 절망을 끄집어 내어 십자가에 못박으십시다. 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달걀이 깨지면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누에가 고치를 벗으면 나비가 됩니다. 옛 자아가 깨어지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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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예화-5)
휫필드는 청년 시절에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이 온통 시꺼먼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해서 먼저 그는 자기부정을 애썼다. 모든 사치를 마음으로부터 거부했고 누더기 옷을 입고 가장 조야한 음식을 먹었으며 일주일에 이틀 간은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었으며 밤마다 기도로 지새곤 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 웨슬레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영혼 속의 하나님 생명.이란 책자를 얻었다. 이 책을 읽은 휫필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믿음으로써 주님께 매달렸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훗날 휫필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서인도제도의 유색 인종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광부들과 런던의 부유한 귀족들의 접견 등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지역에서 전도를 했다. 그때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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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출발"(예화-6)
192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로우즈 보올 게임이 한창 진행되던 중 레이갈이라는 선수가 볼을 잡아서 있는 힘을 다해 골대를 향해 뛰는데 거의 다가서 이상하게 자기편 선수가 발을 거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일어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자기는 자기편 골대를 향해서 뛰어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선수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전반전을 끝내고 탈의실 구석에 앉아서 죽고 싶다고 하면서 내내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코치가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서 어깨를 두들겨 주며 “로이야, 게임은 이제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절반이 남아 있어. 어서 들어가 남은 후반전에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뛰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다시 열심히 뛰었는데 그 후에도 그는 그 코치의 말을 생전 잊지 않고 열심히 뜀으로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가끔 그릇된 길로 갈때가 있고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저질러서 교회에 나오기가 두렵고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위대한 코치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변화를 주십니다. 절대 낙심한채 주저앉지 마십시오. 손을 주님께 내밀면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 새 출발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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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도문"(예화-7)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로인해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와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로인해 인간된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이로인해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모든 일로 감사할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로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연세의료원(세브란스)
심장혈관병동 병실에 부착돼 있는 기도문이 입원 환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줄 뿐만아니라 내방객들에게도 신앙적인 도전을 주고 있어 화재가 되고 있다.[어느 병실에 걸린 시]란 제목의 이 시는 인간의 삶 모두를 감사로 연결,새로운 소망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모두 20행에 불과한 이 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빠진 환경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해석, 앞으로 보다 낳은 삶을 향유하려는 의지로 연결시켜 큰 설득력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실제로 심장혈관동에 입원해 있던 강모씨는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를 보는 순간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며 [내용이 단순하지만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시]라고 평가했다.
한편 병문안을 왔다가 이 시를 발견,이 시를 옮겨적은 뒤 타이핑까지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사람도 있다.많은 사람이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현대인에게 긍정적인 시각을 심어주고 시가 하나님의 절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신앙의 필요성까지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 시가 보급된 것은 그해 초부터 심장혈관병동을 매주일 방문,찬양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치는 찬양팀들이 이 시를 나눠주기 시작하면서부터로 그후 이 시를 부착하는 환자들이 늘어났고 방문객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작자의 이름도 나타나지 않는 무명시는 현재 타 병원에서도 보급되고 있으며 환자 위로 및 전도동기부여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 시는 나약해진 심리상태를 잘 파악하여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게 하여 절대자를 의지할 것을 강조하며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의 구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이런 점에서 [어느 병실에 걸린 시]는 문서 선교의 차원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계속 파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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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신년(新年)주일 목회자료 + 절기별+/-설교
출처: http://blog.naver.com/pky6513/12003376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