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능호다.
문정왕후는 16세에 중종의 중전이 돼 28년간 왕비를 지내고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이렇듯 50여 년간 왕실의 어른 노릇을 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한 여장부였으니
중국의 측천무후나 서태후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명종은 지금의 태릉 터에 모셨다.
당대의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 따라 문정왕후를 태릉에 모시고 훗날 아들 명종도 바로 옆 강릉(康陵)에 안장됐다.
태릉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 전시관(안 보면 섭섭할 겁니다)
조선왕릉 전시관 내부
임금의 국장 행열도
12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545년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이때가 문정왕후의 조선은 여인천하로 만들었다. 실록에는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다행이였다고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울창한 솔밭의 솔향기가 그윽하다. 정말 산책코스로는 최고다.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의 금천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태릉 전면의 물길은 오랜 세월 상부의 마사토 등이
흘러와 퇴적하면서 물의 흐름이 막혀 다리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사라진 물길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박석이 깔린 네모칸은 망료위(배위)로서 임금이 능을 향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네번 절하고 들어감
멀리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릉과 정자각이 소나무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신도와 어도를 아는 듯 '나는 왕이다' 하고 씩씩하게 어도로 걸어가는 어린이
정자각은 6·25전쟁 때 파손돼 석축과 초석만 남은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월랑(月廊)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복방(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의 숙소. 방1칸에 부엌 그리고 창고가 전부)
주변이 온통 솔밭이지만 능 주변에 오래 된 향나무도 눈에 많이 보인다.
신계와 어계
태릉은 왕비의 능이지만 웅장해서 여장부였던 문정왕후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능호도 크고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태릉이라 했다. 특히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조선 능원 가운데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왕후의 정권욕을 잠재우려 했던 왕과 신하들의 뜻이 아닐까?
중종(中宗)은 왕비가 세 명이면서도 옆에 누워있는 왕비는 없고 모두 멀리 따로따로 홀로 두고 있다.
숙종(肅宗)이 정비, 계비와 장희빈 네 명이 서오릉(西五陵)에 같이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태릉의 문석인 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큰 형태다. 무석인은 특히 퉁방울 눈에 코가 유난히 크다. 키는 약 2.6m.
능제는 봉분에 운채와 십이지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다.
예감
문정왕후 비각
아름다운 솔밭사이로 멀리 정자각이 보인다.
중종의 정릉과 성종의 선릉은 1592년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문정왕후 태릉도 ‘효인’이라는 자가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일본 왜군이
기마병 50명과 주민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 주변의 멋진 송림, 좌우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오리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 경관이다.
앞으로 1970년대 태릉 능역 안에 만든 놀이동산과 국제사격장을 철거하고 소실된 재실과 어정과 수락간 등을 복원해야 한다.
첫댓글 문화재청에서 잘 보수관리하여 우리들에게 보여 주겠지요.
소나무 속에서 잘 보전되어 온 능은 보는이로 하여금 무언가 찡~~ 함을!!
또 다시 영상으로 보니 더욱 깊은 감회가~~~~~~
아름다운 노송의 태릉 솔밭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한 즐거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