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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갑오·을미개혁, 광무개혁과 관련한 내용은 참으로 헛갈립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이 부분이 자주 출제되는데, 출제될 때마다 어려워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 기회에 한번 잘 정리하고 확실하게 맞을 수 있도록 공부해둡시다.
갑신정변의 주요 출제 포인트는 개혁안, 전개 과정, 갑신정변 직후 체결된 조약,
갑오·을미 개혁은 당시의 정세, 개혁 추진 기구(교정청, 군국기무처), 개혁 내용,
대한제국의 광무개혁과 관련하여서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대한제국 시기의 정세, 사회 모습, 개혁 내용입니다.
핵심내용 공부하기
갑신정변
1. 개화당의 개화 정책 추진
① 개화 정책 : 박문국(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발행), 우정국 설치, 일본에 유학생 파견, 신식 군대 양성 시도
② 개화 정책 추진의 어려움 : 일본 차관(개혁 자금) 도입 실패, 민씨 정권의 탄압
2. 갑신정변의 전개
① 배경: 민씨 정권의 개화당 탄압, 청군 일부 철수(청ㆍ프 전쟁 1884),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
② 경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킴 → 개화당 정부 수립(14개조 정강 마련) → 청군 개입 →
주도 세력 일본으로 망명
③ 결과와 영향
• 한성 조약(조ㆍ일): 일본에 배상금 지불,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
• 텐진 조약(청ㆍ일): 양국군 공동 철병, 군대 파병할 때는 사전 통보
• 영향: 청의 간섭 더욱 강화, 개화 세력의 약화
④ 실패 원인: 청군의 개입, 개화당의 세력 기반 취약, 일본에 의존 → 대다수 관료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함
3.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분야 | 14개조 정강 | 개화당의 목표 |
정치 | 1. 흥선 대원군을 빨리 귀국시키고 종래 청에 대해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청에 대한 사대 외교 관계 청산 |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 양반 중심의 정치 체제와 신분제 타파 | |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기관을 폐지하여 국왕의 권력 제한 | |
7. 규장각(외척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을 폐지한다. | ||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 한다. | 국왕의 전제 정치와 외척의 국정 간섭을 막고, 내각 제 도를 확립 → 입헌 군주제 추구 | |
14. 의정부와 6조 외에 필요 없는 관청을 없앤다. | ||
경제 | 3.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재정을 넉넉히 한다. |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 제도 개혁이 아님) |
6. 각 도의 환상(환곡)을 영구히 받지 않는다. | ||
9. 혜상공국(보부상을 총괄하는 기관, 보부상의 특권을 보호하며 집권층의 손발 노릇)을 혁파한다. | 보부상의 특권을 폐지, 자유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 |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 호조가 국가 재정 관할(재정 일원화) | |
기타 | 5. 탐관 오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 국가 기강 확립과 민생 안정 |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 근대적 경찰 제도 도입 | |
10. 귀양살이하거나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 민심을 얻기 위해 | |
군사 | 11. 4영을 1영으로 합하되, 영 가운데에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 군의 통솔권 확립 |
① 의의: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
• 정치면: 청에 대한 사대 외교 관계 청산, 전제 군주제 → 입헌 군주제
• 사회면: 문벌 타파, 인민 평등권 확립 → 봉건적 신분제 철폐
• 갑오개혁 → 독립 협회 활동 →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화 운동의 선구
② 한계: 일본에 의존적 태도, 국방력 강화와 토지 제도 개혁 소홀 →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함
4. 갑신정변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1884~1894)
① 전개 방향: 청ㆍ일 간의 침략적 대립, 러시아 영국의 대립
• 청: 내정 간섭 강화, 상민 수륙 무역 장정 → 경제 침략 본격화
• 일본: 청에 비해 정치적 열세 → 경제 침략에 주력
• 러시아: 조․러 통상 조약(1884) 체결 이후 적극 진출 시도, 조․러 밀약 추진(청의 방해로 실패)
• 영국: 러시아 남하 견제 → 거문도 사건(1885~1887)
② 조선 중립화론 대두(1885): 열강의 대립 격화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 부들러(독), 유길준
갑오개혁~을미개혁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을미개혁 과정
▶ 갑오·을미개혁의 내용
|
성격 및 배경 |
개혁내용 |
제1차 (1894. 7~12) |
온건 개화파가 주도한 김홍집 내각(1차)이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자주적으로 추진(흥선 대원군이 섭정) 갑신정변의 정강,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가 많이 반영
|
◦ 정치 : 왕실과 정부 사무 분리(궁내부와 의정부 분리), 국왕의 전제권 제한, 의정부에 권한 집중, 6조를 8아문으로 개편, 과거제 폐지, 경무청 설치, 개국 연호 사용 ◦ 경제 : 국가 재정 일원화(탁지아문), 은 본위 화폐제,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 사회: 신분제 폐지, 공사 노비제 혁파,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제도 폐지 |
제2차 (1894. 12~1895. 7) |
박영효, 김홍집 연립 내각 성립(2차 김홍집 내각) → 군국기무처 폐지, 독립 서고문과 홍범 14조 발표(1895. 1.) → 삼국 간섭으로 일본 세력 약화되면서 박영효가 개혁 주도 |
◦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8아문 → 7부), ◦ 지방 제도 개편(8도 → 23부, 337군), ◦ 지방관의 권한 축소(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 사법권 독립(재판소 설치) ◦ 교육입국조서 반포(한성 사범 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
삼국 간섭 이후 일본 세력 약화 → 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 실각 →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 성립(3차 김홍집 내각) → 일본의 내정 간섭 배제, 배일 정책 강화 → 을미사변 발생 | ||
제3차 (1895. 10~1896. 2) |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 성격이 강화된 김홍집, 유길준 내각(4차)이 급진적 개혁 실시(을미의병 발생) → 아관파천으로 개혁 중단 |
◦ '건양' 연호 사용 ◦ 훈련대 폐지, 친위대ㆍ진위대 설치 ◦ 단발령 실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 소학교 설치, 우편 사무 실시 |
▶제1차 개혁 때의 개혁 법령(일부)
• 국내외의 공사 문서에 개국 기원을 사용한다.
• 문벌과 양반·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한다. • 남자 20세, 여자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 •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
▶홍범 14조(2차 갑오개혁 때 발표)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되, 종실·외척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 및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한다. 행정 기구 개편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 기예를 견습시킨다. 선진 문물 수용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징병제 실시(근대적 군사 제도 마련 시도)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생명권, 재산권 보호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광무개혁
1. 개혁의 성격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것은 참작한다.)의 원칙에 바탕을 둔 복고적, 점진적 개혁 → 황제권을 강화(구본)하면서 경제, 사회적 근대화를 추구(신참)하려는 개량주의적 성격, 동도서기론과 유사한 입장 ↔ 독립 협회(입헌 군주제, 의회(대의) 정치)
2. 개혁의 내용
• 정치 : 대한국 국제 반포(1899, 최초 헌법) → 자주 독립과 황제 전제권 강화 표방
▶대한국 국제(일부)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 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의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 등을 명한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를 정하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
• 경제 : 양전 사업 → 지계 발급(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 확립 도모), 황실 중심의 상공업 진흥책 추진
(근대적 공장, 회사 설립)
• 사회ㆍ문화 : 각종 학교 설립, 유학생 파견, 근대 시설 확충
• 군사 : 원수부 설치(황제가 군권 장악), 무관 학교 설립(장교 양성)
• 외교 : 간도, 연해주 교민 보호 정책 → 간도 관리사 파견
▶ 간도와 독도
①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의 본격적인 간도 개척 → 청의 간도 귀속 문제 제기 →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조ㆍ청 사이의 영토 분쟁 발생 ② 간도 관리사 파견(1902, 이범윤) : 간도를 함경도 행정 구역에 편입 ③ 간도 협약(1909) : 일본이 만주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청의 간도 영유 인정 ④ 독도 : 대한제국 때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 관할 → 러ㆍ일 전쟁 중 일본이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 |
3. 개혁의 한계
• 전제 군주권의 확립을 통한 근대 주권 국가 지향, 민권 운동 탄압
•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 일본 등 열강의 간섭으로 성과를 못 거둠
갑신정변~갑오·을미개혁~광무개혁의 흐름
12회 고급 37번 문제
37. 갑신정변~광무개혁의 흐름 답③
이 문제는 쉽지 않은 1점 문제입니다.
몇달 차이 또는 1~2년 사이에 이루어진 개혁 내용을 시기순으로 연결해야 하는 문제잖아요.
이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자주 나올 것이니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개혁, 갑오개혁, 을미개혁, 그리고 광무개혁의 내용은 스스로 정리해 두세요.
여기에 독립 협회의 개혁 사상까지 함께 ...말이죠.
(가)는 을미개혁(1895. 10)의 내용입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 이후 단행된 개혁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 친위대·진위대 설치,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사무 실시 등입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 추진, 특히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납니다.
이후 아관 파천이 일어나면서(1896. 2.) 을미개혁은 중단됩니다.
(나)는 제1차 갑오개혁(1894. 7)의 내용입니다.
1차 개혁은 일본의 강요로 정부는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수립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합니다. 이때 민씨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이 다시 추대되기도 했으나 실권은 없었습니다.
1차 개혁이 일본의 강요로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당시 청·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적극 간섭할 여건이 못돼 개혁은 갑신정변의 정강이나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자주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정치면에서는 ①궁내부를 따로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제한하고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하였습니다. ②행정 기구를 개편하여 변화된 현실에 맞게 6조를 8아문으로 확대하고 과거 제도를 폐지했으며, ③경무청을 설치하여 경찰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관행을 버리고 개국 연호를 사용합니다.
경제면에서는 ①국가 재정을 일원화하여 왕실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조세를 독자적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으며, ②은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고 ④조세를 금납화했으며, ⑤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사회 분야 개혁도 두드러졌는데,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폐지되고, 공사 노비제가 혁파됩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내려오던 좋지 못한 관습들도 타파하여 조혼이 금지되고,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었으며, 고문과 연좌제도 폐지되었습니다.
(다)는 제2차 갑오개혁(1894. 12)의 내용입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아가자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 등을 앞세워 조선을 보호국화 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조선 정부는 청에 대한 의존적 관계를 청산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합니다.
그리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하고, 지방 제도를 8도에서 23부로 바꿉니다.
또한, 지방관의 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하여 권한을 축소하였으며,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마련하여 한성 사범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등을 발표합니다.
(라)는 광무개혁(1897)의 내용입니다.
대한제국은 황제권과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고, 장교를 육성하는 등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습니다.
이 밖에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였습니다.
또한,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적극 도입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식산 흥업 정책을 펼칩니다. 그 결과 철도, 전기, 해운,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시설이 마련되고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근대적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새로운 기술자와 경영인의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화 가설, 전차 선로와 철도 부설 등 교통·통신 산업도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갑신정변(1884)
29회 고급 33번 문제
33. 갑신정변(1884) 답①
(가)에 들어갈 사건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이 주도한 사건'이니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적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이라는 급진적인 방법을 통해 새로운 개혁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어요.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으나, 소수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근대화 운동, 정변의 방식으로 진행, 일본의 군사적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였고, 농민의 염원이었던 토지 개혁에 소홀하여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갑신정변 직후 일본은 갑신정변의 책임을 조선에 돌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한성 조약(정변 때 죽은 일본인에 대한 배상과 불에 탄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 보상)을 강요하였습니다(1885). 이어 청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1885) 조선에서 청과 일본 양국의 군대를 철수하고, 앞으로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대국에 미리 알리도록 규정하였어요.
① 갑신정변 직후 일본은 조선에 한성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받았습니다.
② 대한 제국이 추진한 광무 개혁에 대한 설명입니다.
광무개혁은 ‘옛 법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기본 방향으로 하였어요.
③ 흥선 대원군은 임오군란 당시 고종의 요청으로 잠시 집권하였으나, 청의 군대가 개입하면서 재집권 1개월 만에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청에 연금되었다가 귀국하였습니다.
④ 강화도 조약 중 '조선의 부산 이외에 2개 항구(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는 조항에 따라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을 개항하였어요.
⑤ 김윤식은 1881년 유학생, 기술자들을 이끌고 청에 영선사로 가 무기 제조법과 근대식 군사 훈련법 등을 배우고
귀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4회 고급 34번 문제
34. 갑신정변(1884) 답①
제시된 사건은 '배상 교섭', '일본과 청은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 상대국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도록 하는 협정 체결', '개화당 세력과 개혁의 뜻을 품은 인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망명하였다.'라는 내용이 나타나 있으니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어요.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집권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 수립을 추구하려는 급진 개화파(개화당)의 불만이 커졌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자 청은 조선에 주둔 중인 청군의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키죠.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사전에 일본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죠.
정변 당일 급진 개화파는 개화당인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축하연에 참석한 수구파를 살해합니다. 또한 창덕궁에 가서 고종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경우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화당 정부를 수립합니다. 개화당은 개혁 정강 14개조(청에 대한 사대 관계의 청산, 인민 평등권 확립과 내각 중심의 정치 등)의 혁신 정강을 국왕의 전교로 발표하고 근대적 국가 수립을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청군의 공격과 민중의 지지 부족, 일본군의 철수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어요(홍영식은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다 최후를 맞았지요.).
갑신정변 직후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하자 한성 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까지 지불합니다. 그리고 청과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고(1885)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합니다.
① 갑신정변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장소에서 정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어요.
우정총국은 급진 개화파(개화당)의 한 사람인 홍영식 건의로 설치된 기구였어요.
홍영식은 우정참판(차관)으로 임명되었기에 개화당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수구 세력을 초청, 이들을 제거하면서
정변을 시작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어요.
②, ③ 임오군란(1882)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오군란은 차별 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일어났어요.
궁궐까지 습격한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흥선 대원군이 일시 재집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군이 흥선 대원군을 난의 주동자로 청으로 납치해가고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④ 운요 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의 일부입니다.
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청으로부터 배상금과 요동 반도를 얻습니다.
이에 요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세 나라가 함께 요동을 청에 돌려주라고 압력을
가하죠(삼국 간섭). 결국 일본은 이에 굴복해 요동 반도를 청에 반환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6회 고급 31번 문제
31. 최초의 근대화 운동 갑신정변(1884) 답①
모르시면 이번 기회에 꼭 알아두세요.
1점짜리 문제로 제시된 보기도 쉽게 구성되어 있어 답을 찾기 어렵지 않네요.
제시된 개혁안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이 제시한 개혁 정강 14개조의 일부입니다.
임오군란에 개입해 이를 무력 진압한 후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과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집권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급진 개화파(개화당)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고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1884). 그리고 개화당이 주축이 된 새 정부를 구성하고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들이 발표한 개혁 정책은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와 있듯, 청에 대하여 자주권을 내세우고, 문벌 타파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것 등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정변 추진 세력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민중의 지지 속에 정변을 성공시키기보다는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ㄱ -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개화당)가 일으켰습니다.
ㄴ -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일본과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일본이 갑신정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하자 정부는 한성 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에 비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담판하여 톈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 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ㄷ - 구본신참의 개혁 원칙으로 표방한 것은 대한 제국이 실시한 광무개혁입니다.
ㄹ -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임오군란(1882)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고(1882)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나아가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팁을 하나 드리자면
이 시기 일본과 체결한 조약은 강화도(병자수호) 조약(1876) → 제물포(인천) 조약(1882) → 한성 조약(1884)인데,
서울(한성)에서 먼 강화도에서부터 시작해 서울로 오면서 체결했다고 알아두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으로 구성된 ①번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조항들을 한번 설명할게요. 이 부분은 안보셔도 되지만 한번 봐두면 다른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거예요. 1.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한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이 군란에 가담한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갔는데, 흥선 대원군을 조선으로 송환하라는 것, 그리고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내세우려는 것이죠.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 신분 제도 폐지와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 재정 관할을 호조로 일원화하자라는 것입니다. 갑오개혁 때는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하는 조치를 발표하죠. 갑오개혁 때 정치 조직을 개편해 의정부 밑에 6조를 8아문으로 바꿉니다. |
13회 고급 38번 문제
38. 갑신정변과 관련한 여러 세력 답③
이 문제는 갑신정변의 전개 과정과 주도 세력을 연계시켜 묻는 문제네요.
(가)는 급진 개화파(개화당), (나)는 일본, (다)는 청을 가리킵니다.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집권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급진 개화파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4년 청과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나자, 청은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키죠. 급진 개화파는 이를 기회로 여겨 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몰아내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급진 개화파는 청군의 반격을 막고 개혁에 필요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전에 일본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이용할 목적으로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급진 개화파는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축하연에 참석한 수구파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는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이동하여 취침 중이던 고종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경우궁으로 옮기게 합니다. 이 때,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지키면서 청군의 습격에 대비하였으며, 궐내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와 군인들이 수비하였습니다. 이후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화당 정부를 수립합니다.
이어 청에 대한 사대 관계의 청산, 인민 평등권 확립과 내각 중심의 정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14개 조의 혁신 정강을 국왕의 전교로 발표하고 근대적 국가 수립을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고종은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대신들의 소식을 듣고 개화당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왕비의 환궁 요구에 따라 창덕궁으로 환궁을 합니다. 청군이 공격해오자 급진 개화파의 군대는 수와 무기의 열세로 패퇴하였고, 일본군도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철수함으로써 결국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다 최후를 맞았지요.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고종은 새 내각을 통해 각종 개혁 조치를 무효화하고, 일본의 정변 개입에 항의하며 김옥균 등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합니다. 이에 정부는 한성 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까지 지불합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에 비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담판하여 텐진 조약을 맺고(1885),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합니다.
③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청은 3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합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수습하며 잠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에게 임오군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청으로 압송하였어요.
따라서 갑신정변 당시 흥선 대원군은 청에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에는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귀국시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3회 고급 35번 문제
35. 개항 이후 일본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 답④
이 문제는 개항기 청·일과 맺은 조약의 원인과 그 내용을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비교적 쉬운 문제니 반드시 맞춰야 해요.
(가)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계기이니 운요호 사건(1875),
(나)는 임오군란(1882), (다)는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라)는 갑신정변 후 일본과 맺은 조약이니 한성 조약(1885)입니다.
그럼 하나씩 알아볼까요?
(가) 운요호 사건(1875)
일본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개항시킬 목적으로, 1875년 8월 운요호를 강화도에 파견합니다. 운요호가 허락도 없이 강화도로 다가오자 강화 수비대는 당연히 위협 포격을 가했는데, 운요호는 초지진에 포격을 가하고, 영종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살인과 약탈, 방화를 저지르고 물러갑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삼아 1876년 1월 대규모 군함과 병력을 보내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였는데, 조선 내에서도 일찍이 개항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되죠.
(나) 임오군란(1882)
조선은 개항 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별기군을 창설하죠(1881). 별기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신식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식 군인들은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차별 대우에 불만이 많았어요. 결국 불만이 폭발하여 궁궐을 습격한 구식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일시 재집권)하는 한편, 개화 정책을 추진한 민씨 정권의 고관 집을 습격하고 일부 관리들을 죽이죠. 도시 하층민까지 가세한 군중들은 관청을 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 교관을 살해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합니다. 결국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고 청이 원군을 보내 난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난의 주동자로 청으로 납치해가면서 끝났어요.
(다)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일본은 임오군란 때 입은 피해를 구실로 조선에 조약을 강요해 제물포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사과 사절단의 파견,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 군대 주둔 등이 이루어집니다.
또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은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하여 체결합니다. 여기에는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진출과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라) 한성 조약(1885)
갑신정변 직후 조선은 정변에 관여하여 주권을 침해한 일본에 엄중히 항의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무력을 동원하여 정변 때 죽은 일본인에 대한 배상과 불에 탄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 보상 등을 요구합니다. 결국 조선은 한성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고 말죠.
ㄹ - 임오군란 당시 피해를 본 일본은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합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1882)을 체결하여 일본 공사관 호위를 위한 일본 경비병 주둔을 허용받았습니다.
한성 조약에서는 갑신정변 때 죽은 일본인에 대한 배상과 불에 탄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 보상 등이 담겨져 있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8회 고급 36번 문제
36. 갑신정변의 결과 체결된 조약의 내용 답④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1885년에 일본 신문에 게재한 글입니다.
따라서 제시된 글의 밑줄 친 '작년의 거사'란 갑신정변(1884)을 의미합니다.
갑신정변의 결과 체결된 조약은 두 가지가 있죠.
먼저, 일본은 갑신정변의 책임을 조선에게 돌리며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체결합니다.
또, 일본은 청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청과 일본 양국의 군대를 철수하고, 앞으로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대국에 미리 알리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후일 동학 농민 운동 때 두 나라가 군대를 파병하여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빌미가 됩니다.
ㄱ - 1883년에 개정한 조·일 통상 장정에 해당합니다.
ㄷ - 임오군란 이후 체결한 제물포 조약(1882)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7회 고급 35번 문제
35. 갑신정변(1884) 답③
이 문제 지도도 위에서 봤으니 눈에 익죠?
갑신정변 당시 3일간의 경과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위에서 갑신정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으니 이 문제는 답지 위주로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① 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국내로 돌아와 독립 신문을 발간하고 독립 협회 창립에 참여하죠.
②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이 원병을 보내 정변을 진압하였으므로, 이후 청의 간섭이 심화된 것은 불보듯 뻔하죠.
③ 갑신정변은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였습니다.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 강화와 관련된 것은 광무개혁을 들 수 있어요.
④ 당시 일본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한 상태였기에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관은 조선 병사와 난민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일본 사람이 학살당하게 되죠.
이는 일본이 한성 조약에서 일본에 대한 사죄,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답니다(배상금 지불).
⑤ 청·프 전쟁(1884)으로 인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일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합니다.
개화당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정변을 추진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6회 고급 39번 문제
39. 갑신정변(1884) 당시 개화당의 주장 답③
밑줄 친 '이 당'은 개화당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이 발표한 14개조 개혁 정강을 생각하면 됩니다.
임오군란에 개입해 이를 무력 진압한 후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과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집권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는 적극적인 개화, 개혁 정책을 통해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급진 개화파(개화당)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고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1884).
정변 후 권력을 잡은 개화당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들이 발표한 개혁 정책은 청에 대하여 자주권을 내세우고, 문벌 타파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것 등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① 개화당은 삼정의 문란 중 하나인 환곡제를 완전히 폐지하고자 하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사창제 개혁 이후에도 환곡제는 남아 재정 수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② 개화당은 전근대적인 내시 제도를 없애고 그 중 능력 있는 자는 관리로 등용하고자 하였습니다.
③ 2차 갑오개혁 당시 발표된 홍범 14조 가운데 하나입니다.
갑신정변 당시 징병제 등의 군제 개혁 주장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④ 개화당은 여러 관청에서 조세를 징수하고 지출하던 것을 호조로 통일시켜 과도한 조세 징수, 중간 착복, 낭비 등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갑오개혁에서는 탁지아문, 독립 협회가 제시한 헌의 6조에서는 탁지부로 재정을 일원화하자고 하였어요.
⑤ 양반 중심의 정치 체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갑오·을미개혁(1894~1895)
25회 고급 39번 문제
39.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의 한반도 정세 답④
제시된 조약의 '청국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한다.'라는 내용은 청의 조선에 대한 간섭 배제를 의미하죠.
그리고 '청국은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청국은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라는 내용을 통해 이 조약이 청과 일본 간에 체결되었으며, 일본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일방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에서 청을 완전히 제거하였으며,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 및 영토를 할양 받은 것은 청·일 전쟁 승리 후 청과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정부의 요청으로 청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자 조선에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일본은 조선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체결한 톈진 조약에 근거하여 군대를 파병합니다. 그러나 전주 화약 체결 후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죠. 이때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침략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1894).
이 시기 성립된 김홍집 내각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갑오개혁, 1894).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어요.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고종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어요.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1895. 4.)해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자 이 지역을 욕심내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하죠(삼국 간섭). 이에 굴복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합니다.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자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 8). 이 사건 후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친일 내각이 수립되어 단발령과 태양력 사용 등을 포함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을미개혁).
ㄱ - 김옥균 등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1884)에 대한 설명입니다.
ㄴ - 을미개혁(1895. 8.)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 4.) 이후 실시되었어요.
ㄷ -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친 것은 1894년 4월입니다.
ㄹ - 삼국 간섭(1895. 4. 23.)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 4. 17.)으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를 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21회 고급 36번 문제
36. 3국 간섭과 아관파천 사이의 역사적 사실 답③
(가)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청에 요동반도를 반납한 삼국 간섭, (나)는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대사관으로 처소를 옮긴 아관파천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파병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어요(1894.7). 이때 성립된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어요(1차 갑오개혁, 1894.7~1894.12).
1차 갑오개혁에서는 의정부와 각 아문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어요.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여하였어요.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은퇴시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김홍집·박영효 내각이 출범하여 제2차 갑오개혁(1894.12~1895.7)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때 고종은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어요.
2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8아문 → 7부), 지방 제도 개편(8도 → 23부, 337군), 지방관의 사법권과 군사권 배제, 재판소 설치, 교육입국조서 반포(한성사범 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관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1895.4 . 17.)을 체결하여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1895. 4. 23.)으로 요동 반도를 반환하며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어요. 이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10).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어요(을미개혁, 1895.7~1896.2).
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어요.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어요.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 파천, 1896.2),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어요.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조치 등을 단행하였습니다.
ㄱ - 군국기무처는 1차 갑오개혁 당시 설치되었으므로, (가) 이전의 사실입니다.
ㄴ - 삼국 간섭 이후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ㄷ -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이후 단행된 을미개혁 당시 군제를 개편해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였어요.
ㄹ - 러·일 전쟁 전쟁 발발(1904.2) 직전의 모습입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고종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18회 고급 33번 문제
33. 갑오개혁과 홍범 14조 답①
갑신정변~대한제국까지의 개혁안과 관련한 내용은 빈번하게 출제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다급해진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톈진 조약에 근거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냅니다.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전주 화약)을 맺고 전주에서 철수한 후 일단 해산합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해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는 한편,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목적으로 궁귈을 침범해 국왕을 감금하고 민씨 정권을 축출한 후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키고 더 나아가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1894).
김홍집 내각은 초정부적 회의 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청·일 전쟁으로 일본의 간섭이 약한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1차 갑오개혁, 1894. 6). 1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은 개국 연호 사용, 의정부와 각 아문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 신분제 철폐, 각종 폐습 타파였어요.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며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김홍집·박영효 내각을 출범시켜(1894. 11)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2차 갑오개혁 당시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내정 개혁 및 자주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 서고문을 바치는 한편,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습니다(1894. 12). 내각제를 시행하고 8아문을 7부, 8도를 23부 부로 개편하였으며, 시위대와 진위대를 설치하였으며, 재판소를 두어 지방관의 사법, 군사권을 배제하였어요.
①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1894. 12. 12)의 내용입니다.
② 독립 협회가 주관한 관민 공동회에서 국권 수호, 민권 보장, 정치 개혁 등을 담은 헌의 6조를 제출합니다(1898.10).
③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은 반봉건, 반침략적 성격이 담긴 폐정 개혁안 12개조를 제출합니다(1894.6).
④ 대한제국은 전제 황권 강화를 담은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1899.8).
⑤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 정강 14조를 반포하였습니다(1884.12).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5회 고급 37번 문제
37.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공통점 답③
첫 번째 자료는 갑신정변(1884), 두 번째 자료는 갑오개혁(1894) 당시의 장면입니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며,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선언하는 등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한 농민들은 노비 문서 소각과 청상 과부의 개가 허용, 신분제 타파를 요구하였습니다.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추구하던 신분 제도의 폐지는 마침내 갑오·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또, 조혼이나 과부의 재혼 금지, 인신 매매, 고문, 연좌제 같은 악습도 없앴다. 아울러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① 대한제국에서 반포한 대한국국제의 내용입니다.
② 두 개혁에서 토지 제도 개혁은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토지 제도 개혁 요구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라고 주장하였어요.
④ 대한제국이 실시한 광무개혁의 기본 원칙입니다.
⑤ 의회 설립을 요구한 것은 독립 협회입니다.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의하여 중추원 관제를 새로 반포하였습니다.
중추원은 입법권, 조약비준권, 정부 정책에 대한 심사권과 건의권을 가진 의회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4회 고급 35번 문제
35. 개항 이후의 평등 사회 실현 노력 답③
개항 이후 사회 부분에서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주제가 평등 사회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갑신정변~갑오개혁까지는 법제적으로 평등 사회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고,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로는 독립 협회의 활동~일제 강점기 여성 운동, 형평 운동을 통해 실질적인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됩니다.
갑오개혁을 통해 법적,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사회적으로 백정과 같은 천민들에 대한 천대가 여전하였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백정들이 사회적 차별 폐지를 주장하는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조선 후기 들어 신분 차별에서 벗어나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은 꾸준히 전개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속에 1801년에는 공노비 해방, 1882년에는 서얼과 중인에 대한 관직 진출 제한이 철폐되었습니다.
1886년에는 노비 세습제가 폐지됩니다.
개항 후에는 평등 의식이 더욱 확산되어감에 따라 각종 개혁들에도 이러한 것들이 반영되기 시작합니다.
갑신정변 때 발표된 14개조 개혁 정강에는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어요.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폐정 개혁안을 통해 '탐관오리, 불량한 양반, 횡포한 부호 등에 대한 징벌과 노비 문서의 소각, 천인에 대한 차별 개선, 청상 과부에 대한 재가 허용' 등을 주장함으로써 양반 지배 체제의 타도와 신분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개화파와 동학 농민군의 신분 제도의 철폐 요구는 갑오개혁을 통해 실현됩니다.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관리 임용 제도가 채택되었으며, 신분 제도와 공사 노비 제도가 혁파됩니다. 또, 조혼이 금지되고 과부의 재혼이 허가되었으며, 고문과 연좌법이 폐지되는 등 악습이 폐지됨으로써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독립 협회는 민중을 계몽해 평등 의식과 민권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노력합니다.
독립 협회는 천부 인권 사상을 앞세워 신체의 자유, 재산권 보장, 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민 주권론을 주장하여 입헌 군주제 실시와 국민 참정권 실현을 위한 의회 설립도 추진하였습니다. 독립 협회의 활동으로 자유 민권 사상이 널리 보급되면서 근대적 사회 의식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시민들의 정치·사회적 활동도 활발해집니다.
정부는 1896년에 호구 조사 규칙을 공포해 호적에 신분을 적는 난을 없애고 대신 직업을 적도록 호적을 개펀합니다.
① 노비 문서 소각과 과부의 재가 허용은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 개혁안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② 중대 범좌의 공판과 피고의 인권 존중은 독립 협회가 헌의 6조에서 주장한 내용이죠.
③ 신분제는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혁파되었습니다.
④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제정은 갑신정변 당시의 개혁 정강에 나타났습니다.
⑤ 연좌제 폐지와 조혼 금지는 갑오개혁 때 이미 발표되었으니, 신민회(1907~11)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3회 고급 34번 문제
34. 갑오·을미개혁 답②
'육군 편제 강령'이라는 군제를 개편한 내각이 추진하였던 개혁 내용을 찾는 문제네요.
문제 자료에서 '친위대, 진위대'가 나오네요.
친위대, 진위대 설치하면 딱 을미개혁을 떠올려야 합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 반도까지 할양받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랴오둥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죠(삼국 간섭).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죠(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
을미사변으로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친일 내각이 성립되고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제3차 개혁(을미개혁(1895.8~1896.2))을 추진합니다.
을미개혁의 주요 내용은 ‘건양’이라는 새로운 연호 사용, 단발령 실시, 친위대·진위대 설치,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우편 사무 실시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높아진 가운데 친일 내각에서 단발령 등의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되는 데 대한 반발이 커 유생들을 중심으로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조치에 따라 해산되는 착한 모습(?)을 보이죠). 이러한 혼란속에 아관 파천(1896. 2)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해산되고 을미개혁은 중단됩니다.
ㄴ - 은본위 제도는 1처 갑오개혁(1894. 7) 때 실시되었습니다.
ㄹ -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로 개편한 개혁은 2차 갑오개혁(1894.12) 때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0회 고급 37번 문제
37. 군국기무처 답④
제시된 자료를 살펴보죠.
첫째 자료에서 '차비문'이란 궁궐 정전(正殿)의 앞문을 뜻하므로, 정전의 앞문 밖에 설치한 기구겠지요.
일단 이 내용은 잘 모르니 패스~~~~
두 번째 자료에서 '이 기구가는 국내의 크고 작은 일을 전적으로 의논한다.', '총재 1인은 총리대신이 겸임하며 …… 회의원은 10~20인 이하'라는 사실에서 갑오개혁과 관련하여 정비된 기구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니다.
이 기구는 군국기무처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톈진 조약에 근거하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군대도 있겠다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침략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민씨 세력을 몰아낸 후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킵니다. 이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가 군국기무처였어요.
ㄱ - 둘은 미국에 보빙사절단으로 함께 파견된 적은 있었는데, 회의원으로 같이 참여한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ㄴ - 군국기무처는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는데, 퇴직 관리의 상업 경영 허가 개혁안도 그 중의 하나입니.
ㄷ - 제2차 김홍집 내각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9회 고급 35번 문제
35. 교정청 답③
제시된 자료 내용에 '우리 정부는 폐정 몇 가지를 개혁하니 모두 동학당이 주장해 온 바의 일이다.'라는 내용을 통해 이 기구가 동학 농민 운동 직후(구체적으로 전주 화약 후) 조선 정부가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죠?
따라서 이 기구는 교정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정청은 조선 후기의 임시 관청으로서 동학교도들이 요구하는 폐정 개혁안을 수용하여 1894년 6월 6일 내정 개혁에 관한 정책 입안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입니다.
교정청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일본이 강압적으로 요구한 5개조의 내정 개혁안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내정 개혁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6월 21일 일본은 왕궁을 포위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 대원군을 섭정에 앉혀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정부를 수립, 새 정부로 하여금 일본과 내정 개혁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합니다. 결국 6월 25일 내정 개혁을 담당하고 추진할 기구로서 교정청 대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오토리 일본공사가 고문이 되어 간섭하며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① 갑오·을미개혁을 추진한 군국기무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설치한 기구는 통리기무아문(1880)입니다.
④ 대한제국의 최고 군통수 기관인 원수부가 해당된다
⑤ 14개조 개혁 정강은 갑신정변 때의 개혁안이죠? 그리고 교정청은 그 이후인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세워진 것이기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네요. 교정청은 위에 설명했듯 동학 운동 당시 제기된 폐정 개혁 12개조와 관련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6회 고급 41번 문제
41. 교육입국조서 발표 시기의 상황 답②
제시된 자료는 제2차 갑오개혁 당시 발표한 교육입국조서(1895. 2)의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근대식 학제(學制)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4년 6월 학무아문을 두고 새 학제를 실시하여 관학(官學)을 세우고, 1895년 1월 선포한 '홍범 14조(洪範十四條)'의 제11조에서 외국 유학과 새로운 학문에 관하여 언급하였으나, 전(全)국민을 상대로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교육입국조서가 최초입니다.
교육입국조서의 주요 내용은
교육은 국가 보존의 근본이며, 신교육은 과학적 지식과 실용을 추구하며, 교육의 3대 강령은 덕육·지육·체육이며, 교육입국의 정신을 들어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국가 중흥과 국가 보존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입국조서 발표에 따라 한성사범학교가 설치되고 소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반포되었습니다.
이후 을미개혁 때는 서울에 4개의 소학교가 설치되었습니다.
① 임오군란(1882)은 갑오개혁 이전에 일어났어요.
② 홍범 14조는 2차 갑오개혁 당시 발표된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으로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가집니다.
③ 갑신정변(1884) 당시에는 개혁의 기본 방침으로 14개조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죠.
④ 독립 협회는 교육입국조서 발표 이후에 설립되었습니다(1896. 7).
⑤ 교육입국조사 발표 후인 1905년 이후 국권 피탈 전까지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 광무개혁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 풀기
2회 2급 38번 문제
문제해설
문제에 제시된 글을 보면,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 실시된 광무개혁에 대한 것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죠?
대한 제국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상공업 진흥, 각종 학교 설립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는 등 군제를 개편하여 궁귈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친위대), 그리고 지방을 지키는 군대(진위대)도 증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① 광무개혁은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② 전차(서대문~청량리)가 개통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설된 것은 1899년입니다.
③ 대한국 국제는 황제가 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인사권 등 무한한 군권을 행사하는 전제 정치를 실
시한다는 점을 명문화한 것입니다.
국민의 자유 민권 등을 규정한 것이 아니죠.
④ 이채연은 한성판윤(서울 시장)을 연임하면서 최초로 서울의 도시 계획을 추진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독립 협회 창립에도 참여하였습니다.
⑤ 이용익은 1897년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에 발탁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황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위해 인삼을 황실 전매 사업으로 하였고 외국인의 광산 채굴 금지하였으며,
일본 자본을 막고 대한 제국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4회 고급 40번 문제
문제해설
제시된 글을 보면, 청·일 전쟁 승리(1895)~대한 제국 시기(1897~1910)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아관파천, 즉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지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환궁 당시는 러시아와 일본 모두 한반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어 외세의 간섭도 상대적으로 약해졌던 시기입니다. 이에 고종은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높여 자주 독립 국가를 대내외에 표방하고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수립·선포하였습니다(1897).
이후 광무개혁이라고 하는 각종 개혁을 추진해 나갑니다.
① 대한 제국 성립 이전부터 을미사변, 을미개혁(1895) 등으로 조선에 대해 압력을 가하는 일본과 아관파천(1896)으로
응수하는 러시아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결국 러·일 전쟁
(1904~1905)이 일어나는 배경이 됩니다.
② 러시아가 연해주에 진출한 것은 베이징 조약(1860)으로 이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얻어낸 이후입니다.
③ 삼국 간섭(1895)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요동을 확보하자, 이전부터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
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번에 압력을 가해 요동을 돌려주도록 압력을 가한 사건입니다.
결국 일본은 이에 굴복에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죠.
④ 아관파천 시기 조선의 많은 이권들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에게 넘어갑니다.
이는 고종이 이 시기 러시아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주었는데, 조선과 통상 조약 체결시 최혜국 대우 조항을 넣은 많은
국가들이 동일한 이권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도 여러 이권을 얻었는데, 경의선 철도 부설권 획득(1896.7)도 그 중의 하나였어요.
⑤ 세계 각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며 대립하던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
과 영·일 동맹(1차 : 1902, 2차 : 1905)을 맺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5회 고급 44번 문제
문제해설
문제에 제시된 내용에 ‘국왕 폐하(고종)의 왕궁에의 환어(還御)’라는 것으로 보아 아관파천 시기(1896~97), 그 중에서도 환궁을 위해 일본과 러시아가 고종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 환궁 바로 직전임을 알 수 있어요.
이 시기에는 서재필이 민중 계몽을 목표로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1896~1898)을 발간하였어요.
② 대성학교는 신민회 회원인 안창호가 1907년에 평양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③ 헌의 6조는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에 관민 공동회에서 채택하여 고종에게 올렸죠.
④ 지계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1~1904년에 발행하였으며,
⑤ 김홍집은 갑오·을미개혁 시기에 세 차례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었으나 1896년 아관 파천 후 친러 내각이 수립된 후
광화문을 걷다가 친일파로 몰려 민중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 이전의 일이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0회 고급 32번 문제
문제해설
문제에 제시된 사료 (가)에서는 '관계(官契)'를 통해 지계(地契)를 떠올리고 광무개혁 당시의 양전 사업을 통한 지계 발급을 파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토지 조사.."를 통해 일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을 떠올릴 수 있죠?
따라서 문제에 제시된 자료 (가)는 대한제국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증명해 주는 문서로 발행한 지계 사업,
(나)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이라는 명분하에 실시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에 대한 것입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지세 수입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명목으로 신고되지 않거나 미확인된 토지는 조선 총독부 소유로 하게 됩니다.
⑤ 대한제국의 지게 발급은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어요.
반면, 일제의 토지 사업은 전국에 걸쳐 실시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43번 문제
문제해설
제시된 건물 어디서 많이 본 건물이죠?
교과서에 자주 나오던 황궁우란 건물이죠.
그런데 이 건물이 언제 축조됐는지는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제시된 설명 자료에 환구단 건립 2년 후에 완공됐다고 하네요.
환구단은 언제 건립됐는지 또 아리송하지요?
환구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나요?
환구단(圜丘壇)이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으로,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죠.
고종은 1897년 환구단을 건립하고 그해 12월에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제사를 지냈습니다(그럼 환구단 건립 후 2년 후에 황궁우를 건립했다고 하니 황궁우 건립 연도는 1899년이겠죠?).
이는 대한제국이 황제국이란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메세지를 전달한 것이지요.
1899년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황궁우를 건립합니다.
고종은 환구단과 황궁우에서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했지요.
하여간 환구단 거립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 건립한 것이니 대한제국 선포 연도만 알면 황궁우 건립 연도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1899년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을찾아야겠네요...
이게 더 어려울 수도 있죠? ^^;
ㄱ- 대한 천일 은행은 일본을 비롯한 외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1899년 1월에 설립된 민족 은행이었어요...
ㄴ- 독립 협회는 1896년에 설립되어 1898년 12월에 해산되었죠?
ㄷ- 서대문~청량이 전차는 1899년에 개통되었답니다.
ㄹ-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었어요...
그러므로 1899년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은 ㄱ과 ㄷ이겠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1회 고급 37번 문제
문제해설
1점짜리 문제니 간단한 해설로 대신하겠습니다.
제시된 자료는 1899년에 발표된 대한국 국제입니다.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상공업 진흥, 각종 학교 설립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는 등 군제를 개편하여 궁귈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친위대), 그리고 지방을 지키는 군대(진위대)도 증강하였습니다.
그럼, 답지별로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① 도입 부분에서 설명드렸지만, 대한 제국은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얼핏 대한국 국제가 일종의 헌법임으로 이의 발표가 법에 의한 통치, 즉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대한 제국의 모든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결론적으로 법에 의한 통치를 전제
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제 군주제를 표방한 것이기에 입헌 군주제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② 대한 제국은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을 통해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였지요.
③ 30번 문제에서 해설하였지만, 대한제국에서는 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던 교민들을 보호하도록 하였지요.
④ 대한 제국은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습니다.
이에 필요한 기술자와 경영인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했어요.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으로, 개인이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사립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답니다.
⑤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이곳으로의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2회 고급 9번 문제
문제해설
최근 독도와 관련하여 일본의 극우파 성향의 의원들이 독도 방문을 목적으로 국내에 입국하려다 공합 입국대에서 입국 불허를 내렸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버티면서 나라를 시끄럽게 하였었지요.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일본 내 극우 성향의 강화와 더불어 이러한 주장은 더욱 기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시험전 이러한 추세에 따라 독도 관련 내용이 시험에 출제될 것이라고 보고 꼼꼼히 공부를 하셨으리라 생각듭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였어도 조금 풀기 어려운 3점 문제로 출제되었네요.
카페 내에 <시험전 꼭보기> 방에 올려놓은 독도 관련 내용을 읽어보신 분은 문제푸는데 그러헤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그럼 문제를 해설해볼까요.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 영토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들어 도적 방지, 왜구 침입 등에 대비하여 공도(空島;섬을 비워두는 것) 정책을 추진하여 섬을 비워두자, 울릉도와 독도 연안에 일본 어민들이 불법 침입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숙종 때는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존 어민을 몰아내고 일본에 들어가 막부로부터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일본 어민들의 불법 침범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측에 항의하는 한편, 육지 주민을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1884).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을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등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시키는 관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독도도 관할하게 함으로써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2000년에 10월 25일, 이 날을 독도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1905).
이는 국제법상 맹백한 불법 영토 침탈 행위였습니다.
⑤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기 전에 발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 독도 <사료로> 정리하기
<동북아 역사재단의 독도 정보> 주요사료
http://www.dokdohistory.com/history_hole/main.asp
[삼국 시대]
512년(신라 지증왕 13)
6월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 : 현재 강릉 지역)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 우산국(于山國) 정벌.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은 溟州 正東의 海島로 鬱陵島라 불리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같은 기사에 亏陵島(今作羽陵)라 기록되어 있음.
[조선 시대]
1417년(태종 17)
2월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토산물과 주민 3명을 데리고 돌아와 섬에는 15호 86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보고함. 우산·무릉도(于山武陵)에 주민의 거주를 금하고 거주민을 쇄출하기로 최종결정되므로써 수토정책(搜討政策)이 확립됨. 8월 왜가 우산 무릉(于山武陵)을 노략함.
1432년(세종 14)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편찬되었는데,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 “우산(于山), 무릉(武陵) 두 섬의 정동 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기록함. 이 내용은 1454년(단종 2)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에 그대로 실리게 됨.
1481년(성종 12)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 하였는데, '강원도 울진현 산천조'에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 - 혹은 무릉(武陵), 우릉(羽陵) - 두 섬은 현 정동 쪽 바다에 있는데 날씨가 맑으면 나무 등을 볼 수 있고, 바람이 편하면 2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우산 · 울릉이 원래 하나의 섬이라고도 한다. …”라고 하였음. 이 내용은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대로 전재되었음.
1693년(숙종 19)
안용복 1차 渡日. 3월 동래와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충돌했는데, 일본인들이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을 꾀어 隱岐島로 납치함. 안용복은 隱岐島主에게 자신들을 잡아온 이유를 따지고, 다시 伯耆州 太守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해줄 것을 요구함. 백기주 태수는 막부에 보고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서계(書契)를 안용복에게 전달함.
1696년(숙종 22)
1월 도쿠가와 막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 금지를 결정함.
8월 안용복(安龍福) 2차 도일(渡日). 재차 일본에 가서 울릉도 문제를 담판 짓고, 강원도 양양현(襄陽縣)으로 돌아온 안용복을 잡아 가둠. 안용복은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등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子山島-于山島)를 거쳐 일본 백기주로 들어가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태수에게 전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따짐.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독도지역을 침범한 일본인들을 처벌하였고, 안용복에게 “두 섬은 이미 조선에 속했고,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함부로 침범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약속 함. 안용복은 막부에 대한 상소를 취하 하고 강원도로 돌아옴.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 <삼국통람도설>에 표시된 조선 영토 울릉도와 독도
1785년 일본인이 쓴 <삼국통람도설>에 나오는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 색깔로 칠해 놓고 ‘조선의 것’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이 지도 외에도 일본에서 제작된 여러 지도에 독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개항 이후]
● 동해에 있는 울릉도 외 일도(독도)를 지적 편찬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품의
◦ 울릉도를 관할로 할 것인가에 대해 시마네 현으로부터 별지와 같이 질의가 있어서 조사해 본 결과, 울릉도는 1692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후 별지 서류에서 요약 정리한 바, 1696년 정월 제1호 구정부(막부)의 평의, 제2호 역관에의 통보서, 제3호 조선에서 온 서한, 제4호 이에 대한 우리나라(일본)의 답서 및 보고서 등과 같이, 우리나라(일본)와 관계없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게 올린 품의서, 1877년 3월 17일 -
◦ 질의한 바의 울릉도 외 일도는 우리나라(일본)와 관계없다고 명심할 것.
- 태정관 지령, 1877년 3월 29일 -
●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소속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야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일.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도 전체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
제3조 개국 504년 8월 16일 관보 중 관청 사항란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 505년 칙령 제36호 제5
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 밑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할 일.
제4조 경비는 5등 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이액(吏額)이 미비하고 여러 것들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이 섬의 세금으로 우선 마련할 일.
제5조 미진한 여러 조항은 이 섬을 개척하면서 차차 마련할 일.
- 고종실록, 1900년 10월 25일 -
● 의정부 참정 대신에게 올린 보고서와 답변
◦ 울릉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 바깥바다 100여리 밖에 있는데, 본월(4월) 초 4일 진시(唇時) 가량에 윤선(輪船) 1척이 군내 도동포에 내박(來泊)하여 일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이르러 스스로 ‘독도가 지금 일본 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라고 말하온 바 ……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 헤아리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하였습니다.
- 강원도 관찰사 서리 춘천 군수 이명래, 1906년 4월 29일 -
◦ 보고는 잘 받아 보았다. 독도의 일본 영토설은 전혀 사실무근이니, 그 섬의 형편과 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라.
- 참정대신 박제순의 지령, 1906년 5월 20일 -
● 러․일 전쟁 전후의 상황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국외 중립 선포 → 일제는 한․일 의정서(1904. 2) 체결해 한반도 군사 전략상 필요한 곳을 군사 기지로 마음대로 사용하기로 함 → 이후 독도를 일본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 전쟁 물자 수송 등을 위해 경부선, 경의선 부설 → 러일 전쟁에서 우위를 잡은 후 제1차 한․일 협약(한․일 협정서, 1904. 8) 강요 체결해 고문 파견(재정 고문-메가타, 외교고문-스티븐슨)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7), 영국과 영․일 동맹(1905. 8),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1905. 9)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 받음 →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 1905. 11)을 강제로 발표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통감 정치 시작)
●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직접 관할하게 함(1900. 10. 25) → 2000년에 이를 기념해 독도의 날로 지정 |
독도 정리해보기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삼국 시대 이래로 명백한 우리 영토였다.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려주는 기록은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세기 초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있던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고 하며, <고려사>에는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 울진현 소속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 책에 덧붙어 있는 팔도총도에서도 독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 <위능도사적>, <만기요람> 등에서도 독도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위의 자료를 보면 조선 후기에 일본 막부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 무렵 우리 연안에 일본 어민들이 불법 침입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일본 측에 항의하고 육지 주민을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였다(1884).
대한 제국 시기에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침입 및 삼림 벌채가 문제가 되자 정부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이후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를 묶어서 군으로 승격시켜 독립된 울릉군을 설치하고 군수로 하여금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관할하도록 하는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다(1900).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에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므로 일본 시마네 현의 소속 도서로 편입시킨다.’라는 내용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공포하여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1906년 4월에 일본 지방 관리들이 울릉군수를 방문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통보하자, 울릉군수 심홍택은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 편입되었다는 말을 하더라.’고 강원도 관찰사를 경유하여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1906년 4월 29일자 지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인의 영지라는 일본인의 설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하고,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독도는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 영토에 귀속되었다. 1952년에 정부는 ‘인접 해양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서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경계를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본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이후 독도 문제는 한·일 양국의 외교 문제가 되었다.
13회 고급 40번 문제
문제해설
12회 시험 41번 문제 답지 중에도 왕릉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많은 분들이 어렵게 느꼈는데,
이번에는 온전하게 조선 왕릉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네요.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하면 쉽게 맞을 수 있었던 문제입니다.
태조~철종까지 동일하게 유지되던 능 구조가 고종 때부터 바뀐 직접적인 이유를 정확하게는 모르더라도(카페지기도 몰랐음....^^;) 고종 때부터 바뀌었다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황제 즉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야할테니까요.
①, ②, ③번은 왕릉의 구조를 변경시킬만한 이유가 못되죠?
⑤번에서 조선이 자주국이라고 명시를 했지만, 이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명시이지 중국을 완전하게 배제한 완전한 자주국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왕릉 구조의 변화와 관련성이 적죠.
홍릉은 고종, 유릉은 순종의 왕릉입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고종의 능인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습니다.
문제에 제시한 능의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능침의 삼계(봉분과 정자각 사이에 일자 형태의 석대로 상계, 중계, 하계로 구분해 놓은 것)를 없애고 봉분 앞에 배치하였던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을 배전(종묘나 문묘 등의 배단(拜壇)에 까는 벽돌 )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습니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능으로 가는 길)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 조선 시대 왕릉
조선 시대 왕릉의 구조를 보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해 보세요.
http://cafe.daum.net/hankuksalove/jPxr/33
고종의 능인 홍릉의 구조를 보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geumgok.cha.go.kr/depart/n_geumgok/promenade/royal.jsp?mc=geumgok_01_01
■ 우리나라 고분
선사 시대~조선 시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분을 한번에 공부하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cafe.daum.net/hankuksalove/jPxr/8
14회 고급 28번 문제
문제해설
이 문제는 주어진 자료를 통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임을 알아내는 것은 쉽습니다.
'고종 사진', '대한제국', '원구단에서의 황제 즉위식'을 보면 이것이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임을 알 수 있어요.
광무개혁까지 몰라도 대한제국 시기에 실시된 개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 내용이 아닌 것을 골라 내면 답이 찾아지겠네요.
고종은 아관파천 후 약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이후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국제 역학 관계에 힘입어 환구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 선포합니다(1897).
연호를 광무라 정한 고종은 국내외에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대한 제국은 만국공법에 기초한 대한국 국제를 제정합니다(1899).
대한국 국제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국’이며 황제가 무한한 권리를 가지는 전제 정치를 실시한다는 점을 명문화하였죠. 또한, 황제가 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인사권 등 무한한 군권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국임을 밝혔습니다.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에 따라 점진적인 개혁을 내세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군사 수를 증강하고 장교 양성을 위해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고,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근대적 과학 기술을 일으키기 위해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⑤ 교육입국조서는 대한제국 이전인 2차 갑오개혁 때의 일입니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된 교육입국조서(1895. 2)는 근대식 학제(學制)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육입국조서의 주요 내용은 '교육은 국가 보존의 근본이며, 신교육은 과학적 지식과 실용을 추구하며, 교육의 3대 강령은 덕육·지육·체육이며, 교육입국의 정신을 들어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국가 중흥과 국가 보존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이후 한성사범학교 관제(1895. 4), 외국어학교 관제(1895.7)를 반포하고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1895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를 세우죠.
3차 개혁, 즉 을미개혁에서는 서울에 4개의 소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광무개혁 때에는 신교육령(1897)을 발표하고 각종 학교를 지속적으로 설립해 나갑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상공업 진흥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상공학교, 광무학교 등의 실업 학교들을 많이 설립했어요.
물론 소학교나 중학교, 의학교 등의 다양한 학교들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위에 설명한 것들은 관립 학교들이고, 외국인 선교사, 종교계나 민족 선각자들이 많은 사립학교를 세웁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6회 고급 41번 문제
41. 대한제국이 실시한 광무 개혁 답②
시사적인 자료(신문 기사)를 제시한 문제네요.
'1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악기,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참가, 출품한 악기'라고 나와있네요.
밑줄 그은 '이 개혁'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겠죠?
이 개혁은 '황제로 즉위한 고종이 추진'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광무개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광무 개혁이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시기상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 추진한 개혁 내용을 찾으면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1897).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어 외세의 간섭도 약한 상태에서 고종은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수립·선포하였습니다(1897).
또한, ‘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만국공법’에 기초하여 건국된 국가로, 국내외에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국임을 강조하였죠.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광무 개혁).
개혁은 자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재정 확충,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습니다.
먼저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으며,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밖에 전화 가설, 우편과 전보망 확충, 전차와 철도 부설 등 교통, 통신 산업도 발전시켰습니다.
ㄴ - 청에 영선사를 파견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일입니다.
1881년 개화 정책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 습득을 위해 일본에 조사 시찰단,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ㄹ - 교육 입국 조서는 갑오개혁 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2차 갑오개혁 때에 국민 교육을 위한 교육 입국 조서(1895.2)를 발표하고 근대적인 학제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3회 고급 26번 문제
문제해설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관련 문제는 주로 탐구 활동 주제로 연결하여 찾는 유형으로 출제되었어요.
자료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곳'은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 지대로 수백년 동안 비어 있었으나 수신 년 전부터 북쪽 변경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가 십여만 명이나 된다. 일찍이 분수령에 세운 정계비 이래로 토문강 이남 지방은 우리 영토로 확정되었으니 관리를 두어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네요.
이를 통해 이곳이 간도이고, 대한 제국 당시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동포들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 제국 시기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후금(청)을 건국하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 만주 지역을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하여 성역화하면서 이 지역을 비워 놓는 정책을 펴면서 다른 민족의 이주를 금지하였어요. 하지만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면서 이 지역 곳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서위압록 동위토문(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이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하였습니다(1712).
19세기 후반 계속된 자연 재해와 삼정의 문란 등으로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늘어났어요. 이러한 가운데 청은 중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을 목적으로 이곳의 조선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백두산 정계비에 새긴 '토문'에 대한 해석을 청은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은 토문을 쑹화 강을 보고 이를 경계로 할 경우 간도는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어요. 그러면서 대한 제국에서는 간도를 함경도 행정 구역으로 편입시키고(1902)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여 한국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리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도 교민의 통제를 위해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어요. 그러나 일제는 1909년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청과 간도 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의 영토로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①, ② ,③, ⑤는 모두 문제에 제시된 사실(대한 제국 시기) 이전의 일입니다.
①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
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청이 강성한 상태였으므로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② 광해군은 명과 신흥하는 후금 사이에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을 폈습니다.
③ 세종은 북방을 개척해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지역에 삼남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해 우리 터전으로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④ 대한 제국이 수립 후 정부는 1897년, 1898년 두 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하고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확인하였어요.
이후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을 직접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⑤ 백두산 정계비 설립(1712) 전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3회 고급 34번 문제
문제해설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나타난 '고종은 국호를 고치고(대한 제국) 새로운 연호(광무)를 선포', '지계 발급'이라는 내용을 통해 대한 제국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따라서 대한 제국 시기(1897~1910)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이룬 상황을 이용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1897).
대한 제국은 국내외에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국임을 강조하였죠.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의 고종은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기에, 이 시기의 개혁을 광무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개혁은 자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재정 확충,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습니다. 먼저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으며,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새로이 측량(양전)하여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즉 지계(地契)를 발행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밖에 전화 가설, 우편과 전보망 확충, 전차와 철도 부설 등 교통, 통신 산업도 발전시켰습니다.
① 조선은 통리기무아문(1880)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신식 군대인 별기군(1881)을 창설하였습니다.
② 군국기무처는 제1차 갑오개혁(1894)을 추진한 최고 정책 결정 기구로, 4개월 동안 약 210건의 안건을 처리하였어요.
③ 대한국 국제는 1899년 8월 대한 제국의 고종 황제가 발표한 것으로, 황제의 권한이 무한함을 강조하였습니다.
④ 한성 사범 학교는 교육 입국 조서 발표 후 1895년에 설립되었어요.
2차 갑오개혁 시기인1895년 2월에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에 근거해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1895.4, 한성사범학교 설립),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⑤ 노비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제1차 갑오개혁 때입니다.
1차 갑오개혁에서 노비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가혹한 고문과 연좌 제도 폐지 등이 이루어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33. 1897~1907년 시기의 모습 답⑤
(가)는 구본신참과 광무라는 연호를 세웠다고 나와 있으니 대한 제국의 성립 모습(1897),
(나)는 통감이라는 존재와 즉위식이라는 내용을 통해 순종의 즉위(1907)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897~1907년 사이에 있었던 사실, 즉 고종 황제 재위 기간의 대한 제국에서 있었던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ㄱ - 육영 공원은 1886녀에 세워져 1894년까지 운영되었어요.
개화기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를 비롯한 미국인 교사들을 초빙해 현직 관리나 양반 상류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비롯한 산수, 국제법 등 근대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ㄴ - 원각사는 1908년 개관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극장이었으며,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극으로 공연되었어요.
ㄷ - 경부선 철도는 일본이 러·일 전쟁 등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1901~1905년에 걸쳐 건설하였습니다.
ㄹ - 우리나라는 1900년에 만국우편 연합에 가입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첫댓글 이 부분은 정리가 길어 공부하기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자주 나오는 부분이니 잘 알아둡시당.
많은 것을 주시려는 배려가 곳곳에서 묻어나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래저래 애매모호한 것들이 확연히 들어올 것 같네요.
정말 고맙단 말씀 밖엔 드릴 수가 없네요
이 문제 많이 나오던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자주 틀리는 부분인데, 정말 감사합니다^ ^
몇 번 더 봐야 할듯...ㅠㅠ 자료는 짱인데 제 머리가 노짱이라....*^^*
잘 봤습니다~~
여러번 봤는데도 아직도 헷갈리는 개혁들.... 이렇게 잘 정리되어있는데도 자꾸 잊어버려요 ㅠㅠ
앗 정말 기출더해서 방대한양 서술식으로 감사히 정리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와~~~~ 그져 한번 뵙고 싶네요 대단하십니당
진짜 많네요...;;한국사짱님 대단하신거같아요..ㅎ
완전 감사합니다ㅠㅠ 시험보기전까지 몇번 더 보면서 익혀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어디가 약한 지 알게 되네요 감사드려요^^
어렵네요 ㅎㅎ
어렵네요 ㅎㅎ -ㅁㄱㅎ-
자료 감사합니다...
와우~~ 대단 하십니다. 짱입니다.
아 어렵다어려워ㅎㅎ잘봤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고생하시네요^^
셤에서 잘 가려낼지 ,,열심히 해볼께요 감사합니다.
잘 설명되어 있어 이해가 잘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자료 해설 감사합니다ㅜㅜㅜ!!
우와 빡쎄다ㅎㅎㅎ감사합니다~잘봤어요ㅎㅎ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설명 감사합니다.
진짜 복받으실겁니다~고맙습니다^^
임오, 갑신, 동학, 갑오, 을미, 광무..
감사해요
정말 감사드려요~자료를 보니 자신감이 쑥쑥~꼭 합격할 수 있기를~~~
이부분은 정말 정리가 잘 안되네요 그냥 달달 외워야할까봐요~~
정리 감사해요~~*
awesome decent explanation! well done!!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갑신정변때 일본이랑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것! 처음 알았습니다.
와~~근대사 부분 늘 헷갈리고 어려웠는데..감사합니다. 꾸벅!
자료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50대 후반으로 국사책을 손에서 놓은지 30년을 훌쩍 넘었네요.
우연히 지난 추석에 아들에게서 이런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구입하고 무작정 원서를 접수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근대사에서 자꾸 막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곳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자신감이 생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너무 감사해요~ 항상 헷갈리고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어려운 부분^^
잘 보았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