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근세 조선시대의 교동도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강화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정묘호란과 강화도
정묘호란은 서기 1627년 음력 1월 8일부터 3월 3일까지)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입해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그 명칭만큼은 비교적 잘 알려진 전쟁이지요. 여기서는 최대한 강화도에 한정해서 전쟁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 등지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지요. ‘졌잘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후금군에게 패하면서 그 본진이 개성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지요. 분조(分朝)는 말 그대로 조정 즉 정부를 나눈다는 말입니다. 인조가 유사시 잡히거나 살해당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요.
훗날의 병자호란 때와 비슷한 양상이지만 후금군은 겨우 10여 일 만에 황해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후금은 평산(황해북도 평산군)에서 진격을 멈추고 강화도에 있는 조선 조정과 계속 사신 왕래를 했지요. 후금(여기서는 아민)은 음력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 유흥조)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묘호란은 병자호란과 달리 실제로 화약 과정을 보면 주거니 받거니 협상도 제법 이뤄졌습니다. 전반적인 정세가 달라서기도 했지만 후금에서 화친을 재촉하기도 하는 경우였지요. 이후 병자호란에서의 굴욕처럼 조선 입장에서,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조가 유생들을 위로한답시고 강화도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했지요.
그런가 하면 상소에 '항복'이라는 표현을 쓴 관리를 파직시키라고 인조가 심술을 부려대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다만 해괴한 상황은 상소를 올린 사람이 '얼른 항복하소서.'하는 식의 상소를 올린 것 때문이 아니었지요. 험한 말로 ‘아 X팔리게 왜 오랑캐한테 항복하십니껴? 나가서 싸워얍지요.’라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인조도 그 부분은 나름 창피했는지 답변이 이러했지요.
‘여봐, 우리가 지금 화친 협상하지, 항복 협상하냐? 너 지금 나 놀려먹냐?’가 요지였습니다. 그래도 이때는 후금이 국제 정세상 상황 급한 것을 알았는지 인조가 때아닌 여유(?)를 부리는 모습도 보였지요. 병자호란 때와 달리 정묘호란은 얼굴은 좀 깎여도 그런대로 납득 할 만한(!) 강화였습니다. 다만 인조가 이 전쟁에서의 교훈을 전혀 못 살려서 문제였지만요.
② 모문룡 잔당의 투항과 정세의 변화
병자호란은 음력으로는 서기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8일부터 정축년(서기 1637년) 1월 30일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입니다. 유명세에 비하면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진 전쟁이었지요. 병자호란은 정묘호란에 비해 강화도와 관련한 이야기가 더욱 많은 편입니다.
병자호란이 정묘호란과 달리 새로운 파국의 시발점이 된 것은 조선을 괴롭히던 모문룡의 부하 장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의 후금 투항 사건이었습니다. 서기 1633년 초에 이들은 명나라 정부군의 진압을 피해 바다로 탈출한 후 파격적인 조건으로 휘하의 14,000명의 병력 및 185척의 전함과 함께 압록강변을 통해 후금으로 귀순했지요. 훗날 공유덕은 병자호란 때 조선 공격의 선봉이 되었고, 경중명은 예친왕 도르곤 밑에서 강화도 공략을 맡게 됩니다.
이때 투항한 모문룡 잔당의 명나라 수군은 단지 수군 함선뿐만 아니라 과거 태조 누르하치를 죽게 한 홍이포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후금(청나라)의 전력은 급성장하게 되었지요. 이는 명나라와 조선의 입장에서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의 경우는 이제 후금(청나라)이 육지의 산하이꽌 뿐만 아니라 수군을 통해 텐진과 산둥을 위협할 수 있게 된 점이었지요.
조선의 경우는 훗날 병자호란 때에도 입증되지만, 과거와 같이 수군이 없는 후금을 상대로 강화도로 피신하여 장기 농성하는 전략을 구사하기가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정묘호란 때와는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조선 조정은 이를 간과하고 강화도로 피난만 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마저 제대로 도망도 못 가서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지요.
심지어 후금에서도 '너희들은 분명 강화도로 갈 것이 뻔하다'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 대놓고 시험문제 알려준 셈인데도 조선 정부는 이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지요. 하다못해 최우는 자기 정권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화도의 방비는 철저하게 했는데 인조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래서야 인조가 용군(庸君) 즉 IQ 두 자리 임금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밖에요.
③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전쟁(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도원수로 임명된 김자점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는 싸우고,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가 봉화를 막고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지요. 뭐 그 임금에 그 신하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급보를 접한 인조는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반, 무반과 그 가족들 그리고 종묘사직의 위패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시켰습니다. 그런 후 자신은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했지요. 그렇지만 이미 청군 선발대가 서대문 근처 홍제원까지 도착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결국 인조는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요.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하지조차 못했고, 단 8일 만에 수도인 한성을 내주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록(29일)을 큰 차이로 뛰어넘었습니다. 해괴한 기록의 갱신이지만요. 이후 청나라가 장사꾼 행렬로 위장한 300기의 기병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신하지도 못한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잘 알려진 대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산성입니다.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일부가 걸쳐 있지요.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방식이 접근성이 좋기도 해서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상당히 홍보하는 편입니다. 암군이라는 선조와 인조도 손은 쓸 만큼 남한산성은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었지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