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경주 동궁과 월지가 어떤 곳이지?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서기 7세기 신라의 궁궐 유적입니다. 동궁은 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지요. 흔히 별궁(別宮)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특별히 따로 지은 궁전’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용어로는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 때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던 궁전이라고 하지요.
동궁(東宮)은 일단 태자가 사는 곳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실 듯합니다. 혹은 태자나 세자 그 자체를 나타내기도 하고요. 이 동궁은 국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북동쪽으로 접해 있으나 현재는 원화로에 의해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서 법궁(法宮)은 궁궐 중 가장 으뜸인 궁궐로, 군주가 거처하는 제1궁궐을 뜻하지요.
한편 원화로(源花路)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배반네거리에서 출발하여 용강동 용강네거리에서 끝나는 도로입니다. 4번 국도와 904번 지방도의 일부이지요. 원화로에 대한 설명이야 어떻든 원화로의 문제점은 옛 동해선 철도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월성과 동궁과 월지를 심각히 훼손한 도로라는 점입니다. 난개발이라 해도 좋을 상황이지요.
경주 동궁은 황룡사지의 남서쪽에 있습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지요. 황룡사는 잘 아시겠지만, 경주시에 있던 사찰로 서기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습니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전북 익산 미륵사, 고구려의 평양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사찰이었지요.
② 동궁과 월지의 특징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文武王) 14년(서기 674년) 02월」 |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채만 복원한 상태라고 하지요. 아울러 이곳의 상징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입니다. 사실 이곳은 궁궐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지요. 안압지 관련 이야기는 조금 후에 계속하기로 하겠습니다.
동궁과 월지는 대표적인 고대 한국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서기 7세기 통일 전쟁기 신라 정원 양식의 원형이 잘 보존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보통 한국의 다른 고대 유물들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온 유물의 특징은 온갖 실생활 용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지요.
예를 들어 문고리, 옷걸이, 가위, 빗, 출퇴근 카드 용도로 쓴 목간, 젓갈 제조일자 꼬리표, 실제로 쓴 각종 그릇 등이 그러합니다. 이곳에는 임해전(臨海殿), 임해문(臨海門) 등이 있었다고 하지요. 임해전은 삼국 시대 신라에서 봉래산(蓬萊山)을 본떠서 경주 동쪽에 못을 파고 지었다는 전각입니다. 임해문은 신라 왕궁인 월성(月城)에 있었던 문으로 추정되고요.
③ 대체 뭐가 맞는 명칭이야?
원래 명칭은 당연히 월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중에게는 오히려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지요. 사실 안압지는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천주사(天柱寺)[(중략) 그 북쪽에 안압지(雁鴨池)가 있다.] (중략) 안압지(雁鴨池)[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기유년(1669, 현종 10) 가을에 동무와 서무에 비가 새는 곳이 있어 개수하여 공사를 마치고, 부사(府使) 주면(周冕)이 유생(儒生)들과 상의하여 안압지(鴈鴨池) 임해전(臨海殿)의 옛터에 있던 돌계단을 가져다가 성전의 계단 아래에 깔고 또 정로도 쌓았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학교(學校)」 |
월지는 조선시대에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이곳 호수에 기러기(雁)와 오리(鴨)들이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서기 1980년에 안압지라 이름 붙여진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월지’란 원래 명칭은 반월성(半月城: 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임해전(臨海殿)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서기 2011년 7월부터 이곳의 정식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되돌아갔습니다. 각종 안내문에서도 되돌아간 명칭을 따랐고요.
그럼에도 아직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압지라고 부른다 합니다. 조선시대 이래로 안압지로 알려진 기간이 워낙 길어서요. 동궁과 월지에 비해 부르기 더 쉬운 점도 한몫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명칭이 무작정 근거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고요. 예를 들어 월지궁의 경우 신라 시기에도 ‘임해전’이란 명칭을 일부 쓰기도 한 듯합니다.
9월에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8 「신라본기 제8 효소왕(孝昭王) 6년(서기 697년) 09월」 |
이른바 삼국통일기 그리고 남북국 시대에도 임해전이라는 명칭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반면 월지궁이라는 명칭은 빈도수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요.
14년(서기 822년) 봄 정월에 왕과 어머니가 같은 동생[母弟] 수종(秀宗)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헌덕왕(憲德王) 14년 1월」 |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