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 안에서만 산책하게 될 때, 주로 다니는 길은 시내 고분군과 경주 문화원이다. 경주 읍성은 최근에 정비되었으니, 마지막 코스쯤 되겠다.
경주 문화원에는 300년 된 산수유 나무와 600년 된 은행나무들이 있고, 요즘 모과 열매들도 잘 익어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아였고, 일제시대에는 박물관이었던, 옛 건물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는 오후의 햇빛 속에서 은은하게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는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그곳 벤치에서 잠시 앉아 있곤 한다.
정면에는 두 그루의 전나무들이 있는데, 하나는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께서 식수한 것이다. 이 나무들이 재미있는 것이, 어떤 새들의 새끼들이 살고 있는데, 내가 그곳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그들은 떼지어 경계의 아우성을 지르곤 한다. 잠시 멀어지면, 그 소리는 사그라든다.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다시 왔다갔다 하면서, 그들을 놀려본다.
문화원 뜰안에는 항상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전에는 클래식 음악이었고, 요즘은 DJ(?) 취향이 바뀌었는지, 어느 여인이 촉촉한 목소리로 시나 수필을 읽어준다. 그녀가 읽어주는 글은 피천득의 ‘인연’을 연상시키는데, 귀가 침침한 나는 ‘그 남자를 3번째 만났을 때...’ 이후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결국 궁금해서 문화원측에 물어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제로 시인이고, USB에 녹음된 것을 매일 반복해 틀어놓는다고 한다. 좀 더 서성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날, 문득 그 남자를 3번째 만나고,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
경주문화원 국장님이 지금은 반은 죽었고, 반만 살아있는 산수유나무가 300년이나 되었다고 했을 때, ‘설마요?’ 싶었다.
그 옛날 박목월 시인이 20대 청년이었을 때, 그는 더 어린 조지훈 시인을 글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신 교환만 하다가, 그가 어느 이른 봄날에 ‘경주문화원에 산수유 꽃이 피었으니, 보러 오시지요,’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그들은 박목월 시인이 살고 있던 고향 건천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몰랐기에, 박목월 시인이 조지훈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역에서 기다렸다고 하면서, 환하게 밝아지시던, 문화원 국장님의 얼굴도 20대 청년의 맑은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최근에 시내 고분군과 경주문화원 사이에 있는 문화의 거리에 ‘MOKWOL’이라는 간판이 새로 걸려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녀의 남편이 건천 출신이라서, ‘MOKWOL’로 지었고,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인들의 시집인 절판된 ‘청록집’도 많이 구해놓았다고 한다.
이른 봄날이라고 말하기에도 쌀쌀한 날씨 속에서, 시내에서 가장 먼저 예쁜 꽃을 보여주는 것은, 경주문화원의 산수유 꽃과 읍성 앞의 매화꽃이다. 내년 봄에도 겨울의 무채색 속에서 노오란 꽃을 피울, 산수유나무의 생존을 확인하러 와야겠다.
첫댓글 황성공원에서 박목월 시인 노래비에 안경 올려놓고 잊으신 분!
재미있어요~~~
경주 주변의 문화공간을 빛내주시네요.
그곳에 담긴 쏠쏠한 담화와 계절을 머금은 풍경과 자기맘을
너무 잘 표현해 주시기도하고요.
주변을 둘러보며,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박하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소원들 중 하나가 이루어지고 있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