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운동의 튀김냄새. /김호순
-행정안전부와 좋은생각주최 <우리마을 수기 공모 제1회> 최우수 당선작-
교회가 보이고 청남초등학교가 바로 코 밑인 청주 영운동, 그 곳에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동네 가득 풍겼던 핫도그 튀겨내는 냄새이다.
나 혼자 썼던 작은 방이 딸린 홀과 그 홀 길이만큼 길쭉했던 큰 방(이 방에서 엄마 아버지 동생 세 명이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주인집과 함께 썼던 마당 가, 그 집에서 나는 고교시절 끝 무렵과 대학시절을 보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뺑소니 운전 사고를 당하기 이전만 해도 우리의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버지가 뇌수술을 하고난 이후, 막막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준 것이 바로 엄마가 튀겨내는 핫도그였다. 엄마는 비어 있던 홀 안에 튀김 솥을 걸었다. 솜방망이만한 반죽덩어리 안에는 커다란 소시지가 들어 있고 펄펄 끓는 튀김 솥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약간 갈색 빛을 띨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핫도그가 되었다. 그 위에 마지막 장식처럼 설탕이나 케찹을 바르면 끝이었다. 초등학교가 문턱이었기에 점심시간이나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시간엔 언제나 코흘리개들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누구라도 핫도그 하나 먹고 나면 얼굴에 벌겋게 케찹이 묻거나 설탕가루가 하얗게 묻거나 그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아이들은 서로 친구 얼굴을 보고 또 깔깔대기도 했다 마치 굴뚝청소를 마치고 나온 그 소년들처럼.
처음엔 작고 예쁘장한 솜방망이만하더니 나중엔 애호박만큼 점점 엄마의 핫도그는 커져갔던 걸 기억한다.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영운동에서 엄마의 핫도그는 국민 간식이었다. 때로는 목사님께서, 회복 중에 있는 우리 아버지를 위해 심방 오셨을 때, 심방 가방 안에서 성경책 대신 신문지로 둘둘 말은 소고기 덩어리를 조심스레 꺼내 놓으시고 기도해 주시고 갈 때 엄마가 대접 해 드린 것도 그 핫도그였다.
그 핫도그가 때로는 우리의 한 끼 식사가 될 때도 있었다. 늦은 오후 집에 돌아오면 팔다가 남은 핫도그가 튀김 솥 위 거름망 위에 얌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다섯 개가 남아 있던 그 이유를 한 번도 엄마는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뇌수술 후 허약해진 아버지나 평소 영양가 있는 간식 하나 챙기지 못하는 우리 4남매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영운동 골목골목을 스며들던 그 튀김 냄새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냄새였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서부터 시작되는 튀김냄새는 튀김 솥이 있는 홀 안의 작은 내 방안에선 늘 고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늘 튀김냄새에 절어 있었다. 튀김냄새를 먹고 튀김냄새를 덮고 자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남겨 놓은 그 핫도그를 반갑게 먹을 수 없었다. 언제나 다섯 개의 핫도그 중 꼭 한 개가 남았다. 나의 핫도그였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종일 핫도그를 튀겨 낸 엄마야말로 튀김 냄새에 절어 있었을 텐데, 아니 핫도그 자체가 되어 있었을 엄마에 대한 생각을 그 때 나는 미처 할 수 없었다. 오직 내가 맡는 나의 튀김냄새가 싫었을 뿐이다. 나는 그 튀김기름 냄새가 싫어서 무심천 둑길에 가끔 쫓아나가 울부짖곤 했다. 늘 무심천을 건너고 싶었다. 삶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지니고 있는 듯한 그 무심천 둑길을 헤매다가 밤늦어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무심천은 언제나 변함없이 무심히도 흘렀다. 그 무심천 둑을 따라 걷다 보면 다슬기 해장국, 뼈다귀 해장국, 해장국집이 늘어서 있고 그 어디 쯤 골목길 안에 야간학교가 있었다. ‘심지자활학교’ 그 이후 야간학교 장소는 몇 번 옮겼지만 그곳은 나의 시끄러운 가슴을 열었던 곳이다. 연일 최루가스 날리던 대학생 데모 대열 대신 분필가루 날리는 어두운 교실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 때 내가 맡았던 핫도그 튀김냄새 때문인지 몰랐다. 삶은 목소리의 투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절절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늙은 학생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엄연히 선생이었다. 대학교 강의를 듣고 대학신문사 기자로서 기사를 쓰고 그리고 야간학교 교사로 서는 것, 그것이 그 시절 나의 삶이었다. 튀김냄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럴수록 그 튀김냄새를 더 맡아야만 하는 삶의 원리를 깨우치느라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영운동 시절이었다. 밤늦어 자정을 넘겨 돌아오는 둑길에서 비로소 잠시 숨을 쉬는 자유로움을 느꼈던 곳. 어느 날엔가, 그날도 똑같이 자정을 넘겨 들어왔을 때, 엄마와 아버지가 내 종아리에 회초리를 치셨다. 밤늦은 둑길을 그만 다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예’라고 하지 못했다. 평소 늘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만큼 갖게 되는 것이라는 엄마 아빠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말대꾸를 했지만 사실은 그날 밤새도록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엄마 아버지의 번갈아 치는 회초리 앞에 차라리 속이 시원했던 기억이다. 어쩌면 엄마도 아버지도 나도 그 당시 삶의 튀김 냄새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회초리를 대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함께 그 회초리에 기댔는지 모른다. 새벽종이 울리고 엄마는 회초리를 던지고 교회로 달려가고 나는 숨도 못 쉬겠는 내 작은 방에 엎드려 그렇게 실컷 울었던 그 때의 기억이 장마철 곰팡이 피어나듯 스멀스멀 살아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퉁퉁 부은 종아리를 잘 내려가지 않는 청바지 속에 간신히 숨기고 나는 여전히 무심천 둑을 향했다. 천천히 야간학교 계단을 걸어 나왔을 때. 가로등 밑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버지, 뇌수술 후 이제 겨우 다 자라 난 아버지 머리칼이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아버지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말없이 내미는 짐받이 자전거에 몸을 실었던 그 달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뿌리 깊은 슬픔의 끝에서 피어나는 아버지의 등이 등나무처럼 푸르다는 것을 그 때만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아버지 짐받이 자전거와 함께 무심천 그 둑길을 밤마다 달렸다.
이제는 그 무심천도, 예전의 그 길이 아니고, 그리고 영운동 작은 집도 헐려서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눈만 감으면 영운동 그 집의 핫도그 튀김냄새를 맡는다. 그 튀김냄새 속의 나의 대학생활과, 야간자활학교 아이들을 지켜주었던 아버지의 짐받이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무심천 바람 속을 가르는. 그리고 눈앞에 맴도는 핫도그 하나. 그 튀김 그릇 위에 언제나 덩그러이 남아 있던 그 때 나의 핫도그를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