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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릴리(상층부)조상들이 풍요를 누렸던 "북이스라엘",
2. 허나 <로마제국의 압제>, <헤롯왕가의 수탈>에 그리고 <유대성전으로 부터 착취>행위로 말미암아 "갈릴리는 가난한 이들의 소외된 지역"으로 "주인의식"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3. 그리하여 말하자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정치, 경제, 종교로 부터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지요. 그들을 "갈릴리 민중들(오클로스: ὄχλος)" 이라고 불렀습니다.
4. 그래서 오클로스, 그들에게 삶에 용기를 심어주려 (톨스토이도 반복했던) <마음의 평화>를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5.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는 의미를 찾으려 한것이, 민중신학(안병무, 서남동, 다가와 겐죠 등)이라고 봅니다.
6. 카톨릭 중심국가가 아닌, 한국땅에서는 해방신학 보다는 <민중신학>의 변화와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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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民衆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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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및 특성
(1) 1970년대 한국에서 시작된 신학 해석의 한 갈래.
(2) 복음의 민중적 성격을 들어 ‘민중’이라는 용어를 처음 신학해석의 핵심틀로 사용한다.
(3) 영적 구원보다는 민중(오클로스: ὄχλος)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억압"으로 부터의 구원(해방, 자유, 평화)이라는 주제가 핵심인 신학이다.
(4) 기독교의 민중사(民衆史: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의 예수운동)에 한국민중사를 신학에 합류시킨 신학사조이다.
(5) 기존신학과 민중신학을 구분지을 수 있는 문장은 "예수는 민중이다." 가 아닌 "민중이 예수다."라 할 수 있다.
2. 발생
(1) 특이하게도 민중신학은 한국에서 시작된 신학사조이다.
공식적인 용어의 사용은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후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신학인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한국적 상황신학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2) 그러나 실제 민중신학의 시작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시작된 1960년대에 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다만 이렇게 따지면 함석헌의 씨알에서부터 태동되었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역사와 구원의 주체인 "민중"이 고려된 것은 아니었지만 개발독재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된 민중의 고난 현실과 그들의 저항에 접한 신학적, 신앙적 반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까닭이다.
(3) 뒤이어서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의 충격과 연이어 시작된 유신체제는 구체적으로 민중신학이 발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정확히는 1975년에 발표된 안병무의 글 민족·민중·교회를 본격적인 민중신학의 태동으로 보기도 한다.
3.의의와 한계 - 리브레위키
(의의)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가 민중에 무관심한 부분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될 여지가 있으며,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상황신학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한국 주류신학의 한계점을 보완할 수 있고, 초대교회의 공동체 정신과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한 실천적인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 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계)
(1) 그러나 비판점 역시 존재하는데 우선 보수 신학적인 측면에서 "예수와 초대교회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까딱하면 성서로부터 뚜렷하게 벗어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정치화 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2) 또 한 가지 비판 포인트는 민중신학에서는 대체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로 쏠린 해결 방안이 나오는데 이쯤되면 이게 종교인지 정치운동인지 헷갈릴 수 있다는 것이다. 1세대 민중신학에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2세대 민중신학은 기독교 세계관을 차용한 유물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근데 초기 기독교의 모습에 신이라는 개념만 빼버리면 딱 나오는 사회주의 사회인지라 .....)
(3) 또한 출애굽 사건과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이집트를 탈출한 하비루(3D 업종에 종사하는 떠돌이 이주노동자)들과 가나안 땅에서 착취당하던 소작농들이 연대하여 지배계급을 박살내고 생산 수단을 차지한 계급투쟁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다만 민중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민중과 신의 위치가 뒤바뀌어서 종교혼합주의나 종교 다원주의같은 모습이 나오는데 이러면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도 존재한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너무 나갈 경우 기독교 타이틀을 떼야 할 수도 있다)
(4) 또한 민중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민중은 무조건 옳다는 잘못된 개념에 빠질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의 문제와 맞딱뜨릴 때 실제 현장과의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서남동목사의 경우 한국민중의 삶이 실제적 텍스트이고 성서를 컨텍스트로 이해해야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보수 기독교계에선 기겁을 할 일이다.
(5) 사실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대한민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신학사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고장에서는 철저하게 비주류 신학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뭐... 영향력이 있어야 뭘 하던지 말던지 하지... 이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 신학 및 교회 지도자들이 해방 직후 미군정 및 권력층과 결탁하면서 이들의 행태가 권력층에 가까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나타나는 상황이고 교회가 권력과 유착하면서 이러한 구도를 깨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 할 수 있다.
1970년대 안병무(왼쪽)와 서남동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민중신학적 이론의 토대를 구축했다.
몰트만 교수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이들의 활동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4. 하지만, 민중신학이 정치적으로만 기울었던 것은 군사독재정권이라는 당시, 정치적상황으로 인해 정치적인 면이 부각되었을 뿐이다. “민중신학은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요, 신학적인 귀결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들의 탄압 밑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민중과의 만남과, 그들의 고난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한 결과가 민중신학을 낳았다.” 먼저 올린 글에서도 말했듯이, 부패한 종교와 함께하는 제국주의에 희생되는 사람들(오클로스ὄχλος)에게, 정치적 세력들의 억압은 물론, 경제적 세력들의 수탈, (니코스 카잔자키스도 원했던) 종교적 세력들의 지배와 억압 .... 그것들로 부터의 출애굽, EXODUS(해방, 자유, 평화...)를 리드하는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民衆神學)인 것이다. (JK).
일제시대의 조선
민중의 삶은 예수시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갈릴래아) 지역을 떠돌던 유대민족의 삶과 흡사했을 것이다. 갈릴리는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비천한 땅이었다. 그곳에 살던 주민은 농노와 소작인, 소농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예수의 갈릴리 선교는 곧 민중 선교의
성격이 짙었다.(‘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0)
“민중신학이
탄생한 것은 물론 유신체제하에서였고, 민중신학을 말하려고 하면 유신체제하에서의 한국 민중의 상황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민중에 대한 가슴에 사무친 생각은 일제시대로, 저 간도에서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중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은
그러한 뿌리를 가진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신학적으로 개화한 것이라고나 할까요?”(‘민중신학을
말한다’)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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