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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高等學校山岳部에 OB산행은 지금까지 몇번 있었어도 OB-YB 합동산행은 없었다. 지난 추석에 나를 찾아온 경주고산악부 OB들은 이번 가을에 경주고OB-YB 합동산행을 한번 하자고 결의했고 그 제반 업무를 3기 김규환(경주 삼성증권 근무)이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2010.10.31일 드디어 경주 남산에서 경주고산악부 OB-YB들이 모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OB들은 여러 사정으로 많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시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OB들은 2기 고현무(경주 중앙농약종묘사 대표), 3기 김규환(경주 삼성증권 근무), 3기 김상길(대구 메리츠증권 근무)이 왔고 재학생인 YB는 1, 2학년인 14, 15기가 모였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지역의 명문고의 서클에 산악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내가 바로 경주고산악부를 창설한 지가 어느듯 15년이 흐른 것이다.
선후배 상견례에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들을 했고, 이어 최고참인 2기 고현무 선배가 격려금을 14기 회장인 권기원(경주고 2학년)군에게 전달하고는 화기애애한 산행를 시작한다.
시작은 우리들의 산악활동의 모태인 경주의 남산에서 시작하지만, 여느때처럼 호락호락한 코스를 택한 것은 아니다. 내가 수년전 만들었던 경주남산 황금종주를 하기로 한다. 모두 7시간이 걸리는 쉽지 않은 코스이다. 황금종주? 내가 붙인 말이다. 말 그대로 경주 남산의 비경지대를 모두 꿰차고 나오겠다는 얘기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경주 남산하면 삼릉으로 금오산을 오르고 용장골로 고위산을 오르고, 아니면 기껏해야 동남산인 통일전으로 해서 칠불암 오르는 것이 남산 등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작은 우리 경주의 남산에도 비경지대는 있다. 그것을 한 코스에 모두 돌고 나오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일인가? 우리 산악부원들이 모두 경주사람들이지만 아마 분명히 놀랄 것이다. 남산에도 이런 곳들이 있었나 하고................
산행에 앞서 통일전 서출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우측에 있는 친구들이 OB멤버들이다. 우측 뒷줄 검은상의가 고현무, 앞줄 앉아있는 노란상의가 김규환, 그 옆에 세줄상의가 김상길군이다. 나는 맨 왼쪽에 서 있다. 나도 늙었네.
우선 칠불암 방향으로 나아간다. 칠불암으로 가려면 남산동 주택가를 지나야 한다. 남산동 주택지는 유적보호지역이라 전통 한옥식가옥 외에는 건축 허가가 안 난다. 쾌적한 환경지역이라 땅값이 매우 비싼데, 울산의 부유층이 많은 지역을 점유해 별장처럼 주택을 지은 곳들이 많다.
칠불암으로 가다보면 과수원이 포함된 목장이 나오고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좌측능선으로 붙어 올라가는 소길이 나온다. 이리로 오르면 칠불암계곡 동편능선인, 이른바 바람능선이다. 물론 바람능선은 내가 붙인 이름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 암석신앙(巖石信仰)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의 유물, 유적이 발굴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蘿井:사적 245), 신라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유적, 서쪽 기슭의 포석정지(鮑石亭址:사적 1),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랑 김유신의 효와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사적 340)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바람능선! 바람골 위에 있는 능선이라고 내가 지은 이름인데 남산의 비경 능선 중 으뜸이다. 정상 등반로는 아니지만 내가 매우 좋아하는 능선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길에다 전망이 확 트여 등반 시 기분이 상쾌한 코스이다.
바람능선을 조금 오르다 뒤를 돌아다 보니 남산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남산동에는 통일전과 서출지, 화랑교육원, 수목원 등이 있는데 경주에서는 매우 귀한 땅이다. 남산임씨라고 불리우는 임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혼자서 낭떠러지에 걸터 앉아있는 김판수군을 사진에 담아본다. 수업시간에 늘 졸린 듯한 눈으로 수업을 경청하는 김군은 착실하고 정이 많이 가는 학생이다.
바위가 있는 경관 바로 밑에 유명한 암자인 칠불암이 보인다. 국보인 어마어마한 불상군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 저곳이다. 저 크게 보이는 바위에 마애여래좌상들이 새겨져 있다.
바람능선 상부에 깔려있는 바위지대. 조금 더 올라가면 바람재가 나온다.
되돌아 보니 우리가 방금 지나온 바람능선의 전경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바람재, 봉화대, 백운재로 간다.
바람재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봉화대. 이곳도 고위산과 높이가 비슷한 산정이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최근에 석굴암 불상에 버금가는 국보급의 대형 부처상이 발견된 열암곡 석불좌상 지대이다.
저 앞에 남산 최고봉인 고위산(494m)이 나타나고................
커다란 바위위에 view piont가 있어 올라간다. 어? 한넘은 미끄러지고 있네. 앞 좌측은 김유신이다. 신라장군과 동명인데 구미 옥계중에서 경주까지 공부하러온 유학파다. 경주고는 경북 전체에서 우수학생들이 몰려오는 명문학교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서 담소하는 OB들. 마냥 어리게 봤던 얘들도 이제 어린 아이들이 아니다. 벌써 사장이고 중견 증권회사 금융맨들이다. 2기 고현무는 아버지가 닦아 놓은 경주 굴지의 농약종묘회사를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고(그 아버지는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아들을 일찌감치 건국대 축산과를 다니게 하고 외국계 농약회사에 근무케 했다.) 김규환, 김상길은 삼성과 메리츠증권에 다니는 금융맨들이다.
바람재 지나오면서 우측 아래를 보니 칠불암이 나타난다. 모든 절들이 그렇지만 칠불암도 절묘한 곳에 위치해 있다.
가을산을 지나가는 경주고산악부 대원들.
백운재에서 조금 내려서면 나오는 산정호수는 고위산 정상 바로 밑에 있다. 예전에 귀머거리못으로 불리웠다. 지금하고 다르게 물이 많았을 때 귀머거리 처녀가 빠져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가 물에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주산지를 연상시킨다.
산정호수에서 용장골로 내려가는 길중에 이런 산죽지대가 있다. 여기 말로 신허대라고 하던가? 예전에 저걸로 비짜루 만들어 쓰곤 했는데................
가을이다. 어쩌면 가을은 산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가을날>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가을산을 지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가을은 더 진하게 물들어 간다.
가을 숲길
용장곡의 설잠교에서 기념촬영하는 경주고산악부
이 용장곡과 관계가 깊은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서 말해볼까?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다. 또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이며, 유명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한시를 척척 지어내고 경전을 외워댔다하여 총애를 받고 '5세신동'이란 글을 받았다고 한다.(그래서 그가 그 뒤에 오래 머물렀던 설악산 오세암은 그 별명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 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지금의 용장사 부근)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전국에 김시습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지만 우리 경주도 남산의 이 용장골에서 늘 김시습의 흔적을 더듬는다.
이제 용장곡에서 고위산을 버리고 금오산으로 오른다. 용장곡에서 용장사지로 올라가면서 맞은 편 산인 고위산 정상 부근을 올려다 본다.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신입생 신고식도 받고.............노래하는 신입회원 김기홍군. 그는 일본 수학여행 시 선상 노래자랑에서 수상한 귀염둥이다.
다시 용장사지로 영차, 영차! 비둘기 고지의 10용사!
이제 고위산이 점점 멀어진다.
우리 바로 위에 용장사지 3층석탑이 보이고............
요런 바위코스도 있고............
드디어 용장사지에 올라왔다. 매월당 김시습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는 용장사(茸長寺)이다. 이곳에는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용장사지의 위치는 절묘하기 그지없다. 절벽인데도 그 암반의 터가 견고하여 좁지만 그 위에 사찰이 선 것같다.
용장사지에는 보물 제 187호인 용장사지 석불좌상이 있다. 이 석불좌상은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으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이 석불은 특이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주며, 『삼국유사』 에서 보이는 유명한 승려 대현(大賢)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이다. 대현의 활동 기간에 제작되었다고 보아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장사지의 석불좌상 바로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이 역시 보물 913호로 지정되어져 있는데 높이가 156cm에 달한다. 바위에 새긴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이중의 두신광을 구비하고 나발(螺髮)에 육계(肉髻)를 갖추고 있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각 부분이 정제되어 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있어, 목의 삼도와 잘 조화되어 존엄하면서도 인자한 인상이다.
법의는 통견, 왼쪽 어깨로부터 앞으로 흘러내린 옷무늬 등은 매우 유려하다. 전체적으로 여래상의 어깨가 당당하고, 무릎을 널직하게 처리하여 안정감이 있다. 양식과 조상 수법이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분명치 않아 판독하기 어려우나 신광 좌측면에 3줄로 된 10여 자의 명문(銘文)이 있어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우리는 이 여래좌상 앞을 지나 우측으로 바위를 타고 위로 오른다.
용장사지 바로 위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보물 186호이다.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자연암석을 바윗돌과 아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바로 윗층 기단이 올려져 있다. 즉, 자연암석이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대단한 모습이다. 어쩌면 위에서 말한대로 절터 전체가 바위산 전체를 기초로 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쓰러져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는데 사리장치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였던 바와 같이 절묘한 위치에 위치해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용장사지에서 내려다본 용장골. 용장골에서 좌상으로 다시 파여져 들어간 골짜기가 유명한 은적골로 김시습이 이 골짜기에 은적하여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은적골은 뱀이 많기로 소문이 나 예전에는 근접도 못했다는데............얼마 전 <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책을 쓴 이문구씨가 이 은적골을 답사하다가 뱀이 많아 후퇴했다는데 과연 정말일까? 하고 웃고 말았는데, 요즘 보면 그게 아니다. 용장골에 올 때마다 뱀을 본다. 심지어 등산로에도 뱀이 지나가곤 한다. 반가운 일이다. 남산의 생태계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말이니까............
용장사지를 올라서면 남산 순환도로가 나온다. 누가 말했다. "경주 개발에서 최악의 실수가 남산에 순환도로를 낸 것이고, 최선의 업적이 남산 순환도로를 포장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흔히 전망대라고 불리우는 금오정이다. 어떤 이는 팔각정이라고 하는데 아니다. 팔각정은 여기 오기 전에 우측으로 부석골로 내려가는 길 초입의 봉우리에 있다. 지금은 정자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금오정에서 서쪽 사면으로 바라다 보면 늠비봉의 대형 석탑이 겨우 보인다. 우리는 저곳으로 길을 찾아 내려갈 것이다. 보시다시피 저 늠비봉은 남산 최고의 명당자리이다. 오대산과 비슷하게 산줄기가 3면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한 가운데에 낮은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세이다. 터진 한쪽은 경주 분지를 내다보고 있고 물은 그리로 흘러간다. 과연 명당자리다.
늠비봉이다. 예전에 흩어져 있는 석탑 조각들을 모아 붙이고 없는 부분은 만들어 끼웠다. 이 곳은 금오정 좌측 내림길로 줄곧 내려오면 부흥사 바로 옆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앞서 말했지만 이 늠비봉의 위치는 기가 막히는 명당자리이다. 주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한가운데에 이 봉우리가 솟아있다. 꼭 오대산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봉에 둘러싸인 중대봉 아래에 있는 땅인 적멸보궁 자리같다.
이곳은 사방이 탁 트여서 마음이 편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오면 무척이나 아름답겠다. 이 밑의 골짜기가 부흥골인데 사방에 유적들이 흩어져 있어 말 그대로 남산의 노천 박물관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곳이다.
여전히 돌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여전히 개발중인 곳이다. 중요한 곳에 알박기 무덤도 하나 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밀어버리겠지.
늠비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부흥사의 요사체. 서남산에서는 가장 유명한 현존하는 사찰이다. 예전에는 고시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부흥골 암반에 자리를 편 1학년들. 내가 가져간 오겹살도 지글지글 맛을 낸다.
여기는 2학년들
OB들
편장군 묘터의 소나무들
그리고 남산 순환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포석정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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