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사진전을 보려 사전 정보없이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서대문으로 향했고, 갤러리 입구에 도착해서야 전시회 타이틀이 ‘더미’라는 것을 알았다.
더미? dummy?, the me? 더미라...
전시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며, 머리 속에선 ‘더미’와 연결되는 의미를 골라 내느라 잠깐 동안 뇌세포의 숨을 고른다. 헝클어진 뇌신경 다발을 정리하면서 차분히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새로 나온 영어단어 같기도, the me 같기도하다. 헷갈리다가 결국 리프렛의 사진을 훔쳐 본 후에 우리말 ‘쓰레기 더미’의 그 ‘더미’와 연결 짓는다.
그리곤 전시장을 돌며 ‘더미’를 영어로만 이해 하려했던 이유를 한참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영어권 나라는 아직 구경도 못 해본 나 이지만, 나의 뇌세포는 애처롭게도 우리 말보다 영어를 우선해서 연결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는 한물 간 레파토리 같지만, 문화 제국주의와 신 식민지화를 실감한다. 언제부터 내가 그들의 코드에 마추려고 노력 하도록 훈련 되고, 학습 되었는지? 참! 뒷통수를 얻어 맞는 기분이다.
이렇게 사진전 ‘더미’는 그 제목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무의식에 침잠해 버린 미국(어) 중심의 질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론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데...
미국과 세계 질서의 함수관계를 따지느라 복잡해진 머리는 전시장 입구에 첫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내 눈을 잡아둔 한 장의 사진- 사실 사진이라기 보단 벽화 수준의 거대한 작품에서 다시 한번 뒷통수 얻어 맞았다. 멍했다.
전에도 그런 류의 쓰레기 처리방식을 매스컴에서 보아 알고 있었지만, 거의 실물 크기만 하게 확대 해 놓은 쓰레기 더미 사진은, 그것들이 바로 내 앞에 진짜로 서 있는 듯 했다.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용도 폐기되어 멋대로 버려진 쓰레기들을 오징어처럼 누르고 펴서 켜켜이 쌓고, 반듯 반듯하게 포개고 묶어, 정사각형의 말끔한 육면체로 만들어 놓았다. 찌그러지고 형편없이 흩어진 모습의 쓰레기가 정형화되고 조형적 모습으로 변신 한 것이다. 미적인 감각도 느껴진다. 유형학적 사진같이..
그것들은 마치 자신들이 태어났던 공장을 추억하면서 다음 생에서는 좀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모습으로 환생하는 꿈을꾸며 윤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에 한 발짝 다가가 보면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부추키는 자본주의 탐욕스런 단면이 보인다. 그냥 그대로 모습처럼 썩고 냄새 나는 현대 대량 소비사회의 구정물일 뿐이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는 백조로의 화려한 변신을 꿈꾸며 재활용을 기다리는 미운오리 더미가 아니라, 대량소비를 미덕으로 가르치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의 납골당처럼 보인다. 과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쓰레기를 처리해야 했는지? ‘더미‘전을 보면서 재활용이란 善에 앞서, 낭비라 해야 맞을 대량소비의 惡이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쓰레기 더미 앞에서, 재활용 보다 앞서 생각해야 할 또 다른 무언가, 즉 스스로 소비를 통제할 자정기능이 살아있는 자제력있는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더미’의 이미지는 ‘오래된 미래‘의 ’라닥‘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존재한다.
인도의 북부 오지 라닥 사람은 너무도 가난하다. 특별나게 요란한 재활용 개념이 없어도 지속 가능하고 완벽한 리사이클링 시스템이 구동 되는 사회가 라닥이다. 반면 경제활동의 최종목표가 물질과 소비인 우리 사회의 면면을 ‘더미‘전에서 본다.
우리는 행복이, 소비하는 물질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육받지 못했다. 댐을 짓고, 공장을 세우고, 수출을 많이 하는 것이 가난에서 탈출하는 길이며 선진조국 창달을 위해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라 배웠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높이려 노력하기보다, 물질을 소비하므로 존재를 과시하려는 이상한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 최면에 걸려 살았던 시기가 계속돼 온 사회이다.
거대한 쓰레기 앞에 서서 물질 만능 대량 소비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생각한다. 지금이 그 어느때 보다 퐁요롭고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사회 공동체의 신뢰도는 바닥이다. 마음은 항상 불안 하고, 여유가 없다, 사람들은 마음의 허무를 느낄 새도 없이 항상 바쁘다. 그런 정신적 허기를 보상 받으려는듯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먹고, 하고, 이것 저것 사들인다, 그리고 더 많이 싸고, 더 많이 버린다. 허리 둘레에 비례해 혈당과 간수치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뭔가 잘못 돼 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지만 뒤돌아 볼 생각도 할 수 없다.
사진속 ‘더미’들이 바로 우아한 재생을 꿈꾸며 윤회를 기다리는 우리의 숨겨진 자화상이 아닌지 반문해본다.
오징어 같이 눌려진 깡통들의 무덤에서. 켜켜이 쌓인 파지 납골당에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란 자본주의의 달콤한 허구가 느껴진다.
높다랗게 쌓은 정육면체 쓰레기 덩어리가 뉴욕의 마천루로 보이는 것은 내눈의 스펙트럼이 유난스런 탓 만은 아니리라. 뉴욕이 어떤 곳인가? 월스트리트가 있고, 월드트레이드쎈터가 있던곳(비록 911 테러로 지금은 없어 졌지만), 전세계 자본주의의 메카... 마천루와 포개놓은 정육면체 쓰레기 더미는 자본주의와 물질 위주의 사회, 대량 소비가 미덕이 된 사회의 상징적 단편이란 면에서 내용적으로 같다.
단지 차이라면, 신기루 같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양지를 화려하게 잘 포장 하여 놓은 것들이 마천루의 늘씬한 빌딩들이고, 그것의 음지로서 무한 소비에서 용도 폐기된 하수도 속 구정물 같은 것이 쓰레기 더미란 차이일 뿐이다.
형태는 다르나, 뉴욕의 화려함과 한국 쓰레기 더미의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쓰레기 더미가 대량소비 시대의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난 이경애 사진전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하수구를 들여다 보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이경애 선생의 작품들이 또 다르게 해석될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전시회를 보신 다른분들도 글을 좀 올려 주세요!!!
설득력 있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글을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