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서 - 奴婢文書]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 중에 진품명품이라는 시사교양 프로가 있다. 전언에 의하면 어느 출연자가 자신의 집에 소장 중인 가보라며 고문서를 제출하였는데, 판정단에 의하여 ‘노비 문서’로 밝혀졌다는 설이 있다. 나는 이 방송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만약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노비 문서라기보다는 ‘노비매매 입안(立案)’이나 ‘노비매매 명문(明文)’이었을 것이다.
노비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문서를 소장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출연자는 자신의 조상이 노비인 것이 아니라, 노비를 매득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매매문서를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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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매매 명문’은 노비를 매매하면서 이를 증빙하기 위해 작성한 문기이다. 노비매매도 토지매매와 마찬가지로 관에 신고하여 ‘입안’(立案-공증)을 받아야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입안을 받지 않고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지매매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입안 절차를 준수하였는데 그것은 노비들의 도망과 출산 및 사망 등으로 변동이 심해서 입안을 받아두어야만 후일 소유를 증빙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업자료로 쓰였던 사진–1은 1766년에 노비 덕산(德山)이 상전 댁의 노비를 도산서원에 매매한다는 노비매매문기이다.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건륭 31년 병술년 정월 6일에 도산서원의 수노(首奴)에게 주는 명문
위 명문은 나의 상전댁 노비 금녀(金女)와 금녀가 세 번째로 낳은 안암(安岩)이를 가격 12냥을 받고 후소생과 함께 본원의 수노에게 영구히 방매하는 일이다. 뒷날 만일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보고하여 바로 잡을 일이다.
노비주의 사노 덕산 (좌수)
증인 금(琴) (서압)
필집 이(李) (서압)
이 문서는 1766년(영조 42) 1월 6일 덕산이 상전댁의 노비를 도산서원에 매매한다는 ‘노비매매문기’이다. 매매하는 노비는 금녀와 금녀가 세 번째로 낳은 안암이다. 금녀의 나이는 55살이다. 두 노비의 값은 12냥이고 도산서원의 수노에게 매매하는데 나중에 태어나는 소생도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나중에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따지면 될 것이라 하였다.
노비매매의 경우 매매한 노비가 나중에 자식을 생산했을 때 소유권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노비매매 문서에는 나중에 태어난 소생도 모두 함께 방매한다는 구절이 반드시 들어있다. 노비의 주인은 사노비 덕산으로 되어 있는데 덕산은 상전을 대신해서 매매한 것이다. 덕산임을 증명하기 위해 왼손 마디를 그려 넣었다. 증인은 금씨이고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이씨이다. 둘 다 서압(署押)을 하였다.
서압은 요즘 말로 사인이라 할 수 있는데, 수결(手決), 수결(手訣), 수압(手押), 화압(花押), 서결(署決), 수례(手例), 서명(署名), 착함(着銜), 서함(署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명문(明文)’은 전답을 비롯한 가옥, 노비 등의 매매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고문서 명칭이 아닌데 관례적으로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도량(導良)은 이두로서 ‘그것에 따라서’라는 뜻이다. 가절(價折)은 값으로 매긴다는 뜻이다.
사진-2는 ‘자매문기(自賣文記)’이다. 조선 후기에 거듭된 흉년으로 살길이 막연해진 평민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과 처자를 노비로 팔았는데, 이때 작성하는 문서를 자매문기라 하였다. 숙식만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돈도 받지 않고 노비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진-2는 융희(隆熙) 4년(1910)에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의 류승지댁으로 김순천(金順千)이 작성한 자매명문이다.
유승지 댁의 노비였던 자신을 정유년에 방매하여 황지에 있는 부항의 산에 들어가 살았는데, 가세가 몰락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노비로 다시 받아서 사용해 먹도록 청하였다. 이에 전문(錢文) 100냥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문서를 작성하고 후일의 증거로 삼는다고 하였다. 실제로 자신의 몸을 파는 명문이다.
증인은 김덕진(金德鎭)이고 필집(筆執)은 유만길(柳萬吉)이다. 김순천(金順千)의 이름 밑에 수형(手形)을 그렸다.
고문서 관련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는 존엄성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한낱 재산으로 치부되는 생명이 있는 물질에 불과한 존재였다. 유산을 나누는 ‘분재기(分財記)’에는 노비를 가족 단위로 형제들에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격 단위에 맞추어 한 가족을 뿔뿔이 흩어놓는 야만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하기도 한다.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양반 사대부들의 비인격적 이중성에 때로 치가 떨리기도 한다.
고문서는 후대의 기록자에 의하여 편집되거나 가필되지 않은 1차의 원사료이다. 당시의 사회 문화와 풍습 등의 실제상황을 생생히 엿볼 수 있는 매우 귀한 고증 자료이지만 고통스럽고 참혹한 기록이 너무 많다. 고문서를 통하여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배우는 사람치고 울화병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고사하고, 바르게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霞田 拜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