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히브리서 11: 17 - 19
제목: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일시: 2009. 6. 7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가끔은 무지해 보이기도 하고 무지해 보일 정도로 밀어붙이는 사람을 보면 내가 믿음이 없나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여간해서 병원을 가지 않고 기도로 낫겠다는 한 형제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저러다 병을 키우지 않나 싶다. 믿음이라고 하지만 너무 무모하게 일을 밀어붙이지 않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가끔은 내가 믿음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믿음이 있으면 이성적이지 못한가? 이성적인 사람은 믿음을 갖기 어려운가? 종종 믿음과 이성은 대치되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이성으로 하면 믿음이 없다고 하고 믿음으로 하면 이성 없이 무지하다고 하고 말이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의 사람이었는가 막 밀어붙이는 무식한 사람이었는가?
II. 믿음의 사람들은 “알 것 다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을 보라.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시험출제 내용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출제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를 알고 싶으셨던 것이다. 자, 그러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아들을 막 바친 무지한 노인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고민했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했다.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제사의 과정을 알고 있었다. 각을 뜨고 피를 뿌리고 태워 드려야 함을 알고 있었다. 반면 이삭이 약속의 아들임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하시는가 출제자의 의도도 생각했을 것이다. 수많은 생각 속에서 그는 머리를 감싸고 이해할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고민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고민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시험”을 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이 있은데 고민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원래 시험은 고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아브라함을 마취시켜 놓고 고민도 못하게 해 놓고 아들을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아들 이삭을 드릴 때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면 이삭을 바치는 것이 무슨 어려운 시험이 될 수 있겠는가! 바치라고 하면 쑥쑥 바치는 일이면 말이다. 그는 테스트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도 시험이 있었고 다음주도 시험이 계속된다. 우리는 건강의 시험도 있게 된다. 삶의 시험들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 그 시험들은 다 어렵다. 이성적으로 너무 어렵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느꼈다. 그러기에 그는 이성으로 바치기 어려운 것이기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고 한 것이다. 무지한 사람은 고민하지 아니한다. 아는 사람은 고민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는 그 일에 있어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무지하지 않고 다 알고 있었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는데, 아벨, 에녹, 노아 사라, 모세 등등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거론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것은 “알았다” 라는 것이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었다. 알고 있기에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하기에 시험이 되는 것이고 그런 시험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이 고귀한 것이다. 이성적이 아니라면 고민도 없을 것이고 고민이 없는 결단은 고귀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 아는 믿음을 가지라. 이성적인 믿음을 가지라. 그리스도인들은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알고 손해 봐야 한다. 억울한 일도 당할 수 있다.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그게 내게 오는 시험으로 알고, 알고 당해주고 손해 보는 것이다. 죽을 줄 알고도 뛰어드는 것이다. 주님도 잡히실 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사도바울도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이번 예루살렘여행이 안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간 것이다. 선교사들을 보라. 고난을 당하는 줄 알면서 선교사로 나간다.
III. 믿음은 초이성적이다
그런데 이성은 왜 우리 신앙에 있어 경계의 대상이 되고 밉상을 받기까지 하는가? 이성은 자신을 만족하게 다 이해시켜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성으로는 이해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너 수고했다 거기까지야!” 우리가 착각도 잘하고 실수도 잘하며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안다면 이성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 머리로 이해 안 되는 것은 이해 안 되는 것이다. 이해 안 되는데 이해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무지한 것이다.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 안 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적이 이해되지 아니한다. 어떻게 사람이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를 강요받는다. 물위로 걷는 것을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이성적이다. 우리가 만일 물위로 걷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물 위로 걷는 것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성을 초월하고 그 너머에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로는 수용 못해도 믿음으로는 수용할 수 있다. 이성이 이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래 애썼다. 이해 안 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니... 괜찮아” 하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 이성은 할 일을 다 했으면 이제 잠잠히 있어야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끝까지 나 이성을 만족시켜달라고 하니 믿음의 경계를 받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이성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 조금은 시원하게 해 주는 것 같아도 믿음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성적으로 시원하게 해 준 다음에야 믿는다는 것이다. 5병2어의 표적은?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냐? 머리로 이해하게 한다. 아이가 자기의 도시락을 가지고 오니 어른들이 부끄럽고 감동해서 먹을 것을 내왔다나?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서늘한 동굴에 넣어서 그랬다나? 이성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제 신앙에 그 과제물을 토스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신앙이다.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이성으로 풀 수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이 과제를 믿음으로 푼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초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과 설명과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이성을 넘어 믿음에 이른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시험지를 받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슬픔과 고통의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먼저 우리의 감정이 말을 할 것이다. 좋다 나쁘다 즐겁다 슬프다 등... 그러나 우리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 감정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답을 그렇게 감정에 따라, “하나님 미워”식으로 쓰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으로 고민했다. 감정의 단계에서 이성의 단계로 가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리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양과 소를 드리던 번제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 이삭을 어떻게 주셨던가?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도 기억했을 것이다. 다메섹 엘리에셀도 아니고 이스마엘도 아니고. 줬다 뺏을 것은 무엇인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선에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성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게 되면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판단하게 된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 신앙의 결단으로 하는 것이다.
예)사람들이 목사에게 어떠한 일을 가지고 상담을 하러 온다. 목사가 해 줄 말이 무엇이 있는가? 기도하자는 것이다. 말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말들이다. 무슨 말을 기대하는가? 사업이 어렵게 되었다면 주식에 대한 이야기와 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가? 입시에 관련되어 있다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가정의 어려움이 있어 상담을 하자고 한다. 그러면 무슨 지혜가 필요한가? 혹자는 내 그럴 줄 알았지 목사님이야 언제나 그러한 대답이지. 최종적인 답변은 “믿음으로” 이다. 믿음은 지극히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성보다 수준이 높은 것이다. 믿음은 이성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고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비이성적인 모습이 아니고 이성적이다 못해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믿음에 이성의 단계가 없이 가면 신비주의가 될 수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구름위에 걷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이성을 지나쳐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예) 율법을 지나서 은혜에 이르는 것과 같다. 율법 없이 은혜에 이른 사람은 은혜를 자세히 모른다. 처벌과 죽음과 속박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것이다.
미술생도들은 기초데생을 하고 추상화로 나가야 한다. 미술책에 미로의 그림을 보았다. 낙서가 아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낙서이지만, 그가 하니 작품이다.
오래전에 베를린 어느 교회에서 하는 음악회를 갔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계속 시끄럽게 그어댄다. 그리고 연주자 바로 앞에는 커피를 좍 뿌려 놓았다. 모니터가 여러개 설치 되어 관객이 그 모니터로 그 커피를 보고 있다. 그게 음악이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클라식을 안했을까? 다 경험 했기에 그들의 연주가 인정된다. 현대음악이라며.
아브라함은 이성을 지나서 믿음으로 나아간 것이다.
IV. 아브라함이 초이성적인 믿음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다.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자였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는데 어찌 약속하신 이가 그 말씀을 어길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것이다. 시험문제를 푸는 결정적인 실마리였다. 갈등도 많았지만, 그것이 그의 결단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브라함 부부는 믿음의 부부였다. 로마서 4장 19-22절을 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약속에 기초한다.
우리는 약속을 한다. 약속의 도장도 엄지손가락으로 찍는다. 그리고 복사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 1)우리가 무능해서 약속을 지킬 수 없기도 하고 2)우리가 간사해서 약속을 변경하기도 한다. 감정도 바뀌고 깜빡 착각한 것이 있어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미가 7장 5절에서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만한 것이다. 그분은 미쁘신 분이라고 하는데,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비록 이삭을 죽이실 것이지만,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맡겨버린 것이다.
이 약속에는 꼭 들어가야 할 것이 있다. 주권이라는 것이다. 주권이 있는 분만이 약속을 하실 수 있다. 주권이 없는 사람은 약속을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삶과 죽음에 대한 주권도 가지고 계심을 알았다. 주권 없는 사람은 약속할 수 없다. 제가 식당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여러 형제 자매들을 만났다고 가정을 해보라. “야 배고프지? 들어가지 그리고 원하는 대로 뭐든지 시켜먹어. 아 그리고 김재형 집사님 돈 내세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저는 집사님의 지갑에 대해 주권이 없다. 저는 부탁을 해야 한다. 비테 비테 하면서... 한국에서 이곳에 유학을 오기 위해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누가 내게 도움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아 아, 아무 걱정 말아요! 그거 다 태희형제가 하면 되니까”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번에 누가 오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어요? 라고 간청을 해야 한다. 제가 그분들의 시간에 대해 주권이 없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남의 것은 고사하고 내 것이라고 여긴 것을 가지고도 우리는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흔히 경험하는가?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우리 마음대로 되던가? 우리는 무엇을 하자고 결정을 했다고 하고 혹은 무엇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하거나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엄격히 우리는 결정되고 선택이 되어지는 것이다. 할 수 없어 하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이번 학기에 라이프찌히 음대가고 베를린음대 가고 쾰른음대 가지 뭐.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칼자루를 들고 있는 교수가 뽑고 싶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이번 바하 콩쿨에 입상하지 뭐. 늘 1등만 하면 좀 그러니까 이번에는 2등이나 하지 뭐.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싶은데 게반트하우스 악장하지 뭐. 우리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기업하나 세워 년 매출 100억불 만들지 뭐. 우리의 건강도 우리가 하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그래져야 하는 것이다. 단어를 외운다고 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 잊어먹는데 어찌하냐? 누구는 잊어먹고 싶어 잊어 먹냐? 공부도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왜 데에스아 아인스를 못 맞겠냐? 안되니까 그런 거지 뭐. 우리는 선택한다고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점수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여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권이 없는 존재이다. 주권이 없기에 약속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이 있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상의하신 다음에 결정하실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약속이 된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주권이 그에게 있기에 약속을 지키실 수 있다. 상황은 예측할 수 없는 안개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을 초월하신다. 한계를 넘어서신다. 약속하신 분은 미쁘시니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변수로 인해서 계획을 변경하시고 슐디궁이라고 말하시지 않으시는 분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 결코 생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뭘 믿겠는가! 그분은 약속하시고 지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V. 삶 속에서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험과 과제가 있게 된다. 내 감정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뿐 아니라 머리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있다. 내가 하기에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있다. 가장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이르러야 할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32절을 보라.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우리의 이름을 여기에 첨가시키라.
이 한주간도 입시와 졸업시험, 건강, 사업, 그리고 인생의 모든 영적전투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