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62년 6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大田대학(현 한남대학교 전신) 김정일 형제의 제안으로 1학년 7명이 모여 매주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정함. 김정일(영문과 1학년 - 현 CMI공동대표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김요한), 김정웅(성문과 - 세계한인선교사회 증경 대표회장, 현 태국선교사, 촌부리 선교원장), 김인수(성문과 1학년 - 현 장신대 역사신학교수, 대학원장), 배영일(화학과 1학년, 울산대 교수), 어광선(성문과 1학년, 침신대 졸업, 목사), 조성일(영문과 1학년, 大田중앙장로교회장로, 회사 사장), 김의배(수학과 1학년, 전 수도여고, 신광여고 교사, 합창단 지휘자) 이것이 大田 캠퍼스내 최초의 자발적인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었음. 가을학기에 본격적으로 매주 성경공부 지속함. 후에 양치관 목사님을 지도교수로 모심. 내용은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공부이었음. 최초의 공부는 씨 뿌리는 천국 비유(막4장)였고, 이를 통해 캠퍼스와 지성인들의 마음에 복음을 심어야 함을 깨달음, 그리하여 가난한 한국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수 있다는 소망을 발견함.
2. 1962년 가을학기 미 남장로 선교사 출신 한미성 교수(Melicent Huneycutt Verghess, 미국 NC 주립대 영문과 출신, 미국 문단의 시인)가 大田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전 기전여고 교장, 전북대 중심 영어성경공부 통해 전주에서 교육 사업과 Student Evangelical Work을 감당하심)하면서 大田에서도 11월부터 大田대학 영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오정동 오정교회와 大田대학에서 Student English Bible Study와 캠퍼스 사역이 시작됨.
3. 1962년 가을학기가 끝나갈 무렵 목적과 Vision이 같으므로 두 모임을 합하기로 결정하고 7명의 친구들이 UBF(그 당시는 ‘기독학생연맹’으로 부름)에 합류함. 그 당시 약30-50명의 학생들이 모여 영어와 한글로 성경공부를 함. 1963년 1월 大田대 영문과 과장 Dr. Keith Crim이 안식년 귀국으로 Huneycutt 교수가 그 당시 영문과 과장 대리를 맡음.
4. 1963년 그 당시 이창우 선생(고 이사무엘 선교사)과 광주 배사라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온 한미성 선교사와의 갈등관계로 인하여 미 남장로교 선교부 Student Evangelical Work Committee에서 사역지 분할정책을 결정(서로 다른 지역을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기로 결정. 광주는 배사라 선교사, 전주는 이거보 선교사, 大田은 한미성 선교사). 이로 인하여 이창우 선생과 한미성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더욱 증폭됨. 이것이 광주 UBF에서 초기에 이창우 선생이 미국 선교사와 한국 목사를 많이 비난하고 민족주의 등 사상 강좌를 많이 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됨.
5. 1963년 2월 大田대학에서 제1회 大田 UBF수양회를 개최하고자 할 때에 두 사람의 갈등으로 인하여 한미성 선교사의 고통이 극심하여 수양회가 거의 포기상태에 빠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김정일 형제가 광주로 찾아가서 이창우 선생과 단판함. 그 결과 전주와 광주 형제 자매들이 大田수양회 참석하여 화해와 협력의 수양회를 갖기로 합의. 그러나 끝내 수양회가 임박했음에도 이창우 선생과 광주 형제 자매들은 오지 않음. 이러한 지도자들의 갈등의 여파로 크게 방해받아 결국 大田과 전주 형제 자매들만 참석하는 계획보다 작은 수양회로 전락함.
* 이 사건이 이사무엘 선교사와 김요한 목자가 최초로 서로 만나는 동기가 됨. - 이사무엘 선교사는 이때부터 김정일 형제를 선교사의 앞잡이라고 비난했고, 반면에 이때에 이 용감하고 맹랑한 녀석을 학생복음운동가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고 후에 스스로 증언함.
6. 1963년 봄학기 후반기 본격적으로 충남대학 문리대, 농대, 공대개척을 위하여 大田시 은행동 11번지에 기독학생회관을 얻어 “大田 대학생 성경연구회(UBF)” 간판을 걸음. 이로써 大田 대학생 복음운동의 은행동 시대가 개막됨. 그리고 한미성 선교사의 안식년을 대비하고 사역의 활성화와 동역을 위하여 임춘복 선생(후에 장로교 통합측 교단 전국여전도회 총무 역임.)을 Staff으로 영입. 그 당시 Program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매일(월~금 까지) 아침 6시-7시까지 한미성 선교사의 영어 성경공부 2) 저녁 7:30-9:30(각 1시간씩 영어 성경공부와 한글 성경공부 Group이 이루어짐.) 월요일 : 충남대 문리대생을 위한 성경공부(마태복음) 화요일 : 충남대 공대생을 위한 성경공부(마태복음) 금요일 : 충남대 농대생을 위한 성경공부(마가복음) (영어성경공부는 한미성 선교사가, 한글 Group 성경공부는 학생리더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함) 3) 토요일:3시-5시(음악감상(김의배 해설)1시간, 영어성경공부 1시간) 4) 일요일:3시-4:30 예배와 사도행전 중심 성경공부 이루어짐. 5) 이후 매주 월,금(오후5시-6시) 임춘복 선생의 일어성경공부가 추가됨. 6) 당시 수고했던 말씀공부 인도자 - 오승재(수학과, 후에 한남대 교수, 대학원장 역임. 현역 작가), 박정식(성문과, 목사. 전 통합측 증경 총회장), 송정길(수학과, 한남대 교수) 유영갑(영문과, 대전대 학생회장), 박정옥(영문과, 디케이토 4년 장학생), 박화자(영문과, 기전여고 교사, 유학 후 장로교 통합측 전국여전도회 총무역임), 맹용길(성문과, 장신대 교수, 총장 역임), 김원곤(영문과, 육군대위, 헬리콥터 조종사, 순직), 김정일(현 김요한 국제신대총장), 서숙자(영문과, 연세대 불문학과 김관식 교수 사모), 김의배(수학과, 전 수도여고 교사, 합창단 지휘자), 어광선(성문과, 침신대 출신, 목사), 조경덕(화학과), 김성억(영문과, 한남대 교수) 등 여러 학생리더들. 7) 당시 적극 활동했던 충남대생 문리대 : 박영관(영문과), 전형수(영문), 최병정(영문) 등 공대 : 엄기찬, 백창기, 유경종, 허선일 등 농대 : 송일우, 백광선, 박영 등 그 외에 김건수, 조남진, 김만제, 김인제 등
7. 1964년 3월부터 매주 토요일 “씨알(The Seed)”라는 Christian Students Weekly News Letter를 발간함. 1) 1964년 4월 11일 날짜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음 Adress : 새로운 믿음의 형제들. 김문규 : 충남대학교 농대, 김현철 : 충남대학교 농대 백운봉 : 충남대학교 농대, 서정원 : 충남대학교 농대 이상우 : 충남대학교 농대, 임광형 : 충남대학교 농대, 최우영 : 충남대학교 농대 2) 1964년 6월 24일 날짜 소식란에 기록된 명단. 한미성(허니컷) 선생 안식년 귀국기념으로 한복 상하 한 벌 등 기념품을 선물 하였는데, 이일에 참여하여 협조하신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건수, 김만제, 김민제, 김의배, 김정일, 박권의, 박영, 박영관, 박정식, 박정옥, 백광전, 백운봉, 백창기, 서숙자, 송정길, 어광선, 오승재, 오진태, 유영감, 이무훈, 이상우, 이종세, 임춘복, 전형수, 조남진(임춘복 선생을 제외한 대부분 소기도회 위원들임)
8. 1964년 6월 15일 한미성 선교사의 안식년으로 귀국함. 1) 임춘복 선생(당시 신학대학을 졸업한 여전도사)이 大田UBF 총무를 맡음. 2) 아침 영어 성경공부는 大田대 영문과 과장이신 Dr. Crim이 대신 감당함. 3) 화,목 저녁 영어성경공부는 Miss Aukeman선생(당시 외국인학교 영어교사) 감당.
9. 1964년 7월 20일~23일까지 여름수양회 가짐 - 주 강사 Dr. Crim, 리커보(전주 UBF 책임자), 홍연호 목사 David Ross 목사 부부(한국예수전도단 창설자) - 주제 : 지혜 있는 자의 생활
10. 1964년 가을학기 9월 25일부터 Miss Cumming 교수가 충남대학교 문리대생을 위한 영어 회화공부 및 영어 성경공부를 인도함.
11. 1964년 9월 26일 충남대 농대교정에서 大田 UBF 체육대회(배구)가 열림. - 4팀: 大田대학, 충남대 문리대, 공대, 농대 팀 대항전. 약 50여명이 참여 농대팀이 우승함.
12. 1964년 9월 29일 제주도 김한옥 선교사가 大田 UBF 방문. 9월 30일부터 새벽기도회와 좌담회를 통해 제주도 활동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은혜에 공감. 제주도 선교지원에 참여하는 계기가 됨.
13. 1964년 10월 8일 광주 이창우 강도사 大田 방문. 大田대학 회원 17명과 기도회 및 간담회 가짐(중심주제 : 패배의식 버리고, 자립정신 가지라)
14. 1964년 10월 19일 충남농대 송일우 회원(산내면) 집에 가서 회원들과 벼 베기 행사 가짐.
15. 1965년 봄. . 임춘복 선생이 장로교 통합측 교단 총무가 되어, 떠나게 되어 역사의 중심이 학생들 중심으로 바뀜, 반면 역사가 다소 어려워짐. 김정일 형제가 학생 총무가 되어 벅찬 역할을 감당. 이수민 형제(수학과 1학년, 현 한남대 교수)와 박행순(화학과 1학년, 현 전남대 교수) 등을 大田 UBF로 초청하여 돕기 시작.
16. 1) 1965년 4월 27일 배사라 선교사 안식년 중 편지 내용에서 광주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보고 새 지역을 개척하고자 함.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길” 기도요청. 2) 1965년 5월 27일 배사라 선교사 새로운 선교개척지구인 서울로 가기로 결정. 3) 1965년 7월 3일 광주 소기도회 때 김정일 형제(大田UBF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大田에 Staff을 파송해 줄 것을 건의. 大田UBF는 기초가 섰으니 협조와 기도를 바라는 내용. 이 때 가을 새학기부터 광주UBF는 자립하고 배사라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논의함. 4) 1965년 7월 23일 배사라 선교사 안식년을 마치고 부산을 통해 귀국함. 5) Dr. Crim이 배사라 선교사에게 약 2개월간 大田에 와서 도와줄 것을 정식요청.(참조 - 1965년 11월 25일 배사라 선교사 보고서) 6) (1965년 11월 25일 배사라 선교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배사라 선교사가 기도와 논의 후 광주를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함에 기꺼이 동의. 그녀는 Dr. Crim이 大田으로 와서 잠시 大田UBF를 도와달라고 초청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역 개척을 위해) 문을 열어주신 것으로 깨달았음, 그리고 제주, 전주, 大田과 한국의 여러 캠퍼스가 기도와 성경공부 등 학생들의 증거를 통해 열리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보고함)
17. 1965년 8월 3일-7일 제1회 UBF 성경학교 열림. 주제 : “내 님을 알고자”, 장소 : 전남대 농대. 150여명 참석(大田, 전주, 제주, 대구 포함). 大田에서는 김정일, 정갑택 등 5명 참석 (강사: 낮시간 - 김형모 총회장, 아침기도회 - 홍관순 목사, 낮 구약 인물사상사 - 배사라 선교사)
18. 1965년 8월 22일 배사라 선교사 광주를 떠남. 大田과 서울 개척사역시작. 1) 大田에 있는 동안 김정일 형제와 마가복음, 요한복음 공부 시작. 2) 이때부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김정일 형제 Full Time Staff 되도록 권면 기도하도록 함.
19. 1) 1965년 9월 26일 주일 기도제목. “이창우 선생, 배사라 선생, 김선지 자매의 大田UBF Weekend Conference 참석.” 그간 4년간의 담은 이번 Weekend Conference로 말미암아 붕괴 될것임. 2) 1965년 9월 27일자 소기도회 이창우 선생의 大田보고. “4년 동안 광주와 大田 사이 삼팔선이 가로 막혀 있었다. 이는 윗사람들 때문, 20여명의 大田 UBF 소기도회 멤버들과 기도회 가졌다. 구신자 중심의 모임 - 수술이 필요한 곳. UBF맹서 선서의 모습까지 광주를 닮았으나(참조 - 이것이 그 분의 견해다), 大田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김정일을 위해서 (그가) UBF의 일군이 되도록, 광주는 Power Station이다. 개인적인 문제를 이기고 이제는 전국을 위해 기도하고 자격을 마음 가운데 가져야 한다.” 3) 1965년 10월 6일(수) 보고서. “배사라 선교사 다시 大田으로 떠나심. 2년간 절교되었던 大田의 문이 열리고 배 선생님이 그곳에 가셔서 2달 동안 일하시게 되었다. 천국과 같이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광주를 뒤에 두고 가시는 그 위대한 종의 앞길에 은총이 깃들기를 기도드립니다.”
20. 1) 한편 배사라, 이창우 선생이 김정일 형제에게 학생복음운동을 위해 Full Time Staff으로 자원하고 헌신할 것을 권면함. 2) 이 권면을 받은 김정일 형제는 9월부터 40일간 매일 아침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인도하심을 알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 자신의 이상(꿈)과 현실적 요구 사이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기도함. 3) 마침내 10월 25일 “Serve God as a Servant”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한 감격의 눈물과 함께 모든 이상과 자신의 장래 꿈을 버리고 대학생 복음운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함.
21. 1965년 10월 31일 UBF Staff Prayer Meeting에서의 발언. 1) 김춘순 : UBF 전망과 구체적 방안이 필요. 2) 정수일 : 선교사업의 분산을 지양하고 한 곳이라도 성공적으로 끝내자. 3) 배사라 선생 : 大田UBF는 널리 선전되었다. 金正一 군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4) 11월 6일 정기 소기도회 이창우 총무 : 개인 Plan은 서울가는게 소원 이 때까지 대구에서 정수일 Staff은 5-7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기도, 캠퍼스 사역, 별로 진전이 없었음. 이 때 정수일 Staff은 대구를 그만두고 大田으로 가서 사역을 감당하기로 결정함(공식 결정은 12월 26일에 결정).
22. 1965년 11월 7일 주일예배 때의 기록. 1) 정수일 선교사는 大田지구를 위해서 일하기로 결정. 2) 배사라 선교사는 大田사역을 마친 2개월 후 서울에 갈 작정.
23. 1965년 12월 19일의 기록. 1) 大田, 전주 기타 지방의 Center 준비 위해 기도함. 2) 이창우 선생이 大田에서 열린 12월 Staff 기도회에 참석, 아직 돌아오지 않음. 3) 12월 22일(수) 이창우 선생 여행보고 ① 大田에서는 광주회관보다 더 큰 회관 마련하여 공사중(수리중) - 이때부터 大田Center가 대흥동(시청앞)으로 옮겨서 大田UBF의 대흥동 시대가 열림. ② 이창우 선생 大田Center수리를 위해 광주Center 2층 칸막이 문짝을 가져다가 수리에 사용 - 이것이 그처럼 이창우 선생이 자랑하던 문짝사건이다 ③ 반면에 이때 大田은 전주Center를 위하여 의자6개를 보냄, 그리고 제주 김한옥 선교사를 위해 선교비를 지원함. ④ 大田에는 몇몇 좋은 학생이 있긴 한데 좋은 지도자가 없어서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할 것 같다고 기록. ⑤ 지도자의 올바른 훈련을 위하여 숙제를 많이 내주고, 생각하는 사람들, 창조적인 지성을 소유한 자들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야겠다고 보고함. ⑥ 12월 23일(목) 사랑의 파티를 마친 후의 기록. 가. 지난 18일 大田에 가서 Center 수리를 마치고 돌아온 Lee(창우) 선생이 갑자기 大田으로 UBF의 진로의 방향을 결정한 것에 대하여 광주 리더들은 대부분 영문들을 몰라 궁금해 하고 있었음. 나. 특히 전주에 가서 Center를 계약해 놓은 김춘순 선생을 그냥 광주로 돌려보내면서 大田을 미는데 대하여 어떤 이유인지 궁금해 함. 다. 그동안 수고하고 애쓴 UBF 형제들과 충분한 토의 끝에 앞으로의 UBF 진로와 그 형편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하여 광주 리더들은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의아한 리더들이 많았음. 라. 그러나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大田을 충분히 밀어주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함. 마. 그날 오후 기도회 때 고광옥 형제가 大田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망함(김정일, 이창우, 정수일, 배사라 선교사를 위하여)
* 이 일이 중요한 것은 그동안 광주, 大田, 전주로 지역분할정책으로 나누어지고 제한적이었던 UBF가 大田을 집중개척하고 김정일을 광주 이외의 지구에서 최초의 Staff이 되게 함으로서 UBF 전국화의 첫디딤돌이 됨과 동시에, 광주-전주-大田 line을 거쳐서 서울을 개척하고자 한 이창우, 배사라 선교사의 소원과 전략적인 가치 때문.
24. 1965년 12월 26일 임시 소기도회에서 한층 더 높은 핵심리더들로 “동역자회”를 구성함. 그리고 이 모임에서 Staff 재배치와 1966년 신년도 사업계획을 논의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함. 1) 大田지구 - 배사라, 이창우 선생을 파송. 2) 김정일 - 광주지구 Staff으로 파송. 3) 김춘순 선생에게 4월까지 Center를 마련해 준다. 大田에서 책임질 것을 약속. 4) 제주 Center를 준비해 준다.
25. 1965년 12월 29일(수) Lee(창우) 선생 보고. 1) 大田에서 육신적인 많은 일을 했다. 일하는 가운데 참기쁨을 얻었다. 2) 大田 Center는 궁전과 같이 아름답고, 큰 Center에서 여러분들이 한푼두푼 얻은 헌금과 기도가 大田에서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3) 김정일, 정수일 두 형제를 잘 훈련시키려고 한다.
26. 그러나 1966년 1월 23일 주일밤(7-10시) 동역자회에서 토의하고, 1966년도 선교사(Staff) 배치 문제로 다음과 같이 변경하여 재배치함. 1) 광주지구 - 이 총무, 김춘순 선생. 김정일은 2월부터 광주에 와서 모든 Staff 훈련을 받도록 함. 2) 전주지구 - 고광옥. 3) 大田지구 - 정수일, 김춘순. 4) 서울지구 - 배사라, 이 총무.
27. 1966년 2월 4일(금)-6일(일) 광주에서 역사적인 주말수양회를 개최함. 1) 大田에서 김정일 선생과 ①서덕근(충남대 농축산과 2학년), ②백광열(충남대 농축산과 2학년), ③박행순(大田대 화학과 2학년), ④송정호(충남대 화공과 2학년), ⑤정갑택(大田대 화학과 3학년)이 참석. 2) 주로 배사라 선교사의 성경공부방법론과 QT강의, 이창우 선생의 What is Gospel(복음이란 무엇인가)와 UBF이념강좌(①자유와 평등 ②일대일 ③공동체) 등 강좌를 들음. 3) 5일(토) 아침경건회 때 김정일 선교사가 히브리서11:1-12을 중심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라”는 주제로 말씀 전함. 그리고 오후 UBF 이념강좌 시간에 大田대에서 중창단(김정응, 김의배, 조성일, 이성재(대신 김정일) 공연함.
28. 1966년 2월 15일부터 大田에서 엄두섭 목사를 모시고 목원대 목자관에서 수양회 개최. 광주에서는 이낙승(공대 2학년, 현 남산UBF 목자), 정성만(조선대 약대), 안병호(옛 동대, 옛 한양UBF 목자, 한양대, 개신대 객원교수), 노상채(교대), 최정한(조선대 여대, 현 시카고 정요셉 선교사 사모), 김선지(농대, 현 UBF 전요한 목자 사모), 정금자(농대, 현 이승장 목사 사모) 등 12명이 참석. 전주에서는 이복주(전북대, 현 김성전 이비인후과 원장 사모) 등 여러 명이 참석. 大田에서는 송정호(충대 농대, 현 미국 뉴욕 선교사), 문건연(현 미국 아틀랜타 선교사), 서덕근(농대, 현 X국 진선생) 등 모두 50여명 참석.
29. 1966년 3월 16일(수)의 기록. 1) 마침내 김정일 선교사가 정든 영적 고향인 대전을 떠나 광주로 옮겨감. 이때 광주 소기도회 일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大田에서 태어난 유일의 UBF의 Staff, 김정일 선생님이 광주로 오다. UBF 모체로서 전국을 밑받침하는 광주의 열렬한 물결 속에서 같이 고난을 겪고 전국 UBF를 향한 기도의 제사장이 될 것을 염원한다”
결론
이상을 종합해 볼 때 1) 大田 학생복음운동 초기 역사는 학생복음운동의 본질인 학생들의 자발적인 성경공부의 기도모임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초기 역사는 광주, 전주와 마찬가지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학생선교운동의 필요에 따라 시작되었습니다. 2) 그러나 전주와 大田에서 마찬가지로 학생복음운동을 시작하였던 한미성(허니컨) 선교사와 이창우 선생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초기개척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Student Evangelical Work 위원회에서, 광주(배사라), 전주(이거보), 大田(한미성) 지역으로 각각 분할하여 역사를 감당하고,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분할 정책이 세워졌습니다. 3) 이로 인하여 이창우 선생은 초기 역사에 나타난 대로 순수히 복음과 말씀을 전하기보다 일요일 예배도 “사상강좌”로 불렀고(大田의 정수일 목자도 마찬가지), 민족주의를 많이 강조했으며 선교사들과 교계 목사들을 비판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심음으로 오랫동안 교회와 신학교, 그리고 교회론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학생들에게 심었고, 기존교인들은 구신자라고 무시하도록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4) 大田 학생복음운동 초기 개척역사는 한미성(허니컨) 선교사가 大田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자연히 처음에는 大田대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63년도부터 大田시내 은행동 11번지에 Center를 얻으면서부터 충남대 개척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5) 大田 학생복음운동 초기 역사에 참여했던 많은 학생들 가운데에는 후에 신학대학교 총장(맹용길, 임열수, 김요한), 신학대와 일반대 교수(송정길, 배영일 오승재 김인수, 김성억, 이수민 박행순), 교계지도자(박정식 총회장, 박화자 전국여전도회 총무), 연구원(KIST,정갑택)선교사(정성균,방글라데쉬초대선교사,순교함), 교사, 사업가 등 사회에 공헌하는 많은 인사들을 배출하여 교계 신학교, 평신도 학자들, 작가 여러 사회 분야에서 일생 믿음의 사람들로 헌신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6) 광주의 이창우, 배사라 선교사 두 Partner가 장단점을 보완하면서 장기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려는 것과는 달리, 大田은 같은 기간에 한미성, 임춘복, 김정일, 정수일 등으로 Leadership이 4번이나 교체되는 바람에 역사와 제자들의 연속적인 계승과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이 자주 바뀌는 것도 큰 영적 손실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7) 그러나 김정일 형제가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첫 Staff이 되고, 大田을 떠나 광주에 파송됨으로써 학생복음운동(그 당시 UBF)이 전국화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게 되었습니다(그 이후 전주의 장창식, 이현정, 대구의 이진화, 정도열, 서울의 손석태, 大田의 서덕근, 홍덕순 등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기 여러 지역에서 Staff이 배출됨). 8) 大田 초기 역사 가운데 大田대학 역사는 김정일(현 CMI 공동대표,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이수민(현 한남대 교수)과 박행순(현 전남대 교수), 그 후에 홍덕순 목사(大田열방선교교회 담임목사, 大田CMI 대표), 김형태(현 한남대부총장), 임열수(이수민의 양, 현 大田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그리고 김영환(현 大田열방선교교회 초대장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은 자들의 물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동안 大田 역사를 통해 부르심 받은 남은 자들의 생애를 통해 맺어진 수많은 열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9) 大田 초기 역사를 개척하면서 광주 중심의 초기 역사 때문에 나는 많은 외로움과 고통 때문에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졸업과 동시에 大田을 떠나 광주에서부터 시작하여 60년대 말까지 전국을 개척하면서도 언제나 大田에서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학생복음운동가와 선교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탄생하도록 하나님의 Vision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픔과 눈물의 기도를 외면치 않고 大田 역사를 크게 쓰셨습니다. 10) 특히 학생시절 잘못된 선배 Staff을 만나 많은 마음고생을 한 서베드로 목자에게 언제나 나는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쓰셨으며 大田 초기 나의 일생뿐 아니라, 서베드로-홍덕순-우남식목사로 이어지는, 大田 초기 Full Time Staff의 부르심과 계승의 역사를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11) 또한 大田출신 수많은 선교사들을 생각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단 한 사람의 남은 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다윗의 등불과 역사의 물줄기를 끊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귀히 쓰셨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감사하고 그 놀라움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12) 大田의 거룩한 물줄기는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결코 주님이 주신 꿈과 Vision을 잃지 마시고 21세기 “꿈의 시대”, 그 꿈을 이루는 자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후기 1) 이상의 기록은 실제 경험과 모든 사실적 자료에 근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역사자료를 아직 다 발견하지 못하여 장정자자매 등 이 기록에 누락된 인물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때가 되면 좀 더 의미있게 大田 초기 역사를 더욱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록이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2) 나는 초기 역사를 내가 처음 대학에 입학하여 부르심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최초의 大田출신 학생복음운동가로 부르심을 받고 大田을 떠나 광주로 가는데까지의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그 후의 역사자료는 서베드로, 홍덕순 목사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3) 나는 이 초기 역사자료를 정리하면서 그 당시에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초기 역사에 부름받고 쓰임받은 개척자들이 끝까지 남아있거나, 중간에 떠난 이들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분야에서 귀하게 쓰신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