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14) -
팔순 스승과
칠순 제자의 동행
"점심이나 같이 할까?"
"조금 전에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하러 가는데 같이 갈까?"
"아닙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노병(老兵)의 제안에 젊은이들의 반응이 이쯤 되면 다시 자리를 같이 하자는 얘기는 꺼내기 어렵다.
"김교수, 농구 보러 상주체육관에 같이 갈 수 있겠나? 내가 이제 교통수단이 제한되어 있지 않나?" 고교시절 농구감독이셨던 팔순스승의 제안이었다.
언뜻 젊은이들로부터 퇴짜 맞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고 싶고 말고는 선택의 조건이 될 수 없었고, 칠순의 나이도 동행결정에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은사님과의 왕복 네 시간여 동행이 쉽지만은 않았다. 많은 말도 은사님께 실례가 될 것 같았고, 침묵이 이어지면 서먹해질 것 같기도 했으니...
허나, 여느 때와 달리 이야기를 제법 많이 했다. 농구를 보면서도 재담(才談)은 이어졌다.
어딜 가나 노경(老境)으로 처신해야 할 나이였으나, 스승 앞에서의 동심은 지난 추억들을 되뇌게 했다. 이 어찌 스승만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으랴?
세상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탄들이나, 직분과 위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스승과의 하루 동행. 늘그막에, 그것도 스승의 요청에 의해 성사된 것이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2019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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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11) -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나의 성취로 인해 중국에서 실업상태로 있는 부모님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기 바란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한 중국 소트트랙 선수 저우양(周洋)의 소감이다.
이에 대해 중국의 IOC 부위원장이었던 유자이킹(干再淸)은 "부모에게 감사를 전한 건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조국에 감사를 표했어야 했다."고 질책하였다.
당시 러시아 총리였던 푸틴(V. V. Putin)은 저조한 성적을 거둔 자국의 스포츠 고위관료에게 "경기에 나가면 땀만 빼지 말고 이기란 말이요."라고 나무랐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3연패를 한 북한의 계순희 선수 어머니는 "우리 장군님 뜻대로 했기 때문에 이겼다."라고 했다. 사회ㆍ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하고 귀국한 여자 배구팀 주장 김연경 선수의 인터뷰 장면이 요즘 화제다.
"포상금 금액을 알고 계시나요?"
"격려금이 쏟아지고 있는데 감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뭔 인사요?" "대통령님께" "했잖아요" "한 번 더"
구태의연한 한국배구연맹 경기감독관의 사회솜씨가 가관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스포츠내셔널리즘의 병적인 징후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의 스포츠계에서나 볼 수 있던 해괴한 장면이 대명천지(大明天地)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펼쳐지고 있다.
"해준 게 뭐가 있다고!"
2021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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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6) -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말만큼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드물다. 우선, 날씨가 춥거나 덥지 않고 선선할 때 시원하다고들 하는데 생활하기에 적당하다는 의미다.
난제가 해결되어 마음이 개운할 때도 시원하다고 한다. 촉각에 의한 느낌이 아닌 내재적인 성취감의 표출이다. 스포츠경기에서의 통쾌한 승리가 그렇지 않은가?
희한한 건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고들 한다. 속이 후련하다는 우리식 표현이니 외국인들의 보편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몸매가 늘씬한 이를 향해서도, 대머리 아저씨를 보고도 시원하다고들 한다. 외양이 답답하지 않고 서글서글하다는 의미일 게다.
우스운 건 미운 놈 실수를 보고도 시원하다고 한다. 경상도 방언에 고소하다는 뜻의 '꼬방시다'란 말이 있다. 거슬리던 차에 그들의 실책이 꼬방시고 시원할 수밖에...
이번 여름의 혹서(酷暑)는 '시원하다'는 말을 되뇌게 한다. 사이다 발언 운운하면서도 상호 헐뜯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판에도 언젠가는 시원한 바람이 불려냐? 흔하디흔한 '시원하다'는 말이 우리에겐 아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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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철학자의 글쓰기- '親'의 이중성-내려 놓을 때가 되었다-'선생님' 홍수시대-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체육철학자의 글쓰기
체육철학 전공자로서 철학서적의 탐독은 당연한 일이었다. 늘 철학서적을 가까이 하면서 체육학의 논리를 편 셈이다.
학교를 떠나면서부터는 이를 바탕으로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소일거리 삼아 글로 정리해 보곤 한다. 어떠한 유형의 글쓰기든 내 나름의 기본원칙이 있다.
철학의 현실참여가 체육철학연구의 근간이었던 만큼 글쓰기에서도 '사회현상의 비판'이 주된 과제일 수밖에 없다. 비판에는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하나 항상 그게 난제다.
'이해하기 쉬운 표현'도 글쓰기의 기본요소다. 늘그막에 삶의 지침을 인도한다는 명분으로 난해한 글로 위세를 과시하면 실속 없는 허담(虛談)이 되고 만다.
'이념의 편중과 왜곡된 진영논리'도 경계해야 할 소재다. 글쓰기에 있어 자기주장은 필연적이나 보편성이 결여된 편견은 독자를 호도(糊塗)하여 그릇된 길로 향하게 한다.
글을 쓰는 이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 의무가 있다. 서술에 이은 시사점(implication)의 제시가 중요한 이유다.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글은 생명력을 상실한 글이다.
"교수님!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습니까?"
"끊임 없는 "자기 글의 수정'이다." 문학가가 아닌 나에게는 이게 정답일 수밖에 없다.
일본 소설 [철도원]의 저자 아다사 지로(淺田次郞)는 글쓰기의 중요한 원칙으로서 아름답고 재미있으며, 이해하기 쉽게 쓸 것을 주문하고 있다. 소설의 특성을 반영한 글쓰기 비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글쓰기는 창작과 전달기능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우선은 용감하게 펜을, 아니 컴퓨터 앞에 앉아야 시작된다. 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2021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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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의 이중성
가깝고 사이가 좋거나 사랑하는 관계를 묘사하는 접두어로서 '친(親)'이 있다.
친족관계인 친부모, 친아들, 친형제, 정답게 오래 사귄 벗을 의미하는 친구, 친우, 찬성하거나 돕는다는 뜻의 친정부, 친미 등이 있다.
각박한 세상에 이보다 더 정겨운 표현이 있을까? 그럼에도 '親'의 성립을 위해서는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
우선 막역한 사이에도 상호존중의 배려가 필연적이다. 친구 간에도 예의와 신의를 중히 여겨야 우정이 지속된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늘 권고하는 충언이기도 하다.
사회나 국가차원에서 '親'은 독약이 될 위험요소도 있다. 보편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親'을 앞세운 무리들은 권세 등등하다가 연대책임론이 대두되면 곧 흩어진다. 이게 바로 패거리, 모리배들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친노(親盧), 친이(親李), 친박(親朴)에 이어 친문(親文)에다 친조국(親曺國)까지 나대고 있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대된 결과다.
다수의 개체들이 협력하거나 경쟁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은 떼거리 문화와는 달리 개인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이성(理性)을 전제로 한다.
그런 면에서 건실한 사회와 국가의 정초를 위해서는 독립개체 못지않게 집단지성의 역할이 절실하다. 유의해야 할 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親'으로 결집한 벼슬아치들은 늘 일탈의 소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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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이당 저당 욺겨 다니며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꿰찬 팔순의 노정객(老政客)이 정치판에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
"나에게 오면 도와 줄 게"
어린애에게나 할 수 있는 사탕발림으로 소인배들 끌어 모아 상왕노릇 하고 싶은 게 본심 아니겠는가? 내려놓을 때가 되어도 한참 된 유치한 노욕(老慾)이다.
교수이자 장관이었던 인간이 온갖 범법으로 세상을 어지럽혀 놓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회고록 출간으로 항명하는 철면피 희극을 펼치고 있다.
편향된 이념으로 국민을 왜곡 선동하는 공영방송 진행자의 말장난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내려놓을 때가 되어도 한참 된 광란들이다.
세수(歲收)를 엄청나게 늘여놓고 국가채무 상환에는 관심 없이 현금살포부터 구상하는 정치권이 있다. 이의 배후에는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반미-반일 친중-친북만 부르짖는 시대착오적인 권력자가 있다.
실수 없는 인간, 과오 없는 지도자가 어디 있으랴만, 오판에 대해 치졸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정치권 무리들의 오만이 심히 역겹다. 내려놓을 때가 되어도 한참 된 집권세력의 횡포 아닌가?
"아닌 건 아닌 거여!"
주말 드라마 주인공 영감이 시도 때도 없이 읊는 대사다. 마치 우리 시국(時局)의 독선을 향해 비웃는 듯하다.
2021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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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홍수시대
선생(先生)'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학예가 뛰어난 사람 혹은 상대를 높여 이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물론 선생을 공경하여 부를 때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평생 대학에 몸담았던지라 선생님 소리는 늘 듣거나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대학에서는 선생님 대신 '교수님'으로 부르는 경우가 일상화 되어 있다. 교수님을 선생님의 높임말로 착각한 탓이 아닌가 한다.
요즘은 오히려 선생님이란 호칭이 교육기관이 아닌 일반사회에서 쉽사리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상대를 높여 이르는 말이니 문제가 될 건 없으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근(禍根)이 되듯이 선생님이란 호칭도 과용하면 당사자는 물론 주위를 민망하게 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님'을 의미하는 '사마(さま, 樣)' 라는 표현이 접미어로 사용되고 있긴 하나, 무분별하게 선생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통상적으로 용어에 대한 닫힌 개념의 주장은 언어에 갇힘으로써 본질에서 변용될 가능성이 있고, 열린 개념으로서의 접근은 오용에 의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TV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절제된 표현이 한층 요망된다. 과공비례(過恭非禮), 즉 과한 공손은 예절이 아니다.
선생님을 '道를 깨닫고 덕업(德業)이 있는 자', '성현의 道를 전하는 자'로 한정하고 싶진 않으나, 우매한 남용만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2021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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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박사과정 지도교수이셨던 이광섭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만 간다.
평소에는 물론 수업 시에도 많은 말씀보다는 토론을 이끌며 한번 씩 짓는 미소가 남다르셨다.
덕망과 존경을 받으신 교육자였음은 물론 슬하의 남매까지 교수로서 제 몫을 하고 있었으니 염려가 없으신 분이셨다. 허나, 선생님은 아쉽게도 세상과 일찍 작별을 고하셨다.
생존해 계실 때 문하생들은 선생님과 만남을 이어 왔었다. 하루는 사모님께서 섭섭했던 기억을 조곤조곤 토로하신다.
"얘야! 그게 무슨 뜻이지?"
"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잘 키워놓은 자식의 어미를 무시하는 한 마디에 사모님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하셨다.
지난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면서 어미를 한물 간 변방 노인취급 하는 아들놈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죄 없는 영감님께 넋두리를 할 수도 없고...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애절한 고백과 상념에 잠기셨던 사모님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어미들은 그러한 아쉬움의 한(恨)을 안고도 하염없이 오늘도 내일도 자식걱정에 여념이 없다. 어미 팔자는 원래 그러한 것이어야 하는가?
2019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