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선이
- 오늘도 해가 이미 똥구멍까지 솟았는데 이 화선이 년은 문 쳐닫고 나자빠만 있으면 어쩌란 말이고? 사내 냄새도 그만큼 맡았으면 실속도 차릴 줄 알아야지 이년아, 하다 못해 올 겨울 높새바람에 미친 년 치마끝맨치로 치든 저 초가 처마를 쳐다봐라. 칠바구 넘더러 지붕 쫌 이게 마른 짚 몇 동이라도 마당에 부려 놓고 동지섣달에 이불 속 춘삼월 꽃놀이를 하든가 말든가 해야지 원, 딸년이라고 하나 둔 게 지 어미는 배창지가 말라 붙어 허리가 고꾸라지는지, 손발이 곱아서 단춧구멍도 못 채우는지도 모르고, 온 동네가 큰물에 다 떠내려가더라도 사내 놈만 끼고 눈 감고 헤엄질 치고 있을 년이네, 쯧쯧.
- 아이구 어매, 그런 소리 말거레이. 내가 누구 딸인가배? 영포읍 홍등가 주름잡다 나이 마흔 넘어 이제는 이 늙다리 어매하고 뭉개면서 외딴 초가집에 몸 붙이고 이제나 저제나, 읍내 군 서방들이 불러 줄 날만 기다리며 손가락 빨고 앉았는 화선이 아인가배. 하루 가고 이틀 가고 한 달 가고, 이제는 시든 꽃인가 도무지 이 시골 구석 색주집에서도 불러 주지를 않는 퇴기가 됐구마이. 그런데 이 끈 떨어진 년이 답답한 마음에 바람 쏘이러 문밖을 나서 샘터로 가는데 마침 근처 논에 일보러 나왔던 칠바구 넘이 기특하게도 날 알아 보데. 두어 달 전에 제 또래 사내들 몇 넘 하고 읍내 내가 나가던 색주집에 들른 적이 있던 바로 그 촌놈인데, 당장 내가 들쥐 본 송골매가 된 거지. 그래서 그 날 그 순간부터 그 칠바구 넘은 지고 왔던 지게며 가래며 다 저 우리 마당 구석에 내던져 놓고 이 퀴퀴한 내 방 이불 속에서 진을 빼고 있는 거 아닌가배. 그게 벌써 닷새가 지났는데 다른 넘 같았으면 벌써 너부려져 다 털리고 신발도 제대로 못 꿰고 기어 나갔을 텐데 이 넘은 무슨 산삼을 캐 먹었는지 도리사 천하의 이 화선이가 지쳐 나부라질 판이랑께~.
- 으이구 이 년아, 산삼도 좋고 천삼도 좋다마는 먹이를 물더라도 제대로 물어야지 이 에미는 무슨 흙 파 묵고 살아라카나? 그넘 좋은 일 시키고 니캉 내캉은 어이해 살아 갈래? 니 눈에는 조 봇도랑 아래 칠바구 아들 부열이 조고만 조놈이 꼬부리고 앉아 있는 게 니 눈깔에는 안 보이더나? 고 조고만 놈이 지 애비 쳐박혀 있는 우리 집 사립문 앞에 와서 ‘아부지~, 아부지~, 엄마가 인자 오라 카던데요~, 아부지~, 아부지~’ 카고 족제비한테 물려간 삐야가리 새끼 찾는 암탉맹키로 하릴없이 부르다가 아무 반응이 없자 또 조 봇도랑 밑에 가서 쪼그리고 있다가는 들판을 건너온 칠바구 각시가 감히 지 남편 더럽고 신경질 많은 성질 때문에 방문 젖히고 들이닥치지는 못하고 또 지 아들을 부추기어 등을 떠밀면 고놈이 또 사립짝 앞에 와서 ‘아부지~, 아부지~, 엄마가 오라 카던데요~, 할배 제사 지내야 된다꼬요~’ 하다가 또 돌아가고…, 오늘 아침에 벌써 세 번째다. 니 귓구녕엔 그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이가 이년아, 몸장사를 해도 좀 되는 장사를 해라. 아이구 내 팔자야, 복도 없고 운도 없다. 천하에 난봉꾼에다 왈패요, 탈탈 털면 X랄 두 쪽 밖에 없는 빈털터리 배칠바구, 우리 모녀 저 넘 뒷감당이나 하게 생겼구나.
- 사돈 남 말 하네 우리 어매. 그리 몸장사 잘 했으면 지금쯤 고대광실에 호의호식 할 텐데 어쩌다 땡전 한 푼 없는 울 아부지, 그런 울 아부진 와 꼬셔 냈소? 덕소 심냇골 숯막에 수꿍장수 울 아부지 뭐 볼 거 있다꼬, 멀쩡한 남의 집 가장 꼬리쳐서 호려 내어 천하에 불쌍한 이 화선이 년 씨 하나 떨구고 저 세상 꼴까닥 보내 버렸소?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나더러 흥, 배칠바구 뒷감당이나 한다꼬요? 울 아부지라도 살아 있었으면 내가 지금 이 짓하고 방구석에 쳐박혀 있겠소!
- 그래, 이년아 말 잘 했다. 내가 니 애비 덕소 영감 잡아 묵었다, 와!?원캉 배를 곯아서, 젊으나 젊은 년이 북만주 무딴쟝인지 목단강인지 그곳에서 잘 살다가 해방 되자 왜넘 앞잡이 섰다꼬 우리 부모 짱께들한테 맞아죽고,우리 오래비 어디로 도망가서 행방불명, 나혼자 살아남아 허위허위 남쪽으로 내려왔지. 만주서 내려오며 외톨로 떨어져 숱하게 굶었지만 삼팔선 넘고 만주서 귀동냥 한 대로 먼 친척이 있다는 굴산에 와서는 쫄딱 닷새를 굶고 나이꺼내 눈에 뵈는 게 없더라꼬. 절양 거쳐 마곡 갔다가 거기서도 친척이나 아는 사람은커녕 밥 한 숟가락 못 구하고 허적허적 초주검이 되어 시오리를 기다시피 걷는데, 산모롱이에 빤히 초가가 보이는데 오리 밖에서도 밥냄새가 나더구만. 그래서 목 마른 낙타처럼 미친 듯이 그 집을 찾아가는데 삼거리 외딴집 주막이데. 그런데 그때 그 주막 마당 평상에 앉아 밥상을 받은 이가 너그 아배 덕소 영감하고 다른 숯장사 두어 명이더군. 내가 환장을 해서 평상 모퉁이로 다가가 달려들었지. 주막 할멈이 웬 미친 거지냐고 뛰쳐나와 내쫓더군. 그래도 덤벼들었지. 다들 질겁을 하는데 그 가운데 점잖게 앉아 밥술을 뜨던 중년의 양반이 자기 밥상을 물리며 주모를 부르더군, 주모, 이 상 저 아낙에게 물리고 값은 내가 치르겠소 하며.
- 그래, 남의 밥상을 어거지로 덮쳐 먹었으면 됐지 와 멀쩡한 남정네에게 수작을 붙였수?
- 먹던 밥이든 쏟아진 밥이든 무조건 움켜 입으로 털어 넣고 나이꺼내 곧 정신이 몽롱해지며 까무라치더라. 한참이나 그런 상태인데 주막 할멈이 송장 치르게 생겼다면서 찬물을 입에 붓고 얼굴에 들이쏟고 뺨따구을 치고 해서 겨우 깨어나 두리번거려 보니 사람들은 다 간 데 없고 뉘엿뉘엿 저녁 해가 비치데. 쯧쯧, 혀를 차는 할멈에게 죽어 가는 소리로 제우 달라붙었지. 나 여기 좀 있게 해 달라꼬, 무슨 일이라도 할 테이까 재워 달라꼬. 사람 좀 살려 달라꼬.
- 그래 어매, 내 내력이 바로 그 내력이오. 주막집 몸 파는 년 내림이 어디 가겄수? 그 어미에 그 딸년.
- 입 닥쳐라 이 년아.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라. 니 애비 뜨다 만 밥상 거두어 먹고 눈 빤히 뜨여 살아난 년이 그 은공을 잊을라꼬? 처음에는 그럴 정신도 없어 며칠을 지나고 보는데 어느 날 바자울 너머로 한 떼의 지게 부대가 아침 녘에 성큼성큼 주막으로 걸어오는데 그 양반이 맨 뒤에 따라 들어와 감나무 밑에 지게를 고이더군. 저 사람이 누구더라, 꿈 속같이 몽롱한 속에도 할멈 호령 속에 바삐 밥상을 차리는데 그 양반 수저 놓고 짠지 담고 하는데 괜히허둥대며 지체가 되고 마음만 바빠지더라카이. 밥상을 들고 평상으로 다가가는데 남정네들이 모두 쳐다보며 뜨악해 하는 건지, 야릇한 표정을 짓는데 그 양반은 아는지 모르는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무관심하더라꼬. 나도 모르게 밥상을 그 앞에 소리나게 탁 놓고 돌아섰지.
- 손님맞이 한 번 이쁘게 하셨구만. 그나저나 어매는 울 아부지 어느 구석이 그리 좋았수? 혹시 밤 농사가 끝내 줬수?
- 예끼 이년!니가 아무리 화류계 퇴물이라 해도 넉 아배한테 그리 해선 못 쓴다. 그 양반 무척이나 무덤덤하더구먼. 닷새장마다숯 꾸러미를 지고 그 주막을 지나는데 처음엔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지만 차차 빠지지 않고 들러서 꼭 밥이든 술이든 드시고 가셨지.
- 왜 그랬수? 그깢 숯검댕이 팔아 얼마 남는다고 그리 매상을 올려 줘요? 주막에 뭐 맡겨 놓은 거 있었수?
- 그래, 처음에는 나도 매상 올리는 데만 신경 썼지. 오늘 또 이 단골한테 밥 한 그릇 팔았구나 하는 쪽으로 여기다가 어느 날부턴가, 아매도 처음부터였던가, 이 양반 지게 지는데 힘이 부칠 텐데 하고 밥도 좀더 꾹꾹 눌러 담고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기다리게 됐지. 할멈은 눈치 채고 핀잔을 주고 시샘을 하기도 하고.
- 아이고 듣고 들어도 지겨운 신파, 흘러간 로맨스. 덕소에 본 마누라 있고 딸까지 있다는 건 언제 알았소?
- 당연히 장가 갔겠거니 했지. 그래, 그게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랐지. 남이사 장가를 갔든 말았든. 근데 그게 아이라, 그래가아 그랬는지 하여간에 더욱 내가 그 양반에 얽혀 들고, 내가 그 양반을 얽어 매고…, 그래 세상 사는 게 다 헝클어진 실타레라, 제대로 풀리지 않는 실타래라 마침내 내가 마음을 정했지.
- 포기하셨다구? 짝짝짝, 울 어매도 사람 된 적이 있었네?
- 아서라, 내가 돌아앉으면 그 양반이 매달리고, 그 양반이 멀쭘해지면 내가 가슴을 쥐어뜯고, 그러다 삼동네 소문이 다 나고, 나 보러 기웃거리던 뜨네기들 발길이 뜸해지자 할망구가맞대놓고 떠밀더군. 밥 축내지 말고 어서 보따리 싸서 나가라꼬.
- 그래서 덕소로 가서 첩노릇 한 거여?
- 내가 덕소로 와 가노! 남정네가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데 그 참새 궁둥이 놓을 자리도 없는 집자리에 내가 와 가노!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 내가 사생결단을 내렸지. 온갖 수단을 다해 내 사람 만들겠다고. 아니면 그만 칵, 죽고 말겠다고. 그래서 수꿍지게 지고 장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서 추림골 냇가 숲으로 끌었지.
- 하이고야, 울 어매 특기 나왔구먼. 그 육탄공세에 신세 조진 울 아부지…, 불쌍타!
- 지랄한다. 그래, 말은 바른 말이지 내가 육탄공세를 했다. 추림골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너럭바위에서 내가 시퍼렇게 간 정지칼을 꺼내 탁, 무릎 앞에 놓으며 웃저고리를 벗었지. 이 길로 결단을 하라꼬. 지금 일어서서 덕소 본마누라한테로 갈테면 가시오. 대신 나는 당신이 저 모퉁이를 돌아서 안 보이는 순간에 이 칼로 한 많은 이 가슴팍을 팍 찌르고 저 맑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게요. 이 더럽은 년, 못된 년, 재수에 옴 붙은 모진 년 싹 잊어뿌고일어서라카이요! 내가 눈에 파랗게 불을 품었지.
- 연극 한 번 끝내 준다. 그때 고마 그 가슴팍에 칼을 콕 박고 죽었으면 이 화선이도 한 많은 세상 더럽은 구경 안 하고 좋았을 낀데…, 아깝다. 히히.
- 그런데넉 아배가 정말로 일어서더라. 그래,인자 다 글렀구나. 아등바등 애끓이던 세상 나도 정말 이별이다 하고 눈을 감고 앉았는데 갑자기 골짜기가 찌렁찌렁, 너그 아부지 터지는 울음소리에 눈을 번쩍 떴지.
- 와 울었는데?
- 그 굵은 팔을 벌려 나를 감싸 안으면서, 중미야! 중미야! 니가 이 세상에 와 나왔노! 니 없이는 내 못 산다, 니 두고는 내 못 간다 하면서 눈물이 범벅이 되어 나를 안고 우는데 내가 정말로 이 세상에 안겨 있는 건지 저 세상에 떠다니는 건지! 그래 덕소 양반, 내캉 삽시더, 내일 칼을 받고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하루 내캉 삽시더 하고 그 때부터는 한 몸이 돼삔기라. 남녀간에 한 몸이 돼뿌면 이 세상에 거칠 것이 뭐가 있겠노. 다 잊어뿌고, 숯지게는 골짜기 맑은 물에 쳐박아삐고 둘이서 내빼 대처로 나갔지. 너그 아배는 난전에서 박상 튀기고 나는 국밥집에서 설거지 하고….
- 본마누라 야단 났겠다.
- 죽일 넘 죽일 년이 돼 놔서 그 동네 언저리에는 얼씬도 못 하고 내내 멀찌감치 떨어진 낯선 고을을 떠돌았지.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는 못 챙기는지라. 그 쪽 소식은 한 귀로 흘리고 애써 잊어뿌렜지. 듣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고 나아질 것도 없잖나 말이다.
- 멀쩡한 남의 가정 풍비박산 내 놨으면 즈그들이라도 잘 살아야지, 어쩌다 요 모양 요 꼬락서니가되었당께? 천하절색 요조색녀 울 어마님?
- 그래, 복 없는 년은 봉놋방에 눕어도 고자 옆에 눕는다꼬,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무슨 놈의 장사를 해서 조금만 돈이 모이면 꼭 무슨 사단이 나서 홀랑 날리는기라. 깡패가 찡짜를 붙어 몽땅 뜯기든지, 몸을 다쳐 치료비에 통째로 털어 넣든지, 아이면 얼토당토 않게 장돌뱅이들 시비에 말려들어 송사가 벌어진다든지. 참으로 미치고 환장하겠더라카이. 근근히 밥이나 제우 먹는 정돈데 니 애비가 사람이 경우가 너무 바르고 모진 데가 없이 여린데다 도무지 흐린 구석이 없는기라. 그리 맑은 물에 무슨 고기가 꼬일노?
- 아이고 울 엄마, 답답한 남편 제쳐 두고 물장사로 일찌감치 나섰으면 천하의 홍등가를 휘어잡았을 텐데, 이 딸년까지 합심해서 말이야!
- 안 그래도 하도 일이 안 풀리이꺼네 내가 그 생각도 했다. 그 이듬해 여름에 니를 낳았는데 이 양반 믿고 있다가는 모녀가 한 무더기로 굶어 죽을따, 내가 바드득 이를 갈았지. 십원 생기면 일원 꼬불쳐 놓고, 어쩌다 백원 생기면 십원 챙겨 놓고, 그리 하자이 내가 거진 밥을 굶는 기라. 밥을 묵더라도 찬도 없이 거진 맨밥이라. 내가 모질게도 이를 악물었지. 죄 많은 이 몸 돈까지 없으면 너그 아부지하고 니하고 세 식구 어디 가서 호소하고 어디 가서 빌어 먹을 거냐고. 쪼매만 참자, 쪼매만 참자. 굶고 물 마시고 한 숟가락 빨고 물 마시고, 너그 아배 보는 데서는 깡보리밥 한 숟가락 뜨고 간장 찍어 묵고. 내가 몸 안 팔고 살 길은 그 길밖에 없는기라.
- 그래 돈 좀 모았수? 아부지 몰래?
- 그래 모았지, 너그 아배가 또 무슨 장사를 벌인다꼬, 이번에는 꼭 된다꼬, 돈을 조금만 돌리면이번엔 틀림없이 한 건 하는데 그 밑천이 모자라 놓친다꼬온갖 궁리를 하며, 밤새도록 끙끙 앓으며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뱅뱅 돌아 껍질이 벗겨져도 나는 모질게 모질게 귀를 막고 못 들은 척을 했지. 그런데 그게 다 쥐약이고 독약이고 천벌이더라꼬, 흐흐.
- 무슨 소리요?
- 사흘을 끙끙 앓던 넉 아배가 너무 돈이 급하이꺼네 그 전까지 얼씬도 않던 덕소에꺼정 다 찾아 간 거 아인가배.
- 본 마누라한테?
- 차마그석엔 못 가고 아랫동네 막역했던 옛 친구에게 가서 손을 벌렜나 보더라. 거기서도 냉대를 받고는 마지막 희망이 꺼져 터덜터덜 돌아와가아는 대낮에 벽장을 열어 개어 놓은 이불을 확 댕겨 방바닥에 깔았지. 너무 탈진해서 한 숨 눈이나 붙일라꼬.
- 그래서?
- 그런데 그때 내가 은행에 돈 바꾸러 갈라꼬 챙겨 놓았던 돈뭉치가 방바닥에 떨어졌지.
- 돈을와 바꿀라캤는데?
- 니는 어려가아 모리는구나. 박정희가 갑자기 화폐개혁을 안 했나! 멫 월 메칠까지 은행에 가서 안 바꾸면 헌 돈은 다 똥 되는기라. 그래서 내가 깊이 꼬불쳐 놓은 돈들을 한데 모아 챙겨서는 은행에 갈라카다가 마침 화선이 니가 안 보여서, 그래서 화들짝, 돈을 벽장 이불 속에 급히 쑤셔 넣고는 허둥지둥 너를 부르며 뛰쳐 나갔는데, 다행히 니가 옆집에 있어 가가아 찾아 오는데, 마침 그 때 덕소 갔던 너그 아부지가 집에 온 기라.
- 돈 보고 좋아했겠네?
- 미친 년! 그 순간부터 아배가 확 변했다. 세상이 달라져삤다.
- 팔자 고쳤단 말이가?
- 완전히 딴 사람이 돼가아 내게 착 깔아진 목소리로 조용히 묻데, 이 돈 웬 거냐고. 그래서 내가 당신 정말 급할 때, 당신하고 화선이, 우리 식구 정말 죽기 직전에 살게 할라꼬 모아 둔 돈이라고 말했지. 지금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꿔야 된다꼬. 화폐개혁이라꼬. 그냥 두면 안 된다꼬.
- 그랬더니?
- 당신이 나 몰래 모아 둔 돈이라? 우리를 살릴라꼬? 기특하군. 그러더니 입을 다물고는, 그 때부터 아무 말 않고, 밥을 안 묵더라꼬.
- 데모 하는 거야? 와 그라는데?
- 밥도 안 묵고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앉아 있더라꼬, 낮이나 밤이나. 그래가아 내가 또 설명했지. 이차저차해서 이차저차 됐다꼬. 그래도 별 대꾸가 없는기라. 장사도 안 나가고 도무지 사람이 목석이 되는기라. 말도 거진 않고, 답답해 미치겠데. 쥐어 팰 수도 없고.
- 쇼크 먹은 거야? 아부지가? 뭣 땜시로?
- 내가 또 조분조분 설명을 했지. 아는 사람도 불러와 증언을 서고. 소용 없더라. 화가 나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무진 애를 썼지. 그래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조용히 몇 마디 하데. 나는 그래도 당신 믿고 다 버리고 왔는데…, 하며. 그제사 나는 정말로 사태가 심각함을 알았지. 뭐가 크게 잘못 될 것 같애서 내가 몹시 안절부절을 해도, 화선이 니가 찢어지게 울어제껴도 너그 아배는 그저 고개 숙인 목석이야. 그나마 없는 살림에 돈은 마르고 영감은 저 모양이고, 미치고 환장하겠데. 그래서 내가 장사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이 영포읍에서도 더 들어온 송촌 골짜기로 옮겨 왔지.
- 이리로 와 왔는데?
- 내가 장바닥에서 장사할 때 영포에서 온 사람 얘기가 여기 송촌골에 용한 보살무당이 있다는 게야. 정신 오락가락하는 사람 잡귀 내쫓아 주고 정신 돌아오게 한다꼬.
- 그래서 정말로 굿을 했나?
- 탈탈 털어서 재 지내고 굿을 했지. 흥, 효험은 무슨! 너그 아배 그때부터 저 뒷도랑 가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하늘만 바라보는 거야.
- 서쪽하늘?
- 그래, 덕소 있는 쪽이지. 내가 뒷도랑에 가서 너그 아배 앞에 엎드려 빌고 또 빌었다. 여보, 화선이 아부지, 덕소 양반, 내가 잘못 했소. 내가 죽일 년이오. 내가 당신 속이고 돈 챙겼소. 날 죽여 주시오. 내가 지옥에 떨어질 년이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와 당신이 이러고 있소? 제발 좀 일어나시오. 우리 화선이 불쌍치도 않소? 내가 이렇게 빌지 않소? 죽으라면 죽을테요.
- 아부지가 뭐라캤는데?
- 빌고 또 빌어도 소용 없더니 어느 날 이윽고, 멀거니 서쪽 하늘 붉게 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입을떼어 내한테 조용히 말하더라꼬. 나는 당신 하나 보고, 중미 당신 하나만 생각하고 당신 하나만 믿고 다 내삐고 왔는데, 내가 죄가 많소…. 저 해지는 산 아래 덕소에, 손발이 터지도록 고생한 마누라, 신발 하나 못 사준 내 딸, 울고 불고 매달리는 모녀를 뿌리치고 당신만 보고 내가 왔는데, 내가 이제 죄를 받소…. 내가 나쁜 놈이요. 죽어 지옥에 가도 낯을 들 수 없는 죄인이요. 중미한테도 죄인이요 윤소한테도 죄인이요.
- 치~, 화선이 싸질러 놓고 둘이서 잘들 논다. 윤소가 본마누라?
- 딱 한 번 그때 들었다. 그러고는 그 날부터 정말로 곡기를 완전히 끊던구나. 백방이 무효요 그냥 사람 앉혀서 죽이는 거야. 니 뒹구는 그 방에서 꼬박 이레를 굶고 나더니 너그 아배 한 많은 이 세상, 이 풍진 사바세상 떴다. 모진 사람.
- 저 방에서?
- 그래. 내가 너그 아배 거적데기에 묶어 놓고 덕소에 통보를 안 했나. 눈 감으면서도 못 잊어 하는 본마누라, 송장 치워 가라꼬.
- 어매도 부아가 났나 보네?
- 그래, 그래서 내가 흰 쌀밥을 못 먹는다. 도저히 목구멍에 안 넘어간다. 너그 아배 아무리 달래도 못 넘기던 그 밥알, 내가 너무 너무 굶어 가며 물 마셔 가며 아낀 밥알. 내가 몸 팔고 이름 팔고 넋을 팔았으면 팔았지 그 흰 밥알 못 넘긴다.
- 덕소에서는 정말로 사람이 왔나?
- 알 게 뭐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적데기에 둘둘 싼 채로 남겨 놓고 내 니 손 잡고 집을 안 나섰나. 원수 갚는다꼬 곧바로 읍내 장진각으로 안 갔나. 이 더럽은 몸, 팔릴 때까지 팔아 보자꼬. 그보다도 우선에 묵고 살 게 있어야지. 니하고 둘이서 칵, 칼 물고 죽어뿌자고 마주 앉기도 했다만. 열흘 후에 집에 와 보니 다 치워 갔데.
- 내가 몇 살이었는데?
- 다섯 살. 그런데 이 년아, 피가 그런지 보고 듣는 게 그래선지 네 년이 열 살도 되기 전에 기집 티를 내는데 열 다섯에 벌써 온 고을이 짜하게 바람을 피우니 내가 아무리 묵고 살라꼬 노류장화 노릇을 하기로서니 얼굴을 들 수가 있나! 니 년이 나이 스물에 이미 화류계 기집년으로 떨어진 게 다 니 팔자요 내 팔자다. 그나저나 이년아 춥어 얼어 죽을따. 칠바구더러 어여 마른 나뭇짐 한 짐 부려 놔라 캐라.
- 아이구베룩이 간을 빼 묵지. 나이 마흔 넘긴 퇴기 오화선, 마지막 남은 논두렁 기둥서방 너무 기대하지 마셔용? 왕년의 황진이 울 엄마, 헛다리 짚은 미스 영포, 눈물의 여왕 미스 송촌! 장진각 1대 마담 퇴기 어멈 왕퇴기! 중미 중미 사중미, 우리 어매 부라보오~!!
- 육시랄 년…!
201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