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나의 소묘
홍문숙 시휘집
소소리 문학
自序
유월 초순 이틀을 골라
몇 편의 시를 묶는다
낯선 이동들을 필사 한다
내 몽환의 자술서, 오래 잠재 된
기억들을 불러내어 잠을 미루고
또 한 권의 시집을 낸다
시간, 나의 소묘
서평도 없이 무작정 묶는다
2015. 유월, 홍문숙
序詩
오래 된 날들의 안쪽은 푸르다
기억들의 저장고다
사연들이 밀실로 옮겨지는 사이
봄이 지나쳤고 우기가 시작될 무렵,
잃어버린 우산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또 하나의 우산을 구입해 구깃, 접어
한 켠에 놓아둔다.
몸은 쇠하고 정신만이 푸르른,
저장된 목록들을 써내려간다
이미 여름이다
2015 . 6. 3
목록
자서
서시
1부, 붉은 계절
산책, 민들레의 날들을 돌아보다
한낮에 문장을 훔치다
방축리, 잠깐의 말들
탈고되지 않을 은유 4
붉은 계절
시간이 보인다
4월의 시간
햇살 4
봄날 3
봄의 불문율 2
전철 안에서 3
전철 안에서 4
전철 안에서 5
칸타타 2
옹이
목록
2부, 식물의 시간
途中 2
바다
땅끝 2
그녀 2
진홍색 팔레트
능소화 2
화홍문 3
식물의 시간 2
식물의 시간 3
또 다른 날 3
안개, 가끔은 낯설어지는 그 이름이
인연 2
인연 3
유월, 통복천을 걷다
우기 3
매미
새로운 흐름 4
목록
3부. 시간, 나의 소묘
사과
선물
천일홍
너,
그네
백합
달맞이꽃
꽃들에게도 門이 있다
9월,
외출 9
시월 2
시월 3
시월 5
시간, 나의 소묘 1
시간, 나의 소묘 2
습관이 있던 자리
철지난 역설
목록
4부, 환절기
窓, 허구를 말하다
롤러코스트
잠, 잎새
도시의 길 - 은행나무 길 3 -
길 2
배꼽
풍경 2
가끔 가끔은, 이라는 말
환절기
겨울이 바람에 헐린다
문장
신춘문예
칼
퇴화된 풍경 하나
맺음말
1부 , 붉은 계절
산책, 민들레의 날들을 돌아보다
길은 늦겨울 한 때 끊어졌었다
그러나 그 안 어딘가에 남아있을 신열의 발자국들
발자국이란 멀리 떠나기 위해 남겨놓은 비표 같은 것
그 속에서 나는 한없는 졸음이었던,
봄이 다시 태평산 오솔길로 모였다
한 치의 햇살을 늘리고서야 아침을 붉힌다
어느새 민들레, 저 노랑의 어느 쯤에 홀씨들을 모아들이고
한 모퉁이에서 유리조각처럼 빛나기도 하는,
오후 4시가 되면 알게 된다
지상에서 끝내 남겨질 햇살과
이튿날 되어 질 날짜들이, 그러나 나는
더 먼 곳의 기억들을 미루어둔 채
찻잔 속의 깊이만한 햇살 속으로 들어가거나
한 낮의 잎들이
회상의 밑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길을 걸으며,
나는 민들레홀씨들의 비행飛行을 쫓아
저 방축리언덕의 오솔길 따라 걸어가고 있다
* 태평산 , 평택 방축4리 33년간 머문 두 번째 주소지.
한낮에 문장을 훔치다
사생활 속에 거주하는 문장들이
한순간 꽃을 에워싸는 듯
때론 지상의 그늘들을 끌고가
나무 위를 오르듯 공허 속에 잠긴다
둥지를 빼앗긴 계절과
그 고뇌의 텅 빈 무게를 지상 저쪽에 유폐하곤
쓸쓸한 목소리로 미행하는 일,
길을 잃은 상념들이 내 몫의 과거가 되고 그리하여
세월 저쪽에 다녀오는 새가
그 나무를 잊지 않고
푸른 폐부 속에 꽂히는 것도 방금 전의 일,
세월의 활자들을 다듬어
줄곳 직립의 시위를 당겨왔을 한낮에 문장을 훔치다
새로운 흐름 4
구운 비스켓처럼 바삭 부스러지는 햇살들
칠월을 끌어안고
빌딩의 그림자를 지우고 있는,
핸드백 속의 행방들은 권태이거나
낯선 식욕이어도 좋을 한때다
누군가 소지품을 뒤적이다 불쑥 소나기를 꺼냈고
가뭄은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무수한 날들을 어떠한 욕망도 숨기지 못한 채
이곳에 이르렀다
나를 미행하던 고독은 며칠 전의 모퉁이에서 결별을 했고
모든 추억들은 자고나면 그뿐,
어떠한 소문도 이곳에 이르면 나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죽음에 대한 지식이 나약해졌다는 것
이 도시에서
나 얼마동안 그 허물을 배우기 위해
이 고립된 법칙 속을 헤매어왔던가
문명, 나는 그동안 그 곳을 폭포처럼 뛰어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조명 속에서 스텝을 밟거나 땀에 젖은 어깨를 부비기도 했지만
새로운 나와 도시는 다시 흐름 속으로,
방축리, 잠깐의 말들
오래 된 집은 홀씨들의 생애인가
망각들의 거처인가
몇 주 전의 방축리,
집 뒤 언덕이 봄빛으로 푸르다
쑥들과 불안한 바람
한 치의 햇살만으로도
그곳에서 나는 한없는 꿈을 꾸곤 했지
저녁에서 밤으로 기울어질 때의 노을은
눈이 부셨고
4월이 오면
재래시장의 모종들을 끌어모아
텃밭을 가꾸는 일도 금지되었다
이제 어떠한 체험도 그곳에선 이룰 수 없는,
마치 호흡 속에서 옛 추억만을 뒤적이는 일과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
오늘 불현듯 따뜻한 체온 하나
민들레 홀씨,
내 生涯의 두 번째 주소지를 떠올려본다
탈고되지 않을 은유 4
이곳의 소금들은 좀 더 다르게 굳어왔다
태양의 조명도
사람의 슬픔에 의해 굳을 것이다
태양은 슬프지 않다
낮은 곳
누군가의 눈물이 하얘졌다
고단한 내력에 대해 들추려하지 않는다
교회로 오르는 길은 늘 가파르고
목련이 고통을 하얗게 물들일 때면
눈물,
이 땅의 가마득한 아래로 낮아질 것이다
붉은 계절
4월 초
거리 저쪽은 빨간불이다
이쪽에서 가려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가시밭길, 성서 속 시련들도 저런 것일까
그렇다면 치매에 걸린 똥을 치우는 일엔
가시가 돋아 있을까
겨우내 묶여 있던 나무속에서
말씀들이 돋아나는 일이 사나흘 늑장을 부리는,
꽃샘추위 끝에서 빨간불은 속죄다
파란 위선을 택하지 못한
아직은 치매에 묻은 양심이다
당신의 잃어버린 세월을 손으로 모아들이는 어머니
어머니는 일생 명치끝에서
빨간불과 파란불을 수도 없이 꺼내셨다
나는 한동안 어머니의 똥을 받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똥은
그녀 자신의 파란불인가 빨간불일까
4월 초 어머니의 삶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내가 똥을 누듯 닦고 씻는 그 붉은 봄날 오후,
시간이 보인다
빠르게 흐르는 통복천通福川, 또는 내 숨소리는
시간이다
아, 아니다 시간은 본시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시간을 허울로 만든 것처럼
양수를 등 돌린 배꼽 같은 것,
나는 매일같이 시간을 깨운다
눈곱을 떼고 아랫배를 어루만지거나
마지막 분량의 치약을 짜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잘도 흐른다
내게 경전이 되었던 시침소리의 심장은
노을에 물들거나 푸른 새벽이 되는 일,
나는 습관처럼
창 밖 4월의 살구나무를 살핀다
4월의 시간
내가 아는 한 그녀의 삶은 9시 뉴스 속에서 나누어진다.
그녀는 어느새 오래전의 자신과 뉴스 속의 세상에
샴쌍둥이처럼 달라붙는다
한쪽으로는 TV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한쪽으로는 과거를 향해 혼잣말을 중얼 거린다
도통 끝나지 않을 두 개의 세상
한쪽으로는 강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한쪽으로는 사막을 으적으적 들이킨다
자정 저쪽의 시간을 몽유처럼 떠돌며,
어미의 항문, 낮 하늘엔 별이 뜬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똥이 오후 2시가 되면서
부피를 드러내고 있는 한때,
그래그래, 알아들을 수 없는 타이름을 하면서
가끔씩 어머니는
동물성 이야기를 똘똘 뭉쳐 내보내기도 하지만
초저녁의 발치께론 이따금씩 식물들의 행방을 전해주기도 한다
세월의 무게 몇 줌 나에게 건네주는 날
4월이 또 다른 걸음으로 휘어지고 있다
햇살 2
아침이 오자
햇살이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오후의 풀밭으로 뛰어나간다
풀밭의 바람들이 빠른 속도로
옮겨지고 있고
나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듯
못이 박힐 수 있는 한 가슴을 풀고서
한동안 뜰에서 웅성거리던 햇살들이
내 안으로
그 침묵의 깊이만큼 자라고 있다
봄날 3
아직은 그리움이 남아있는지
노을 지는 날이면
내 마음도 서녘하늘을 본다
되살아나는 이름,
들꽃으로
그렇게 떠나보내지 말아야 했다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우두커니 입 속의 말들을 잊고서,
누군들 안 그러랴
내가 너의 가장 먼 바닷가 가장자리
노을 앞에 서는 일로 잊혀진들
너의 저녁을 잊을 수 있는지
오늘도 나는 저문 들녘에 서서
너의 이별을 듣는다
봄의 불문율 2
8톤 트럭의 매연이 덕지덕지 낀
아파트 턱 밑
주눅 든 텃밭에 녹슨 보습을 들이댄다
이제 씨앗들의 미래는 금속들에 맡겨야 하는,
곧 화학성 물이 흐를 것이고
싹이 돋아날 즈음 잦아드는 황사 속에서
풀꽃들은 이동과 응시를 반복할 것이다
번화한 길에 버려진 햇살들이 흩어지고
누추한 그늘에도 변혁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4월의 바람 탓은 아닐까 아니 비가 내린 탓이다
움이 돋는 봄날에는 나비 같은 내 옷도
그처럼
지상의 날들처럼 가벼워진다
전철 안에서 3
전철 속에서의 화장은 낯설다
칸과 칸 사이 몇 걸음 앞의 화장과 몇 걸음 뒤의 화장이
저마다의 세월을 길게 긋거나
입술을 새기는 사이에도 청춘은 몇 개의 간이역을 내려놓거나
태양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잘도 지워진다
그리고 그 속도의 어디쯤엔
아랫배를 쾌청하게 내보이고 있는
젊은 여자의 사진도 하나 끼어있다
그러나 권태는 길다
그 권태를 막기 위해 요구르트를 얼마나 마셔댔을까
오후에 좋다는 약들을 얼마나 많이 찾아 헤매었을까
지금 쯤 내 인생은 내 몸속 어디까지 내려갔을까
이젠 식물도 나오지 않는 나의 위치는
태양보다 더 까마득한 과거를 발버둥치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행방의 끝에서 변비와 만나게 될 것이다
전철 안에서 4
더부룩한 안으로 들어간다
스카프가 조이고 속도의 안쪽에 겨우 걸친다
그나마 손잡이를 끌어당기며 세 정거장 쯤,
콩나물시루 사이처럼 끼어 있던 누군가의 대화들이 벗겨지고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한 사람들이 사이사이 메워진다
서서 붙들린 신열들이 열애중이고
내려다보는 사람과 눈길을 나누던 건장함이
그 대화에 한쪽 다리는 반대편까지 뻗어있는,
어느 자리에선가 대화가 바깥으로 실종되기도 하고
저 편 수다들이 안쪽까지 드러나는 사람들 틈은
한가함 속의 전쟁이다
그러나 더운 기억 속을 빠져나오려면 아직 멀다
달리는 속도를 재촉하며 사각의 시간 속 일탈을 꿈꾼다
전철 안에서 5
전철 안 수면제는 노인들이다
노인들 몇 만 들어차도 그 안은 아교처럼 단단하다
누가 잠든 척 하는가
알약처럼 넘긴 잠들이 쏟아지는,
누구도 깨어날 기색이 없다
이곳의 현상들은 사각의 시간 속이다
가끔씩 초행의 태양은 전철 바닥에 깔려
은전 몇 개로 쓸쓸하게 떨구고
덜컹이는 리듬에
모두 고개를 가슴에 묻거나 끄덕거리는,
태양의 분실물은 그 밖에 많다
잠 속에 기억들은 잊혀지고
소란함도 기쁨도 정지된
무표정의 풍경만이 그려지고 있다
칸타타 2
무수히 비워지는 의문들
모든 생각은 노을을 꿈꾸다가 그리움 하나 파헤친다
시간 저쪽의 의문들은
삶의 무게를 저울질 하던 저묾 또한
느긋함과 가벼운 상념들이 떠다녔다
언제던가
며칠째 이별 속으로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고
열리지 않는 허망의 두께들이 녹아들던,
계절이 나른한 향기로 피어나고 바뀌는 사이에도
혀 끄트머리쯤에서 묻어나는 사건처럼 칸타타,
욕망의 이름들이 한동안 입안에서 머물다 사라진다
나는 오늘도 하루가 저무는 태양의 그림자를 넘겨다보며
유월 늦밤의 갈증을 녹인다
옹이
저 소나무
오랜 시간이 한 마디 잘려나갈 때쯤
옹이, 자꾸만 새어나오는 눈물인가
어떤 이별이 제 심장에 들러
저렇게 못이 박힐 수 있는지
습기의 유월을 지나
칠월의 우기에 점령당하고
느슨해진 관절들을 말리지 못한 채,
옹이들은 뒷걸음질 친 나무의 후회다
나무들의 도주로다
그해 봄에도 햇살이 찾아들지 않았고
잊혔던 유월의 생애에 기억 몇, 단단히 박힌다
봉인되지 못할 상처의 입구에 돋아난 침엽들이
바람에 미동도 없이 마디마다 맷집만 불리고 있다
2부, 식물의 시간
途中 2
떨리는 목소리로 권하는 소주를 순종하며 마셔야겠지
어느 순간은 그만 마시겠다고
고독은 뿌리쳤지만 나는 떨칠 수 없다
노곤한 음성들을 어깨에 묻히고서 쓸쓸히 되돌려져야 겠지
돌아오는 내 발굽만이 딸깍거리는 투정을 애써 숨기려 했던,
그런 건 아닐까
뒷짐 지고 있던 사연들이 고개를 들어
뜨끔하다 문 한번 닫고
민기적 왔다가 사라진 우연처럼
이번 만남이 마지막 인줄도 모른다고,
떡갈나무 잎들 위 달은 낡은지 오래되었고
흐릿한 그림자를 닫고 들어간 우리들의 사연은
새벽녘이 되고서야 그만 마시겠다고
보름달을 갉아먹던 생쥐 하나가
은밀한 개벽이 눈이 부신지 천길 미궁 쥐구멍 속을 찾는,
잠깐 들린 바람은 이슬을 털어내고
방문한 햇살에게 문을 열어주고는 조용히,
나는 그 탈고되지 않을 밤의 역사와
술잔을 깨우지 못하고
새벽의 나뭇결들이 움켜쥐고 있던 비밀을 열고나온다
바 다
급히 돌아오는 길
문 앞까지 그가 밀물로 돌아오고 있다
저녁이 되어 노을에 쫓기듯
바닥 드러난 세월을 가로질러 주름진 발길로 다가오고 있다
저벅저벅 물결 저쪽 한 낮의 사연들을 애써 숨기며
후줄근한 깊이로 뻘을 빠져나오고 있다
바다의 속도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새기는 발자국들은 난감하다
불안이란 늘 벗어 놓은 지 얼마 안 되어서도
급격히 허둥거리는 의심들과 같다
그가 빠져나오자 짐짓 분주해지는 발자국들의 초조
지금 물살 저쪽 한낮의 사연들을 애써 발자국으로 벗어놓으며,
물살 저쪽에서
또 다른 심연 속을 서성거리던 한 사내가 지금 돌아오고 있다
의심에 퉁퉁 불은 한 사내가 저녁이 되어
한 낮 저쪽의 알 수 없는 비밀들만 이끌고서
저벅저벅 빠져나오는 것이다
마치 썰물하고라도 싸운 듯
흰 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거느리고서
공복 같은 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럴 때 내가 켤 수 있는 건 어둠인가 등대인가,
땅끝 2
바다로 간다
내 이름 모를 날들의 권태를 일으켜 세워
모래를 밟는다
밟을 때마다 묻어나는 낯선 감촉의 시간들
등 뒤 어디선가 방금 전 매점으로 몸을 숨긴 듯
청춘이 기척을 내고,
바다를 걸어가는 한 사내가 있다
이별을 만나면 바다만 만나도 가라앉지 않는 사내
그리움의 끝, 내 안 그 사나이를 꺼내기 위해
스무 해를 넘겨도 그 바다를 마시고 있다
그녀 2
또아리를 튼 꿈, 온 몸이 다리다
본시 그녀의 말들은 늘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러나 어느 길속으로
세상 저쪽의 탐욕이 걸어들어 오는지는 알 수 없다
차갑도록 푸르던 계절의 잠들은 그리고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
4월의 사악함에 비루한 은유의 또아리를 가르쳐 주던,
이제 다시는 길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부려 놓은 그 꿈의 궁금증을
애써 저녁의 촛불 속에서 심지로 돋을 뿐
오후의 사람들이 불씨 하나 못 건지고
밤의 저쪽으로 사라진다
어느 날은 어쩌다 그녀가 허물을 벗는 까닭은
꽃들의 아집이 제 몸을 벗고 짐승이 되지 않는 까닭이고
성서 속의 말들이 미끄러운 까닭도
저녁의 사람들이 붉은 갈피를 훔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의 구름들은 이미 상해버렸다
이제 어떠한 추락도 허락하지 않는 계곡과 몇 침식지들
그리고 상수원 저쪽의 땅 속에 심어진 꿈 몇,
4월의 햇살 속에 움트기 시작했다
진홍색 팔레트
봄날이었을까
길 건너편 작은 포플러 잎들은 낮의 음모를 이끌고
오후를 푸르게 물들이곤 했고
향기롭던 수선화 꽃잎들이 하늘거리던 날도
물감을 풀어놓은 듯 어린 날들이 손끝으로 몰려들었다
내게 준 선물
그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물건이었을까
먼 세월을 돌아와
서재 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추억을 꺼냈다
녹슨 시간이 담겨진 진홍빛 팔레트,
칸 마다 짜놓은 물감들은 화석처럼 굳었고
갈라진 틈으로 먼지를 덮어쓴 채
이제야 묵언의 날을 전하듯 마른 흔적을 들추고 있다
좀처럼 묻어나지 않는 기억들
누군가와의 대화를 끝낸 후 마음이 하얘졌던,
나는 붓을 들었고
그 번지기 쉬운 회상의 언저리부터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능소화 2
나는 자유를 버리고서 문, 하나 얻었다
방황을 내쫓고서
쉽사리 돌아보지 않는 세월의 把守꾼이 되었다
화홍문 1
무지개,
그 門 앞에 서면
잊었던 푸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한순간 멈출 수 없던 그때 그 순간의 호흡들,
그렇다면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갈 열쇠는 어디에 있는 걸까
발소리를 낮추어도 밟히지 않는 나의 어린 날들의 기억들
단절의 시간들과 화해하고 싶은 날이면 화홍문에 간다
태양이 먼저 도달한 곳으로 간다
미동도 없이 묶여있는 저 그늘과 소소한 바람
빛바랜 단청처럼 그리고 나,
다시 돌아와 보면 화홍문, 그대로 서 있을 것이고
언젠가 그곳을 떠날 것을 나는 짐작하며..
문을 나서면
바람의 바깥엔
무수한 아이들이 버드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식물의 시간 2
마루 끝의 햇살이 돌아오고
그 안, 오래 전 멈춘 괘종시계의 시간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시간 앞에서 나는
늘 초식의 계절을 돌아 나오는 반추동물 같습니다
아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낮 졸음들의 부족 같은,
그렇게 또 봄 내내
닳지 않은 나른한 심지 하나 돋우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을 듯 합니다
현미 녹차가 산수유처럼 노랗게 배어나오는 한 때,
바람만은 제법 소유하고 이곳의 햇살은
동쪽 산맥에서 콸콸, 쏟아져
사철 저쪽의 들판을 적시곤 했고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땅의 문서 한 조각도 없지만
한 뼘의 뜰을 서성이는 일은 새롭고
오늘도 나의 체온을 덥혀 줄 햇살 한줌 쥐고 있다
식물의 시간 3
좀처럼 움직일 수 없는 더딘 흐름들
고도로 사회적이며 독특한 삶이다
식물이 그러하듯
태양의 시간, 빛이 지배하는 사월이 소생한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를 넘긴 식물들은
곧 뜨거운 여름을 맞는다
세상의 어떤 대지가
수천 개의 심장을 꺼내놓고서
죽음의 묵시록을 쓰지 않으랴
나 또한 누군가와의 작별이
다시금 봄이 되어 푸른 심장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겨울이 필요했던가,
모든 늦가을은 중요하다
에너지 비축과 생존 대비는 철칙.
동면을 맞아 버려야 사는 것들,
겨울이 끝날 때까지 게다가 이맘때면
더 이상 버릴게 없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나는 유월의 햇살 아래
깊어지는 고요의 숲으로 간다
또 다른 날 3
4월의 서점 한 켠
너의 심장이 켜지고 그때부터 봄은
고스란히 남아 시 몇 편만이 읽히고 있는,
봄에 사랑을 완성하려 했던 과오가 얼마나 무모 했던가,
사상을 바꾸려던 광기 어린 사연들과 또 다른
충고들에 대해 나 그대의 말들을 쫓아내곤 했다
가끔은 만취가 되지 못한 저녁술에
내 오래 된 사회주의는 몇 개의 단어와 시간을 들쓰고 있는 사이 봄이 지나쳤고
어느 여름으로 가는 모퉁이에서
기억의 냉정에 붙들릴 때마다
그대를 떠올리긴 했지만-
문득 보이지 않아야 더 오래 남는 기억처럼 그러나
가을이 오면서 그 사랑, 잊어 갈 것이다
안개, 가끔은 낯설어지는 그 이름이
돌이켜보면
잠시 바람으로 머물고 싶었던
낮은 날들의 방황彷徨 그리고
기억에 체류된 몇 개의 안개일 뿐,
내 외출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더 이상 감성도 돌려주지 않았다
머물던 기압골이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는지 더는
열리지 않는 입이 야속한지 콸콸,
메케한 촉촉함으로 유혹하는 안개
몇 걸음만 걸어도 안개 때문에
그 해변에 가는 걸 포기 했지
어차피 안개란 살 肉만 발라내면 오후가 되기 전
생선뼈와도 같은 것이고
어느 낙오 된 시간의 풍경과도 같은 것
가끔은 낯설어지는 그 이름이
안개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인연 2
우기가 시작될 무렵
잊고 지낸 생일이 떠내려 온 것은
나의 중년이 아직도 외출을 머뭇거리기 때문일까
그러나 생일은 내가 바깥을 떠도는 사이에도
집 안을 눅눅하게 서성였을 것이고
때로 우울이란
세상의 노후를 팔아 대신 구한 사막과도 같은 것
또는 햇살 대신 찾아드는 구름,
은반지 하나 샀다
스무 해전의 옆 사내가 건네준 반지 이후
우울 대신 은반지에 기대고 싶은,
새로운 인연의 약속 하나 끼워본다
인연 3
거리의 케롤송이 울릴 무렵
문득 너의 생일이
거리의 자선냄비 속 은전처럼 반짝, 눈에 들어온 건
크리스마스가 이 도시에 입성했기 때문일까
발걸음이 가파르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만남이란 늘 등 뒤에서 울리는 것
만남이란 먼저 와 있던 햇살 또는
금방 촉촉해진 눈물 같은 것
그리고 도시의 십자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일,
유월, 통복천을 걷다
오래 된 통복천을 걷는다
내 안을 들여다보는 토끼풀꽃들과
낮 동안 소인 하나 찍히지 않는
바람의 징검다리를 걷는다
언제부턴가 저 돌처럼
견고한 각오로 나 자신을 버티었을,
이 계절은 직립이다
물 속의 왜가리 한 마리 발목을 묻은 채
물의 흐름을 지켜본다
나는 유월의 通福川이
비수 같은 햇살들을 견디지 못할
시한부의 날들이라는 걸 짐작하며..
그러나 물의 목록들은
유월의 폭염에 미열을 앓고
길가 풍경들이 노랗게 그을리고 있는 한 때,
그 길모퉁이에서
행운 하나, 네잎클로버와 만났다
오후의 소나기가 갈증처럼 잠시 들렀고
나는 오늘의 늦은 약속하나 짚어보며
집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우기
망초꽃을 보았습니다
쇠잔함이 묻어 있는 것 같은
가끔의 바람 속에서 웃음 짓습니다
언제나 꼿꼿이 서서
빈 하늘을 넘겨보는 듯한
노모는 치마속바람이 불때마다
칠월의 이름을 떠올려 하얀 기억의 안쪽을 봅니다
망각 저쪽 푸른 계절의 그리움 여럿 세워놓고서
우기의 깊이에 하얗게 흐려지는 날
치매의 세월 저쪽이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바람의 어느 오후,
비틀거리는 망초꽃 하나 곁으로 다가서 봅니다
매미
매미소리가 나무를 달구고 있다
대추나무의 뿌리가
잎새들의 안쪽에서 파르르 들비치고,
그러고 보니 저 매미는
해마다 대추들에게 사서오경인 셈이다
때 이른 더위 한철,
맴맴, 매미소리들은 여름 속으로 고립되었다
새로운 흐름 4
구운 비스켓처럼 바삭 부스러지는 햇살들
칠월을 끌어안고
빌딩의 그림자를 지우고 있는,
핸드백 속의 행방들은 권태이거나
낯선 식욕이어도 좋을 한때다
누군가 소지품을 뒤적이다 불쑥 소나기를 꺼냈고
가뭄은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무수한 날들을 어떠한 욕망도 숨기지 못한 채
이곳에 이르렀다
나를 미행하던 고독은 며칠 전의 모퉁이에서 결별을 했고
모든 추억들은 자고나면 그뿐,
어떠한 소문도 이곳에 이르면 나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죽음에 대한 지식이 나약해졌다는 것
이 도시에서
나 얼마동안 그 허물을 배우기 위해
이 고립된 법칙 속을 헤매어왔던가
문명, 나는 그동안 그 곳을 폭포처럼 뛰어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조명 속에서 스텝을 밟거나 땀에 젖은 어깨를 부비기도 했지만
새로운 나와 도시는 다시 흐름 속으로,
3부. 시간, 나의 소묘
사과
누군가에게 얻어온 사과
며칠 소홀한 사이 안이 쪼글해졌다
그 많던 풍부함은 어디로 달아났을까
내가 그녀를 그리워할 때마다 수분을 줄였듯이
이 사과도 햇살을 그리워했던 건 아닐까
붉은 신열을 놓지 않았던 날들이 지나쳤지만
쉽사리 해맑은 사연 하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선물
내 오래 전 친구에겐
잘려나간 손가락 있다
그의 손은 그 이후
몸속으로 숨어있는지
좀처럼 세상 밖으로 내보인 적 없는,
잘린 손가락은 팔뚝마저 숨기고 있다
부끄러움이란 그런 것 아닌가
이번 토요일엔
포장하지 않은 선물, 하나 주고 싶다
꽃, 1000일 동안
- 천일홍 -
몸 속 머물던 한기가 빠져나가고
세상의 모든 햇살이 직립으로 걸어와
4월로 몰려왔는지 희미한
사연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봄은, 열꽃의 근원지
발열과 오한의 통로다
세상의 모든 열망은 꽃이 되는 일인가, 나는
천일동안 그에게 꽃, 이었다
그에게 초대된 날들은 다투어 봄이 되었고
계절이 바뀌고 꽃이 될 환영이 되는 사이
햇살이 흘리고 간 풀씨를 고르는 일도..
이젠
더는 깊어질 수 없는 사랑의 백치성,
나 꽃이 된 날들은 푸르렀을 눈빛과 서툰 고백과
가슴 한 켠 버리지 못할
이별의 경계를 차마 뒤로한 채
꽃이 될 수 없는
무중력의 크기만이 먼 허공 속으로 역류한다
너,
너에게 이르는 일은 모든 이에게 이르는 일,
눈 밑 그늘이 깊어질 쯤
저 뜨락 한켠에서 너,
서성이기 시작하고
내 기억들은 나무에 붙들려 있거나
먼 곳에서 찾아온 영혼
덜 잠긴 문에 끼어 있던 구름들을 밖으로 몰라내곤
아직 밝히지 못한 사연들을 조금씩 깨우기 시작 한다
얼마간의 날들 속에서
떠나간 너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리움이란 때로 태양의 첩자들이 숨기 좋은 그늘처럼
몸 속 깊이 자리하기도 하고 때론
음엄陰嚴하기도 한,
낯선 바람으로 헤매는 한 때
너, 그 이별 속이 환하다
그네
지난날의 멀미들을 타고
불가항력의 그리움을 탄다
4월의 하늘은 그러나 은폐되어야 하고
나는 매순간 새를 꿈꾸지 않아도 된다
바람을 꿈꾸지 않는 건
길이 될 수 없는,
지난 밤 이야기들이 흔들린다
부주의한 말들이 흔들렸고
깊이 칩거 중인 그가 흔들린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
그 위에서 기억을 탄다
바람은 없어도 된다
백합
한 때 백합으로 비유되던 친구가 있었다
흰 목과 좁은 교실 속에서의 움직임들,
3월의 교정에서 그녀는 화려했다
그 친구를 길에서 만난 것이다
좁은 교정 9월의 시화전이 떠나버린
길 위에서의 만남,
무수했던 미백의 기억들은 다 지워지고
치아 속에서만 겨우 버티는 하얀 과거들
그 순간 나는 오래 된 길에서
여전히 그윽한 백합의 그녀와 포옹을 했다.
달맞이꽃
크고 작은 모임들이 길을 잃은 채
저녁은 붉은 그리움을 들고 내 골방으로 왔다
달맞이꽃은 비를 맞으면서도 달을 찾고 있을까
지난밤을 밝힌 사연들이 서둘러
못들의 자국 속으로 잊혀지는 걸 느끼며
나는 경운기자국이 물살을 쥐고 있는 풀들의 기슭까지
내려다본다
한 사내의 가슴을 붉게 흔들었던,
그건 달빛 속이 적당한 것인가
그녀가 9월의 달맞이꽃을 지키기 시작했고
꽃들은 달의 이동을 따라 함께 수런대기 시작 했다
꽃들에게도 문이 있다
벤치 근처 우울한 날들은
그 꽃이 열어주는 만큼만 휴식을 담고 있다
낯선 이동들을 기다리기엔 지루하다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작은 움직임들 그러나
내 안쪽은 소란하다
바람의 이동, 나는 저항에 익숙해진다
어떤 꿈도 이곳에 이르면
새로운 열매를 꿈꾸지 못하는 구월은
이미 저장한 절망의 계절,
그렇다면 꽃이야말로 열매를 향한
가장 눈부신 자객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두렵다
이곳의 태양이 어느 열매 속으로 저물지 알 수 없다
금단의 의문만 익어갔고
덕지덕지 둘러싸인 계절이 통과하는 사이
나의 꿈들은 시들어 갔으며 불구의 아름다움만 넓혀간다
노을이 지기 전
나는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안쪽
햇살의 문을 조용히 닫는다
9월,
열매들의 생애는 대체로 싱그럽다
태양이 가까웠고
그을림이라고 여름을 못 넘긴 빗물밖에 없다
분만의 계절,
열매들에 들렀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몇 몇 햇살들의 대합실이다
바람을 쫓는 잎들은 아직 푸르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마음처럼 찬연한 9월,
돌이킬 수 없는 열매들이
지난여름의 자취들을 차곡차곡 뭉치고 있고
나뭇잎들, 뽀얗게 단장하고 비상할 준비를 한다
외출9
언젠가 무수한 시간을 모아서
지상의 미로가 되었던 김천이라는 추억의 한 끝을
들른 적 있다
그 빛나던 천 개 만 개의 길로 나누어지던 햇살과
미간 사이로 기억의 유통기한을 지나는 바람,
그러고 보면 모든 미완의 기억 속엔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불가항력 같은 것
뿌리를 놓친 감정들은 미로 속을 헤매는
수신자 거부대상이었다
바람이 함구하고 있던 태양의 부조리를 엿들을 때마다
쉽게 마르지 않는 기억 저쪽의 인연 하나,
그 푸른 인연의 문턱을 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저녁이 오면 푸른 멀미처럼 번지는 호흡들
무수한 익명 속으로 잠적하던 욕망들과
몇 개의 부조리한 즐거움도 있었으리라
오늘도 초라한 바람과 몇 줌의 현기증을 받아내며
중독 된 도시로 간다
시월 2
가을과 돌아온 국화와 햇살
어쩌면 구월의 종언 같기도 한
그렇게 또
天刑의 들길을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태양이 릴케의 생애를 따를 것 같은,
바람들은 그 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한순간 멈춘다는 건
그 문이 벽이 되었거나 망각이 되었다는 것
나는 오늘도 꽃에 이르는 절망을 배우기 위해
사람의 말들을 버리고 시골마을로 간다
시월 3
웃자란 계절이 되면
가을을 훔치려는 것들, 저처럼 분주하다
바람의 묵직한 발자국이 이곳저곳 찍힌다
길게 내려왔던 햇살 몇 올
지상의 심중을 더듬는 사이
나는 호흡의 넓은 잎들이 가슴 속에서 수런거리는 걸
애써 참아내며..
며칠 게을리 두던 환절기를 쓸어낸다
무심히 꽂힌 감잎들과 누군가의 기침 소리를
마당 끝으로 옮기며
하루만 게을리 해도 안마당까지 쌓이는 가을들을
따라 나선다
시월 5
무중력하게 흐르는 날들
몇 걸음 행방을 지불하고서야 새벽을 얻는다
밤을 지켜낸 별들이 빛나는 시월의 중순
추억은 꿈의 내력이라도 찾으려는 듯
푸릇한 광기를 드러내고
젊은 날의 힘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바람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식의 나날이라도 헤아리듯 낮게 수런거린다
이곳의 추억들은 때로 날카롭다
추억이 손목을 긋거나 내 안은 상처들의 곳간이다
내가 착각한 이른 9시는 계절 사이에서 속고 사는 듯
그곳에 매달려 낡아갔고
나의 발목은 아주 자유롭고 나무들의 뿌리는 그 보다 깊은,
내 평온이 무방비했기 때문에 부조리 했을까
시월의 언저리에는 그리움들이 핀다
내 가슴에 꽃물이 들기 시작하면
등 뒤의 날들은 무수한 이별이 되고
무수한 계절의 모퉁이와 후미진 안쪽을 서성여야한다
이 계절은 추억들이 내 안에 들어와 집을 짓는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월이 알레르기처럼 습관을 버리고서
저 아래 숲으로 우회되고 있다
시간, 나의 소묘
사과는 다급하다
푸른 열망과 붉은 이별사이에서
하루치의 태양을 어느 쪽으로 엎질러야 할지
쩔쩔 매고
사과는 줄다리기다
지난여름과 올 가을이
푸른 기억과 붉은 망각 사이에서
시간의 샅바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
그러나 시월의 햇살은 좀처럼 다시 깨어나지 않았고
이튿날이 되어도 빠른 몰락만이 지나쳤을까
빠져나간 상념들이
현관문 앞에 벗어놓은 껍질처럼 말라간다
열망은 가으내 내일이라는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또다른 누군가는
절망 끝에서 붉음의 내력을 건네줄 것이고
때론 아무런 성숙도 위로해 주지 않는
불면의 깊은 구석에서 외마디 체면들을 중얼거릴,
그리고 사과는 다급하다
방금 깨어난 또 한 무리의 햇살들이 내려왔고
나는 그 중 잘 익은 사과 하나를 따내어
윤기를 낸다
시간, 나의 소묘 2
시간은 다행이다
번민과 사랑이 그 속에 있으니
시간은 애증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어떤 시간이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겠는가,
애증처럼 따뜻한 해갈이 또 있을까
가슴을 저미는 냉정 속에 따스한 한줄기 그리움처럼
나는 어떤 새가
허공 저쪽 공백을 통과하여 날아간 것을 본적이 있다
시간은 절망이다
갈증과 갈망이 그 속에 있으니
그 낡은 초라함으로 다가온
여름에 곧장 직행하지 못한 햇살
이제 겨우 지상에 닿는 태양의 찌꺼기였을,
나는 어떤 새가
허공에 정지당한 채 날고 있는 것을 본적 있다
망각과 시각의 터널을 통과하여 노란 햇살이 들어차고
희망을 갖고서야
또 다시 나를 소묘 한다
습관이 있던 자리
낡고 오래된 냉장고는 이미 가전제품이 아니다
친정어머니다
집안에 숨겨놓은 은밀한 말벗
그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잠시 집을 비운사이
발효를 놓쳐버린 김치 국물이 줄줄이 외출을 했고
싼 맛에 떨이로 샀던 콩나물,
용돈을 깎아서 큼지막 재워놓은 육肉고기들이 부패를 시작하여
맙소사,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이십년 전 꽂았던 전기를 살피고
정전 흔적을 들춰봐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사태의 실마리
냉동실은 어떨까, 희미하게 짚이는 상온의 감촉
그토록 꽉 채워놓은 겨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계절의 또 다른 유실을 막기 위해
부리나케 여닫던 알뜰함도 무색하게
얼음을 놓쳐버린 맹물들, 맹추 같은 세월 이었다
믿음을 한번 꽂고는 다시는 의심하지 않은 채
따뜻한 얼음, 잘 발효된 말씀들을
어머니의 교훈처럼 덜어내며 지내온 날들이었다
그 불변의 관습이 오늘 고장이 났다
미리 예고도 하지 않고 흘러나온 무수한 유언들
플러그를 뽑고서
새로운 말씀을 신청하기 위해 가까운 대리점으로 전화를 건다
철 지난 역설
나는 그가 오래전 가을 숲에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동안 긴 방황 속에서 쉽사리 돌아보지 않던,
그리고 가을이 길다는 것을,
4부, 환절기
窓 , 허구를 말하다
눈 마주쳤을 때
넌 이미 네가 아니다
30년 전 아니 일억 년 전의 너였을지도 모를,
이럴 때 어둠은 너를 향한 유일한 창이다
한순간 내 지상의 언어들이 체적을 줄이기 시작하고
집 모퉁이 돌아오는 창으로 별이 뜬다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는 저 허공은
내 관념의 부피만 갖고는 욕망의 또 다른 부작용물일 뿐이다
가끔은 창이 어둠 속으로 밀려가 낯설어지는 이름,
선인장 하나, 퇴화의 날들을 더듬고 있고
슬픔은 여자를 불러들여야만 마술을 만난다
롤러코스트
말하자면 말이지 인생이란 롤러코스트 같은 것
어두침침한 도시 뒷거래와
골목 저쪽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되찾는 데도
저 롤러코스트가 필요하지
잠깐, 그러나 성급함은 금물이지
그 위에서 당신이 볼 수 있는 건 오래 전의 옛사랑,
가슴을 뒤집어서야 이룰 수 있던 사랑들과
나머지 고백들,
세월은 어차피 원심력일 수밖에 없는 일
사랑의 게임을 의심한다는 것
오늘도 나는 단순한 원심력과
복선의 사연이 금지될 바로 그,
롤러코스트를 찾는다
잠, 잎새
나뭇잎 하나에 매달려 있는 것은
바람들의 꿈을 일궈내는 것이다
훗날 누군가
그 잎 뿌리라 했다
나는 아직도
벌레들의 고향을 이파리에 두고 산다
대부분의 우화는 절망이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고
허리 굽혀 들어오는 햇살
호흡이 전 속력으로 빈사의 후미진 안쪽으로
구겨지고 있었고
잠을 걸친 잎새 하나
비상을 꿈꾼다.
도시의 길
도시의 모든 길들은 고흐처럼 고뇌다
가볍고 샛노란 움직임으로 흩날렸던 그해 가을은
수런거림마다 눈부신 나뭇잎들은
이미 태양을 열어 놓은 지 오래,
바람들이 고흐가 지나쳤는지 잎들이 난리가 아니다
이 거리로 햇살의 귀를 잘라내고 뒹굴기 시작한다
내 가슴 속에 겨우 말라붙어있는 환청의 귀 하나
햇살들은 수면제처럼 내려와 속살거리고
노란 질병들이 길을 따라 퍼지고 있다
길 2
우리들의 추억은 한때 끊어졌었다
계절이 지나칠수록 침묵의 길이 되었으며
때로는 잠도 오지 않았다
봄은 더디 왔고 기억의 날들은 길었다
그때 처음으로 목련이
검은 계절의 환영이라는 착각을 배웠다
다시는 어떤 기억도 빛나지 않았으며
부메랑이 되지 못한 길들은 그리움만 부려놓을 뿐
한낮에도 불면이 거주할 수 있음을 그때 배웠다
한 때 정지된 하루와 나무들은
안식의 나날이라도 헤아리듯 낮게 수런거렸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는 듯 푸릇한 광기를 드러내는,
이제 나는 젊은 날의 힘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절을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졌고
오래 동안, 침묵의 길이 되었으며 때로는 망각의 숲이 되었거나
어떤 기억도 예전의 그 길을 지나치지 못했다 이젠
지상의 쓸쓸한 그늘만이 넓혀가는 근시안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차츰 늦가을을 피해
단풍이 덜 든 도시의 변두리로 귀가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렇게 길은 길속으로 추억만을 받아내고 있다
배꼽
내 안에 노회老獪한 시계 하나 있다
수시로 허기진 짐작斟酌들과 졸음이 몰려드는 곳
한밤중 짧은 병증처럼 나를 불러내기도 하고
때 놓친 안일한 습관을 일깨워주는,
배꼽은 배고픈 것들의 여행지다
굶주린 추억들의 무덤이다
언제던가 긴 여행지에서 낯선 점심과
숟가락 끝에 머물던 몇 방울의 태양 그리고
이런 날 위장은 달팽이처럼 다가와
배꼽에 쩍, 달라붙는다
오늘도
때를 놓친 불면 속으로 들어온 라면을 떠올리며
달그락, 물을 끓인다
풍경 2
역驛으로 구부러지는 행방의 한 켠에
비둘기 하나 몸을 잃고 상징만 남은 채
날개와 몸의 일부가 서로의 경계를 더는 눌려질 수 없는,
평화의 부피 표면에 혈흔을 말리고 있다
저녁마다 무심히 쪼아 먹던 우울이거나 평온
구구구, 제 안의 울음들은 온데간데없다
낯선 행방이 저녁의 햇살에 부풀어 오를 때마다
제 몸을 날려 허공에 박혔던 기억들도
몸의 어딘가에서 망가진 지 오래다
그 길로 날개를 찾아온 듯한 늙은 여자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끔 가끔은, 이라는 말
가끔 가끔은, 이라는 말이
나를 끌어내어 바깥을 떠돌 때가 있다
낯선 곳에서 갓 구워낸 빵 냄새와
견고한 담장의 돌들,
야자수와 몇 줌의 소금으로
찍어먹기에 좋은 바다 풍경 그리고
커피와 들꽃들의 향기 속으로
나를 이끌 때가 있다
가끔 가끔은, 이라는 불온한 유혹이
공중의 태양을 네모지게 주저앉히거나
끝내 밤이 오지 않을 기억 속에
턱을 괴어줄 때가 있다
가끔은 가끔이라는 후추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곤
내 안을 화끈 뒤집어 놓거나 잠재울 때가 있다
환절기
오랫동안 자족의 평안에 들었었다
먼지 속을 부유하던 소음들과
저녁 한 때의 노을을 받아내던 때,
그래 자족의 평안이란 고독한 관습이다
낮은 거실에 들어있던 식물들이
달력 속의 날짜를 빠져나와
그늘진 베란다로 휘어지고
2월이 비워졌다
누군가 환절기는 미궁 속이라 했고
누군가는 감기 바이러스라 했다
한동안 나는
도시 반대편으로 핸드폰을 날릴 수 없고
불쑥 바람의 추억을 뒤적여도 안 된다
무심코 돌아보는 그리움과 체온 속을
당분간 단속해야 하는,
나는 오늘도 희미한 계절 하나, 꺼내고 있다
겨울이 바람에 헐린다
봄날이 어찌 들어찰 것이며
여름이 어찌 짓무를 것인지
계절은 결국 걱정에 불과한 일,
겨울은 그러나
아직도 성한 가지들을 고목 다루듯 눈이 내리고
벌레들의 고샅길 그 뒤 안의 사연이라도 훤히 꿰뚫듯
뿌리 속까지 들여다본다
때가 되면,
아직 읽혀질 수 없는 말들만 하얀 눈들을 받아내는 한 때,
모든 것들은 뼈에서 시작된 통증이다
눈은 그치지 않았고 그치지 않는 흰 무리 속에서
모든 발자국들은 망각 속으로 걸어간 것 빼곤, 하얗다
나는 계절이 다시 윤회의 습성을 되찾아
돌아올 날들을 떠나기라도 한 듯한
모든 필연은 되돌아보면 댓돌 위에 쌓인다
그 필연이 오늘은 분명 돌아올 것이라 짐작하며...
흰 눈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순간 마지막 이력서라도 내주듯
바람의 아귀에 헐리는, 삼월의 폭설
밖엔
눈 오는 풍경이 더 깊어지고 바람이 섞인 흰 빛 몸살을 앓고 있다
문장
내 어릴 적 문장 하나
물방울을 들어 올린 적이 있다
전기 줄 위이거나
비 오는 날의 수사들은 늘 호흡이 같았다
어떤 물방울이든 쉽게 떠나지 못했고
웅엄한 햇살의 푸름에 붙들리고야 돌아갔을,
추락의 안쪽을 더듬고
숲의 그늘로 깊이 들어갈수록 서늘함에 젖었던,
몸속에서 잉크가 마르고 있다
이제 내 나이의 남은 분량으로는
어떠한 사연도 쓸 수 없는,
나의 보잘것없는 것들과
푸덕거리는 갓 깃털 난 상상들
낡은 단어들만이 내 안에 들어차고 있다
신춘문예
지루하다
전화기 근처를 떠나지 못한 채
연말, 연말을 보내는 일은
해마다 소식과의 사투다
오래 전 마신 고뇌는 오후가 되어도 소화되지 않고
가까운 용도의 안부 몇도 피할 수 없었다
당선소감 먼저 건드렸던 게 문제였을까
제목들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을지,
칼
언제부턴가 칼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햇살 한 켠, 쌓이는 그 아스라한 무게의 어디쯤을
무심히 헤아려 보고는
아직 제 길을 열어주지 않는 날 속 깊이
당조짐 밀어 넣는다
벼리는 날들이 눈물일까 하다가
발목이 절여오는 무릎으로 몰려든 세월의 무게가 뻐근한지
삐걱, 일어난다
칼이라는 게 무엇이던 가
낮은 날들의 어떤 사연들을 도려내는 것 아니겠는가
무뎌진 세월들이 미수에 그치길 바라며
푸르스름한 오후의 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망각의 시간들은 길었고
회상의 순간들은 빠르게 지났다
지금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몇 번이고
시간 저쪽만을 매만지고 있다
퇴화된 풍경 하나
저녁이 오면서
신호등 저쪽을 망연자실 걷는 노인
회상이라도 심듯
나른한 지팡이는 모종하듯 천천히 옮겨지고
훅, 어깨를 들썩 인다
횡단보도에 이르러서는
세월을 수소문하지도 길을 묻지 않아도
떠내려 온 젊은 풍경들을 가볍게 헤치며
얼핏 끊어졌다 덧댄 장면처럼,
그러나 그는 불안에 있어서만은 어제 태어난 사람
며칠 전의 조문 길도 그에게 이제
전생의 일에 불과하다
새로운 패션의 죽음을 장만하고 있는
장의사를 지나쳐
아주 낡은 필름을 거리 저쪽으로 느리게
상영하고 있다
맺음말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이 동행 했고
그 어둠 속에서 등불 하나 만나
시를 묶는 일,
점점 투박해지고 쇠하는 정신은
초라한 날들 안의 푸념이거나
어쩌면 먼 옛날로 돌아가고픈 몸짓이거나
그 흔적들.
유월이 지나치기 전
미구의 문장들을 쓴다
허브 한, 그루 들여와야겠다.
2015. 6 단오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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