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한국 정치가) 운정[金鍾泌]
김종필(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부여 ~ )은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이었고 박정희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35살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하였다. 9선 국회의원(제6 ~ 10, 13 ~ 16대)과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三金)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지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중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으며,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하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정계 복귀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하여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2004년 18대 총선거 낙선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1971년 6월 4일부터 1975년 12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1998년 3월 3일부터 1998년 8월 17일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1998년 8월 18일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호(號)는 운정(雲庭)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생애 생애 초기출생과 소년기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주중학교[1]를 거쳐 1944년 3월 공주고등학교를 졸업[2]하고 1945년 4월 대전사범학교 강습과(講習科)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였다. 군인 생활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1949년 5월에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50년 6월에는 육군 대위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휴전 후 대위로 있을 때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에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2년 4월에는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8년 중령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하였다. 5.16 전후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하였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하였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였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되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1년 5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61년 7월에는 잡지 《사상계》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인 장준하를 불러 취조하였다. 1963년 1월에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하였고 중앙정보부장직도 사퇴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하였고, 같은 해 2월에는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정치 활동3공 시절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하여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 기록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명 혁명공약을 기초하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였고, 1962년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박정희의 공과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일협정의 실질적인 교섭을 담당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군번 13517)하였고,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했다가, 2월부터 정구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하였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8월에는 미국으로 유학, 미국 하버드 대학교 정치경제하계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왔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 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유신 시대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박정희의 견제와 반대 세력의 움직임으로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삼선개헌과 10월 유신에 협조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1972년 5월엔 PTP 명예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명예회장, 1974년 5월 5.16민족상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을 지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실권을 유지했으며,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3]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서울의 봄’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재산환수를 당한다.[4] 이후 타의에 의한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고, 1979년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를 지냈다. 야당 정치인유신 붕괴 직후1980년 5월 17일 새벽, 신군부 인사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당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8일에 신군부는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언론에 발표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모욕적인 대우와 감금을 당하면서 그는 전두환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경사령관 노태우 준장이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 존댓말을 쓰며 깎듯이 예우하였고 자주 그를 방문하였다. 신군부 인사 중 유일하게 김종필에게 깎듯이 대하자 노태우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린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알려 주었다. 자신의 고사와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2인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며 절대 일인자(당시 일인자란 전두환을 지칭)에게 밉보이지 말 것, 전두환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절대 서운한 표현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아랫사람과 주변의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 등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구 민주공화당, 유정회계 인사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금지가 해제되면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그를 총재로 받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5공 이후이후 1987년 정계에 복귀하여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삼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1990년 초 삼당합당을 통하여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하여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이 되고, 19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 대표위원, 김영삼 정부 초기에 다시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되었으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그의 견해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김영삼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되었다. 한편 차기 대선유력주자로 거론되었으나 노태우는 박철언을 선택하려 했고, 이후 김영삼 계열이 집단 탈당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선 예비주자로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였다. 1993년 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군부, 하나회 등 전두환 계열의 군부 숙청 이후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하였다. DJP연대와 국민의 정부 출범1995년 3월 자유민주연합 총재에 추대되었고, 1996년 4월에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일명 DJP 연합), 1997년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과 손잡고 DJP 연합을 하자 보수주의 세력에서는 그의 DJP 연합을 놓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일하다가 다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하였고,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이한동이 뒤를 잇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2004년에는 탄핵 역풍에 이겨내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하여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자,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하였다. 이로서 김종필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종결된 것이고 김종필은 대통령에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이후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자신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2008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했다.[5] 2000년대 이후 한성디지털대학교의 명예 석좌교수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6] 가족 관계
상훈
학위
저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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