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운면 지세포에 사는 주말순(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씨 모친) 여사가 지금은 사라진 고향마을을 회상하는 글을 본사에 보내왔다. 주 여사의 아들 고영화 선생은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가 지금은 사라진 고향 아양마을을 그리워하며 평소에 가끔씩 기록해 놓은 고향마을에 관한 글을 우연히 접한 뒤, 이를 동향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겠다는 생각에 신문사에 기고를 하기로 했다"며 글을 보낸 배경을 설명했다. 이 글은 고영화 선생의 모친이 초고를 쓰고, 고 선생이원본을 토대로재정리한 것이다. 대우조선이 설립되면서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옛 아양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글이 당시 고향을 잃어버린 이주민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사라진 옛 거제시 장승포읍 아양리에는 넓은 들판이 바다에 접해 있었고 아양1∙2구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2구에서 제일 큰 부락(마을)이 내 고향이었다. 고향 위쪽을 쳐다보면 높이 솟은 옥녀봉이 있고 마을 아래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조개 미역 파래 등을 채취하며 마을 앞들과 뒷들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양1구와 2구가 마주보고 있는 중간에 시내가 흘렀고 들판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 아양1구는 ‘관송’이라 불렀고 아양2구는 ‘당목’이라 했다. 동네에는 아주1구(장승포쪽 대우조선 동문)와 2구(아주쪽 대우조선 정문)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그 사이 포강(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였고 겨울이면 물을 빼버려 남자 아이들은 공차기를,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포강 바로 밑에는 벚꽃나무가 5그루 있어 여름이면 농부들의 휴식처가 되곤 했다. 우리 집은 제일 앞쪽에 위채와 아래채 초가3칸 집인데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터가 약 100평 남짓 되었다. 마당이 제법 넓었고 앞에는 남새밭(난서밭)이 함께 있고 뒤쪽 텃밭에 소를 매어놓은 두릅밭과 감나무 돌배나무와 포도넝쿨이 있었다. 사립문을 나서면 10m 거리에 두레박으로 길러 올리는 샘물이 있었는데 이웃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보리쌀도 씻고 빨래도 하고 물을 길러다 설거지도 하고 세수도 하고 했다. 하지만 물이 좋지 않다고 해서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동네에서 쭉 올라가면 옥연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주지는 양대원이었다. 그 절 아래 큰 찬샘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집에서 올라가는 시간이 왕복 약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아침에 물을 길어다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밥하고 먹는 식수를 사용하고자, 부엌에 큰 항아리를 놓고 하루 2번씩 나무통으로 만든 양동이(나무물동이)를 이고 물을 담아 이고 날랐다. 바위 틈사이로 펑펑 쏟아져 나오는 물이 겨울이면 김이 나고 따뜻하여 버선을 벗고 발을 물에 담그고 서답(빨래)를 하였으며 여름이면 발이 시려 길게 물에 담그지 못할 정도였다. 바윗돌로 사각 우물 형태로 만들었는데 가로세로가 1m를 넘지 않았다. 바로 아래쪽은 빨래터로 이용했다. 큰 찬새미 우물 주위 두둑에는 조선소나무가 한그루 넓적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샘물과 빨래터 전체를 덮고 있었다. 기억컨대 나무높이가 4m는 넘지 않았지 싶다. 샘물 앞에서 물통을 놓고 앉아서 물을 길어 채웠는데 그 소나무 밑에 긴 축대가 있어 축대 위에다 물동이를 들어 얹어놓는다. 그리고는 머리에 짚따바리를 올려놓고 나무물동이를 들어 머리에 이고 집으로 왔었다. 그 시절에는 장갑이 귀해 추운겨울 물동이를 이고 오면서 한손을 호호 불고 다시 바꾸어 다른 한손을 호호 불면서 다녔다. 또한 작은 찬샘이(찬새미)도 있었는데 두 찬새미 모두 옥녀봉 자락에서 솟아나온 샘물이었다. 큰 찬새미에서 작은 찬새미 쪽으로 갈려면 약20분 걸렸고 우리 집에서는 두 곳이 비슷한 거리에 있었다. 작은 찬새미는 큰 찬새미보다 물줄기가 1/3정도 되었지만 물 온도는 겨울이나 여름이 큰찬새미와 같았다. 다만 규모가 작아 물을 길어 먹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샘물이었다.동네 사람들이 큰 찬새미에만 다녔는데 나는 우리 논밭이 작은 찬새미 옆에 있었기에 논밭에 일하려고 갔다가 돌아오면서 나무물동이에 물을 길러 오곤 했다. 나는 찬새미에 물 길러 집을 나서면서 “정자야 춘자야 동년아 광자야” “찬새미 가자”고 부르면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같이 다녔다. 함께 어울리던 동무들과 좋은 물에서 씻고 떠들고 노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집에 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봄이면 친구들과 대바구니를 들고 쑥을 캐러 들로 나갔다가 친구들과 어울러 놀다보니 오전 내내 캔 쑥이 바구니 바닥에만 깔려있어 물을 축여 땅에다 칼을 꼽고 칼 위에 쑥바구니를 돌리며, “온 동네 할마시 이 쑥이 살아서 한바구니가 되게 해 주이소.”라고 한바탕 떠들다가 집에 오면 엄마가 “요년의 가시나 어디서 놀다가 이것밖에 못캐왔노.” 영락없이 야단맞곤 했다. 우리 마을 당목 뒤쪽에 아주당(신당)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을 거북산이라고도 불렀다. 바다에 던져 놓은 것처럼 길쭉하니 둥근 타원형의 산이었다. 산모가지에서 옥포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고 길 위에는 집들이 있었는데 길 아래 바닷가에도 ‘깨끄모실’이라는 동네가 있었다.(옛날에는 바닷가를 ‘깨끄시‘라 했으며 “깨끄씨 가자“는 ’바닷가로 가자’라는 말이었다.) 이 산에다 옥포대첩 이순신 장군의 기념탑을 세워놓고 1년에 한 번씩 제를 올렸다. 옛날 초등학교 소풍을 자주 아주당으로 갔는데 당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보였으니 높이가 50m정도는 된 것 같다. 산 한복판에 연못이 있었고 빙 둘러 철조망을 쳐놓아 들어가지 못하게 팻말을 세워놓았던 것 같다.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이 그 연못 속에 용이 산다고 했다.
내 나이 22세에 일운면 지세포로 시집을 와서, 봄가을이면 친정을 다녀갈 때면 당 위에도 올라가보고 친구들과 같이 찬새미에도 가보곤 했다. 그리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양1∙2구 전체가 대우조선소 부지에 편입되어 돈 몇 푼씩 받고 능포(옥수동) 언덕배미에 만들어 놓은 집으로 쫓겨나오듯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제는 내 고향 아양1∙2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요즈음 옥포 노인학교를 매주 목요일에 다니는데 고향을 지날 때마다 어디가 어딘지? 내 고향 집터가 어디쯤 있었는지도 분간하기가 어렵다. 사라져버린 고향땅을 지날 때마다 허전하고 텅 빈 내 가슴이 쓰라린다. 내 나이 벌써 76세, 까마득한 옛날 그 시절 그때가 그리워진다. 그래도 꿈속에서 가끔 어릴 적 뛰어놀던 그 고향을 만난다. 꿈에서라도 자주 볼 수 있어 다행이다.아양동에 예전에 "양대원"씨의 절 옥연암이 있었는데 절의 위쪽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마당 아래에는 숙식을 하는 초가(대나무와 진흙으로 엮어 만든 집)가 있었고 마당 가운데는 오래된 석탑이 안치되어 있었다. 스님 양대원씨와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 양문자 양문길 모두 4명이 절에 기거하였다. 해방 후 어수선한 시기 어느 날, 소위 ‘빨갱이’(좌익 무장공비 빨치산)들이 절에 들어와서 돈을 주며 하는 말, “담배와 술 한말 그리고 쌀을 사서 밥을 지어 놓으면 내일 와서 먹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장승포에 가서 부탁한 것을 산 후에 장승포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약속한 날에 경찰들이 완전무장을 한 후 그 절을 에워 싸 포위하였다. 양대원(스님)씨는 아이들을 미리 법당으로 피난시키고 부인과 함께 아래채인 초가집에서 빨치산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밥상을 들고 초가집 방으로 들어오면서 너무나 긴장하여 손을 심하게 떨고 말았다. 이에 빨치산 3명이 상황을 인지하였고 이를 눈치 챈 스님과 부인이 뒷문으로 도망가는데 그때 부인은 총에 맞고 스님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 순간 초가집은 벌집을 쑤셔 놓듯 사격을 가하니 공비 둘은 그 자리에 즉사했으나 한명은 부상을 당했다. 경찰들은 부상당한 한 명을 절 앞 큰 바위에서 총살하였고 그 바위에서 빨치산 3명의 목을 잘라 큰 대나무 장대에 매달았다. 그리고 본보기로 장대에 매단 머리를 들고 장승포 경찰서까지 걸어서, 온 동네를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매장 했다. 지금은 절터도 찬새미 도랑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빨치산 3명의 집은 아주∙능포∙느태 였는데 모두 우리 거제군민의 이웃이었다.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 국민들 사이에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이데올로기 열병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그 뒤 빨치산 3집안은 모두 육지로 이사 가야 했으며 그 후로 그 후손과 가족을 본 사람이 없었다 한다. 이 사건이 지나간 후 약 10년이 흐른 어느 해(1958년경), 아양리 동네 청년들이 산에서 소 먹이고 오는데 양대원씨 절간 옆길에 이르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때 법당에서 스님(양대원)씨의 이상한 염불 외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자야~ 길아~ 비 온다" "빼까리~ 갑빠 덮어라". "자야~ 길아~ 비 온다" "빼까리~ 갑빠 덮어라." 이 염불 소리에 두 아들이 뛰쳐나와 나무 빼까리에 갑빠를 덮으니 이를 본 청년들의 소문으로, 온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