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개가 불쑥 주유의 장막으로 찾아든 것은
주유가 거기에 대한 생각으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앉아 있을 때였다.
아무도 딸리지 않고,
그것도 밤이 깊기를 기다려 찾아 온 것으로 보아
무슨 은밀한 의논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주유는 그런 황개가 까닭 없이 반가워
자리를 권하고 말했다.
"공복께서 밤늦게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틀림없이 조조를 깨칠 좋은 계책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런 게 있으면 부디 내게도 좀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황개는 무장답게
말을 쓸데없이 늘이지 않고 바로 털어놓았다.
"적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오래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오.
어째서 불을 써서 한 번 공격해 보지 않으시오?"
"불을 쓰자고요? 누가 그런 계책을 공께 일러줍디까?"
화공 법을 쓰자는 말에 주유가 깜짝 놀라 물었다.
황개가 실쭉 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지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게 아니외다."
혹시 말이 새어나가 황개까지
자기의 중심 되는 계책을 주워듣게 된 게 아닌가 걱정했던 주유는
그 같은 황개의 대답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 대신 황개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게
새삼 놀라워 그의 늙어 가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견 때부터 손씨를 섬겨 온 노장.
어렸을 적 손책과 더불어 그에게서 칼쓰기를 배운 적도 있는 주유였다.
손견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움터를 누볐고,
손견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손책을 도와 강동에 터를 잡게 했으며
다시 손책이 죽자
이번에는 그 아우 손권을 위해 일하는 그의 충성을 높이 여기기는 하나
그 무렵 주유는 황개를 어쩔 수 없이
몸은 늙고 머리는 굳어 가는 장수로 보고 있었다.
그저 공 있는 원로로서 공경하며 대할 뿐 장수로서는
이미 한창 때를 넘긴 이로 알았는데 그 밤에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눈빛은 무언가 알지 못한 결의로 번뜩였으며
시들어 가는 줄만 알았던 근육도 어떤 투지 같은 것으로 팽팽하여 부풀어 있었다.
그 같은 황개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자
문득 주유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래 전부터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막연한 구상과 더불어 처음과 끝이 가지런한 한 계책으로 어우러졌다.
거기서 주유는 이상한 열기로
목소리까지 떨며 황개에게로 다가앉았다.
"화공법(火攻法)은 바로 제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 때문에 채중과 채화가 거짓으로 항복해 온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
우리편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화공법을 쓰려면 우리 중에 누군가가
방해받음 없이 조조군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도 사항계를 써야 하는데,
그때 조조를 믿게 하는 길은
채중과 채화를 통하는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아직도 사항계에 쓸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한 번 그 사항계를 맡아보겠소."
주유가 은근히 기다린 대로
황개는 미처 주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며 나섰다.
그러나 주유는 짐짓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아니 됩니다. 저쪽이 항복을 믿게 하려면
먼저 이쪽에서 그만한 고초를 겪은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나라의 어른 되시는 분으로서
몸도 젊은이들 같지 않으신 터에 어찌 그 같은 고초를 겪어내시겠습니까?"
거짓 항복을 상대편에 믿게 하기 위해
먼저 고육계를 쓸 작정으로 있는 주유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황개는 주유의 말을 듣고도 뜻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보다 한층 격양되어 자기를 보내줄 것을 고집했다.
"나는 3대에 걸쳐 손씨네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이외다.
설령 간과 뇌를 땅에 쏟고 죽게 된다 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처음에는 자기가 도맡아 치러야 할 싸움과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계책에만 마음이 쏠려 있던 주유였으나
황개가 그렇게 나오니 절로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황개에게 절하며
거짓 없는 마음으로 감사를 올렸다.
"장군께서 이 고육계를 맡아 주신다면
실로 강동 백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나 또한 죽어도 아무런 원망이 없을 것이외다."
황개도 마주 절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주유의 장막을 물러났다.
☆☆☆
그 다음날이었다.
주유는 북을 울려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동오의 장수는 아니지만 공명도 불려나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유가 여럿 앞에 나서더니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조조는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와 3백 리에 이르는 진채를 벌이고 있다.
하루 싸움으로 깨뜨려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제 도독으로서 군령을 내리는바,
모든 장수들은 각기 이끄는 부대의 석 달치 말먹이 풀과 군량을 마련하고
적과 맞서도록 하라!"
주유가 어제같이 진병을 재촉하는 손권의 전갈을 받은 걸
알고 있는 장수들에게는 좀 엉뚱한 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처 주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장수가 일어나 볼멘소리를 했다.
"석 달치 아니라
서른 달치 말먹이 풀과 군량을 마련한다 해도 일이 제대로 될 것 같지는 않소.
만일 이 달 안으로 조조군을 깨뜨려 낼 수 있을 것 같으면
빨리 싸워 깨뜨려 버리는 게 나을 것이오.
그러나 이 달 안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그것은 영영 조조를 깨뜨릴 수 없다는 뜻과 같으니,
차라리 장자포의 말대로 갑옷을 벗은 뒤창을 거꾸로 잡고
북쪽을 향해 엎드려 항복하는 길밖에 없소이다."
주유의 영이 못마땅한 장수들에게도 지나치다 싶은 말이었다.
모두 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는데,
얼굴이 시뻘개진 주유가 성을 이기지 못해 소리소리 황개를 보고 꾸짖었다.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쳐부수러 왔거늘 어찌 감히 항복을 다시 말하느냐?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맞서고 있는 이 마당에
너는 그 같은 소리로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였으니
너 같은 자를 목베지 않고서
어찌 무리를 명에 따르게 할 수 있으랴!"
그리고는 좌우에 있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호령했다.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 내게 가져다 보이도록 하라!"
황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성난 목소리로 주유를 마구 꾸짖었다.
"나는 돌아가신 파로장군을 따라 동남을 휩쓸고 다니던 때부터
이제까지 3대에 걸쳐 이 나라를 위해 싸워 온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온 놈이기에 주둥이에 노란 털도 벗지 못한 것이 나를 이리 작게 보느냐?"
그 말에 주유는 더욱 펄펄 뛰었다.
한편으로는 황개를 꾸짖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사들을 재촉해 황개를 목베려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장수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황개가 아무리 여러 대를 섬긴 노장이요,
공신이라 하나 상대는 방금 동오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도독 주유가 아닌가.
보다못한 감녕이 나서서
황개를 위해 주유에게 빌었다.
"공복은 우리 동오의 오래된 신하입니다.
도독께서는 그 점을 보아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주유와 황개가 짜고 벌이는 소동이란 걸 모르고 끼여들었으니
그 말이 간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주유는 그런 감녕마져 내막도 모르는 연극에 끌어넣었다.
"너는 또 어찌하여 여러 말로 내 법도를 어지럽히려 드느냐?"
그렇게 감녕을 꾸짖은 뒤 좌우를 향해 매섭게 영을 내렸다.
"여봐라, 먼저 이놈부터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내쫓아라!"
감녕이 동오에서 그리 낮은 장수가 아니었으나
주유가 워낙 불같이 설쳐대니 무사들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황개는 제쳐놓고 감녕부터 몽둥이질을 해 내쫓았다.
주유로서는 감녕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개에게 떨어진 불이 감명에게 옮아붙은 것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쨌든 황개가
그만한 잘못으로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감녕이 몽둥이질을 당하고 쫓겨난 걸 보았으면서도
장수들이 모두 주유 앞에 나가 무릎 끓고 빌었다.
"황개의 죄는 비록 죽어 마땅하나,
다만 그를 죽이는 것이 군에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도독께서는 너그러이 살피시어
잠시 그의 죄를 기록만 해두고 목베는 일은 뒤로 미루어 주십시오.
황개의 목은 조조를 깨뜨린 뒤에 베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를 받지는 못해도 우선 시간이나 벌어 놓고 보자는 생각들이었다.
그렇게만 되어도 손권에게 알리거나 주유 스스로 화가 풀어져
황개가 사는 길이 생겨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유는 성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모든 관원들이 한결같이 나서서 애걸하니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내키지 않는 목소리로나마 황개의 목숨만은 붙여 주었다.
"모든 관원들이 낯을 보아 네 목을 베지는 않으리라.
네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오직 그 덕분인 줄 알아라."
매섭게 황개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무사들에게 이미 내렸던 명을 고쳤다.
"목을 베는 대신 척장 1백 대를 때려 황개의 죄를 밝히도록 하라!"
하지만 척장 1백도 가벼운 형이 아니었다.
늙은 황개가 죽지 않고 받아넘길지가 걱정이었다.
이에 여러 관원들이 다시 주유에게 몰려가 빌었다.
"척장 1백은 너무 과합니다.
황개의 나이를 헤아려 주십시오."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주유는 제 성을 이기지 못해 앞에 놓인 탁자를 밀쳐 뒤집으며
몰려든 사람을 꾸짖어 물리쳤다.
☆☆☆
사람들이 움찔해 물러나자
주유는 날선 목소리로 눈치만 보고 있는 무사들을 재촉했다.
"군령을 어기면 어찌 되는 줄 모르느냐? 어서 형을 시행하라!"
그렇게되니 무사들도 하는 수가 없었다.
황개의 옷을 벗긴 뒤 땅바닥에 엎어놓고 매질을 시작했다.
주유가 내려다보며 다잡는 매질이라 단 한 대도 헛 매가 없이 50대를 채웠을 때였다.
보다못한 장수들이 또 주유 앞에 엎드려 애걸했다.
주유도 막상 황개의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걸 보자
어느 정도는 속이 풀린 모양이었다.
매질은 그치게 하였으나 그래도 분을 완전히 삭이지는 못한 듯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황개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네가 감히 나를 하찮게 보다니!
이제 여럿의 낯을 보아 몽둥이질을 그만두게는 한다마는
남은 50대를 두었다가
뒷날 다시 태만하는 일이 있으면 그 두 배로 베풀리라!"
그리고는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는데
그때까지도 분을 삭이지 못한 꾸짖음이 끊이지 아니했다.
☆☆☆
주유가 돌아가자 남은 장수들이 우르르 달려가 황개를 부축해 일으켰다.
황개의 모습은 실로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모진 매로 살 껍질은 찢어지고
드러난 속살에서는 붉은 피가 샘솟듯 했다.
떠메고 황개의 진채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늘어지니
곁에서 본 사람들은 물론 그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조차도 눈물을 금치 못했다.
여럿과 함께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노숙은 속이 답답했다.
주유의 재주를 믿고 있기는 하였으나 3대에 걸친 황개의 공 또한 적은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미 늙어 가는 원로 장수를
대단찮은 죄로 초죽음을 시켜 놓았으니 앞일이 어찌 될까 걱정이었다.
정보를 비롯한 황개 또래의 구장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으려니와
그 같은 장수들의 다툼이
군사들의 사기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머지 공명을 찾아 뵙고 푸념했다.
"오늘 공근이 성나 황개를 꾸짖을 때
우리는 모두가 그의 아랫사람 된 처지라 감히 맞대 놓고
다그쳐 말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손님된 처지로서
어찌 소매에 두 손을 찌르신 채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선생께서 한 마디만 해주셨어도
황개가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그 말을 들은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경께서는 나를 속이려 하시오?"
"이숙과 선생은 함께 강을 건너온 이래
한 번도 서로 속인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숙이 알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공명을 살피며 되물었다.
공명은 그제야 깨우쳐 주듯 말했다.
"자경께서는 어찌 오늘 공근이 짐짓 모질게
황개를 때리도록 한 게 바로 그의 계책인 줄 모르시오?
그런데도 나더러 공근을 말리라고 권하신 단 말씀이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노숙도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자신의 헤아림이 모자란 것을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말을 잊고 있는데
공명이 다시 주유의 속셈을 넌지시 풀이해 주었다.
"고육계 같이 힘든 계책이 아니고서야
어찌 조조같이 꾀 많은 인물을 속일 수 있겠소이까?
오늘 한 일은 반드시 황개로 하여금
조조에게 의심받지 않고 거짓 항복을 할 수 있도록
공근이 일부러 꾸민 것이오.
우리 진중에 역시 거짓으로 항복해 와 있는
채중과 채화가 이 일을 조조에게 알린다면
아무리 조조라 해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소?
하지만 자경께서는 결코
내가 그 같은 계책을 미리 알고 있더라고 공근에게 말하지 마시오.
다만 나 또한 도독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다고만 해주시면 고맙겠소."
몇 번이나 겪어 주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노숙은
그 같은 공명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주유가 정말로 그런 계책을 품고서 한 일인지가 궁금했다.
이에 공명과 헤어지기 바쁘게 주유를 찾아보았다.
주유는 노숙이 찾아가자 대뜸 그를 장막 안 깊숙한 곳으로 맞아들였다.
낮과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노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체 물었다.
"오늘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모질게 황개를 꾸짖으셨습니까?" "
모든 장수들이 그렇게 나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주유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노숙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공명은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았소?"
"그 사람도 도독께서 너무 박정하게 하셨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