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5·10총선의 결과 제헌의원들이 선출되고, 제헌의원에 의해 헌법이 제정됩니다. 제헌헌법은 3권의 분립과 대통령 중심제, 국회 단원제를 채택했습니다. 대통령 선출은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접선거(간선)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로써 제1공화국이 수립됩니다. 제헌헌법에 따라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이룩하여 세움)을 선포합니다.
1공화국 당시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고,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었습니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대선(大選)이라 하고, 국회의원 전부를 한꺼번에 뽑는 선거를 총선(總選)이라고 합니다. 임기가 2년이었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되었는데, 이승만 추종자들이 많이 탈락했습니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많이 당선되지 못한 이유는,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청산 등과 같은 국민의 열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종자들의 대거(한꺼번에 많이) 탈락은,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제도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6·25전쟁 중인, 1951년 12월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자유당 창당합니다. 자유당의 창당 이유는 지속적인 집권을 위해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대통령 임기는 1952년까지였습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 간접선거로 되지 못할 것 같으면, 직접선거로 대통령 선출방식을 바꾸면 되었습니다. 그러자면 헌법을 고쳐야(개헌) 했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의 화신(추상적인 특질이 구체화 또는 유형화된 것) 이승만은, 정치깡패(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깡패)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겁박(으르고 협박함)하여 강압적으로 헌법을 바꿉니다. 그것도 비밀투표가 아닌 거수투표(손을 들어 각자의 의사를 표시. 공개투표)와 비슷한 기립표결이었습니다. 기립표결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부(찬성과 반대)를 표시하는 표결방식으로, 기립투표라고도 합니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겁박하고 기립투표를 한 결과, 참석 국회의원 166명 가운데 찬성 163명, 반대는 없고, 기권 3명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헌법을 고침)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의도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를 ‘발췌개헌(1차 개헌)’이라고 합니다. 발췌란, 필요하거나 중요한 부분만 뽑아서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발췌개헌의 핵심은 대통령 선출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또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에게 군림(어떤 분야에서 절대적 세력을 가진 사람이 남을 압도하는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야당에 대한 빨갱이 몰이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승만이 재집권(다시 정권을 잡음)에 몰두할 때, 우리는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빨리 배웁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가르침(?)을, 아직도 잘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차 개헌의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의원내각제와 국회 양원제였습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52년 8월에 실시한, 대통령 직선으로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헌법상(제헌헌법)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1회에 한하여 연임(임기가 끝난 사람이 다시 그 직위에 임용됨)이 가능했습니다. 두 번만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여름의 갈증 같은 권력욕을 가졌던 이승만은 두 번의 대통령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마침 1954년 실시한 총선(국회의원 전체를 뽑는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은 승리합니다(국회의원 203명 가운데서, 114명이 당선). 자신감을 가진 이승만은 또 다시 헌법의 개정(개헌)에 돌입합니다.
이승만이 바라던 개헌의 요지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조항을 삽입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개헌에는,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대통령의 3선을 제한하는 조항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상정(토의할 안건을 회의에 내어놓음)합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되려면, 203명 중에서 2/3 이상인, 13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135명이 찬성하여, 1표가 부족했습니다. 이에 국회의장은 ‘대통령의 3선을 제한하는 조항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부결(회의에 제출된 의안을 통과시키지 않기로 결정함)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를 번복시킵니다. 203명의 2/3로 계산하니까, 135.3333이 되자, 이승만은 사사오입의 원칙에 의해 0.3333은 버리는 수니까, 135명이 의결정족수(합의체 기관의 의결이 성립하는 데 필요한 구성원의 찬성표 수)라고 우깁니다. 이를 ‘사사오입개헌’이라고 합니다. 집권욕에 눈먼 이승만은 의결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으로 통과시킨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법인, 헌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민도(民度)는 국민의 문화수준이나 생활수준을 말합니다. 그리고 국민의 의식수준(어떤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정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민도(의식수준)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민도가 높아야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민도가 낮을 땐, 권력욕에 불타는 자들은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또한 국민을 우롱(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놀림)합니다. 흔히 말하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일을 처리함)가 일상(매일 반복되는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입니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입니다. 가정생활에도 정치가 필요하고, 학교생활에도 정치가 필요하며, 직장생활에도 정치가 필요합니다. 국가생활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치는 조정(분쟁을 중간에서 화해시키거나 타협해서 합의하도록 함)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시비(옳음과 그름)가 있고, 이해(이익과 손해. 득실)와 유불리(유리와 불리)가 존재합니다. 그것을 조정하고 조율(서로 다른 의견 따위를 알맞게 맞춤)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나쁜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싫어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비아냥거리며 하는 말이, ‘그 사람 참 정치적이야’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대한민국 국민은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치를 하며 삽니다. 심지어 동물도 정치를 합니다. 공부가 버거운 학생들도 많고, 삶이 무거운 역기처럼 버거운 분들도 많습니다. 그 버거움을 조금씩 폭포처럼 쏟아내는 지혜는, 정치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정치를 잘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물질이 다소 부족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잠깐 연임(連任)과 중임(重任)의 차이를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연임은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직위를 갖는 자리에 거듭해서 그 자리에 임명되는 것을 말합니다. 중임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지 않고’ 직위를 갖는 자리에 거듭 임명되는 것을 말합니다. 직위를 갖는 기간을 정하고 임명되는 것을 연임이라 하고, 직위를 갖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임명되는 것을 중임이라고 합니다.
1차 개헌(발췌개헌)은 1회 더 대통령 직위를 연임하고 싶어서 한 것이어서, 실제로 이승만은 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제헌헌법은 1회에 한하여 연임은 되지만, 중임은 못 하게끔 규정(규칙으로 정함)하고 있었습니다. 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불법적 통과(처리)는, 이승만이 중임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 헌법 개정이었습니다. 사사오입개헌(1954.11.29.)의 핵심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을 제한하는 것을 철폐한다.’입니다.
초대 대통령이 두 명일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밖에 없습니다. 이승만은 자신만큼은 최소한 세 번 이상 대통령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연임은 이미 하고 있으니 중임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사오입개헌으로 대통령 출마(선거 등에 입후보함. 후보자로 나섬) 자격을 갖게 된, 이승만은 다시 1956년 대선에 출마합니다. 3대 대선(대통령 선거)엔,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이승만, 민주당의 신익희, 무소속의 조봉암이 출마합니다. 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이기붕, 민주당의 장면이 출마합니다. 당시 대선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따로 뽑았습니다. 유력(가능성이 많음)한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의 갑작스런 사망(선거 열흘 전)으로, 이승만이 3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부통령에는 이승만과 같은 자유당의 이기붕이 떨어지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당시 민주당의 슬로건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습니다.
이기붕의 낙선(선거에서 떨어짐)과 장면의 당선, 그리고 신익희 사망 후 조봉암의 높은 인지도(어떤 대상을 알아보는 정도)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공포정치(가혹한 수단으로 반대파의 세력을 탄압하여 행하는 정치)를 강화합니다. 이에 정치적 라이벌(경쟁자. 맞수)이었던 조봉암(진보당 소속)을 간첩죄(빨갱이 프레임)로 몰아서 사형을 시킵니다. 그리고 조봉암이 속해 있던 진보당을 해체해버립니다. 이를 진보당 사건(1958.1)이라고 합니다. 진보당 사건은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하고 위원장 조봉암을 간첩죄의 혐의(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있으리라는 의심)로 사형을 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2011년 1월 대법원이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승만의 독재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 같았습니다.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을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에, 4대 대통령 선거에도 이승만은 출마합니다. 1960년 4대 대선(1960.3.15)에는 대통령 후보에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조병옥이 출마했고, 부통령 후보에는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이 또 출마합니다.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과 장면이고, 대통령 후보는 신익희와 조봉암에서 조병옥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여 남겨두고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4대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이미 정해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같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이었습니다.
이승만은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망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85세는 지금도 고령이지만, 그땐 더했습니다. 연로한 이승만이 대통령 임기 도중에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대통령이 유고(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있음)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뒤를 이어받음)하는 규정 때문입니다. 혹여나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된다면, 정권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자유당에겐 절체절명(몸도 목숨도 다 되었다는 뜻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급박한 경우의 비유)의 상황이었습니다. 선거 분위기는 자유당의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에게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조직적(일이나 행동에 체계가 짜여 있는)으로 부정선거(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에 의한 선거)를 제멋대로 해 나갑니다. 이를 3·15부정선거(1960.3.15.)라고 합니다. 이승만 정권, 자유당의 부정과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2년간의 이승만의 독재와 전횡(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 자유당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시위운동(위력이나 기세를 떨쳐 보임)이 있었습니다. 시위 도중에 마산상고 1학년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사망했고, 그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릅니다. 이를 계기로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시작된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김주열 학생의 사망은 4·19혁명의 도화선(사건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960년 4월에 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며 이승만 정권에 맞선 것입니다. 이를 4·19혁명이라고 합니다.
4·19혁명의 선봉에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의 불의에 맞선 항쟁(대항하여 싸움)의 중심에는, 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광복 이전에는 일제(일본제국주의)의 불의한 식민지배에 맞섰고, 광복 이후에는 불의한 독재(독재정치)와 맞서 싸웠습니다. 또한 불의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학도병(학생 신분으로 군대에 들어간 병사. 학병)으로서 국군과 함께 목숨으로 싸운 것도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지식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지행일치(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 또는 아는 만큼 실행하는)의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목숨을 건, 불의에 맞선 항쟁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항쟁은 4월 19일에 절정에 달하였으며,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대통령 등의 권력자가 직위에서 물러남)하면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탄생하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4·19혁명은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 계층이 참여해 불의한 독재정권을 물리친(타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입니다. 4·19혁명은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습니다.
4·19혁명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기 되었습니다. 4·19혁명 학생과 교수와 시민들이 연대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일을 하거나, 서로 연결하는 것을 연대라고 합니다. 2016년에서 2017년의 촛불시위(촛불혁명)는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이승만에 대해서 좀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너무나 많은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나쁜 선례가 바로 흔히 말하는 적폐(오랫동안 쌓여 뿌리박힌 폐단)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나쁜 것을 먼저 배운다고, 이승만의 나쁜 선례를 전통처럼 이어간 이들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