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귀래정은 중종때 좌랑을 지낸 이철명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755년에 지은 여강 이씨 문중의 가숙으로, 평탄한 들에 자리한 마을 한 가운데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육화정이라 했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문중에서 조선조 중종때의 문신인 이철명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귀래정’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 앞의 들판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지어 울창한 대나무 숲 가운데 담을 둘러 경계를 이뤘다. 뒤로는 담 없이 6칸 일자형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담장 안 정자의 동남측에 걸쳐 凹자형 연못(면적 : 103㎡) 을 팠으며, 원장(垣墻)밑은 약(約) 1 m정도 떼어 호안석축(護岸石築)을 곧게 쌓았고 귀래정(歸來亭) 쪽에는 육각(六角)의 기단(基壇)과 평행(平行)은 되지 않더라도 육각(六角)에 맞는 선(線)을 구사(構思)하되 딱딱한 감(感)이 없도록 각(角)을 늦추어 조영(造
營)하였다. 정문에서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귀래정(歸來亭)을 중심(中心)으로 정면(正面) 연못가 로 향(香)나무와 정원석(庭園石), 석류(石榴)나무, 느티나무, 무궁화나무 등(等)을 격조(格調)높게 배식(配 植)하였고, 연못 주변(周邊)과 귀래정(歸來亭) 뒷쪽 서측(西側)으로도 향(香)나무, 과나무 등 조경(造景)을 하였다. 특히 건널 다리 앞에는 대형괴석(大形怪石)을 양쪽에 꼭같이 세우고 작은 괴석(怪石)으로 조화(調和)를 맞추어 놓아 운치(韻致)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연못석축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나 전통적인 평축 쌓기가 아닌 난층으로 쌓았다.
정자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정도 방과 마루를 갖춘 규모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정육각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지붕구조를 좌우측면에 합각지붕이며, 전후측면은 합각 중앙에 추녀마루를 설치하여, 처마선은 일반 육각정 형태와 동일한 매우 특이한 지붕으로구성되어, 지붕형태로도 유일한 예이고, 이와 같이 원래의 육화정이란 이름도 雪花의 六出한 결정과도 유사하다 하여 붙여졌다. 보 상부 중간에 중도리를 설치한 후 여섯 개의 추녀를 결구하고 중앙 상부는 우물반자와 빗반자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나머지 구간은 연등천정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육각 평면의 들보 위에 별개의 팔작 지붕틀을 얹어 몸채와 지붕이 이중 구조를 갖도록 했다. 따라서 합각부분도 역 V자 모양이 되고, 측면도 여늬 팔작지붕과 다른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6면의 지붕 중간중간ㅇ 가는 사각주로 처마도리를 받치도록 했고, 결구는 민도리, 원형의 구조기둥에 운공형 보아지를 달았다.
공간은 전형적으로 구성되어, 앞부분은 개방적인 누마루로 계자난간을 단 쪽마루를 가설하였으며, 그 끝에는 나무창살을 달았고, 뒷부분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출입은 방 뒤쪽 쪽마루를 통해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을 둔 나머지 짜투리 공간에 수납 및 입구마루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건물이 구조적으로 매우 특이하고 정밀하게 신축되어져 있어 정원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1477~1523) 선생의 본관은 여강(驪江), 자(字)는 지지(知之)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 유학자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시 진사 2등 3위로 합격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별시 삼등 3위로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교서관저작랑(校書館著作郞), 홍문관박사(弘門館博士)에 전근되고, 병조좌랑(兵曺佐郞),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역임하였으며 경주훈도(慶州訓導)를 거쳐 홍문관교검(弘文館校檢)이 되었다. 1515년(중종 10) 관직에 성실히 복무한 은전으로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지치(至治)를 펴고자 어진 선비를 등용하자 반대파들이 시기하여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충암(沖菴) 김정(金净) 등 일대(一代)의 명사(名士)들을 모조리 모함하였다. 이에 이철명은 여러
차례 무고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부(歸鄕賦)>를 짓고 1520년 고향에 돌아와서 노친(老親)을봉양하며 독서(讀書)에 힘쓰고 <수분명(守分銘)>을 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다. 1522년(중종 17)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내던 중 지나친 슬픔이 건강을 해쳐 이듬해 생을 마감하였다.
귀래정과 관련하여 이병관과 이대원이 쓴 <귀래정기>가 내려오고있으며 그 중, 이병관이 쓴 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래정의 원래 이름은 '육화정(六花亭)' 또는 '육각정(六角亭)'이다. 정자는 크지 않은 규모에 앞이 트였고, 야단스럽지 않으면서 그윽하다. 여섯 모서리의 집을 짓게 된 것은 마주 보는 산세가 설화(雪花), 즉 육각형 눈꽃을 연상시켜서이며, 그래서 '육화정'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었다. 경주 북쪽 오십 리 천서촌(川西村)에 지세가 평탄한 곳이 있어, 숲이 울창한 가운데 네모난 둑 위 날아갈 듯한 집이 있으며, 그 안에 구부러진 난간이 서있는데 이름하여 귀래정(歸來亭)이라 하였으니,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선생께서 거처했던 곳이다.
선생은 아주 화려한 솜씨로 서당을 지었으며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손뽑혔다. 또한 그는 승문관(承文館)에 천거되어 병례박사(兵禮博士)와 검교지제(檢校知製)를 지냈으며 홍문관에 천거되어 전도(前途)가 밝았다. 그러나 서울거리를 활보하다가 차문의 화를 당하여 일시에 현인이 제거되는 위태로움을 당했다. 공이 이때에 사건의 큼을 알고 드디어 고향에 내려와 ‘賦’를 지어 그 뜻을 대략 드러내어 말하기를 ‘세상길의 험난함을 근심하니, 장차 어디로 가서 멀리 바다 구름을 보며 살 것인가? 장차 어느 동구 밖에서 의지할 것인가? 오직 성현이 서로 만나 국가의 다스려야 함에도 어찌 소인배들이 교언으로 임금의 은총 혹하고 있음에랴. 하물며 지금 세상에 있어서랴. 아 철인(哲人)이 사라짐을 어찌 기다릴 것인가? 구름 아스라이 먼 곳에서 날마다 부르짖으며 젊음을 무릅쓰고 기뻐하고, 또한 부와 귀는 편안함을 구하는데 충분치 않다. 형세가 좋지 않음을 슬퍼하며 종을 불러 앞길을 인도하게 하고 두목(杜牧) 시인의 송국(松菊)을 찾고 들과 밭을 갈았다. 오직 나의 진실된 업은 선대(先代)의 철인(哲人)의 교훈집을 읽는 것이고 성명(性命)의 근본을 미루어 가는 것인 즉 그 날로 내려와 다시는 당세(黨勢)는 꿈도 꾸지 않았다. 이것이 공히 급히 물러날 수 있는 용퇴의 뜻인 것이다.
공의 후손이 되어 현명한 조상의 뜻을 미루어 기술한 즉 당일에 이 정자를 지었고 이곳에서 휴식하며 살았던 것이다. 머리를 돌려 천리를 내려오니 나에게 기록해주기를 청하였다. 잊지 않고 가만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잔혹함이 동한(東漢)의 당과의 변과 흡사하니 초연히 홀로 죽임과 형벌의 화를 면하였다. 후세인이 항상 논하건대 오직 신도반과 곽임종 등 몇 명이 이백과 두보보다 현명하고 겸손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 기미의 명백함을 본 것이다. 공이 조용한 가운데 선생에게 청하여 함께 제휴하며 같이 돌아가자는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단지 만난 지역이 달랐을 뿐이다. 또한 집에는 노모가 계셔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함이 있은 즉 조용히 기러기가 멀리 날아가는 것과 같은 부를 짓게 된 연유이다. 주살이 그 행장에 미치지 못하고 돌아가 쉬는 것이 그 온당함을 얻은 것은 역시 동한(東漢)의 신과 곽 때문인 것이다. 삼가 이런 말로 돌이켜보건대 정자에 기록한 제일의 뜻은 이 정자(亭子)에 오르는 자만이 공의 마음 자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귀래정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귀거래사는 다음과 같다.
도잠(陶潜) - 귀거래혜사병서(归去来兮辞并序)
序(서)
余家贫,耕植不足以自给。
나의 집은 가난하여, 농사로 먹고 살기에 빠듯하다.
幼稚盈室,瓶无储粟,生生所资,未见其术。
애들은 방에 가득하나, 독에 모아둔 곡식도 없고, 먹고 살려면 재물이 있어야하나, 재물을 구할 재주도 없다.
亲故多劝余为长吏,脱然有怀,求之靡途。
친척이 나보고 장리(长吏)라도 하라 여러 번 권하여, 기꺼이 하려 해도 자리를 구할 방법도 몰랐다.
会有四方之事,诸侯以惠爱为德,家叔以余贫苦,遂见用为小邑。
마침 출사(出使)하여 외지로 가게 되여, 제후들은 아껴 은혜를 베풀기를 미덕으로 삼았는데, 숙부께서 나의 가난과 고통을 보고는 마침내 나를 작은 고을에 부임케 하였다.
于时风波未静,心惮远役,彭泽去家百里,公田之利,足以为酒,故便求之。
때는 풍파가 가라앉지 않아, 먼 곳의 벼슬살이가 탐탁지 않았으나, 팽택(彭泽)은 집에서 백 리이고, 공전의 수익으로 술을 넉넉히 마실 만 하여, 편히 벼슬살이를 하기로 하였다.
及少日,眷然有归欤之情。
며칠 안 지나 돌아가야 겠다 싶었다.
何则?质性自然,非矫励所得。
왠고하니, 내 본성이 그와 같고 억지로 얻으려 했던 바도 아니었다.
饥冻虽切,违己交病。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했지만, 본심과 어긋나니 몸이 괴로왔다.
尝从人事,皆口腹自役。
벼슬살이를 좇았으되, 이 모두 수고로이 입과 배만 불리려 했을 뿐이다.
于是怅然慷慨,深愧平生之志。
그리하여 마음이 울컥하여, 평생의 뜻을 생각하며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犹望一稔,当敛裳宵逝。
여전히 곡식이 익기를 바라면서도, 밤에라도 행장을 꾸려 물러나고자 하였다.
寻程氏妹丧于武昌,情在骏奔,自免去职。
얼마안가 무창(武昌)의 정씨에게 시집간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문상하고자 서둘러 벼슬을 내려 놓았다.
仲秋至冬,在官八十余日。
중추(仲秋)에서 시작하여 동지(冬至)까지 머문 벼슬살이는 80여일 동안이었다.
因事顺心,命篇曰归去来兮。
그 일로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지어 제목을 “귀거래혜”라 하였다.
乙巳岁十一月也。
대는 405년 11월이다.
正文(정문)
归去来兮,田园将芜胡不归?
돌아가야지 ! 이젠 잡초 무성할 내 고향 땅, 어찌 아니 돌아갈까?
既自以心为形役,奚惆怅而独悲?
이제껏 내 몸뚱이 마음을 부려왔거늘, 어찌 낙담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랴?
悟已往之不谏,知来者之可追。
지난 일이야 이미 돌리지 못하니, 앞 일에서야 비로소 바로잡고자 하네.
实迷途其未远,觉今是而昨非。
이 길도 아직 멀리는 헤매지 않아, 이제야 깨닫누나, 지나온 잘못을.
舟遥遥以轻扬,风飘飘而吹衣。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산들산들 옷자락 흩날리네.
问征夫以前路,恨晨光之熹微。
뱃사공에 남은 길 물어보며 희미해진 새벽 별빛 아쉬워하네.
乃瞻衡宇,载欣载奔。
어느덧 눈 앞에는 소박한 내 집, 반가운 마음에 바삐 내달려가니,
童仆欢迎,稚子候门。
하인들은 반겨이 맞아주고, 어린 아들 문에 나와 기다리누나.
三径就荒,松菊犹存。
잡초 무성한 뜰 안 길에, 내 송죽(松菊)은 여전하구나.
携幼入室,有酒盈樽。
어린 아들 손잡고 방 안에 들어서니, 항아리엔 술이 가득 담겨 있네.
引壶觞以自酌,眄庭柯以怡颜。
술병 가져다가 홀로 술잔 기울이며, 뜰 안 나무가지 바라보는 얼굴엔 반가운 미소.
倚南窗以寄傲,审容膝之易安。
남쪽 창문에 무심히 걸터 앉으니, 좁디 좁은 이 방도 이리도 편안하구나.
园日涉以成趣,门虽设而常关。
뜰을 거닐 때면 나날이 정취가 가득, 홀로 걸린 사립문은 언제나 닫혀있어,
策扶老以流憩,时矫首而遐观。
늙은 몸 지팡이 짚으며 쉬엄쉬엄 거닐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네.
云无心以出岫,鸟倦飞而知还。
구름은 무심히 산골에서 솟아 나오고, 새도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오는구나.
景翳翳以将入,抚孤松而盘桓。
해는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외로이 소나무 옆 서성이며 가지를 어루만지네.
归去来兮,请息交以绝游。
돌아가야지! 사귀어 놀던 세상 사람과도 이젠 그만해야지.
世与我而相违,复驾言兮焉求?
나는 세상사와 맞지 않으니, 수레에 다시 오른들 무얼 또 얻겠는가?
悦亲戚之情话,乐琴书以消忧。
정답게 친척들과 얘기나누며, 거문고 타다가 책 읽으며 시름 잊으리.
农人告余以春及,将有事于西畴。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 알려주면, 그제서야 서쪽 밭에 나가 일구어 볼까.
或命巾车,或棹孤舟。
때론 천막친 수레 재촉하고, 때론 조각배 노저어가면,
既窈窕以寻壑,亦崎岖而经丘。
어느덧 깊은 골짜기 안은 고요하고 그윽해져, 가파른 산길따라 언덕 오르면,
木欣欣以向荣,泉涓涓而始流。
나무 가지엔 물이 올라 꽃피울 듯하고, 퐁퐁 솟은 샘물은 졸졸졸 흘러 내리니
善万物之得时,感吾生之行休。
세상의 모든 만물(万物)은 때가 있느니, 내 삶도 이제는 저물어 가는구나.
已矣乎!寓形宇内复几时?
아서라! 천지 간에 내 몸뚱이 남은 나날이 얼마겠는가 ?
曷不委心任去留?胡为乎遑遑欲何之?
어찌 오가는 대로 마음을 맡기지 않을까 ? 어디를 그리 허겁지겁 가려는가 ?
富贵非吾愿,帝乡不可期。
부귀는 내가 원한 바가 아니니, 천자 계신 도읍지야 어찌 기약할까 ?
怀良辰以孤往,或植杖而耘耔。
좋은 시절에는 나홀로 거닐어보고, 때때로 지팡이 꽂고는, 밭도 갈고 김도 매고,
登东皋以舒啸,临清流而赋诗。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길게 불고,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읊으며,
聊乘化以归尽,乐夫天命复奚疑!
이렇듯 조화를 따르다 죽으면 그만인 것을, 천명을 누릴 뿐 무얼 더 의심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