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도형(圓型)의 검도(劍道), 만월(滿月)
-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석가세존이여! 노납이 실수하여 풍운강호(風雲
江湖)를 피로 물들일 대살성(大煞星)을 만드는 일이 없기를…….
개정(開頂)이라 함은 천령개(天靈蓋)를 여는 것을 뜻한다.
본시 내가의 진기운용은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따라 운용되기 마련
인 바, 내공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임독양맥이 타동하게 된다.
개정은 그 이상의 단계로, 천지현관(天地玄關)이 열리는 단계이다.
'이 아이는 너무나도 엄청난 시련을 겪어 마성(魔性)이 골수(骨髓)까지
스며들었다. 그 가공스러운 마성을 억제시키지 못한다면, 훗날 살기를 자
제하지 못하고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게 된다.'
번뇌승의 전신은 금도금한 등신불(等身佛)처럼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
다.
그리고 전신 팔만사천 모공(毛孔)이 열리며 누에실처럼 흰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번뇌승의 얼굴은 부조(浮彫)의 얼굴처럼 미소를 머금기 시
작한다.
자애스럽기 그지없는 미소, 그는 육신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해 버
린 듯 단아하고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쌍장을 조용히 앞으로 내밀었다.
"세존지로(世尊之路)."
두 손바닥에서 금빛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황홀하다기보다 우아하다.
백무영은 몸이 금색 무지개 속으로 빠져드는 착각에 휘어 감겼다.
전신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겨드랑이 사이에 날개가 달려 둥둥 떠오르는 듯, 우주(宇宙)가 몸과 하나
로 이어지는 듯…….
"항마법력(降魔法力),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多), 미타공공(彌
陀空空)……."
번뇌승은 심오한 경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쌍장을 통해 하해(河海) 같은 진기의 힘이 밀려들기 시작했
다.
가닥 가닥 끊어진 기경팔맥을 잇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유진력(大柔眞力)이라 불리우는 불가정종(佛
家正宗)의 밀종내공(密宗內功)에 지나지 않는다.
백무영이 익혀 온 진기는 극패(極覇), 극강(極强)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 번뇌승이 불어넣어 주는 진기는 극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
다.
그가 흘려 보내 주는 진기는 끊어진 근육(筋肉)을 잇고, 갈라진 뼈를 아
물어 들게 했다.
그리고 위치를 바꾸었던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칠 일이 지났다.
백무영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아, 이 곳은…….'
우선 보이는 것은 번뇌승의 얼굴이었다.
그의 전신은 땀에 흥건히 젖었으며, 주름살이 더 깊게 패여 있었다.
그는 백무영의 눈을 뜨는 찰나, 진물 돋는 두 눈에서 성광(聖光)을 뿜어
냈다.
영혼을 불살라 버릴 듯한 신안(神眼)이다.
부처의 눈빛이 이러할까?
백무영의 머릿속은 동굴 속처럼 텅 비게 되었다.
그 순간, 번뇌승은 입술을 벌리지 않고 혜광심어(慧光心語)의 전어술을
써서 말했다.
"노납은 소림사(少林寺)를 떠나기 전, 대사형(大師兄) 묵궁(墨穹)과 언약
한 바 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소림사의 비전무예를 쓰지 않는다는 것
이다."
"……."
백무영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번뇌승의 말을 쭈욱 듣기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을 했다. 향후, 그 누구에게도 소림사의 절기를 가르
치지 않겠다고……."
"……."
"그러하기에, 네게 소림사의 절기를 가르칠 수 없다. 솔직히 너는 여타한
초식의 습득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무공초식을 알고 있다. 어찌
여긴다면, 너는 너무나도 산만히 무공을 배웠기에 전진이 되지 않을 정도
이다."
번뇌승은 소림사 출신이었다.
소림은 강호제일(江湖第一) 사찰(寺刹).
그러나 사문의 율법이 엄하여 제자들이 강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엄격
히 규제한다.
번뇌승은 젊은 시절, 소림제일승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또한 승려답지 않은 협골(俠骨)로 한 명의 아수라가 되어 강호의 마도세
력을 평정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바 있다.
그는 소림제일의 고수가 되어 은밀히 하산하였으며, 무수한 거마를 척살
하며 협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으며… 강호인들은 그에게 혈승(血僧)이라
는 아호를 붙여 준 바 있다.
그의 전성기때, 그는 곤륜(崑崙)의 운학상인(雲鶴上人)이나 무당(武當)의
일송자(一松子)와 더불어 천하삼기(天下三奇)로 꼽힌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살행은 소림사의 율법을 저촉이 되었으며, 당시 소림사의 장
문인직을 맡고 있던 그의 사형은 소림백팔나한(少林百八羅漢)을 이끌고
그를 추적하였다.
번뇌승은 화산(華山) 낙일애(落日崖)에서 소림백팔나한에게 포위되었으며,
번뇌승은 차마 사문의 형제들을 칠 수 없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번뇌승은 제압되어 소림사로 압송되었으며, 계율원(戒律院)의 심판 아래
삼십 년 면벽(面壁)의 질책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삼십 년, 번뇌승은 좁은 면벽굴 안에서 참회하며 수도하게 되었으
며… 삼십 년 면벽이 끝나는 어느 새벽, 사형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 대사형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노납은 살기가 너무 짙어 승려가 되지
못할 재목이었거늘, 운명의 조화로 인해 잿빛 가사를 걸치게 되었노라고!
- 대사형은 내게 하산을 명했다. 그리고 다시는 소림사로 들어오지 말라
고 명했다. 만에 하나 돌아온다면, 자신에게 죽을 것이라고!
- 노납은 대사형의 실력을 알고 있다. 대사형은 노납과는 다른 학승(學
僧). 늘 장경각(藏經閣)안에 머물러 살기는 하되, 대사형의 무공은 노납을
능가한다. 그는 노납과 철학이 다르기에 산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그
야말로 백도제일의 고수라는 것을!
- 대사형이 익힌 무공은 지공(指功)이고, 노납이 익힌 무공은 검(劍)이었
다. 노납의 검이 극한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한, 노납의 검은 대사형의
일지(一指)를 막아 내지 못한다.
- 노납은 대사형을 꺾을 수 없기에 소림사를 떠나 떠돌기 시작했다. 그
리고 얼마 전, 노납은 하나의 검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것을 네게 전수
하겠다. 그러니, 노납의 검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바란다. 그래
야만 노납의 팔십 년 한이 풀리리라.
번뇌승의 법명은 창궁(蒼穹)이었다.
사자혈승(獅子血僧) 창궁법사!
이배분(二拜分) 이전의 강호인이라면, 사자혈승 창궁법사라는 이름을 알
고 있다.
그는 곤륜 종대선생(鐘大先生)보다 일배분 이전의 인물이며, 함백에 비교
한다면 사배분(四拜分) 이전의 전대기인이다.
사실 창궁법사와 묵궁법사 사이에 이념 싸움이 벌어지며 소림사가 반으
로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소림사는 이제까지 천하제일지(天下第一地)로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번뇌승의 말이 이어진다.
- 노납이 듣기에, 대사형은 이십 년 전 홀연히 출도하였다가 소림사로
되돌아온 후, 조사동(祖師洞)에 틀어박혀 다시는 외부세계로 나오지 않았
다고 한다. 현재 소림사의 장문인은 노납에게 사손뻘 인물. 네가 노납의
진전을 이어받은 이상, 현인 소림사 장문인은 네게 사질(師姪)이라 할 수
있다.
- 언제고 소림사에 가서 묵궁선사를 찾아라. 노납이 생각하기에, 그는
노납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고 있으리라. 노납이 그를 잊지 않듯, 그도
노납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실로 긴 이야기다.
소림쌍성(少林雙聖)이라 불렸던 창궁, 묵궁 사형제는 강호계에 알려지지
않은 사연을 갖고 있었다.
- 네게 소림사의 절학을 물려 주지 못하는 이유는, 대사형과 한 약속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불행히도 너의 몸은 너무나도 심하게 파괴되었기에, 영약이 없
는 한 내공을 되살릴 수 없구나, 일단 노납의 전기를 너의 기경팔맥(奇經
八脈)에 흘려넣었다. 그것은 소림사의 내공과는 다른 금단공(金丹功). 삼
년 내내 역천행공을 한다면, 언제고 내공이 되살아날 것이다.
번뇌승은 가사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백무영의 육체를 되살려 주기 위해 진원지기
를 모조리 상실해 버린 것이다.
문득 백무영은 그의 죽어 가는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광을 볼 수 있었
다.
"내 손을 봐라!"
"아……!"
백무영은 문득 깡마른 손을 바라봤다. 주름지고 깡마른 손이다.주름살이
어찌나 심한지, 닭의 껍데기처럼 쭈글쭈글해 보인다. 그 손이 서서히 허
공으로 쳐들려졌다.
손은 허공에 원(圓)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승검학의 이치는 불학(佛學)과
일맥상통하기 마련이다.
삼라만상의 이치는 원으로 통한다. 원이란 가장 완벽한 도형이다. 직선
(直線)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지를 않는다.
그러나 원은 계속 나아가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칠야(漆
夜)에서 시작하는 월기(月氣)가 십오 일에 걸쳐 원을 이루다가 만월(滿
月)로 화하듯, 단선(單線)과 단선(單線)이 이어져 나가며 하나의 원이 허
공에 그려졌다.
환상이리라. 그 원형 속으로 우주(宇宙)가 포박됨은…….
그리고 만 개의 부처가 원 속으로 떠오르고, 천만 개의 꽃송이가 피어나
는 것은!
"일컬어 만월심극혜검(滿月心極慧劍). 뿌리는 소림사에 있되 소림사의 절
학이 아니다. 만월심극혜검은 일 식(一式) 일 초(一招), 그 위력은 웅장무
비하다. 그리고 한 번 시전되면 회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번뇌승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들려 왔다.
그의 목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벽력뇌음(霹靂雷音)이었다.
"네게 바라는 것은, 사검(邪劍)을 버리고 의검(義劍)을 쥐라는 것. 아아,
그것은 말로 깨우쳐 줄 수 없는 것이며 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다."
꽃송이의 수가 늘어난다.
하나, 둘… 넷… 여덟…….
과거 부처가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쳐들어 보였던 꽃송이가 이렇게 장
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을까?
환상처럼 피어나는 꽃송이가 띠집 안의 좁은 공간을 완전히 휘어 감았다.
원(圓)이 그리어진다. 불교의 이치는 원으로 통하고 있다. 시작이 바로 끝
이며, 끝은 바로 시작이다. 번뇌승이 소림사를 떠나 방랑하는 가운데, 깨
달은 이치가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 모조리 담기어져 있다.
만월심극혜검은 오직 일 식(一式).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단순한 동작은 어린아이라도 흉내낼 수 있는
동작이다. 그러나 그 동그라미 안에는 우주가 담기어져 있는 것이다.
- 소림에 가라, 묵궁선사(墨穹禪師)라는 거승(巨僧)이 있다. 그는 나를
파계시킨 장본인. 또한 천하제일승(天下第一僧)이다. 네게 바라는 것은,
그를 패배시켜 달라는 것. 그것은 지극히 난해한 일이며, 영원히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원이 이룩된다.
번뇌승, 과거 창궁이라고 불리웠던 일세성승의 무공 정화가 모조리 담기
어진 만월심극혜검은 세 번에 걸쳐 되풀이되었다.
백무영은 무의식상태에서 만월심극혜검이 일으키는 모든 변화를 암기하
게 되었다.
번뇌승은 그의 잠재의식에다가 검도(劍道)의 변식(變式)을 간직시키고 있
었다.
우레 같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만월심극혜검은 가장 강력한 살인무공이다. 만에 하나 네가 마음 속의
살심을 버리지 못하고 피보라를 일으키게 된다면, 노납은 천추(千秋)의
죄인이 될 것이다."
번뇌승의 몸뚱이는 장엄한 금광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골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금광진기(大金光眞氣)의 빛이었
다.
그 빛은 인간의 마성이 빚어 내는 탐욕을 모조리 녹여 버리는 힘을 지니
고 있었다.
"무영, 아쉬운 것은 네게 노납의 진원지기를 전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의 심성이 완성되지 못하였기에, 너의 내공을 완성시킬 수 없는 것이
다. 노납의 내공은 너의 골수 속으로 저미어 들 것이며, 네 스스로 소림
최고의 내공인 부동혜심공(不動慧心功)을 터득하게 될 때 노납의 내공은
모조리 너의 내공으로 화할 것이다."
원이 점점 거대해진다.
'원이 나의 몸을 휘어 감는다.'
백무영은 몽롱한 가운데, 원이 커지는 것을 바라봤다.
원은 산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모조리 빨아들
이는 듯했다.
꿈이리라. 거대한 원이 무수한 동심원으로 화하며 일곱 가지 성광(聖光)
이 새의 깃털처럼 퍼득거리며 분산되는 것은.
'아아, 모조리 사라진다. 모두 무(無)이다.'
백무영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허공에
나직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무림의 고해(苦海)에 떠오르는 천살성(天殺星) 같은 녀석. 네게 많은 짐
을 지웠구나."
자애스러운 목소리 가운데 원은 조용히 사라졌다.
거대한 원이 방 안을 뒤덮었다는 것이 하나의 백일몽(白日夢)이었던 듯,
모든 것이 공허해지는 것이다.
백무영이 눈을 떴을 때, 번뇌승은 염주알과 낡은 가사만 남긴 채 한 줌의
재로 스러져 버렸다. 그는 신외지물(身外之物)에는 욕심이 없었던 일세기
승답게 염주 하나와 낡은 옷 한 벌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어이해, 내게 이런 인연이…….'
백무영은 오랜만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를 벗어났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으며, 마음 속에서 우러난 존경심에 따라 네 번
거듭 절했다.
그는 번뇌승이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가르쳐 준 일
식 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시전하지 못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백무영은 번뇌승의 유품을 갈무리한 다음에 정좌하고 앉았다. 그는 호흡
을 가다듬으며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이마는 고통
스럽게 찌푸려졌다.
'우욱! 기혈이 거꾸로 돌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운기조식을 하려고 하는 찰나, 진기가 거꾸로 흐르면서 전신 혈도가 송곳
에 찔리는 듯 아파 오는 것이다.
진기운용을 그대로 계속하고자 하려다간 전신 혈맥이 팽창하다 못해 화
산 터지듯 터져 버릴 것이다.
'그렇군. 역천행공으로 인하여 전신의 혈맥 구조가 완전히 거꾸로 변화되
었다.'
번뇌승은 백무영을 살리기 위해 역천행공을 베풀었다.
역천행공은 백도계에서는 금단의 내공으로 전설화된 것이다.
그것을 익히는 사람의 혈도는 보통 사람의 혈도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것을 익히게 되면, 진기가 거꾸로 흐르며 내공 발휘를 하는 방법 또한 완
전히 다르다.
탄자결(彈字訣)을 쓴다면 흡자결(吸字訣)이 일어나며, 흡자결을 시전하면
탄자결이 발휘된다.
"나의 혈도는 제멋대로가 되었다. 후후, 사정을 모르는 자가 나의 혈도를
제압하려다간 아무리 신묘한 제혈수법(制穴手法)을 쓴다 하더라도 무용할
수밖에!"
백무영은 다시 정좌하고 앉았다.
그는 역천행공의 방법에 따라서 진기를 조심조심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느끼게 된 것은, 이제까지 그의 단전에 머물러 있던 세 가지 진기의
힘이 하나로 뭉쳤다는 것.
그리고 그것보다도 훨씬 거대한 또 하나의 힘이 골수 속에 머물러 있으
며, 현재는 그것이 자신의 내공으로 녹아들지 않았다는 것.
또한 그는 내외상(內外傷)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하였으되, 과거의 내공
을 되찾지는 못하는 입장이었다.
'이 성(二成)의 내공만 되살아났다!'
백무영은 창 쪽을 본다.
창이 환히 밝아 온다. 여명(黎明)이 대지를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새벽의 불빛은 이 세상의 모든 불빛 가운데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간
직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시작이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번뇌승이 죽은 이상, 그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는 또다시 절대의
고독에 빠진 것이다. 고독이 체질화되어 있는 백무영이기는 하되, 이 아
름답고 상큼한 새벽 대기를 마시며 산책을 같이 하고 한 잔의 차를 나누
어 마실 벗이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염주를 매만졌다. 염주는 손때가 검게 끼여 있었다.
번뇌승은 염주알을 굴리면서 이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헤어나고자 노력
했을 것이다.
하나, 백무영은 번뇌를 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염주를 품에 간직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성승. 저는 심중살검(心中殺劍)과 수중살인도(手中殺人刀)를
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계도하지 못할 악인들이 무수합니다. 저
는 해탈한 승려가 되지 못하기에, 그러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유유자적 살
아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띠집 문을 열자, 안개가 뭉게뭉게 흘러들었
다.
이 새벽, 안개가 꽤나 짙다.
안개는 연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먼 산의 웅자가 안개에 뒤덮이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안개가 깔리어 있다. 그리고 안개 너머에서 새벽 공과 시간
이 됨을 알리는 범종(梵鐘) 소리가 들려 왔다.
백무영이 불쑥 나타난 것은 법륭사 승려들에게 또다시 이야깃거리로 화
했다.
백무영은 영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바, 뛰어난 의술과 박학다식한
인품으로 인하여 승려들에게는 은근한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소문에 의한다면, 그는 거지소년과 더불어 술을 진탕 마시다가 사라졌다
는 것이다.
법륭사의 주지는 그가 대우를 못마땅히 여기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여기
는 참이었으며, 그가 머무르고 있을 때 금은자를 한 움큼 쥐어 주어 떠나
지 못하게 다짐해 주지 못했음을 은근히 애석해하던 참이었다.
한데, 그가 어느 새벽에 불쑥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문득 방랑벽이 일어나서 이백 리 정도 떠돌다 온
겁니다."
백무영의 입가에서 특유한 고독의 미소가 떠돌았다.
어찌 되었든 그가 되돌아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생각하는 일이
었다.
즙기가 별로 없는 석옥 안.
방 안은 자단향(紫檀香)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그리고 향로에서 피어 오
르는 향 내음은 은은한 각침향(角沈香) 내음이었다.
산사(山寺)의 승려들은 차(茶) 가운데 선(禪)의 이치를 배운다.
선은 향과도 통하고 있는 것이다.
차를 끓여 마신 뒤, 다로(茶爐)에 남은 불을 향정(香鼎)에 넣고 서서히 향
을 피운다.
이와 같은 회심(會心)의 경계야말로 태청궁(太淸宮)에서 신선과 함께 노
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며, 인간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일이다.
각침향이 타오르는 향로는 주지승이 선사한 것이다.
백무영은 팔선탁 하나 놓이지 않은 마루방 가운데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그는 화선지를 펴놓고 흰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눈빛, 인간의 감정이 침전되어 버린 고독자의 눈빛이다.
흰빛은 고결하며 고독한 빛깔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한 빛깔이기도 하다.
"……."
무슨 상념에 잠기어 드는 것인가?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머물기 시
작한다.
문득, 붓이 쳐들린다.
묵향(墨香)이 풀풀 흐르고, 붓은 궤도를 따라 원형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쓰는 것은 시(時)도 아니고 문장도 아니다. 그는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는 것이다.
동그라미는 느릿느릿 완성이 되었다.
놀라운 건 개구장이가 장난친 그림 같은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가운데, 그
의 이마가 송글송글한 구슬 땀방울에 뒤덮였다는 것이다.
"놀라운 검식이야."
그는 화선지에 그려진 원을 바라봤다.
최근 며칠, 백무영은 의원으로서 할 일이 없을 때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
원을 그리며 지냈다.
그에게 원을 가르쳐 준 인물은 번뇌승.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입적해 버린 인물이다.
그러한 화승 하나가 법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법륭사에는 아
무런 변화도 없다.
백무영은 만월심극혜검도를 그림 가운데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無)이다.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다. 그러하기에, 상
대자는 원형의 궤도를 따라 시전되는 검초의 허실(虛實)을 눈치채지 못하
는 것이다."
그림을 천 장 정도 그리게 되자, 만월심극혜검의 요결(要訣)이 어느 정도
느끼어지는 것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머릿결을 빗어 넘겼다.
검식을 연성하는 기쁨도 잠깐, 그는 엄청난 혈겁에 휘말린 가문의 원한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빠져들며 우울해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두 종류의 적이 있다!'
그는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중원의 마도를 정복한 자가 나의 적이며, 중원의 백도를 장악하고 있는
자 또한 나의 적이다.'
그는 혈혈단신이다. 그에게는 휘하세력 하나 없으며, 그를 위해 울어 줄
사람도 없다.
'그들 모두 내게 죽으리라! 그들이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는 이십 년 내내 자신의 옷을 만들어 온 여인을 기억했다.
'어머니…….'
얼마나 불러 보고 싶었던 이름인가?
고통스러웠던 소년 시절 내내 그의 머릿속에는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머
물러 있었다.
'제가 갑니다. 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는 주먹을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불끈 거머쥐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영무, 있는가."
그를 찾아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늘 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자광(慈光)이었다.
그는 상당히 흥분된 기색이었다.
자광이 영무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영무가 아니면 치료하지 못할 중환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단한 신분을 가진 분이야. 자넨, 왕부(王府)를 아는가?"
"왕부라면?"
백무영은 자광과 더불어 뜨락을 가로질렀다.
"이 곳에서 왕부로 불리는 장소는 둘이네. 하나는 사밀왕부(邪密王府)이
며, 또 하나는 몽고왕부(蒙古王府)이다. 둘 다 새북의 강국이지. 그 중 더
거대한 왕부는 몽고왕부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가 치료해 주어야 할 인물
은 사밀왕부의 중신(重臣)이고……."
"사밀왕부!"
백무영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가 어찌 사밀왕부를 모르겠는가?
사밀왕부는 중원에 이름이 파다한 곳이다.
사밀왕부와 몽고왕부는 새외쌍천(塞外雙天)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중원인들은 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로 합쳐질 경우에는, 중원천하의 세력판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변황인들은 중원에 눌리어 오고 있다는 것을 열등감으로 품고 있으며, 힘
이 생기기만 하면 만리장성(萬里長城) 너머로 야망의 눈초리를 던진다.
사밀왕부와 몽고왕부가 하나로 뭉쳐진다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
할 것이며, 무수한 사람이 죽는 전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사밀왕부는 부국(富國)으로도 유명하다. 그 곳에는 백옥경(白玉京:상제
(上帝)의 거처)이나 자금성(紫禁城)에도 없다는 기진이보창(奇珍異寶倉)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늘 침략당하였으며, 그 결과 지극히 폐쇄적인 전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사밀왕부를 구경해 본 외지인은 없을 정도로 그 곳은 완전한 신비에 휘
어 감기어 있는 것이다.
"주지스님께서는 영무 자네가 그분을 꼭 치료해 주기를 바라시네."
자광은 그렇게 말하며 백무영을 바라봤다.
그는 백무영이 주지승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그가 법륭사의 발전을 위해 신통한 의술을 아낌
없이 펼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환자는 죽루(竹樓)에 머물러 있었다.
죽루 둘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화려한 복식의 무사들이 대거 머물러
있는 바,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병장기는 금은채(金銀彩)를 현란히 발하
는 신병보도(神兵寶刀)들이었다.
'전신을 금은보화로 휘어 감았군.'
백무영은 사밀왕부의 무사들을 보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사밀왕부의 부는 천하를 들썩이고 있다.
그들은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에 걸친 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대륙의 이대상권을 장악한 절대자들이 아니고는 그들과 감히 부를 겨룰
수 없다.
대륙의 이대상권이라 함은, 중주상권(中州商圈)과 강남상권(江南商圈)을
말한다.
백무영은 두 가지 상권의 지배자와 밀접히 연관이 되어 있다.
하여간 백무영은 호위무사들의 삼엄한 눈초리를 받아 가며 죽루 안으로
접어들었다.
휘장이 쳐진 침상 위, 얼굴이 요염한 미부인 하나가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반듯이 누워 있는 바, 침상 언저리에는 네 명의 녹의여검사가 머
물러 있었다.
백무영이 자광과 더불어 방 안으로 접어드는 찰나, 냉광(冷光)이 일며 두
자루 검이 백무영의 가슴으로 다가섰다.
여덟 명의 녹의소녀 가운데 두 명이 검을 찰나적으로 뽑아 들어 백무영
의 가슴에 갖다 대며 일갈을 토했다.
"병장기가 있다면 꺼내 놓으시오."
"왕부의 귀부인 곁으로 다가서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몹시 맹랑한 어조들이다.
백무영은 상당히 언짢은 눈빛이었지만,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소녀 가운데 하나가 그의 소지품을 샅샅이 검사했다.
그녀는 백무영이 아무런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제 가 보십시오."
"흠."
백무영은 뒷짐을 진 채 침상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침상에 누운 미부인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서며, 콧속으로 스며드는
향기에 사로잡혔다.
'사향(麝香)이다. 몹시 귀한 향기이다.'
미부인은 사향노루에서 채취한다는 사향을 전신에 뿌리고 있었다.
여인의 나이는 삼십대 전반으로 보였다. 대단한 여인으로, 몸매가 지극히
풍만했다.
그녀는 흰 궁장을 걸치고 있는 바, 전신에서 흘러내린 땀이 옷자락과 피
부를 밀착시키고 있었다.
여인의 가슴은 남산처럼 불거져 있었다. 그리고 촉촉이 젖은 나삼 덕에
돌기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터질 듯 풍만한 여체가 지극히 관능적이다.
백무영은 자광이 나무아미타불… 나직이 염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산사에 머물러 있기는 하되, 피가 끓어오르는 청년의 신체가 아니던가?
자광에게 있어 몸이 꽈악 맞는 흰 나삼을 걸친 채 반듯이 누워 있는 미
부인의 모습은 부처를 유혹하려다 실패했다는 마등가녀(摩登加女)의 모습
으로 보이고 있으리라.
'아름다운 여인이다.'
백무영은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여인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으으… 으으……!"
여인은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콧날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다.
백무영은 여인의 관자놀이가 한 치 정도 불룩한 걸 보며 흠칫 놀라워했
다.
'태양혈(太陽穴)이 두드러졌다는 것은, 일신에 강한 내공을 익히고 있다
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여인은 일신에 막강한 내공을 지니
고 있다.'
백의미녀는 땀을 쉬지 않고 쏟았다.
땀의 빛깔이 푸르스름하다. 그리고 비릿하며 역겨운 내음이 짙게 배어 있
었다.
'주화입마에 걸린 건 아니다. 그렇다면 독(毒)에 당한 것인가?'
여인의 용모가 아름답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 마음이 흔들릴 백무영이 아
니다.
그는 이미 무수한 여난(女難)을 경험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살덩어리라 하더라도 그를 유혹할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한, 어떠한 우물(尤物)이라 하더라도 그를 유혹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관능미(官能美)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라 하되, 그에게
는 병든 신체를 갖고 누워 있는 환자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백무영은 만박에게서 의학을 배운 바 있으며, 그 후 여러 권의 의경(醫
經)을 독학한 바 있다.
그의 의술은 이미 만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의술
은 만박의 경지를 능가했을지도.
그는 미부인의 혈도 가운데 두 군데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임맥이십사혈(任脈二十四穴) 가운데 옥당혈(玉堂穴)이 막혔다.'
임맥이란 항문(肛門) 앞에서부터 배꼽, 명치, 그리고 몸의 정면 중심을 지
나 목구멍에서 아랫입술까지에 이르는 경락을 말한다.
옥당혈은 그 중의 요혈인 바, 미부인의 옥당혈이 폐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맥(督脈)의 단교혈(斷交穴)도…….'
독맥이란 미저골(尾 骨)에서 척추를 지나 후두부(後頭部)의 중심에서 얼
굴을 거쳐 입술에 이르는 경락(經絡)으로, 독맥 위에 한 줄로 내장에 관
련된 스물일곱 개의 혈도가 늘어져 있는 것이다.
임맥이십사혈이나 독맥이십칠혈에 속하는 혈도는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혈도라 할 수 있다.
옥당혈과 단교혈은 그 중에서도 요혈.
두 개의 혈도가 폐쇄되어 있는 이상, 신체가 제대로 될 수 없다.
'독에 당한 것도 아니다.'
백무영은 두 개의 혈도 부위를 유심히 살폈다.
환자가 여인이기에 옷을 벗길 수가 없으며, 신체를 세밀히 조사할 수도
없다.
그러하기에, 보다 정교한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여인의 피부에서 미세한 지흔(指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력에 당한 흔적.'
백무영은 미부인의 상세를 살핀 지 일각 만에 두 개의 지인을 찾아 냈다.
중정혈(中庭穴)에 하나, 풍부혈(風府穴)에 하나.
두 개의 지인으로 인하여 옥당혈과 단교혈이 폐쇄되어 버린 것이다.
검미(劍眉)가 잔뜩 찌푸려진다.
백무영은 진맥하기를 멈추고 미부인의 얼굴만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는 머릿속에 서른다섯 권 의서 내용을 깡그리 담고 있다.
그는 그 안의 어떠한 약방문(藥方文)을 생각하는 것일까?
백무영은 미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더 이상 나를 놀리지 마시오, 부인."
"……."
"부인은 일부러 혈도를 폐쇄한 것이오. 부인은 환자가 아니오. 고로, 난
부인을 치료할 수 없소. 어차피 아픈 데도 없으니까."
백무영은 노한 표정 가운데 그렇게 말하며 신형을 천천히 틀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
"호호호… 드디어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를 찾아 내었도다. 연환쇄혈수
(連環鎖穴手)를 알아본 사람은 귀하가 처음이에요."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백무영 바로 앞으로 늘씬한 그림자가 내려섰다.
이제까지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누워 있던 미부인이 생긋 웃는 얼굴로
백무영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녀는 중병에 걸린 게 아니라,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발휘해 스스로
의 혈맥을 처단하고 혼절한 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하는 신의십니다."
여인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백무영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어이해 나를 놀리신 것이오? 난 바쁜 사람이오."
"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난주성에 소문이 자자한 신의, 영무선생(影無先生)의 의술을 시험하기
위해서……."
"시험이라니?"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 어떠한 것인지는 곧 알게 되실 것입니
다."
여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백무영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한기를 느꼈다.
'어이해 나의 의술을 시험한 것일까.'
백무영이 얼떨떨해 할 때, 여인의 손이 쳐들려졌다.
"전후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저와 더불어 모처로 가셔야
합니다."
피잉-!
지공이 퉁기어지며 백무영은 거궐혈(巨厥穴)에 화끈한 자극을 느꼈다.
'비환탄지(飛環彈指)!'
백무영은 미부인의 솜씨가 관북절기 가운데 비환탄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미립타혈(米粒打穴) 적엽비화(摘葉飛花)를 능가하는 수법
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혈도의 위치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게 들통나
겠지.'
그는 실소를 흘리며 혼절한 척했다. 그의 몸뚱이는 미부인의 팔과 허리
사이에 끼워졌다.
"서둘러서 왕부로 돌아가자. 적어도 오늘 밤 안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혼
례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섰다. 그 때까지 일을 마쳐야 한다."
"예, 부인."
"비마(飛馬)가 칠백 리를 호송하고 나서, 비타(飛駝)가 오백 리를 호위할
겁니다. 그리고 사막에 대기하고 있는 비랑(飛狼)이 나머지 천이백 리를
……."
녹의소녀 가운데 하나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가운데, 백무영의 몸
뚱이는 미부인의 팔과 허리 사이에 끼워진 채 네모난 상자에 담기어졌다.
'결혼식이라고?'
백무영은 상자에 담기며 눈을 스르르 떴다.
그는 근자 몇 달 내내 사찰 안에서만 살아왔다.
이 곳은 변황의 오지.
인근 오천 리 안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주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은자(隱
者)로 살아온 것이다.
그는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시간을 써서 무공을 회복한 다음에 중원에 돌
아갈 작정이었다.
지난 겨울 사이, 천하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
다.
솔직히 최근 강호 정세는 격랑(激浪)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무수히 일어났고, 그 가운데에는 그와 밀접히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끼여 있는 사건도 있다.
무림에서 추방된 고독자, 백무영.
그는 해괴한 경위로 인해 납치되어 버린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