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第二十七章 鐵走救宋
“크아악!”
“케엑!”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 소리가 고요한 하늘에 메아리쳤다.
육자예는 감았던 눈을 떴다.
“……?”
천천히 떠지는 그의 동공에는 숨길 수 없는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분명 비명을 지르고 죽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대신 엉뚱한 사람이 비명을 터뜨리며 죽어 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던 육자예의 두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여유를 부리며 자신을 희롱하던 괴모와 사대고수가 모두 비참한 모습으로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나자빠져 있는 모습이 그렇게 기괴해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 옆.
어림잡아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백의복면인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육자예는 가슴에 숫자를 수놓은 채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백의복면인들을 보자 비로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짐작하게 되었다.
삼십육천강(三十六天).
대정회 최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삼십육천강이 급박한 순간에 자신을 구해 준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육자예는 참고 참았던 슬픔이 왈칵 밀려와 도무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서글픈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천강성주(天星主)…… 왜 이제야 왔나, 왜?”
가슴에 이(二) 자(字)가 수놓아진 복면인, 천강성주가 얼굴 가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 죽었네, 다! 형산(衡山)의 이(易) 장문인(掌門人)도, 서(徐) (兄)도…… 그리고 탁(卓) 대협(大俠)도, 모두 다 죽었단 말일세!”
순간, 천강성주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육자예는 대답 대신 허무한 표정으로 단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으음……!”
천강성주는 실성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육자예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일월장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떠났던 고수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니,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육자예의 저 실성한 듯한 표정은 또 뭐란 말인가?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천강성주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육자예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는 좌우에 주욱 늘어서 있는 복면인들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자, 갑시다.”
천강성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번개같은 동작으로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익!
그 뒤를 육자예를 등에 업은 복면인과 나머지 복면인들이 따랐다.
파라락!
휘이익!
백의복면인들의 신법(身法)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들의 모습은 실로 순식간에 주위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단지 다섯 구의 시체만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 * *
슥! 스윽!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닦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가 복잡하고 감정이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검을 만지기만 하면 항상 그 모든 것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지는 그였지만, 오늘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머리가 맑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심란해지기만 했다.
송난령의 아름답고 서글픈 모습이 자꾸 떠올라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철군악은 검을 닦던 손길을 멈추고 가만히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철단소가 죽고 그가 다시 강호에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온통 굳은살과 거미줄 같은 검상에 보기에도 흉측했던 손바닥이, 이제는 언뜻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철군악은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손의 상처, 아니, 손에 상처가 났을 당시의 괴로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참곤 했었지만, 지금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그런 것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왜 그때 좀 더 솔직히 말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그녀에게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고통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철군악은 내심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녀에게 또 다른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으음……”
철군악은 답답한 한숨을 토해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심사가 복잡할 때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
그것은 바로 뭔가에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술[酒]이든, 수련(修練)이든…… 무엇이든 간에.
* * *
‘후후후!’
송난령은 자조 섞인 웃음을 토해 내며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불같은 액체가 싸한 향기를 동반한 채 목줄기를 타고 거침없이 위(胃)로 쳐들어왔다.
내장을 짜르르하게 훑고 지나가는 독한 술기운에, 송난령은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입술을 벌리며 경쾌한 탄성을 토해 냈다.
“카아!”
그녀는 잠시 황홀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있더니 이내 흔들리는 손을 움직여 다시 술병을 잡았다.
쪼로록!
물처럼 무색 투명한 액체가 술병을 통해 잔으로 흘러 들어갔다.
송난령은 상체를 반쯤 구부려 탁자에 기댄 후 한 손으로 술잔을 잡고 그것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술잔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무슨 특별한 보석으로 만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름다운 문양(紋樣)을 넣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사기그릇일 뿐이었지만, 송난령의 눈에 비친 술잔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잔아, 잔아! 네 모습이 이렇게 어여쁘니 모든 사람이 너를 보고 술을 마시나 보구나!”
혀가 꼬부라져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이 쓸쓸함만 지워 버릴 수 있다면 조금쯤 욕을 얻어먹는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송난령은 약간 풀어진 눈으로 잔을 쳐다보며 뭐라 막 중얼거리더니 다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쪼옥!
독하디 독한 독주(毒酒)가 또 한 번 그녀의 목을 통과해 위로 엄습해 들어갔다.
“아…… 좋다!”
송난령은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랑에 애달파 마음 졸일 때는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이고 무관심했었는데, 이렇게 집착을 버리니 세상이 그렇게 달라 보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넉넉했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송난령은 탄식했다.
비록 술기운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지금 이대로가 훨씬 좋았다.
괜히 속을 끓일 일도 없었고, 마음 졸일 일도 없었다.
무뚝뚝하기만 한 그가 뭐가 그리 좋다고 그처럼 수모를 겪어야 했단 말인가?
철군악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보다 훨씬 나은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비록 철군악처럼 무공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내는 자신을 목숨보다 사랑했다.
더군다나 가문이나 능력,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냉철하게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철군악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송난령은 몽롱한 눈길로 정면을 응시했다.
준수한 청년, 남궁욱이 꼿꼿한 자세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한번 좋은 쪽으로 마음을 먹으니 정말 이만한 남자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 좋겠다, 자신을 목숨보다도 사랑하겠다…… 이 정도의 사내라면 한번쯤 사랑에 빠진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까짓 거……!’
송난령은 내심 굳은 결심을 하고는 몽롱한 얼굴을 들어 남궁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머리가 흔들려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남궁욱이 몸을 흔들어서 그러는 것인지 초점이 정확히 잡히지 않았지만, 말을 꺼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남궁 공…… 자님! 우리 이제 그만 나가요.”
남궁욱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구요…… 어디 분위기 좋은 데로 저 좀 데리고 가주세요.”
“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남궁욱은 일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나, 남궁욱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고 그리던 순간이 드디어 다가오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궁욱은 홍옥(紅玉)처럼 불그스름하게 반짝이는 송난령의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자 이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남궁욱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나가시죠.”
“좋아요!”
꼭 미친 사람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막 일어나던 송난령은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으음……!”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술을 먹은 탓에 일시지간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그런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욱이 그야말로 번개 같은 동작으로 다가가 부축해 주었다.
“송 소저, 괜찮으십니까?”
놀란 얼굴로 송난령을 부축하던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하아……”
안기다시피 한 그녀의 몸에서 너무도 향긋한 내음이 퍼져 나와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던가?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온몸에 와 닿는 여체(女體)의 감미로움은 또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자, 갑시다!”
아직도 품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송난령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이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왕충은 시뻘게진 얼굴로 마치 악을 쓰듯 입을 열었다.
“뭐라고? 공손(公孫) 대협(大俠), 아니, 공손표 그 죽일 놈이 진정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커다란 그의 목소리가 좁은 방안에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지만, 뒤이어 들려 온 조용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게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예.”
너무도 짤막한 대답이었으나, 왕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일의 전모(全貌)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월장 놈들은 이미 삼성의 개가 되었단 말이 아닌가?”
“그렇게 봐야겠지요.”
“이런 육시랄 놈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심한 욕을 내뱉는 왕충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왕충은 그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월장으로 간 사람들 중 생존자(生存者)가 정녕 육호법(陸護法) 하나뿐이란 말인가?”
정면.
왕충 자신뿐 아니라 대정회(大正會) 모든 인물들이 신(神)처럼 떠받들고 의지하는 인물, 제갈추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육호법의 말이니 틀림없겠지요.”
“공손표, 이…… 개 같은 놈!”
왕충은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지 이를 뿌드득 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육호법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습니다.”
왕충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심상치 않다니? 뭐가 말인가?”
“육호법의 말을 들어 보니 일월장(日月莊)뿐만 아니라 남궁세가(南宮世家)와 천도팽가(天刀彭家) 또한 삼성과 힘을 합친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면 무림사대세가(武林四大世家)가 모두 삼성의 주구(走狗)가 되었단 말인가?”
왕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제갈추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제갈추는 그 눈을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왕충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같이 수백 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정파(名門正派)가 바로 무림사대세가(武林四大世家)이다.
오랫동안 무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곳도 바로 그들이거니와 감당키 힘든 악(惡)이 창궐(猖獗)할 때면 언제나 목숨을 걸고 정의(正義)를 수호(守護)한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한데, 언제까지나 정의로운 집단일 거라 생각했던 그들이 이제는 만악(萬惡)의 주범(主犯)이라 할 수 있는 삼성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놀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으음……”
왕충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사대세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힘도 힘이거니와 지난 수백 년간 쌓아 온 신망(信望)의 무게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왕충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힘이라는 거야 원래 강할 때가 있으면 약할 때도 있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신뢰는 절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삼성은 이제 사대세가의 가세로 힘뿐만 아니라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의 신뢰를 얻을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힘도 달리는 판에 이제 정말 큰일이로군.”
“그렇지요……”
제갈추는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충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비록 봉공(奉公)으로 있는 검제(劒帝) 냉좌기(冷佐起)나 만승검왕(萬乘劒王) 단리석(段里碩) 같은 고수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삼성과는 커다란 힘의 차이가 있었다.
대정회의 전력(全力)을 끌어 모은다 해도 삼성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철군악이 삼성의 수하인 십존 등 수많은 고수들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정회는 더욱더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제갈추와 왕충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꽈당!
돌연 방문이 부서질 듯 거세게 열리며 무사(武士) 하나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크, 큰일 났습니다!”
그가 어찌나 호들갑스럽던지 왕충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웬 소란이냐?”
무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소매 속에서 쪽지 하나를 내놓았다.
“소, 송 소저 방에 이, 이런 게 있었습니다.”
“대체 그게 뭔데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무사에게서 종이 쪽지를 받아 펼쳐 보던 왕충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예쁘장한 글씨체로 단지 몇 자만이 써 있었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뜻밖인 탓이었다.
<마음이 복잡해 잠시 바람 좀 쏘이고 오겠으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왕충이 일그러진 얼굴로 망연히 쪽지만 응시하고 있자 제갈추가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충은 대답하지 않고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를 받아 훑어보던 제갈추가 흔들리는 눈으로 탄식했다.
“큰일이로군.”
왕충이 그의 말에 동감하듯 투덜거렸다.
“글쎄 말이야…… 지금이 어느 땐데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녀, 돌아다니긴!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맞는 말이었다.
삼성이 대정회라면 이를 갈고 있는 마당에 혼자서 아무 대책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송난령은 철군악과 함께 다니면서 삼성에게 미운 털이 박힌 처지가 아니던가?
아무리 이곳 산서성(山西省)이 대정회의 힘이 크게 미치는 곳이라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너무도 위험 천만한 것이었다.
제갈추는 잠시 쪽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무사에게 물었다.
“철 공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예, 그게…… 조금 전 황급히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돌연 제갈추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역시 그렇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자 왕충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제갈 군사! 왜 그러나?”
“아무래도…… 음모(陰謀) 같습니다.”
왕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모라니?”
“이 글씨체를 자세히 보십시오.”
“음?”
왕충은 제갈추의 말대로 쪽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지만, 도무지 이상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어쨌단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왕충을 바라보며 제갈추는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건 송 소저의 글씨가 아닙니다.”
“뭐라고?”
왕충은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제갈추는 분명 송난령의 글을 본 적이 있을 것이고, 아울러 그는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절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송가 계집애가 쓴 것이 아니면 대체 누가 쓴……?”
왕충은 말을 하다 말고 뭔가 퍼뜩 떠오르는 게 있는지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송난령이 사라지고 나자마자 아울러 철군악이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쳐나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는 잠시 시퍼레진 얼굴로 제갈추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놈들이?”
제갈추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허……!”
왕충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 냈다.
송난령 뿐만 아니라 철군악도 위험했다.
그는 송난령은 차치하고서라도 철군악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일순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삼성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오직 철군악뿐이라서도 아니었고 그와 정이 든 때문만도 아니었다.
철단소의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제 사형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로 뜻한 바와 목적은 달랐지만, 철단소와 철군악은 모두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고독(孤獨)한 투사(鬪士)였다.
영웅(英雄)의 죽음은 철단소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안 돼!”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왕충의 뒷모습이 그렇게 다급해 보일 수 없었다.
* * *
휘이익!
철군악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번개같은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달조차 뜨지 않아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치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질주할 뿐이었다.
이처럼 야심한 시각에 도대체 어디를 저리도 급히 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송난령 때문이었다.
어떻게 눈에 띄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철군악은 조금 전 한 장의 종이쪽지를 보게 되었다.
누가 보낸 건지, 또 누가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철군악은 쪽지의 내용을 보자 그것이 자신에게 와야 하는 것임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종이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 쓰여 있었다.
자신들이 송난령을 보호하고 있으니 철군악더러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철군악 이외에 다른 사람이 눈에 띈다면 송난령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 비슷한 글도 함께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송난령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던 철군악은, 그래서 이렇게 앞뒤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 나온 것이다.
어두컴컴한 산야(山野)를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단지 송난령을 구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철군악은 문득 눈앞에 낡은 사당(祠堂) 하나가 보이자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삼국 시대의 영웅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모시던 관제묘(關帝廟)로,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지 황폐할 대로 황폐한 모습이 어두컴컴한 밤과 어울려 매우 음습한 느낌을 주었다.
철군악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이 틀리지 않다면 저곳이 바로 송난령이 있는 곳이다.
만약 일이 생각대로 잘된다면 무사히 그녀를 구할 수 있겠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송난령이나 자신, 둘 다 이곳에 뼈를 묻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인지라 철군악으로선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관제묘를 향해 다가갔다.
저벅! 저벅!
주위가 어찌나 적막한지 발소리만 크게 울려 퍼질 뿐 어디서고 인기척은 들려 오지 않았지만, 철군악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데, 그가 막 관제묘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화악!
돌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불빛이 번져 나오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철군악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슬쩍 둘러볼 뿐 별반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듣던 대로 아주 무심한 놈이로군!”
어디선가 감탄인지 비난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와 밤하늘에 웅웅거리며 퍼져 나갔다.
철군악은 고개를 들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사람.
번쩍이는 눈과 차분한 몸가짐으로 인해 단지 척 보기만 해도 절정(絶頂)의 고수임을 느낄 수 있는 세 사람이 철군악을 타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좌우측에 있는 사람은 둘 다 청색(靑色) 장포(長袍)와 치렁치렁 늘어뜨린 백발까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항상 함께 다니던 자들 같았다.
철군악은 그들의 특이한 외모를 대하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련쌍괴(祁連雙怪)로군!’
기련쌍괴(祁連雙怪)!`
이미 삼십 년 이상을 감숙성(甘肅省) 제일고수(第一高手)로 군림해 오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친구 사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오로지 험하디 험한 기련산에 은거한 채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않아 범인(凡人)들에게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자들 또한 그들이었다.
각자 지니고 있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서로의 눈만 보고도 의중을 알 수 있는 관계로, 그들의 합격술(合擊術)은 이미 오래 전에 무적(無敵)으로 공인되었을 정도였다.
철군악이 알고 있기로, 그들은 성검문의 호법을 맡고 있었다.
눈을 돌려 기련쌍괴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던 철군악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매부리코에 독사 같은 눈, 그리고 비정하면서도 잔인해 보일 만큼 얄팍하기 그지없는 입술.
간담이 약한 사람은 모습만 보고도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갑고 섬뜩한 인상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철군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상대를 살펴보던 철군악은 그의 미간에 그어진 희미한 선을 보자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바로 삼목혈수(三目血手)였다.
삼목혈수!
이 얼마나 두렵고도 무서운 이름이던가?
그는 나이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렇다고 배경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하나, 무림인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랫동안 적수를 찾아보지 못했을 만큼 고강한 무공(武功)도 무공이지만, 그는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은 절대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또한 심성이 독사(毒蛇)보다도 차갑고 비정해 한번 화가 났다 하면 꼭 피를 보고야 마는 성격이어서, 누구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강한 무공과 잔인한 성격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에 십존(十尊)의 반열에 올라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삼목혈수였다.
삼목혈수는 잠시 쏘는 듯한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철군악이냐?”
철군악은 그의 물음에는 답할 생각도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송 소저는 어디 있소?”
삼목혈수는 잠시 번쩍이는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슬쩍 내저었다.
휙!
그의 손으로부터 뭔가 희끗한 것이 철군악을 향해 날아왔다.
탁!
손으로 그것을 받아 펼쳐 보던 철군악의 눈에 순간적으로 시퍼런 광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귀고리.
벽옥(碧玉)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귀고리가 그의 손 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를 토해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철군악은 이 귀고리를 잘 알고 있었다.
송난령이 항상 차고 다녀 그에게는 너무도 눈에 익은 것이 바로 이 귀고리다.
그녀는 이 귀고리를 너무 좋아해 절대 몸에서 떼어놓는 적이 없었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눈으로 삼목혈수를 쳐다보았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들의 손아귀에 송난령이 있음이 확실한 이상 철군악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원하는 게 뭐요?”
삼목혈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철군악을 쏘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목이다!”
철군악의 얼굴에 실소가 떠올랐다.
“여자 하나 때문에 내가 당신들이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소?”
“……!”
그의 말이 어찌나 싸늘하던지 삼목혈수는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냉면무적(冷面無敵)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지만, 직접 보니 이건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비정(非情)하고 냉혹(冷酷)한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바로 그였지만, 냉면무적은 아예 한술 더 뜨는 것이 아닌가.
‘듣던 대로 아주 냉정한 놈이군……’
삼목혈수는 내심 마음을 단단히 다져 먹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물론 네놈보고 앉아서 우리의 칼을 받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가 우리를 물리치면 신검미인(神劒美人)은 물론이요, 남궁세가의 소가주(小家主)까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철군악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면 바로 남궁욱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송난령은 남궁욱과 함께 있다가 저들에게 잡혔다는 말이 아닌가!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어찌 됐든 우선은 송난령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철군악은 빛나는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더니 어느 순간 비호(飛虎)처럼 몸을 날렸다.
쐐액!
검의 움직임에 따라 푸르스름한 검기가 허공 가득 일어나더니 이내 어둠을 뚫고 삼목혈수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검기가 어찌나 날카롭고 빠르던지 삼목혈수 등은 미처 자세를 잡을 틈도 없이 허겁지겁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엇!”
“이놈!”
우르릉!
번쩍! 번쩍!
비록 얼떨결에 쳐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절정고수들이 내뿜은 경력(勁力)은 만근 거석(巨石)이라도 박살낼 것처럼 위맹(威猛)하기 짝이 없었다.
삼목혈수는 장력(掌力)으로, 기련쌍괴는 일괴(一怪)가 유성추(流星鎚)를 이괴(二怪)는 만자탈(卍字奪)을 사용해 철군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콰쾅!
쐐애액!
장내는 순식간에 고수들이 내뿜은 장력과 번쩍이는 예기(銳氣)로 인해 물샐틈없는 상황으로 변해 버렸다.
그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삼목혈수와 기련쌍괴를 상대하던 철군악의 눈이 돌연 기괴한 빛을 발했다.
장력을 피하면 만자탈이 머리통으로 날아들었고, 만자탈을 쳐내면 이번에는 유성추가 그의 몸뚱어리를 부숴 버릴 듯 파고들었다.
한꺼번에 세 명의 십존과 상대를 해본 적이 있던 철군악으로서도 이처럼 무시무시한 합공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들의 합공이 어찌나 절묘하던지 아마도 철군악을 상대하기 위해 적지 않은 수련(修練)을 쌓은 것 같았다.
철군악이 어찌해야 할지 판단을 못 내리고 있을 때, 일괴가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이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유성추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철군악을 향해 쏘아져 왔다.
위이잉!
철군악은 섬뜩한 기세로 날아드는 유성추를 얼른 피하며 앞을 향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번쩍! 번쩍!
순간적으로 주위가 푸르스름해지며 시퍼런 검기가 앞에서 달려들던 이괴를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순간적으로 이괴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억!”
그는 얼른 만자탈을 들어 막았지만, 검기(劒氣)를 완전히 차단하지 못해 소매를 잘리고 말았다.
카캉……
“으윽!”
이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철군악은 멈칫거리는 그에게 따라붙었다.
쉬이익!
순식간에 이괴의 코앞까지 다가간 철군악이 막 검을 휘두르려 할 때,
“여기도 있다!”
“뒈져랏!”
잠시 뒤로 물러났던 일괴와 삼목혈수가 악을 쓰며 다시 철군악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싸악!
우우우웅……
꼭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 품이 그렇게 섬뜩해 보일 수 없었다.
철군악은 별수 없이 이괴를 포기한 채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는 몸을 슬쩍 틀어 일괴의 유성추를 간단히 피한 후 검을 세차게 떨쳐 냈다.
꽈르릉!
풍뢰야우(風雷夜雨)의 검기가 가공할 속도로 삼목혈수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나, 삼목혈수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얼굴로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 검기를 피해 내는 것이 아닌가!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던지 철군악은 일순 기괴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삼목혈수의 움직임을 보건대 아무래도 이번 싸움에 대비해 많은 연구를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간단하게 자신의 검법을 파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삼목혈수는 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눈을 번뜩이며 기회를 보고 있더니 어느 순간 철군악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후우우웅……
삼목혈수의 손이 피칠을 한 듯 시뻘겋게 변하더니 실로 엄청난 마기(魔氣)가 일렁거리며 퍼져 나와 주위를 감싸는 것이 아닌가!
그 무시무시한 마기는 이내 불그스름한 장력으로 바뀌어 철군악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왔다.
콰아아아앙……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고 강렬했던지 태산(泰山)이라도 감히 그 앞에서는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삼목혈수 비장의 절예인 곤천혈장(困天血掌)이었다.
곤천혈장(困天血掌)!`
마도칠대장력(魔道七大掌力)의 하나로, 이미 오래 전에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진 마공(魔功).
완벽하게 익히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맹점이 있었지만, 익히기가 어려운 만큼 그 위력이 끔찍하고 무시무시해 무인이라면 누구나 얻기를 갈망하는 천고(千古)의 절학(絶學)이 바로 곤천혈장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마인(魔人)들이 대성(大成)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피땀을 흘렸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마의 장법.
곤천혈장은 만약 대성할 수만 있다면 손이 금강석(金剛石)처럼 단단해져 웬만한 병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고 했다.
콰아아앙!
보기에도 끔찍한 시뻘건 장력이 덮쳐 오자 철군악은 감히 태만할 수 없었다.
그는 얼른 저만치 뒤로 후퇴한 후 검을 좌우로 힘껏 그어댔다.
과아아아아……
수많은 편린(片鱗) 모양의 검기가 섬뜩한 기세를 동반한 채 마치 빛살 같은 속도로 삼목혈수를 향해 몰아쳐 갔다. 강대무비(强大無比)의 광해삼검(狂海三劒)이 펼쳐진 것이다.
두 명의 절정고수가 펼친 막대한 경력(勁力)은 곧바로 허공에서 엄청난 충돌을 일으켰다.
따당! 땅!
기괴한 쇳소리가 터져 나오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철군악이 뒤로 주춤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석상처럼 굳은 얼굴은 한 채 뒤로 물러나는 그의 두 눈에는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절세의 신검(神劒)이라는 무적인(無敵刃)과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삼목혈수는 손목이 잘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말짱한 모습이었다.
외려 철군악이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인간의 손과 병기가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병기를 쓴 사람이 오히려 더욱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철군악은 어이가 없어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흐흐흐!”
기련쌍괴가 병기를 마구 휘두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촤라라락!
위이잉……
중병(重兵)인 유성추와 날이 시퍼렇게 선 만자탈이 철군악의 뒷덜미와 옆구리를 노리며 빠른 속도로 쏘아져 왔다.
하나, 그는 별로 피할 마음이 없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공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네놈도 이제 끝장이다!”
저만치 물러났던 삼목혈수가 시뻘건 손을 휘두르며 또다시 덮쳐 왔다.
쐐애애액……
비이잉!
그들의 날카로운 공세는 어느새 철군악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어 누가 봐도 그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