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Dylan Thomas (1914 - 1953)
1930년대의 영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오든, 스펜더, 먹니스, 루이스 등 옥스포드 출신으
로 구성된 오든 그룹이었다면 1940년대의 대표적인 구룹은 신묵시파(The New Apocalypse)
또는 신낭만파(The Neo-Romantics)라고 불리우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다. 그러나 이 두 가
지 호칭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그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묵시파라는 것은 1940년대의
영시단을 특징짓는 새로운 낭만주의의 몇 개의 흐믈 가운데서 시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뚜렷한 것을 말한다. 주로 겔트적인 배경의 시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1939년에 {신묵시록}
(The New Apocalypse), 1914년에 {백인 기수}(The White Horseman)이라는 시집을 발간
했는데 토머스는 {백인 기수}에 산문을 기도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오든보다 7년 연하이고 첫 시집을 오든보다 4년 늦게 발표했으나 40년대 영시으
이 가장 뚜렷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34년에 첫시집을 발표하고 계속하여 제 2시
집, 제 3시집을 발표했으므로 시기적으로는 오든 일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작품활동을 했다
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1930년대 영시의 주된 흐름이나 엘리엇적인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히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낭만적인 시풍은 영시에 있어서 그 이전의 낭만주의로 되돌
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원래 낭만적인 체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시적 방법은
다분히 초현실주의에서 얻어온 것이다.
그는 트리스(Treece)에게 보낸 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내 안에서 한 이미지를 정서적으로 생겨나게 해서 그것이 내가 지닌 지적인 그리고 비
평적인 힘을 적용하는 것이요, 그 이미지로 하여금 또 하나의 이미지를 낳게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첫째 이미지와 충동하게 하고, 그 두 이미지에서 생겨난 셋째 이미지에서 넷째의 모
순된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을 내 개인의 형식의 테두리 안에서 모두 한꺼번에 갈등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요. . . . 내 작품은 어느 것이나 그 생명이 어떤 중심적인 이미지의 둘레를
동심원을 그리며 돌 수는 없고, 그 생명은 중심으로부터 나와야만 하오. 한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이오. 그리하여 나의 이미지들의 연속은 어느 것이나 창조와
반작용과 파괴와 모순의 연속이어야만 하오.
윗글은 토머스가 자신의 시적 방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
미지의 전개방시기은 초현실주의의 이른바 "자동기술"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
에서 정서적으로 생겨난 이미지에 "지적인 그리고 비평적인 힘을 적용"한다는 것은 초현실
주의와는 구별되는 의식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신묵시파의 시인들처럼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의식적인 통제를 가하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토머스의 시는 매우 모호한 경우가 많으며, 구둣점이나 하이픈이 흔히 생략된다. 또한 그
의 시에는 성서적 이미저리나 암시가 많고 성적인 이미저리가 노골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의 시 전체에 걸쳐서, 특히 초기시에서는 탄생과 교접과 죽음이 하나의 집념처럼 되어 있
다. 그의 시에서는 임실할 당시에 이미 죽음이 함축되어 있으며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동일한 과정의 두 면에 불과한 것처럼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의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홉킨스를 방불케하는 언어상의 기교 때문에 모호하고 난해할 때가 많다. 데이비드
에이브즈(David Aives)는 토머스의 시의 기교를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미지 사이의 전이는 말장난, 이중의 뜻, 조어, 합성어, 명사형 동사, 이중의 선행사를 받
는 대명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과 문맥에 의한 더 큰 구성이 있는데, 앞으
로도 읽을 수 있고, 거꾸로도 읽을 수 있는 절, 주문과도 같은 운율, 운, 도안한 말의 모양,
시형과 종지부를 대신한 쉼표로 쓰다듬어진 고르지 않은 이미지, 하나하나는 동용하지만 체
제로서는 안정되도록 잇따른 이미지로 병치된 상말, 속어 및 형식적이고 일반적인 추상적
말씨가 그것이다.
이와같이 토머스의 언어구사는 홉킨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홉킨스에게서 보이는 대상과 방
법에 대한 철저한 추구가 토머스에게는 부족하다. 홉킨스에게 잇어서는 표현이 수단이었지
만 토머스에게는 표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수가 많았다. 그 결과 그는 "고의적으로 난해"하
게 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토머스의 인생관은 기독교인의 인생관과 부합되지만, 이는 단지 기독교가 삶 속의 죽음과
죽음 속의 삶이라는 이미저리를 위해 필요한 상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토머스의 기독교
는 그것이 삶의 감미로움을, 그것도 특히 아이가 시간과 죽음에 관한 어른의 느낌을 배우기
도 전에 지극히 분명히 인식한다는 점에서 엘리엇의 기독교와는 구별되는 다른 형태의 기독
교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기쁨을 느낀다는 점에서 17세기 시인 트라헌
(Thomas Traherne)을 닮았다. 어른들에 관한 그의 시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
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집}(Collectd Poems, 1952)에 붙인 주석에서 "이 시들은 비록 조
야하고(粗野)하고, 의심과 혼동이 잇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신
을 찬양하여 쓰여졌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지독한 바보다"라고 써놓고 있다.
토머스는 1914년 10월 27일에 웨일즈의 스완씨(Swansea)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완씨 문
법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대학에 진학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버나드 쇼우(Bernard Shaw)를 예로 들며 즉각 작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사실상 그의
스타일은 그가 17세 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1934년에 20세의 나이로 그의 최초의
책 {18시편}(18 Poems)을 발표하여 씻웰(Edith Sitwell)등으로부터 찬사를 들었다. 그는 시
이외에 단편 소설과 희곡, 방송 대본 등을 썼으며, 시낭송을 잘하여 미국에서 오랫동안 강연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과음과 알콜중독으로 1953년 11월 9일에 뉴욕에서 그는 사망했다.
토머스의 시적 경력은 4기로 나누어진다. 초기에는 농촌을 배경으로 웨일즈의 농민의 삶
을 극명하게 묘사한다. 제 2기는 신념의 실험기로 갈등을 보여준다. 제 3기는 신에 대한 문
제에 접근하며 비난과 희망과 절망을 보여준다. 제 4기에는 그림과 음악에 대한 관심을 표
현하고 있다.
토머스의 시의 형식적 특색은 평이한 언어의 조신한 선택, 평이한 구문 사용, 적확한 심상
의 제시(시각적 이미지의 제시), 함축성이 많은 은유 사용, 사소한 진술로 심각한 의미전달
등을 들을 수 있고, 내용적 특색으로는 교회가 무기력하고 쇠약해지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현대의 신도들이 겪는 실존적 갈등, 고뇌를 표출하며, 신앙적 진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하나님(신)의 호칭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In my Craft or Sullen Art
In my craft or sullen art
Exercised in the still night
When only the moon rages
And the lovers lie abed
With all their griefs in their arms,
I labor by singing light
Not for ambition or bread
Or the strut and trade of charms
On the ivory stages
But for the common wages
Of their most secret heart.
Not for the proud man apart
From the raging moon I write
On these spindrift pages
Nor for the towering dead
With their nightingales and psalms
But for the lovers, their arms
Round the griefs of the ages,
Who pay no praise or wages
Nor heed my craft or art.
1946
나의 기술 즉 무뚝뚝한 예술로
달만이 분노하고
연인들이 그들의 팔에
모든 슬픔을 안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
고요한 밤에 연습한
나의 기술 즉 무뚝뚝한 예술로
나는 노동한다 노래하는 빛으로
야망이나 빵을 위해서나
또는 상아빛 무대 위에서
매력을 드러내거나 거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매우 은밀한 마음의
평범한 보답을 위해서.
분노하는 달에서 초연한
오만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쓰는 것은 아니다
이 물보라치는 페이지 위에
또한 나이팅게일과 찬가를 지닌
우뚝솟은 죽은자들을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연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팔을
시대의 슬픔에 두른채,
칭찬도 보답도 않고
또 내 기술 즉 예술에 주의않는 연인들을 위해서다.
<작품해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어조는 경쾌하며 서정적이다. 화자가 애인들을 위하여 힘들
여 노래를 부르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작품의 어조는 예술과 현실
의 대조에서 오는 아이러닉칼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쓰라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종류
의 것이다. 이러한 가벼운 내용이 다소의 예외는 있지만 약강 3보격을 기본으로 하는 리듬
에 실려 경쾌하게 전개된다.
화자는 자신의 시작(詩作)이 외롭고 쓸쓸하며 재미도 없고 멋도 없는 달갑지 않은 일이라
고 서두를 꺼낸다. Thomas는 자신의 시작에 관하여 "내 시는 흘러나오지 않고 도막도막이
만들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Wordsworth가 영감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시를
쓴다고 말한 것에 상반되는 것이다. Wordsworth는 "감정의 자연발생적 유출"을 시라고 말
했으나 Thomas는 Eliot적인 방법, 다시 말하여 각 부분부분을 쓴 후에 그것이 하나로 형성
되도록 한 시인이다. Thomas는 그와 같은 달갑지 않은 시작을 달빛 아래에서 애인들이 사
랑에 잠기는 다분히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습작하고 다듬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
하는 것이 금전이나 명예,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 시인이 된다는 외적 화려함이 지니는
매력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신의 시에 공감해 줄 애인들의 정서적 반응이라는 하찮
은 보수를 위해서다. 그러나 그 애인들은 현실세계에 도취하여 화자가 이룩한 그 세계가 비
록 아름답고 영원한 세계일망정 자기들의 현실세계만은 못하니 그에 대한 칭찬도 보수도 없
고 돌보지조차 않는다는 내용으로 된 것이 이 작품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시작활동을 "기술", "고고한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나는
노동한다"고 말하여 그가 시를 쓰는 일이 힘드는 일임을 말한다. 기술, 예술 등의 말은 체력
을 가하여 비틀고, 들어 맞추고 한다는 뜻의 어원을 가진 말로서 자연발생적이 아닌 고역을
필요로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제 1행의 "고고한"(sullen), 제 2행의 "습작하다"
(exercise), 제 6행의 "노동한다"(labour) 등의 말이 기술, 예술 등과 부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Thomas는 시를 쓴다는 기술, 또는 예술이 힘을 들여서 수고한다해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고집스럽고 고고한 일이며 많은 훈련과 연마 즉 습작을 필요로 하는 힘드는 일이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고한"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함축성을 생각해보자. 이 단
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울적한", "시무룩한", "기분 나쁜", "불만스러운", "완고한" 등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를 "기분 나쁜"이나 "불만스러운"의 뜻으로 해석하
여 화자가 애인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정서적 반응을 유일한 보답으로 알고
시를 쓰지만, 그들은 현실세계에만 집착할 뿐 시인의 노고를 알아주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
으므로 기분나쁘고 불만스럽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지나친 해석인
것으로 여겨지며 단순히 시에 표현된 바와 같이 "습작하다", "노동하다" 등의 말과 부합되
게 "완고한", "순종하지 않는" 등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좋을 듯싶다. 여기서는 그것
을 "고고한"이라고 번역하였다.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며 이처럼 다루기 힘드는 예술을 열
심히 만들어내려 애쓰는 화자, 즉 시인의 모습과 달밤의 애인들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대조
되어 시인의 고적한 모습이 한층 더 뚜렷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편의 끝부분에 나오는
"예찬도 임금도 치르지 않는, 또 내 기술 혹은 예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연인들을 위해서
시를 쓴다는 말과 대비되어 예술과 현실의 상극하는 모습이 뚜렷해진다. 예술은 영원불멸의
경지를 지향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관능의 음악에 도취하여" 현
실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경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인간들에게
덧없는 현실세계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인간들
은 비현실적인 영원의 세계에 보다는 덧없는 현실의 세계에 더욱 연연하기 때문에, 인간들
의 슬픔은 가실 날이 없고, 예술가의 고역은 도무지 보답될 길이 없는 것이다.
제 3행의 "달만이 발광한다"는 말은 불타는 달빛을 말하는 동시에 화자와 애인 사이에 격
정을 불러 일으키는 달빛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여 이 말은 달밤에 애인들이 느끼
는 격정과 더불어 시인의 불붙는 정서를 말한다. 애인들은 그들의 모든 슬픔을 그러안고 잠
자리에 누워있다. 이러한 장면은 매우 고요한 분위기로서 달빛이 불러 일으킨 격정이 한바
탕 휩쓸고 간 후의 정경인 것 같다. 여기서 그들의 "슬픔"은 오랜 세월동안 품어온 슬픔으
로 표면적으로는 깊은 의미가 없지만 보다 깊은 의미를 구태여 찾는다면 애인들이 영원히
현재의 상태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느끼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애인
들은 현재의 젊음을 구가하며 찬양하고 현실세계에 만족하며 지내는데 그들이 영원히 젊음
을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Thomas의 사상을 살펴보면 탄생에 이미 죽음이 내포되어 있
으므로 영원한 젊음이 아니라 이미 죽음을 향해 상당히 나아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애인들은 서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슬픔을 간직하게 된다.
제 6행의 "노래하는 빛"이라는 말은 Thomas가 언어를 음악적, 감각적으로 구사하는 특유
한 용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명사 앞에 놓인 형용사가 그 명사와 관련되는 부수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즉 공감각적인 표현방법이다. 이러한 공감각적인 표현방법은 그의 다
른 작품에도 종종 사용되고 있어 Thomas를 실험적인, 난해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다. 여기서 "노래하는 빛"이라는 말은 교교히 비치는 달빛과 그 달빛 아래에서의 노래소리
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느끼게 하는, 또 노래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달빛이라는 의
미를 지니고 있으며 "singing"이라는 소리가 주는 음악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
다. 이러한 달빛 아래에서 화자가 노래하는 것은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지 애인이 지니고 있는 가장 은밀한 마음이 주는 평범하면서도 하찮은 임금, 즉 애인이 마
음 속으로 기뻐하고 인정해 주는 것을 위해서이다.
제 2연에서는 제 1연을 발전적으로 전개한다. 이 작품의 중심 주제인 시인의 예술과 애인
들의 관계를 재강조한다. 제 1연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떤 물질적 이득이나 명성을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이제는 "발광하는 달과는 별도의 오만한 사람"이나
"나이팅게일과 찬가로 장식한 탑처럼 솟은 사자"를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
기서 말하는 오만한 사람은 현실세계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발광하는
달"은 애인들의 격정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Yeats의 "비잔티움"(Byzantium)에
나오는 달과 유사하게 순간적이고, 변화하는 현실세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 사람들은 이러
한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자나 철인 등을 뜻할 수 밖에 다른 도
리가 없다. 또한 "나이팅게일과 찬가로 장식한 탑처럼 솟은 사자들"은 나이팅게일과 찬가가
전통적으로 지상의 이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과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목사들을 말하
는 것이다. Thomas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변화하
는 현실세계에 초연하여 영원을 자처하는 오만한 사람들과 과거의 위대한 시인이나 성직자
들을 다소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시의 방향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잠시 후에는 사라질 순간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뜻으로 "물보라치는 종이장" 위에 시를 쓴다
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시에 대한 자기비하로서 초연한 체하는 오만한 사람들에 대한 조롱
일 뿐 모든 예술이 단명한다는 것은 아니다. Thomas는 자신의 시가 이처럼 덧없는 것이며
단지 애인들, 현실세계에서 괴로와하며 슬퍼하는 애인들을 위해서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러
한 애인들이 비록 자신의 시를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그래도 애인을 위하여 현실세
계를 노래한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Thomas의 시작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시가 즉흥적으로 쓰
여진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니게 되더라도 그것은 외관상 그렇게 보일 뿐이며 실제로는 대단
히 수고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의 주제는 지상이나 천상
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노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
다. 그러면 남는 것은 현실 그 자체의 보다 깊은 의미를 사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남는다.
Thomas 시의 주제는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자신이 이 작품에서 밝히고 있는 것
이다.
A Refusal to Mourn the Death, by Fire,
of a Child in London
Never until the mankind making
Bird beast and flower
Fathering and all humbling darkness
Tells with silence the last light breaking
And the still hour
Is come of the sea tumbling in harness
And I must enter again the round
Zion of the water bead
And the synagogue of the ear of corn
Shall I let pray the shadow of a sound
Or sow my salt seed
In the least valley of sackcloth to mourn
The majesty and burning of the child's death.
I shall not murder
The mankind of her going with a grave truth
Nor blaspheme down the stations of the breath
With any further
Elegy of innocence and youth.
Deep with the first dead lies London's daughter,
Robed in the long friends,
The grains beyond age, the dark veins of her mother,
Secret by the unmourning water
Of the riding Thames.
After the first death, there is no other.
1946
런던에서 불타 죽은 어린애의 애도를 거부함
인류를 만들고
새 짐승 꽃을
낳고 만물을 겸허케 하는 어둠이
침묵으로 최후의 빛이 터짐을 말하고
고요한 시간이
마구를 단채 무너지는 바다에서 올 때까진 결코
그리고 방울의 둥근 시온과
곡식이삭의 유대예배당 속으로
내가 다시 들어가야만 할 때까진
나는 소리의 그림자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거나
나의 소금 씨를
베옷의 조그만 골짜기에 뿌리지 않겠다
그 어린애의 죽음의 장엄과 불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나는 살해하지 않겠다
중대한 진실을 품고 가는 그녀의 인류를,
또한 호흡의 단계들을 모독하지도 않겠다
순진과 젊음의 더 이상의
어떤 만가로.
최초의 죽은자들과 함께 깊이 런던의 딸이 누워 있다,
오랜 친구들, 시대를 초월한 낟알들,
그녀의 어머니의 검은 혈관을 옷처럼 걸치고,
굽이치는 템즈강의
애도하지 않는 물가에 숨은 채.
최초의 죽음 이후엔, 또 다른 죽음은 없다.
<작품해설>
이 작품은 제목에도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런던이 공습당하던
때에, 독일군 폭격기에 의해 불타 죽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보고 그 어린아이에 대한
elegy를 대신하여 시인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시이다. 제목 자체가 죽음
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슬퍼하지 않으련다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
는 당황하게 된다. 이는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paradox의 효과를 노
린 것이다. 이 작품은 뜻이 심각하고, 비유적 표현이 난해하고 복잡하여 무게가 있다.
Thomas는 이 작품에서 지상의 빛이 생기고 만물이 창조되고 역사가 시작된 이후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갔으니 여기의 어린이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
과 합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울거나 눈물을 흘려 죽은 아이를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이래 죽어간 무수한 친구들과 함께 대자연
의 품에 안겨있다. 또한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슬퍼할 필요가 없으며 최초의 죽음 이후에는 죽음이란 없다고 말한다. 특히 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는 것도 삶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죽는 것을 하나의 성스러운 과정
으로 여기며 모든 생명의 동일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많은 종교적 암시 뿐만 아니라 단어들이 이 문맥에서 갖게 되는 특별한 의미때
문에 어렵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이 작품은 읽는 데서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은
구두점이 없이 긴 문장이 제시되기 때문에 문법적인 혼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이 작품 뿐만 아니라 Thomas의 대부분의 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의 난해성의
한 가지이다. 이 작품에서는 첫 문장이 제 3연의 제 1행까지 이어진다. 이 문장의 주어와 동
사는 제 2연 제 4행에서 나오며, 이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Never"는 제 1연 제 1행에 일
찌감치 나와있다. "Never"라는 부정어는 제목에 쓰인 "거부"(refusal)라는 말과 함께 이러한
시가 갖기 쉬운 일체의 감상적 요소를 강력히 부정하는 효력을 갖는다. 한 아이의 죽음이
주는 슬픔에 감동될 망정 그 슬픔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그와 같은 슬픔과 고통을 외부에
서 관찰하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리며,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고수하는 것이
Thomas의 태도이다. 따라서 이 작품도 한 아이의 죽음의 문제가 주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서 감정이 촉발된 Thomas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제 1연에서 Thomas는 "창세기"에 적혀있는 사실을 언급하여 생명의 원천과 그 귀착점을
말한다. 인류가 창조되고 새, 짐승, 꽃 등 만물을 낳는 원시의 암흑은 그 속에서 만물이 우
열을 다툴 수 없는 침묵과 겸허의 암흑이었다. 이 암흑은 우리의 의식 이전의 상태, 곧 생의
원점을 말하는 것으로 태초의 혼돈을 뜻한다. 태초의 혼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 속으
로 만물이 되돌아간다. 인간도 이 어둠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와 잠시 현상세계에서 생활하
다가 다시 그 어둠으로 복귀한다. 인간이 왜 거기에서 나왔으며 그 생존기간 동안에 무슨
일을 하는가, 또 왜 그 곳으로 되돌아가는가 하는 등의 문제는 Thomas의 관심 범위 밖의
일이다. 그는 단지 인간이 어둠에서 나와 잠시 살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한 인간이 자연 속에 흡수되어 원시의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그의
생애는 완결된다. 이 의식의 원점, 삶의 근원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으로 느끼는 것이 Thomas의 시의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신을 믿는 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의 신을 믿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개념화된 종교 사상의 측면에
서 말한다면 범신론적 신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Thomas의 종교관은 다른 작품에
서도 드러나듯이 직접적, 감각적, 육감적이다. 그는 감성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을 직접 본다.
따라서 그의 시는 삶과 성(sex)과 죽음 같은 본능적 상징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창세기의 암흑으로부터 최후의 광선이 터지고 혼돈의 바다에서 역사는 고요히 시작된
다. 여기서 "최후의" 광선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태초의 천지창조의 빛이니 최초의
광선이지만 우주의 역사에서는 지금까지 그 결과가 남아있는 것이므로 최후의 광선인 것이
다. 혼돈의 바다는 온갖 창조물의 모체이다. 그러나 그 혼돈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원초적 의지, 다시 말해 암흑 혹은 신의 지배하에 있다. 여기서 "마구를 달고"라
는 말에서 혼돈이 어떤 질서하에 통제되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고요한 시간은 태초의 원초
적인 시간과 동시에 역사의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바다는 현실의 세계를 뒤엎
는 바다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난해성이 Thomas의 한 가지 특징임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다시 만물의 성소로 찾아들지 않을 수 없다. 제 2연에서는 화자가
죽어서 육체가 분해되어 4대원소로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물의 원천을 여기서는 "물염
주의 둥근 시온산"과 "밀이삭의 유대교회당" 등으로 비유하였다. 물은 제 1연의 바다의 이
미지와 관련되는 것이며, "염주"는 물방울을 가리키는 동시에 종교적 이미지로서, 기도의 장
소 시온과 동일시된다. 기도의 장소 둥근 시온은 화자의 육신이 해체되어 4대원소로 돌아갈
때 그의 생명력(보다 쉬운 용어로 말하자면 영혼)이 들어갈 천국을 말한다. "밀이삭"은 영혼
을 정화하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장소인 성당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필이면
"밀이삭"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성당 내부의 좌석의 배치가
"밀이삭"에 밀낟알이 달려있는 모양과 유사하게 되어 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다. 그러므
로 여기의 성당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성당이 아니라 유대교회당인 것이다. 유대
교회당에는 좌석의 배치가 밀이삭에 낟알들이 붙어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이
앞쪽으로 나와있고 양 옆부분이 뒤로 쳐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도 있지만 물방울이나
밀이삭은 자연물로서,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제 1연에서 말한 삶의 원천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삶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는 그 어린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
겠다는 것은, 그렇게 삶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숙명적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는 말이다. "소리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슬픔을 비유하는 말로서 "슬픈 음향"이라는 말이
고, "소금씨"는 "밀이삭"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 눈물을 말한다. 또한 "베옷"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로서, 창세기 37장 34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야곱이 잃어버린 요셉을 슬퍼할 때
처럼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허리 아래에 두르는 베로 만든 천을 뚯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상복과도 상통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베로 만든 상복이 슬픔의 상징임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베옷의 작은 골짜기"는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의 가슴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 3연에서는 불에 타서 죽은 아이를 눈물을 흘려가며 슬퍼하지 않겠다고 말한 제 2연을
반복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삶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엄숙한 진리인데, 그런 진
리를 알고난 후에 그 삶의 근원으로 돌아간 그 어린아이를 새삼스러이 슬퍼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대표하는 인류의 운명을 다시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정해진 죽음은 다시
되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 운명이 정해졌을 때 이미 애가를 불렀으니 또 다시
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생명의 수난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흡의 수난"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자가 순례하는 14 곳의 예배장소를 의미하는 "the station of the cross"에서
나온 말로서, 십자가는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예수의 수
난은 인간을 대신한 생명의 수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십자가를 "호흡"이라는
말로 대치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어구의 일부를 그 속성에 따라 변경시켜 비유하는
방법도 Thomas의 특징 중의 한 가지이다. "모독한다"는 말도 신에 대한 불경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이다. Thomas가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거룩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린아이가 14살이 되어 호흡의 수난,
즉 죽음을 겪었다고 해도 그것은 인류의 죽음이라는 진실을 품고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
겠다고 화자는 말한다.
제 4연에서는 그 어린아이의 죽음의 의미가 다시 설명되고 있다. 독일군의 런던폭격에 의
하여 죽은 그 어린 여자아이는 그 이전에 죽은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같은 죽음 속에 합쳐진
것이다. 그 이전에 죽은 모든 인간들은 오랜 역사를 통한 죽음의 친구이고 세월을 초월한
무수한 낟알들이다. 그 낟알들은 모든 창조물의 모체에 흐르는 검은 혈관에서 생긴 것이고
죽어서 다시 그 혈관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어린 여자아이도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
듯이 우주의 최초의 근원의 품 안에 안겨 이미 죽은 무수한 낟알들과 함께 누워 있다. 모체
의 이 검은 혈맥은 제 1연에서 나온 혼돈의 바다이며, 이 이미지는 템즈강에 그대로 연결된
다. 물결이 이는 템즈강이 바로 옆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그 어린 여
자아이가 거기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만 당연한 귀착지로 돌아갔
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 작품을 끝맺는 말인 마지막 행 "최초의 죽음 뒤에, 다른 죽음이란
없다"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일단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영혼이 영원히 살아 남아 있으므로 두 번 죽음이란 없다는 뜻이고, 삶이란 괴로운 것이니
육체의 완전한 소멸이후에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Thomas가 여기서
기독교적인 인용과 인유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앞에서 누차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다. 인간은 숙
명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원초적인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인 죽음이란 결
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죽음은 이미 우리가 돌아갔었고 다시 거기에서 나
왔던 원초적인 무의 세계, 혼돈, 창조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미 일어난 일이지 다시
일어날 일은 아니라는 의미를 이 귀절은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기독교적 유일신
의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범신론적 비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
Drives my green age; that blasts the roots of trees
Is my destroyer.
And I am dumb to tell the crooked rose
My youth is bent by the same wintry fever. 5
The force that drives the water through the rocks
Drives my red blood; that dries the mouthing streams
Turns mine to wax.
And I am dumb to mouth unto my veins
How at the mountain spring the same mouth sucks. 10
The hand that whirls the water in the pool
Stirs the quicksand; that ropes the blowing wind
Hauls my shroud sail.
And I am dumb to tell the hanging man
How of my clay is made the hangman's lime. 15
The lips of time leech to the fountain head;
Love drips and gathers, but the fallen blood
Shall calm her sores.
And I am dumb to tell a weather's wind
How time has ticked a heaven round the stars. 20
And I am dumb to tell the lover's tomb
How at my sheet goes the same crooked worm.
1933
푸른 꽃대궁을 통해 꽃을 휘모는 힘
푸른 꽃대궁을 통해 꽃을 휘모는 힘이
나의 푸른 나이를 휘몬다, 나무 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내 파괴자이다.
그런데 나는 벙어리여서 삐뚤어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다
내 젊음이 같은 겨울철의 열병에 의해 굽어졌다고.
바위를 통해 물을 휘모는 힘이
내 붉은 피를 휘몬다, 주절대는 시냇물을 말리는 힘이
내 것을 밀랍으로 바꾼다.
그런데 나는 벙어리여서 내 혈관에 말할 수 없다
산 속의 샘에서 똑같은 입이 어떻게 빠는가를.
웅덩이의 물을 휘젓는 손이
유사를 휘젓는다, 부는 바람을 묶는 힘이
내 수의의 돛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나는 벙어리여서 교수형 당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다
어떻게 교수형 집행인의 석회가 내 흙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시간의 입술이 샘물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사랑은 떨어져 오인다, 그러나 떨어진 피는
그녀의 상처를 진정시키리라.
그런데 나는 벙어리여서 날씨의 바람에게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시간이 별들 주변에서 하나의 천국을 똑딱였는가를.
그런데 나는 벙어리여서 연인의 무덤에게 말할 수 없다
어떤게 내 수의에 똑같은 굽어진 벌레가 기어가는가를.
Fern Hill
Now as I was young and easy under the apple boughs
About the lilting house and happy as the grass was green,
The night above the dingle starry,
Time let me hail and climb
Golden in the heydays of his eyes,
And honoured among wagons I was prince of the apple towns
And once below a time I lordly had the trees and leaves
Trail with daisies and barley
Down the rivers of the widnfall liight.
And as I was green and carefree, famous among the barns
About the happy yard and singing as the farm was home,
In the sun that is young once only,
Time let me play and be
Golden in the mercy of his means,
And green and golden I was huntsman and herdsman, the calves
Sang to my horn, the foxes on the hills barked clear and cold,
And the sabbath rang slowly
In the pebbles of the holy streams.
All the sun long it was running, it was lovely, the hay
Fields high as the house, the tunes from the chimneys, was air
And playing, lovely and watery
And fire green as grass.
And nightly under the simple stars
As I rode to sleep the owls were bearing the farm away,
All the moon long I heard, blessed among stables, the night-jars
Flying with the ricks, and the horses
Flashing into the dark.
And then to awake, and the farm, like a wanderer white
With the dew, come back, the cock on his shoulder: it was all
Shining, it was Adam and maiden,
The sky gathered again
And the sun grew round that very day.
So it must have been after the birth of the simple light
In the first, spinning place, the spellbound horses walking warm
Out of the whinnying green stable
On to the fields of praise.
And honoured among foxes and pheasants by the gay house
Under the new made clouds and happy as the heart was long,
In the sun born over and over,
I ran my heedless ways,
My wishes raced through the house high hay
And nothing I cared, at my sky blue trades, that time alls
In all his tuneful turning so few and such morning songs
Before the children green and golden
Follow him out of grace,
Nothing I cared, in the lamb white days, that time would take me
Up to the swallow thronged loft by the shadow of my hand,
In the moon that is always rising,
Nor that riding to sleep
I should hear him fly with the high fields
And wake to the farm forever fled from the childless land.
Oh as I was young and easy in the mercy of his measn,
Time held me green and dying
Though I sang in my chains like the sea.
1946
훠언 힐
내가 어리고 노래하는 집주위의 사과나무 가지 아래
편안하고 풀이 푸르듯 행복했을 때,
골짜기 위의 밤은 별이 총총했을 때,
시간은 그의 눈들의 한창 때 황금빛으로
날 환호하고 기어오르게 했다,
그리고 수레들 사이에서 영예롭게 나는 사과 마을의 왕자였다
그리고 어린 옛날에 나는 당당히 나무들과 잎들을
데이지와 보리와 함께 끌고다녔다
떨어진 과일 빛깔의 빛의 강물 아래로.
그리고 나는 푸르고 근심이 없고, 행복한 마당 주변의
헛간들 가운데 유명했고 농장이 가정인 듯이 노래했을 때,
단 한 번만 젊었던 태양 속에서
시간은 그의 재산의 자비 속에서
나를 황금빛으로 놀며 존재케했다,
그리고 녹색 황금색으로 나는 사냥꾼이고 목동이었으며, 송아지들은
내 나팔에 맞추어 노래하고, 언덕 위의 여우들은 맑고 차게 짖었다,
그리고 안식의 종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성스런 시냇물의 조약돌 속에서.
온 태양 내내 그건 흘렀고, 그건 사랑스럽고, 건초 마당은
집만큼 높았고, 노래는 굴뚝에서 나왔다, 그건 공기였고
놀고 있었다 사랑스럽게 물처럼
그리고 불은 풀처럼 푸르렀다.
그리고 밤에는 소박한 별들 아래
내가 잠자러 타고 갈 때 올빼미들이 농장을 멀리 가져갔다,
달빛이 비치는 내내 나는 들었다, 마굿간 사이에서 축복받아, 쏙독새들이
건초더미와 함께 날아다니고, 말들이
어둠 속으로 번쩍이며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그 후 깨어나면, 농장이 이슬로 하얗게 된
방랑자처럼, 어깨에 수탉을 얹고 돌아왔다. 그건 온통
빛났고, 그건 아담과 처녀였다,
하늘이 또 다시 모였고
태양은 바로 그날 동그랗게 자랐다.
그러니 소박한 빛이 탄생한 후였음이 틀림없다
최초에, 실잣는 곳에서, 마법에 걸린 말들이
킹킹대는 녹색 마굿간에서 찬양의 들판으로
따뜻하게 걸어나온 것은.
새로이 만들어진 구름 아래 즐거운 집 옆의 여우들과
꿩들 사이에서 영예롭게 또 마음이 긴 만큼 행복하게,
되풀이해서 태어나는 태양 속에서
나는 걱정없는 길을 달렸다,
내 소망도 집처럼 높은 천초더미를 통해 달렸다
그리고 전혀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내 하늘의 푸른 일을 하며, 시간이
그의 모든 가락맞는 회전에서 그리도 적은 그런 아침 노래를 허락하리라곤
푸르고 황금빛 도는 어린이들이
그를 따라 은총 밖으로 나가기 전에.
전혀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양처럼 하얀 날에, 시간이 나를
내손의 그림자로 제비가 모여있는 다락방으로 데려가려는 걸,
항상 솟아 오르는 달 속에서
잠자러 가는 그 승마길에서
내가 그가 높은 들판과 함께 나는 것을 듣게될 것을
그리고 어린이없는 땅에서 영원히 도망온 농장으로 깨어날 것을.
오 내가 어리고 그의 재산의 자비 속에서 편안했을 때,
시간은 나를 푸르게 잡고 죽어가게 했다
비록 나는 내 사슬에 묶여 바다처럼 노래했지만.
<작품해설>
이 작품의 제목으로 쓰인 "훠언 힐"은 토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 이름이다. 토머스
는 이 작품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낸 그 농가를 제목으로 삼아 그 시절의 기쁨을 노래한다.
이 작품은 음절의 숫자에 중심을 두고 구성된 "음절시"(syllabic verse)로 각 행의 음절의
수는 14 - 14 - 9 - 6 - 9 - 14(15) - 14(15) - 7(9) - 9(6)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시형식
은 홉킨스의 스프렁 리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홉킨스는 각 행의 음절의 수에는 관계없이
강세를 받는 음절의 수를 일정하게 하는 스프렁 리듬을 사용하였지만, 토머스는 그것과도
다르고, 기존의 강약, 또는 약강조의 음보로 된 정형적인 운율과도 다른, 각 행의 음절의 수
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시를 썼다.
토머스는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이 자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던 어린
시절, 사냥꾼이나 목동처럼 자연의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쁨을 노래
한다. 그는 농장에서 왕자처럼 의기양양하게 활동하며 행복했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농장이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새 날이 밝아오면 그것이 다시 돌아와 자신의
행복이 끊이지 않을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밤낮없이 기쁘기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가 근심걱정 없이 시골길을 달려다니며 뛰놀 때에도 시간은 언제나 그의 위에 있으면서, 농
장과 그의 기쁨을 훔쳐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어릴적의 기쁨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기 때문이고, 시간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이 소년은 시골 마차들 사이에서 뛰어다니며 "사과마을의 왕자"로
군림했었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군왕이고, 시간이 그에게 그러한 기쁨과 행복을 부여한 것
에 불과했다. 또한 그 소년에게서 농장의 기쁨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시간"이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밑바닥에 소년과 시간의 아이러닉한 관계를 짜넣어 극적
으로 전개시킨 데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 또한 토머스의 시는 대체로 관조나 서술이 아
닌 "노래"이기 때문에, 시인 특유의 정력적인 음악미에서 시의 효과가 대부분 결정된다. 우
리는 예를 들면 "푸른", "행복한", "왕자", "노래", "태양", "황금빛", "바다" 등과 같은 화려
하고 생명력이 있는 듯한 이미지에서 이 작품이 전달하는 생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제 1연에서 화자는 사과나무가 많은 시골 마을에서 강둑을 따라 거닐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 때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으므로 태평스럽게 또 행복하게 지냈다. 여기서 "흥얼거리는
집"이라는 표현은 제 4연에 나오는 "킹킹 우는 녹색 마굿간"과 마찬가지로 공감각의 표현이
다. 이는 "노래소리가 들리는 집", "내가 노래 부르던 집" 등의 의미 이외에도 "노래"라는
말에 내포된 모든 함축적 의미가 집과 직접 연결된 것이다. "킹킹 우는 녹색 마굿가"이라는
말도 그 안에서 말들이 킹킹대며 우는 소리를 내는 마굿간이고 그 색깔이 녹색이라는 의미
이지만 그 이외에 마굿간 자체가 불만스러워 우는 소리를 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이 명사 앞에 쓰인 형용사가 그 명사에 부수되는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을 공감각
(synaesthesia)이라고 말하며, 그런 방식의 표현을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풀이 푸르
듯이 행복하다"는 말도 대단히 상투적인 어구처럼 여겨지지만, 참신한 표현으로 푸른 풀이
무성하게 자라듯이 행복감이 무럭무럭 자라는 느낌을 주고, 화자가 푸플 풀과 같이 신선한
인생을 즐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간은 그의 눈의 청춘기에"라는 말은 시간이 눈을 뜨고
있는, 다시 말하여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는 낮이라는 뜻이지만, "환호성", "황금빛", "청춘
기" 등과 같은 말이 지니고 있는 함축성에 의하여 환희에 넘치는 어린 시절을 연상시킨다.
"청춘기"라는 말은 태양이 한창 때라는 뜻도 지니고 있지만, 화자가 한창 때라는 의미도 내
포하며, 이와 같은 한창 때에 화자가 환호하며 언덕 위로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암시한다.
그 당시에는 사과 마을의 왕자가 되어 당당한 모습으로 줄지어 서있는 마차들 사이로 마치
병사들의 사열, 분열을 받듯이 걸어다녔으며, 마치 부하 시종과 병사들을 이끌고 다니듯이
나뭇가지와 꽃들을 끌고 다녔다.
"사과 마을의 왕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은 사과가 많이 나는 지역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말은 마치 판촉활동을 위해 "사과 아가씨"를 선발하듯이 화자가 왕자로 선발
된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왕자와 같은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암
시한다. 기존의 어구에서 약간 첨가하거나 삭제, 또는 다른 단어들의 대체 등의 수법으로 미
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방법은 토머스가 종종 사용하는 독특한 수법이다. 여기서 이 말도 그
렇지만, "옛날 한 때"라고 번역한 "once below a time"이라는 말은 "once upon a time"이라
는 말에서 "upon"을 그와 상반되는 뜻을 가진 "below"라는 단어로 바꾼 것이다. 시인은 이
렇게 함으로써 제 4행의 "시간이 나로 하여금. . . (Time let me. . .)"이라는 말과 더불어 시
간의 우위성을 나타내어, 어릴 때에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고,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시간의 덕택이며 시간의 은총 하에
있는 것이고, 시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소년이 나뭇가지를 들
국화와 보리로 장식하여 끌고 들판을 달려가지만, 그가 군주답게 당당히 간다는 말은 시간
이 군주가 되어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화자가 뛰어가는 것이 "낙과(落果) 빛의
강 아래로" 간다는 것에는 강을 따라서 하류 쪽으로 달려간다는 의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 구절은 기존의 "강을 따라서"(along the river)라는 어
구에서 "along"을 "down"으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독특한 표현법을 보여준다.
제 2연에서도 화자는 어린 시절에 재미있게 지냈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푸르고, 유명하고, 황금빛으로 빛났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제 1연의 "왕자"라는 말과 부합되
는 젊고, 활기에 넘치고, 화려하고 찬란한 어린 시절의 기쁨의 세계를 표현한다. 화자는 걱
정없던 이러한 어린 시절에 "행복한 뜰" 가의 곳간들 사이에서 뛰어놀았다. "행복한 뜰"이
공감각적 표현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곳간은
실제의 창고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소년인 화자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 다시
말하여 화자가 갖고 놀 수 잇는 자연의 사물드링 잇는 곳, 즉 들판을 뜻하기도 한다. 화자
자신이 과거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태양을 "단 한 번 젊었던 태양"
이라고 말한다. 태양이 하루에 한 번만 비치고 그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을 삶에 비유한다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지내고 점차 젊어졌다가 늙어 죽는 과정을 한
번만 거친다. 여기서 화자는 "젊었던 태양"이라는 말로써 자기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생각
하며 그 시절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때 자신이 시간을 지
배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음은 "시간이 날 놀게 하고" 라고 표현되어 있
다. 시간이 자비를 베풀어 화자가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놀도록 허용했으므로 그는 사냥꾼도
되고 목동도 되어 짐승들과 더불어 놀았다. 여기서 화려한 색채의 이미저리, 뿔피리 소리와
각종 짐승의 노래소리가 들리는 소리의 이미저리 등에 안식일의 교회 종소리가 겹쳐지면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환희의 감정이 부각된다. 성스런 시냇물의 자갈밭에서 뛰어놀 때 안
식일의 종소리가 들려옴으로써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세계가 한층 더 강조된다.
제 3연에서는 밤이 되어 소년이 농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장면이 그려진다. 높이 쌓
아올린 건초더미 사이로 한가로운 농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인
다. 그런데 여기서 저녁짓는 농가의 연기는 "굴뚝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공감각적 표현으로
표현되어 화자의 즐거운 마음을 보여준다. "불은 푸른 풀처럼 푸르렀다"라는 말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불은 원래가 붉은 색으로 빛나서 온화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작품의 정
서에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풀처럼 푸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들판에 풀들이 푸르게 피
어오르듯이 활활 탄다는 의미와 불이 한창 때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화자가 어린 시절
의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으므로 타오르는 불길이 마치 온 들판이 불붙듯이 푸르른 풀이 돋
아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보다 밤이 깊어지면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나
고 부엉이가 울고 농장은 어둠에 완전히 잠겨버린다. 밤이 깊어져 부엉이가 울 때 쯤이면
희끗희끗 보이는 외양간과 건초더미 사이사이로 쏙독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말(馬)들
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지만 기쁨에 넘치는 소년의 마음의 눈에는 번쩍번쩍 빛난다 여기
서 "온 달 내내"(all the moon long)라는 말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온 기존어구의 변화에 의
해 감정의 정확한 전달을 이야기하는 토머스의 독특한 표현기법으로 "하루 종일"(all the
day long)에서 "day"를 "moon"으로 바꾼 것이다.
제 4연에는 아침이 되어 밝아오는 농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얗게 이슬에 젖은 방
랑자차럼 농장은 이슬에 젖어 있고, 수탉이 울자 깨끗한 농장의 아침이 밝아온다. 농장의 한
쪽 모퉁이에서 수탉이 우는 것이 마치 방랑자가 어깨 위에 수탉을 짊어지고 오는 것처럼 표
현되어 있다. 환하게 밝아오는 농장의 아침은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창조
되던 것과 같다. 다시 말하여 아담과 이브가 혼돈으로부터 창조되듯이 깜깜한 어둠으로부터
농장의 사물을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바로 이 날 태양이 힘을 모아 처음으로 동그랗게 되듯
이 동그랗게 동편 하늘에 떠올랐다. "태초의 실잣는 곳"은 운명이 창조되던 곳, 즉 태초의
혼돈을 말하며, 실잣는 것은 운명의 여신을 생각나게 하여 우리 모두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태초의 혼돈 가운데 빛이 생긴 후에 아직 몸이 따스한 상태의 말이 "녹색
마굿간"에서 걸어나와 칭찬의 들판으로 향한다. 여기서는 농가의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태
초의 천지창조에 비유되어 있으며 들판은 에덴동산에 비유되어 있다. 이는 아침이 밝아와서
새로이 활기를 되찾는 농가의 모습이 태초의 모습 만큼이나 순결하고 고결하게 보이기 때문
이다.
제 5연에는 시간의 위협이 소년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소
년은 짐승들과 농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 생활은 변화가 없이 태
양이 매일 새로이 떠오르듯이 새로우면서도 반복되는 것이었다. 소년은 건초더미 사이로 뛰
어다니며 놀며, 높고 푸른 꿈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 시절이 무한히 지속될 것으
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소년은 무모하게 즐거움을 추구했다. 화자는 함부로 자신의 길을 달
렸다고 말하여 이러한 생활을 묘사한다. 그는 푸른 하늘 만큼이나 높은 희망을 품고 뒤어노
느라고 시간이 흐르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소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자
신이 성장해야 하고 어린 시절의 행복한 생활이 조만간 끝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
고, 그 은총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제 6연에는 이와 같은 시간의 위협이 보다 더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간이 그를 죽
음으로 끌고가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기뻐했을 뿐이다. "양처럼 하얀 시절"은
화자 자신이 이 세상의 오욕에 물들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던 어린 시절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때 시간이 그를 붙잡고 데려가는 것은 죽음과 같은 불길한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다. "손의 그림자"와 "제비떼가 모인 다락" 등이 그러한 말
이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는 것도, 그가 좀체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
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들판과 함께 날아간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이 지나가
고 순진무구한 기쁨은 사라진다. "어린애 없는 땅"에서 "영원히 달아난 농장"은 한 번 흘러
간 시간은 영원한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과 함께, 시간이 경과하여 소년이 성장하여 어
른이 되고, 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어린 시절, 농가의 어린 시절이 사라
지는 것을 말한다. 사실은 매 순간 시간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
기 때문에 기쁘고 태평스러웠던 것이다. 화자는 그것을 "시간은 날 푸르게 하고 죽게 하고
있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시간의 지배 하에서 젊음을
향유하고 있었으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과 시간이 그로 하여금 젊어지게 하는
것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는 것, 두 가지 의미를 이 말은 내포하고 있다.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였더라도 그는 지금까지 사슬에 매인 상태로 살아온 것이며 어린 시절과 젊음
을 예찬했던 것이다. "바다처럼 노래한다"는 말은 바다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노래를 부른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부차적으로 바다는 태초의 혼돈인 생명의 바다를 연상케 하므로
무한한 혼돈과 영원한 생명을 암시한다. 이 마지막 구절은 토머스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
및 일관된 작품 주제를 보여준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l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1951, 1952
그 좋은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시오
그 좋은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시오,
노령은 낮의 끝에 불타고 분노해야 한다.
분노하라, 빛이 죽어가는 것에 분노하라.
비록 현자들은 자신들의 끝에 어둠이 옳음을 알지만,
그들의 말이 어떤 번개도 갈라지게 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그 좋은 밤으로 얌전히 가지 않는다.
선한 사람들은, 그 마지막 물결 옆에서, 그들의 연약한 행동들이
푸른 만 속에서 얼마나 빛나게 춤추었는가를 부르짖으며,
분노한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분노한다.
날아가는 태양을 붙잡고 노래했으나, 자신들이
그게 제 길을 가는 걸 슬퍼했음을 너무 늦게 아는 난폭한 사람들은,
그 좋은 밤으로 얌전히 가지 않는다.
죽음에 임박해서, 어두워지는 시력으로
눈먼 눈이 운석처럼 불타며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는 신중한 사람들은,
분노한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분노한다.
그리고 당신, 나의 아버지여, 그 슬픈 높이에서,
당신의 치열한 눈물로 이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해주길 나는 기도하오.
그 좋은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시오.
분노하시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분노하시오.
<작품해설>
약강 5보격 3행연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다루고 있다.
The Hand That Signed the Paper
The hand that signed the paper felled a city;
Five sovereign fingers taxed the breath,
Doubled the globe of dead and halved a country;
These five kings did a king to death.
The mighty hand leads to a sloping shoulder,
The finger joints are cramped with chalk;
A goose's quill has put an end to murder
That put and end to talk.
The hand that signed the treaty bred a fever,
And famine grew, and locusts came;
Great is the hand that holds dominion over
Man by a scribbled name.
The five kings count the dead but do not soften
The crusted wound nor stroke the brwo;
A hand rules pity as a hand rules heaven;
Hands have no tears to flow.
1936
그 서류에 서명한 손
그 서류에 서명한 손이 도시를 무너뜨렸다,
다섯 최고의 손가락들이 호흡을 짜냈고,
사자의 세계를 배가했고 나라를 양분했다,
이 다섯 왕들은 한 왕을 죽게 했다.
그 강력한 손은 이탈진 어깨로 이끈다,
그 손가락 마디들은 분필로 속박되었다,
거위 깃펜이 말을 끝장낸
살인을 끝장냈다.
조약에 서명한 손이 열병을 낳았다,
그리고 기아가 늘었고, 메뚜기들이 왔다,
휘갈긴 이름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그 손은 위대하다.
그 다섯 왕들은 사자를 세지만 딱지 앉은 상처를
달래지도 이마를 쓰다듬지도 않는다,
한 손이 천국을 지배하듯 한 손이 연민을 지배한다,
손들은 흘릴 눈물이 없다.
<작품해설>
이 작품은 정치의 몰개성성을 표현한다. 지배자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환유적으로 손으
로 표현됨으로써 기능화되어버린 인간의 몰개성을 표현한다. 지배자의 감정이나 생각은 중
요하지 않고 그가 어떤 인물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의 손만이 부각됨으로써 기계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Light Breaks Where no Sun Shines
Light breaks where no sun shines;
Where no sea runs, the waters of the heart
Push in their tides;
And, broken ghosts with glowworms in their heads,
The things of light
File through the flesh where no flesh decks the bones,
A candle in the thighs
Warms youth and seed and burns the seeds of age;
Where no seed stirs,
The fruit of man unwrinkles in the stars,
Bright as a fig;
Where no wax is, the candle shows its hairs.
Dawn breaks behind the eyes;
From poles of skull and toe the windy blood
Slikes like a sea;
Nor fenced, nor staked, the gushers of the sky
Spout to the rod
Divining in a smile the oil of tears.
Night in the sockets rounds,
Like some pitch moon, the limit of the globes;
Day lights the bone;
Where no cold is, the skinning gales unpin
The winter's robes;
The film of spring is hanging from the lids.
Light breaks on secret lots,
On tips of thought where thoughts smell in the rain;
When logics die,
The secret of the soil grows through the eye,
And blook jumps in the sun;
Above the waste allotments the dawn halts.
1934
빛이 터진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곳에
빛이 터진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곳에,
바다가 흐르지 않는 곳에, 심장의 물이
조수를 밀어 넣는 곳에.
그리고, 머리에 반딧불을 지닌 부서진 유령들,
빛의 사물들이
살이 뼈를 장식하지 않는 살을 통해 줄지어 행진한다,
허벅지 사이의 촛불이
젊음과 씨를 덥히고 생명의 씨앗을 불태운다,
씨앗이 활동하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열매가 별들 속에 주름을 편다,
무화과처럼 밝게,
밀랍이 없는 곳에서, 촛불이 그 털들을 보여준다.
새벽이 밝아온다 눈 뒤에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깜짝놀란 피가
바다처럼 미끄러진다,
울타리도 없고, 말둑도 없이, 하늘의 분유정은
막대기에 내뿜고
미소 속에 눈물의 기름을 예언한다.
안와 속에서 밤은 둘러싼다,
어떤 새까만 달처럼, 눈알의 끝을,
낮이 뼈를 밝힌다,
추위가 없는 곳에, 살을 에는 질풍이
겨울의 옷을 벗긴다,
봄의 엷은 막이 눈까풀에 매달려 있다.
빛이 터진다 은밀한 지역에,
생각들이 비 속에 냄새나는 생각의 끝에,
논리가 죽을 때
흙의 비밀이 눈을 통해 자라고,
피가 햇볕 속에 뛰어오른다,
황폐한 경작 대부지 위에 새벽이 멈춘다.
<작품해설>
얼핏 보아 대단히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쓰여진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꼼꼼하게 형식을
지키고 있다. 짝수행은 모두 10음절로 되어 있고, 홀수행은 6 - 4 - 4음절로 되어 있다. 이
와 같이 들쑥날쑥한 시행으로 된 6행연 5개가 모여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말의 운율에서도 상
당히 실험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기교상의 실험은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의 영향
을 보여주는데 모운과 두운이 특히 많이 사용되어 있다. 이러한 운율상의 실험 보다도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 각운의 사용이다. 일견 각운이 전혀 정형적이지 않은 것같지만 자세히 살
펴보면 반운(half-rhyme)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제 1연을 보면, 첫 행의
"shines"와 6행의 "bones", 제 2행의 "heart"와 5행의 "light", 제 3행의 "tides"와 4행의
"heads"가 각각 반운을 이루고 있다. 다른 연에서도 모두 첫 행과 6행, 제 2행과 5행, 제 3
행과 4행이 각각 반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단히 꼼꼼한 운율상의 실험을 보
여주는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이 다소 외설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인간 남녀의 사
랑의 행위를 생명창조의 행위로 보고 이를 태양의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한 기법
은 지금까지 없었던 독특한 방식이다.
첫 연에는 여성의 자궁을 향하여 남성의 정자들이 줄지어 달려가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빛은 사랑의 창조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혼돈과 연관되어 무질서하고 생명이 없는
태초의 어둠에 최초의 창조의 빛이 비치는 것이 "빛이 터진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장면이 남녀이 사랑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임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
다. 여성의 자궁은 어둠이고 혼돈이지만, 생명이 탄생하는 장소인데 이제 생명의 빛이 그곳
에 비친다. 여기에 생명창조의 바다가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이
있어 생명이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이 조수를 밀어넣어 생명의 탄생
을 가능하게 한다. "머리 속에 반딧불을 가진 유령"은 생명창조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의 정자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러한 조그마한 빛이 결국은 큰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
게될 것임이 암시된다. 살이 뼈를 "꾸미고 있지 않은 살"은 남성의 특정한 신체부분을 일
컫는 말이다. 이 살 속을 생명창조의 빛인 정자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이 장면이 남녀의
사랑의 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것이 천지창
조에 비유되어 빛이 어둠을 밝히는 창조행위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2연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두 허벅지 사이의 촛불이 어둠을 밝히며
젊음과 씨를 덥히고 늙은 씨를 불태우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성적 흥분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지만, 장징적인 의미로 생명창조의 씨가 쇠퇴하는 생명력에 불을 붙이는 것을 가리킨다. 젊
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창조의 행위가 가능한 것이고 생명의 씨앗이 쇠퇴하는 생명력을 일깨
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씨도 꿈쩍 않는 곳"은 상당히 애매한 의미로 쓰이고 있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생명의 탄생의 장소로 보기 보다는 씨앗들의 저장소, 즉 남성의 신
체부눔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별들 속에 주름을 펴는 사람의 열매"
도 역시 상당히 애매한데, 별들이 있는 곳은 어둠의 장소이니 여성의 특정한 신체부분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고, "사람의 열매"는 단수로 쓰였으므로 씨앗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 1연의 "살이 뼈를 꾸미고 있지 않은 살"과 마찬가지인 남성의 신체부분을 가리키는 것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바로 그 다음 행에 "무화과처럼"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화과
열매의 매끄러움을 연상케되어 그것이 별들이 있는 어둠 가운데로 주름을 펴고 매끄러운 상
태로 들어가는 남성의 신체부분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는
밀랍이 없지만 촛불은 밝혀지고 그 촛불은 털들을 보여준다. 여기의 털들은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서 남성의 신체에 나 있는 털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털들을 비추어주는 촛불은 남성
의 신체부분을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 3연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일체화되어 생명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인간
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세계에서 어둠이 물러나고 밝음이 오는 동이 튼다. 우주가
밝아짐과 더불어 인간의 모든 힘이 모여 창조를 향해 나아간다. 두개골과 발끝으로부터, 즉
머리 끝에서 발끝에 이르는 신체의 모든 부분의 "바람센 피"가 "바다처럼" 미끄러진다. 바다
가 태초의 생명의 근원임은 앞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바다와 인간의 혈액이
동일시되어 자연의 창조의 힘이 인간의 창조의 힘과 다르지 않음이 암시된다. 자연의 물이
흐르도록 하는 힘,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 우리의 혈액을 흐르게 하고 이
혈액을 모아서 생명창조를 위해 어떤 미지의 세계로 돌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생명창조의 씨앗이 있는 남성의 신체부분은 "하늘의 분유정"에 비유된다. 여기에는
울타리도 없으며, 그것을 퍼올리기 위한 막대기도 없다. 그러나 이 분유정은 "눈물의 기름"
을 막대기에 내뿜는다. 여기서 "눈물의 기름"과 "막대기"가 무엇을 상징하는 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다음 넷째 연에서는 빛이 어둠을 밝히는 상징을 통하여 여성의 생명조의 장소에서 남
성의 생명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짐이 묘사되어 있다. "눈구멍 속의 밤"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원초적인 어둠, 태초의 혼돈을 가리킨다. 이러한 태초의 어둠 가운데 낮이 뼈
를 불켠다는 것은 뼈가 없는 남성의 신체부분을 마치 뼈가 있는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는
말이니, 어둠을 밝히는 것이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섭리의 한
과정임을 말한다. 이제 빛과 어둠의 이미저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절의 이미저리로 생
명창조의 의미가 표현된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봄이 겨울을 몰아내는 것이다. 남녀의 생
명창조 행위로 인하여 만물의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이 물러가고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는 봄
이 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여기서 인간의 생명창조는 자연계의 새로운 삶으로의 재생
과 동일시되고 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는 여성의 모태는 겨울에, 남성으로 인한 생명력의
각성은 봄의 아지랑이에 비유되고 있다.
마지막 연에는 자연의 대지 위에 생명이 솟아나듯이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 그려져
있다. 생각, 다시 말하여 인간의 이지적 능력의 극단에 위치한 원초적인 장소에 생명창조의
빛이 비친다. 여기에서의 "은밀한 곳"은 직접적으로는 여성의 신체부분을 지칭하는 말이지
만 상징적인 의미로는 태초의 혼돈과 같은 것을 뜻한다. 여기는 인간의 사유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논리는 사라지고 우리의 육체인 흙이 성장하게 된다. 여기
에 창세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토머스는 기독교의 창조설을 안이하게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흙으로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기는 하지만 신의 창조설을 설파하지는 않는다. 이는 앞에서도 약간
암시되었듯이 토머스가 자연에 생명을 주고 빼앗는 힘, 즉 인간의 생명을 주고 빼앗는 힘을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힘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 힘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한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흙으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가 혼돈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피가 흘러 생명이 창조된다. 이러한 창조는 흡사 황량한 들판에서 각종 식물이 성장하는 것
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땅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 경작하기 위해 임대한 땅이라는데 아
이러니가 있다.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생명의 창조를 위해 인간에게 임대해준 땅이 바로 여
인의 몸이고 , 그곳에 새벽, 다시 말하여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외설적으로 될 수 있는 내용을 상징적 차원의 우주적인
창조행위로 승화시킨 점에 토머스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읭 육체의 부분들을 상징적으로 표
현함으로써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크게 드높인 점에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
다. 한 인간의 탄생은 우주의 창조행위와 동일한 것이며, 인간의 탄생과정은 태초의 혼돈으
로부터 인간이 탄생하는 것과 동일한, 숭고한 것이다. 여기서 상당히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
들이 일차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육체의 부분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을 밝
혀둔다. 예를 들어 제 3, 4, 5연에 계속 나오는 "눈"의 이미지도 여기서 해석한 것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 이외의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토머스의 시는 난해하다는
평이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