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의 명을 받은 군사들은
곧 장간을 말에 태워 서산 뒤편에 있는 암자로 데려갔다.
말이 쉬게 하라는 것이지
실은 가두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사 둘을 남겨 언제나 장간을 지키게 한 까닭이었다.
장간의 마음속이 시름과 불안으로 가득하니 자고 먹는 것 또한 편할 리 없었다.
그럭저럭 한낮을 보내고 밤이 되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해 방을 나섰다.
장간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이고 홀로 암자 뒤뜰을 거닐었다.
얼마를 그렇게 거닐었을까,
장간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얼른 듣기에도 예사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
장간은 그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산 속 바위 언덕에 짚으로 이엉을 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방 가운데 하나에서 등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장간이 가만히 문틈으로 엿보니
한 사람이 벽에 칼을 걸어 놓고 등불 앞에 앉아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읽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산 속에 숨어사는 이인(泥人)일 것이다)
장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보기를 청했다.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는데 과연 생김이나 몸가짐이 속되지 아니했다.
"글 읽는 소리가 하도 낭랑해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감히 뵙기를 청했습니다.
선생의 크신 이름을 들려주십시오."
장간이 물었다.
그 사람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재주는 모자라고 덕도 없이 이렇게 구차스레 지내는 저를
그토록 높이 보아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하찮은 몸의 성은 방이며
이름은 통이요 자는 사원이라 씁니다."
"그렇다면 바로 봉추선생이 아니십니까?"
장간이 놀라 되물었다.
봉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크신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됩니다만
선생께서 이런 궁벽한 곳에 숨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동오가 어찌 선생 같은 분을
이렇게 썩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려."
방통같이 세상이 다 알아주는 재주를 가진 이가 그렇게 지내는 게 이상해
장간이 슬며시 떠보았다.
방통의 얼굴이 문득 굳어지며 노여움이 섞인 말로 받았다.
"주유란 자는 제 재주만 믿고 사람을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실은 제가 이렇게 숨어사는 까닭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뉘시오?"
"저는 장간이라고 합니다."
"제가 세상을 잘 알지 못해 아직 크신 이름을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들어오십시오."
방통은 전혀 장간을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며
암자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장간이 문득 한 걸음 다가앉으며 방통에게 말했다.
"선생 같은 재주로 어디를 가신들 이롭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차라리 조조에게로 가보시지요.
만약 선생께서 그리고 가실 뜻이 있다면 제가 마땅히 다리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은근하기가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방통이 탄식 섞어 대답했다.
"나 또한 강동을 떠날 마음을 먹은 지는 오래되었소이다만
마땅한 곳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소.
공께서 이왕 나를 이끌어 주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당장 떠나도록 합시다.
질질 끌다가 주유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오."
장간 또한 더 머뭇거려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날 밤으로 방통과 나란히 산을 내려와 원래 타고 온 배가 묶여 있는 강가로 갔다.
일이 되느라고 그런지
주유가 딸려 보낸 군사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강가에 이르러 배를 찾아낸 장간과 방통은 나는 듯 배를 띄워 강북으로 갔다.
조조의 진채에 이르자 장간이 먼저 조조를 찾아보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렸다.
조조는 그 유명한 봉추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자
몸소 장막을 나와 방통을 맞아들였다.
주인과 손님이 각기 자리를 정해 앉은 뒤에 조조가 간곡하게 말했다.
"주유는 나이가 어린데다 재주만 믿고 함부로 무리를 다루며
남의 좋은 계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려.
선생 같은 이를 불러 쓸 줄 모른다니 참으로 한심하외다.
이 조조는 선생의 크신 이름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으나
서로 몸을 두고 있는 곳이 달라 감히 청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소.
그런데 이제 다행히도 이렇게 찾아 주셨으니
바라건대 아낌없이 이 몸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오."
☆☆☆
그러나 방통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청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승상께서 군사를 부리는 데 법도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먼저 승상의 군용을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만...."
어떻게 들으면 조조의 용병 법을 한 번 본 뒤에
주인으로 삼을지 않을지를 정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으나 조조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봉추선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만이 기뻐
얼른 말을 준비하게 한 뒤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진채를 구경시켜 주었다.
높은 곳에 올라 조조의 진채를 두루 살펴본 방통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산기슭에서 숲을 의지했으면서도 앞뒤를 고루 헤아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들고 나는 데 문이 있고 나아감과 물러감이 한가지로 합당한 이치로 따랐습니다.
비록 손자와 오자가 되살아나고 양저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이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병가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칭송이었다.
조조가 도리어 겸손을 보이며 방통의 말을 받았다.
"선생께서는 추켜세움이 지나치십니다.
오히려 모자라는 곳이나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수채로 방통을 이끌었다.
방통이 보니 24좌의 진문을 벌여 큰 싸움배를 늘여 세웠는데
마치 든든한 성곽 같았다.
그리고 중간치와 작은 싸움배는
그 사이를 골목 드나들 듯하고 있는데 또한 그 움직임이 앞뒤가 가지런했다.
"승상의 용병이 이 같으니
과연 이름이 헛되이 전하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려."
방통이 그렇게 말하더니
홀연 강남을 손가락질하고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주랑아, 주랑아, 너는 반드시 망하고 말겠구나!"
그 말을 듣자 조조는 크게 기뻤다.
자신이 없는 수채까지도 그토록 칭찬을 듣고 보니
정말로 강남이 이미 자기 손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조는 다시 방통을 데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가
술을 내오게 하고 함께 마셨다.
얘기는 절로 싸움에 관한 것이 되었는데 방통은
높은 견식과 뛰어난 말재주로 그야말로 물 흐르듯 조조의 말에 대답했다.
조조는 더욱 마음속으로 감복했다.
뜻밖으로 훌륭한 인재를 거두게 되었다 싶어 한층 대접이 은근했다.
그럭저럭 여러 순배 술이 돌았다.
방통이 문득 거짓으로 취한 체하며 조조에게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만 군중에 좋은 의자가 있습니까?"
"갑자기 의자는 왜 찾으시오?"
조조가 까닭을 몰라 물었다.
방통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대답했다.
"수군은 원래가 병이 잦게 마련입니다.
반드시 좋은 의자를 얻어 그 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자 조조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때마침 조조의 군사들 사이에는 물과 풍토가 맞지 않은 탓인지
토악질하는 병이 나돌아 목숨을 잃은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그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방통이 그런 소리를 하니 어찌 그대로 흘려들을 수 있겠는가.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요,
좋은 의자를 구하는 일도 급하지만,
더 급한 것은 군사들이 병들지 않게 하는 일이외다.
어떻게 하면 그게 되겠소?"
조조는 간절한 기대로 방통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수군을 조련하는 법은 몹시 묘하나
다만 한 가지 애석한 것은 그게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온전해지겠소?"
조조가 바싹 매달리듯 하며 물었다.
그러나 방통은
조조가 한번 더 묻기를 기다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하신다면 대소의 수군이 병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물은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
그래도 조조는 묘책이 있다는데 우선 기뻤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며 물었다.
"그 묘책이 무엇이오?"
이제 방통의 말이라면 팥으로 매주를 쑨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제야 방통은 짐짓 미뤄 오던 답을 일러주었다.
"대강은 여느 강과 달라
조수가 들고나며 풍랑이 그치지 않습니다.
북쪽에서 온 군사들은 배를 많이 타 보지 않은 까닭에
그같이 심하게 흔들리는 배에서는 멀미를 하게 되고
그 배 멀미가 거듭되면 마침내 병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배를 서른 척이나 쉰 척을 한 떼로 삼아
뱃머리와 꼬리를 쇠사슬로 든든하게 묶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슬위로 널빤지를 깔아 두면
배와 배 사이를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이 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그렇게 한 배를 타고 나아가면
설령 풍랑이 높이 인다 해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마치 땅 위에 있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이
아무리 북쪽에서 온 군사라도 배 멀미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정말로 기가 막힌 묘책이었다.
이에 평소의 위엄도 잊고 앉은자리에서 내려앉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선생의 묘책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떻게 동오를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얕고 어리석은 소견으로 한 번 생각해 본 것일 뿐입니다.
승상께서 한번 더 살펴보시고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방통은 짐짓 그렇게 일러주어
조조를 더욱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조조는 곧 영을 내려 군중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밤낮없이 쇠사슬과 큰못을 만들게 했다.
모든 배를 서로 얽어놓기 위한 것들이었다.
지긋지긋한 배 멀미에 시달리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 한결같이 기뻐했다.
방통은 자기 뜻대로 되었으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조조에게 말했다.
"제가 보니 강좌의 호걸들 가운데는
주유에게 한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제가 세 치 혀를 놀려 그들을 달래
모두 승상께 항복해 오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유는 홀로 남겨져 달리 도움을 빌 데도 없으니
반드시 승상께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또 주유가 이미 승상께 사로잡힌다면
유비 따위야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
자신의 몸을 안전한 곳으로 빼낼 뿐만 아니라
이미 주유가 조조를 상대로 펼치고 있는 사항계를 은근히 돕는 계책이었다.
☆☆☆
그러나 조조는
그런 방통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감사하기에만 바빴다.
"선생께서 그렇게 하여 큰공을 이루시기만 한다면
이 조조는 천자께 상주하여 선생을 삼공의 열에 오르도록 하겠소."
그 같은 조조를 방통은
비정하리만큼 철저하게 농락했다.
"나는 부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뭇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주유를 사로잡고 강을 건너시더라도
결코 죄 없는 백성을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되십니다."
아무리 의심이 많다 한들
이같이 공명정대한 사람을 조조가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조조는 맹세하듯 방통에게 다짐했다.
"나는 하늘을 대신해 이번 일을 하고 있소이다. 어찌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겠소?"
그때 다시 방통은
주유가 채중, 채화의 거짓 항복을 알아보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주유는 그 가족이 조조의 진중에 있는 걸로 미루어
그들의 항복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강남에 있다는 것으로
조조의 의심을 사서는 큰일이라 싶어 방통이 선수를 쳤다.
"승상께서 제게 방문 한 장만 내려 주십시오."
조조에게 절하며 물러나던 방통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렇게 청했다.
조조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방문이라니. 어떤 방문을 말하시오?"
"제 가솔들이며 일가붙이를 안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승상께 온 줄도 모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주유를 돕게 되면
그 아니 낭패이겠습니까?"
☆☆☆
그제야 조조도 방통의 가족에 생각이 미쳐 물었다.
"선생의 가솔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여기저기 강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만
승상의 방문 한 장이면 모두 보존할 수 있겠습니다."
방통이 스스로 그렇게 밝히고 나서니
그 가솔이 비록 강남에 있다 해도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곧 방통의 가솔 및 그 종족들을
안심시킬 방문 한 통을 써서 방통에게 내주었다.
방통은 다시 한 번 절하여 물러나며 조조에게 당부했다.
"제가 떠난 뒤 되도록 빨리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시일을 끌어 주유가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조와 작별한 방통이
강가에 이르러 막 배에 오르려 할 때였다.
☆☆☆
홀연 강 언덕에서 도포에 대나무로 얽은 갓을 쓴 사람 하나가 나타나
방통의 옷깃을 잡아채며 꾸짖었다.
"너희가 실로 간이 커도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나!
황개는 고육계를 쓰고 감택은 거짓 항서(降書)를 올리더니,
이제 너는 예까지 와 연환계를 일러주고 가는구나.
모조리 태워 없애려는 수작이지? 하지만 안 된다.
너희들이 비록 모질고 독한 솜씨를 부려 조조는 속였을지언정 나를 속이지는 못하리라!"
동오의 움직임을 마치 손바닥 안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말에 방통은
눈앞이 아뜩하고 넋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털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돌아서서 보니
그 사람은 다른 아닌 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