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77
6월3일[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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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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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wZ0PzLt7yk
[서울대교구 이원빈 예로니모(노원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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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십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21명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북아프리카에 비해 동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는 꽤 늦었습니다. 1879년에 이르러서야 첫 선교 사제들이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던 무데시 추장은 선교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무데시 추장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무왕가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는데, 성격이 포악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오만하고 그릇된 최고 통치자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독식하고 좌지우지하고 싶었던 무왕가 추장 눈에, 사랑과 배려, 친교와 나눔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 교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폭군은 가장 충직한 부하였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무카사를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무카사 자리를 계승한 다른 부하가 우간다의 김대건 신부님 격인 가롤로 르왕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스 몰래 4명의 예비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즉시 사형이었음에도 은밀히 신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폭군은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은 신자들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갖은 협박을 하고 농락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순교자들은 참수형이나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이 대체로 폭군 무왕가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왕의 개인 비서도 있었고, 왕궁에서 이런 저런 사무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당분간 멀리 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순교자들은 결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간다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순교 이후 박해의 칼날은 더욱 번득였지만, 입교자, 세례자 숫자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순교 직후 3천 명의 예비자들이 쇄도했고, 5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지금 우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풍요로운 성소의 온상입니다. 유럽이나 북남미, 우리나라까지 포함해서 다들 사제 수도 성소의 급감으로 교회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쪽에서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신다는 말씀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보여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범이 일궈내고 있는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박해가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시대 순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어도 나와 맞지 않는 관계라 할지라도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수용하는 자세, 순교 영성을 사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찾아오는 노화나 병고, 실패나 죽음조차도 주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을 지니는 것도 아주 좋은 순교의 한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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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f9ZTZkip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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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라도 했던 선행 하나가 죽기까지 선한 영향을 준다 >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나쁜 소작인들은 주인의 땅을 경작하면서도 한 번도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이들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외아들까지 그들에게 보냅니다. 이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성체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체는 생명 나무인데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면 오늘 주인의 아들처럼 그들 안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게 우리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양심은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불편해집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없다면 아기들은 영원히 유아적인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계속 받아먹기만 하며 내어줄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양심의 작용을 통해 우리 욕망을 누르고 나눌 줄 아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양심이 무뎌졌다면 아무리 받아도 미안하고 고마운 줄 몰라서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단 한 번도 소출을 바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작용이 약합니다. 그러나 한 번 했던 것을 하지 않게 되면 양심의 가책이 심해집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낸 소작인들이라면 아들까지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배신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성체를 영해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 인간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온갖 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십일조, 혹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봉헌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또 돌아가십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십일조 연습입니다. 저희 성당은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50만 원씩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사무실에 가서 십일조를 5만 원씩 내야 합니다. 이렇게 평생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해 보았다면 나중에라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 했던 선행은 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 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더 큽니다. 그래서 돌아오기가 쉽습니다. 아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성당 나오기 싫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는 아이 때 시키지 않습니까? 어른들에 대한 예절도 어렸을 때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번 해 보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안 해 보았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이 덜합니다. 그래서 착해지기가 그만큼 힘이 듭니다.
한 번 한 선행이 평생 내 양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아이들이 힘들다고 해도 매주 교리에 앞서 묵주기도 5단씩 시킵니다. 아이들은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시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이렇게 주님께 시간을 봉헌한 경험이 그들의 양심에 들어가 평생 작용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첫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본 사람은 미래에라도 돌아올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도 단 1년 만이라도 십일조를 해보고 기도나 선행을 체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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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청년들과 만났을 때입니다. 청년 레지오에 함께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남편이 피아노를 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레지오 회합이 있는 목요일 저녁에 미사 반주를 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 열심히 연습한 형제는 부활 2주부터 평일미사 반주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레지오 단원들에게 저녁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주임 신부님 포함해서 청년 레지오 단원들이 모였습니다. 단장은 며칠 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있어서 못 올 뻔했는데 다행히 운전이 가능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단원들에게 아팠던 경험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이, 나무에 옹이가 있듯이 다들 아팠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도 3년 전에 뉴욕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때로 시련과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모두 그런 시련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6명의 단원이지만 10명이 되면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5명이 되면 분단하기 전에 성지순례를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연례행사처럼 저도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가 되면 ‘목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조용히 약을 먹고 쉬면 좋아졌습니다. 본당에 있으니 한 가지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 목소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목감기는 고맙게도 4일 정도 머물다가 떠났습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왔고, 적응하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목감기는 제가 건강을 확인하는 친구 같습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저는 더 무리하게 일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무리하게 지내다가 더 큰 건강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왔다는 것은 저의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건강을 믿고 무리하게 행동하면 건강한 몸도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감기가 오지 않으면 제가 건강관리를 잘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오면 제가 건강관리를 더 잘하라는 뜻으로 알고 면역력을 키울 수 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건강관리를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의 말들 잘 듣는다면 지금 격고 있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가 터널을 지나면 곧 밝은 세상으로 나오듯이, 그런 시련과 고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강한 신앙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를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언자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건강을 확인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면역력을 키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감기를 원망하고, 감기를 욕하는 것은 나의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 더 나쁜 길로 가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아들의 말을 들었다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흔들릴지라도, 비에 젖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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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1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오늘의 복음 비유의 본뜻은 예수님의 수난-부활의 이야기이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주인, 하느님은 이 포도밭을 농부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지로 주고 떠나갔다. 수확기가 되자 주인은 종들, 예언자들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게 하였다. 첫 번째 종은 매만 맞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종도 머리를 맞고 모욕만 당했다. 세 번째 종은 농부들이 죽여버렸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다.”(6절) 이 말씀은 그 아들에게 주인과 같은 마땅한 존경을 드려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아들이 나타났을 때 소작인들은 아들만 없애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아들을 죽이기로 공모하였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포도원 밖, 예루살렘 성 밖으로 버렸다. 그래서 주인은 소작인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아들을 죽였지만, 포도밭이 그들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소작인들은 잔인해지고, 아들은 소작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창에 찔리신다. 그분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로 여겨 죽였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어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퍼져있는 포도밭을 다른 소작인들에게 넘겨주시고 제때 소출을 바치게 하셨다. 이렇게 선택된 자의 탑이 세워지고 빛나고 있다. 교회가 어디서나 빛나고 있다. 어디서든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어디서나 확을 팠다. 이 비유가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 줄 안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를 잡으려 했지만, 군중들이 무서워서 감히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우리 자신이 이제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않을 때, 우리도 이 소작인들과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작인들은 주인의 뜻과는 멀리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겼던 사람들이었고, 끝까지 불순종과 반항으로 주인의 뜻을 거스른 자들이었다. 이러한 소작인들의 자세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지 반성하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매 순간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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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고자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맞게 배치하셨습니다. 믿음이 나 혼자의 선택과 결정인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의 이끄심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우리 안에 당신 없이는 채워지지 않을 갈망도 주셨습니다.
복음은 악한 소작인들을 몇 번이고 참아 주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몇 번이고 기회를 줍니다. 자신의 종을 여러 차례 보냈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면서 그들의 회개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갖은 애를 다 쓰고 계십니다. 당신 사람을 통해서, 특별한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하셨고, 부족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고 기다리시는 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배려가 우리의 위로와 희망의 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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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6-11)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비유이고, 누구든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비유의 전반부는(1절-5절)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 비유의 전반부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기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기다림’을 ‘무기한(無期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한없이 기다리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심판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판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또 “어차피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무조건, 무제한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다.”라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인데, 옳은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무제한’이 아니라 ‘회개’ 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비유의 후반부는(6절-11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과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6절의 “그는 마지막으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악한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자기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은, 모르고 그랬더라도, 하느님께 반역한 것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크게 방해한 일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차지하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유대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9절의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비유의 핵심 주제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들이 선택된 민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 은총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우리도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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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포도원 사건이 주는 교훈>
요즘 시골도 영농기술의 변화로 그런 풍경들이 차차 우리 눈에 사라져 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연세 많으신 분들은 시골에 "원두막".. 하면 옛날 농촌의 정서를 쉽게 연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시골의 풍경을 환히 알듯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상식적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포도원"에는 모든 것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경계를 표시하고, 도적을 막고, 들 짐승들의 내습을 막기 위해 울타리가 으례 만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으례 술통이 있었고, 포도를 밟아서 즙을 짜내는 술 만드는 틀이 있었고, 틀 밑에는 짜낸 즙이 흘러 들어가는 술통이 있었고 그곳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술을 저장하였으며 농부들이 그곳에 유숙하였으며, 수확기에는 도적을 망대에서 지켜왔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용어들은 이사야 5 ; 1-7 말씀의 반복과도 같은 내용의 용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자기들의 비행을 꼬집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 듣고 분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1) 첫째,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은 농부들이 일하기 쉽고 이익을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정비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주셨고 삶의 터전을 나름대로 주셨고 나의 삶을 주시고 계시다는 점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하느님은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멀리 떠나고, 포도원은 농부들에게 그 경영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를 충분히 신뢰하시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인가 나름대로 하게끔 우리가 선택하는 할 수 있는 인생을 삶을 자유를 주셨다는 점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셋째, 하느님의 인내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주인은 농부들이 진 빚을 지불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무엇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호의와 인내로서 그들을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인내와 호의로서 기다리십니다.
4)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의 의도를 저버린 곳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경고를 주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내와 호의를 저버리고 악용할 때 정의의 심판이 기여히 닥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불순종과 반항과 무관심에 대하여 오랫동안 참으시나 끝내는 심판의 처벌을 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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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교회가 사랑인 까닭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인 까닭은 교회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서가 아니라 모자라고 흠 많은 인간을 택하시어 거룩하게 만드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인 까닭은 사랑이 많고 화평한 사람들이 모인 덕이 아니라 섬기는 기쁨을 가르치고 낮은 즐거움을 일러주시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도 모자란 것 투성이인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잘 할 것이라’ 믿어 주고 ‘대단 하구나’ 칭찬하시며 ‘해 낼 것이라’고 추켜 주십니다.
끝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높이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사랑의 모습을 갖출 것이라 여기십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교회에는 평화가 풍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알고 따르는 우리에게 영광과 능력과 모든 힘을 주실 것이라는 진리를 아울러 밝히십니다. 그분을 앎으로써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욕망을 벗고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감히 주인이신 하느님께 도전할 수 있겠는지요?
은혜로 거저 얻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사랑하기를 아끼고 높이 우대받기를 바라고 우쭐댄다면 결과는 비참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분께서 이르신 대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온 천지가 놀랄 일입니다. 내가 그분의 영광을 얻어 살아가는 일만큼 놀라운 일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일이
평화의 비법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꼭 실천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 미련하고 우둔한 노력이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살게 할 것이고 이 끈질긴 수고와 인내가 사랑에 허약하지 않은 튼튼한 교회를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미와 영광의 주님께 감사 올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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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포도밭"(마르 12,1-12)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들이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이사 5, 1- 2)
이것은 사랑하는 임을 사모하며 부른 사랑의 노래이다. 임이 포도밭에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지극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임이 손수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 마련해 놓은 최상의 포도밭이었다.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 놓은 포도밭이다. 임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하고 수확 철이 되어 가 보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들 포도가 달려 있으니 임의 실망이 오죽하였겠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즉 포도밭 주인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을 수 있도록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잘 가꾼 다음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주인은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포도 철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주인이 믿고 맡긴 그 포도밭을 정성껏 관리하여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이 정성스레 가꾼 포도밭이다. 또한 나의 가정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나의 직장이, 나의 본당이, 나의 사도직 장이 주님께서 나에게 관리하도록 맡긴 주님의 포도밭이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포도밭이 많은 결실을 맺도록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 나의 몸을 함부로 또는 무리하여 병이 들게 하거나 또는 나의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맡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자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의 자연은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의 관리 소홀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포도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떠나 갈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소작인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쌍방간에 일정한 계약을 맺고 떠났을 것이다. "포도밭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포도 철이 되자 당연히 종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작인들이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세 번째는 이번에는 아예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주인의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내어던졌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행동은 점 점 더 포악해져갔고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들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악한 행동들이다. 순박하기만 했던 소작인들 (농부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악한 행동들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수 있었는가? 이 소작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7절에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기들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들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이 어떤 욕심에 너무 집착할 때 눈이 멀어진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이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욕심에 집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된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는 소유욕이야 말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소유욕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와 자식간에, 친척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등 모든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은 "내가 차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듯이 내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소유욕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주인의 입장을 묵상하자. 한번 당한 것도 분하고 괴심한 일인데 주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주인은 그렇게 당하하면서도 왜 그토록 보내시기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런 주인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악한 행동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한 없는 이해와 용서와 인내의 덕분이리라.
주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말이다. 주인의 행동을 잘 나타내는 동사는 "보내다"이다.
"보내다"는 동사가 5번 사용되었다. 보낼 때마다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주인의 행동은 계속해서 보냈다. 나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에는 "알아 주겠지" 하는 소작인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심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끝까지 신뢰했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인내하며 또 많은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기다려 주었다.
"알아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또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에서나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느껴 볼 수 있는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한테서도 나 올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알아주겠지" 하는 주인의 마음은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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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였다.”(12,7)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착각의 연속일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사람 수만큼 착각도 많은데, 그많은 사람의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어떤 착각은 자신에게 희망을, 때론 자신에게 절망을 낳게 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한국어판 제목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불평등을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즉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상승(=계층 이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되며 반대로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부유한 성인이 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다 공정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포도밭 일꾼들 역시 불경하고 불손한 착각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엄청난 착각을 일으켰을까요? 이것을 알 때,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요약하자면, 어떤 포도밭 주인이 포도원을 조성한 후, 소작인들에게 소작으로 내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수확 철이 되자 소작료를 받아오도록 종을 보냈지만, 처음 보낸 종을 때리고, 다른 종을 죽였으며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분명 비유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당황스럽고(=그들은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 했다.(12,12),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선량한 소작인들이 이렇게 사악하고 포악한 사람들로 바뀌었을까? 이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착각도 자유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소작인들의 착각을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인이 멀리 떠났다, 는 표현에 드러나듯이, 소작인들은 주인이 아주 멀리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인이 함께 살거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면, 감히 그들은 그런 어리석고 악한 생각과 그런 행동할 엄두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눈치도 살피고, 혹여 소작을 다시 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소작료를 제때 어김없이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착각의 시작은 바로 주인이 함께 가까이 없기에 어느 순간부터 슬금슬금 속임수도 쓰고, 슬쩍슬쩍 부정도 하면서, 욕심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급기야 그들은 소작료를 떼먹기도 하다 보니, 별 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소작인들과 함께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어진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이익에 눈이 멀어지면 마침내 폭력을 일삼는 강도도 되고 살인자도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도 몰라보는 미친개가 되기도 하나 봅니다. 그러기에 루카 사가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12,15) 하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우리도 때론 하느님이 너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종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오래 참으시는 인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악용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계신다 해도 저 하늘 멀리 계셔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모를 거라고 착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제때 처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하느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시며,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리가 하는 일을 다 아시지만 참고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 계신다, 모르신다, 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지만, 왜 주인은 포도원을 두고 멀리 떠나셨을까요? 포도원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느님은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고, 현존 가운데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떠나신 까닭은 바로 하느님의 편안함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덕목은 부재의 현존이며, 아니 계심 속에서도 함께 계심이기에, 이를 우리가 깨닫고 살아가길 바라시고 그래서 전부 다 맡기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소작인들이 착각한 둘째 이유는, 오랫동안 어떤 일을 계속해서 맡고 일하다 보면, 남의 것이 자신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것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처음엔 일할 기회를 마련해 준 주인에게 고맙고 감사로운 마음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소작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처음 가졌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 가졌던 마음은 식고 주인에게 바치는 소작료가 어느 순간 아까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의 신분을 망각하고, 해야 할 임무를 소홀히 한 채 마침내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이게 우리가 땀 흘리고 애를 써서 거두어들인 수확인데 이걸 내놓으라고? 하나도 내어 줄 수 없어’, 그러면서 폭력으로 포도원을 집어삼킬 욕심에 눈이 뒤집혀 버리게 된 겁니다.
우리 또한 자신이 현재 소유한 것을 너무 오래 사용하다 보니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오직 이 땅의 청지기(관리인)일 뿐이다.’(루12,35~48참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듣기 불편하시겠지만, 이 세상에 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 보면,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무상 임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게 맡긴 것을 잘 사용하고 관리할 뿐입니다. 내게 잠시 맡긴 것을 마치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잘못된 착각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우리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착하고 충실한 소작인이 악하고 불충실한 소작인으로 돌변한 이유는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했기에 착각한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모든 일이 다 잘 마무리될 것이라 분명 착각하고 오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결말을 이렇게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12,9) 모든 게 일장춘몽이라더니 그 결말이 그러했습니다. 삼일 천하가 웬 말입니까?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믿고 맡겼던 주인의 무서운 심판과 징벌이 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내일을 보지 못하고 알 수 없습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으리라는 착각이 바로 그들의 착오였습니다. 참고 기다려 주신 주인의 마음, 곧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한해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13,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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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닭을 키우려고 닭장을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 닭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닭장 밑에서 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군다나 닭장을 만드느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서 수리할 비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닭을 키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모두 팔아 버려야 할까요?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 역시 올바른 판단은 아닙니다. 닭장 만드는 데 들었던 비용을 모두 날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최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닭을 팔고, 그 판 값으로 오리를 사서 닭장에서 키우면 어떨까요? 오리는 물이 필요하니 이렇게 물이 올라오는 것이 최적의 환경일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도 사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비로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뜻만을 주장하고 그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주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원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해 고민 속에 있을 때, 나의 뜻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뜻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최선의 상황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쁠 수 있는 또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마음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일을 주인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또한 포도밭 소출의 전부를 가져오라는 것도 아닌 얼마만을 내라고 합니다. 아마 주인은 자기의 배려와 사랑을 알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작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배려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사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늘 나의 입장에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어렵고 힘든 것이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용기 있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충실한 주님의 소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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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 나고 돈 났다>
살아가면서 많은 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위축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뿐더러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 없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합니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존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재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재물을 담보 삼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이재에 밝아 자기의 몸을 망쳐 재물을 일으킨다”(대학).는 옛말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 세상은 끝장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밭을 일구어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어떤 종은 죽이고 결국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상속자가 죽었으니 그 포도밭이 자기들 것이 되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 그 주인은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총의 신이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 분노에 더디시고 항구하게 사랑하시며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종을 몇 차례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며 기다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며 변덕스러운 우리들을 참아주고 계십니다.
받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는 것입니다. 잃어 놓고는 하느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작인이라면 포도밭을 맡겨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 주시고 계신 데 전혀,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고 말하면서도 ‘돈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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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선하라>
마르코 12,1-1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오직 선하라>
선은
살림이라
영원히 살고
악은
죽임이라
마침내 죽으리니
그대
살고픈 사람아
오직 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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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과 삶>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삽시다-
오늘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르왕가와 21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앎과 삶이 하나였던 순교성인들입니다. 무지한 우간다의 무왕가왕은 1885-1887년 사이에 참으로 터무니 없이 무죄한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1964년 이 순교자들의 시성식때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일부를 인용합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은 재생의 표지입니다. 이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순교록에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더해 줍니다. 새시대의 첫 열매인 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아프리카 대륙은 자유를 얻어 독립한 아프리카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도 참혹하고 너무도 보배로웠던 이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되게 해 주십사 기원합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순교자들이 끊임없는 감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님 향한 사랑과 앎과 삶의 일치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바르게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알아야 살 수 있고 알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앎중에 앎이, 공부중의 공부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보다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이렇게 평생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제발 평생공부에 지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평생공부에 앞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참으로 한결같고 열렬한 바른 사랑이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어디서 공부합니까? 혼자만의 공부는 부족합니다. 함께와 홀로가 함께 하는 공부여야 합니다. 이래서 공동체 학교에 몸담아야 합니다. 내 몸담아 살아가는 공동체는 말 그대로 사랑의 학교, 섬김의 학교가 됩니다.
졸업이 없는 공동체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학인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고 너와 나를 아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평생공부 제대로 못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사랑하여 바르게 알아 갈수록 나와 너를 바르게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래야 무지의 편견이나 선입견의 오해나 착각함이 없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있는 그대로 편견이나 오해없이 제대로 보고 아는 경우는 얼마나 힘든지요. 하나하나는 참으로 좋은 분들인데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으로 굳어지면 거의 광적인 광신이나 맹신이 되어 도저히 바꾸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편견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비극적 폭력과 살인입니다.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한 인간에 의해 부단히 반복되고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여기 나오는 불의와 탐욕의 소작인들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과 소작인들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몰랐고 그럼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은 물론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고, 종들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 파견한 무수한 예언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바로 여기서 소작인들은 당대 예수님을 배격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수한 무지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무지한 소작인들은 비단 잘못된 지도자들뿐 아니라 편견에 물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시편 말씀은 당대의 예수님께 대적했던 무지한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라기만 하네.”
당대나 오늘이나 무지한 이들의 편견을 깨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집짓는 무지한 이들이 내버린 돌, 바로 죽임당한 예수님을 부활시켜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자 아무도 없습니다. 당대의 무지한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분을 붙잡으러 했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합니다.
무지한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이나 이렇다 해도 군중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주님의 은총에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는 평생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제1독서에서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갖추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게 하시고 생명과 신심과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앎의 완성을 촉구합니다. 앎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아는 앎에는 얼마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성-믿음-덕-앎-절제-인내-신심-형제애-사랑’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적 실체입니다. 이런 앎의 은총은 영지주의자의 머리로만의 깨달음의 앎이 아니라 생활실천과 관련된 사랑과 삶이 하나로 녹아있는, 참으로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씀이 더욱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다산과 삼국지에 나오는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힘껏 노력한 후에야, 운을 탓할 수 있다.”<다산>
“먼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삼국지>
참으로 잘 익은 가을 열매들처럼, 사랑과 지혜의 삶중에 익어가야할 우리의 앎의 열매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미사은총이 사랑과 지혜로 잘 익어가는 앎의 열매들이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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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덧셈 인생, 뺄셈 인생>
뺄셈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적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정파를 배제하는 정치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덧셈 정치도 있겠고 그것은 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의 한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여기서 포도밭 밖이란 공동체 밖이란 뜻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것은 공동체서 축출했다는 뜻이며 머릿돌이어야 할 주님을 사람들이 버려버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저와 가까운 공동체들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척 슬프고, 그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척 아프고 그 사람들이 무척 가엽습니다.
왜 덧셈은 할 줄 모르고 뺄셈만 하는가? 그런데 자기가 그런 줄은 알고 있을까?
자기가 그런 줄 안다면 무척 슬플 테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럽니까?
그것은 그것이 그의 능력이고 한계이기 때문이고, 달리 말하면 그에게 있어야 할 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이란 선덕의 줄임말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반대로 악덕이란 선은 행할 수 없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덕이 있어야 선을 행할 수 있는데 덕은 없고 악덕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덕이 있고 어떻게 덕을 지닐 수 있을까요? 보통은 덕을 쌓는 사람에게 덕이 있고 오늘 베드로 서간도 이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실 믿는다면서 덕이 없는 사람이 있어 욕을 먹습니다. 능력은 많은데 덕이 없는 지도자들이 욕을 먹는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의 덕에 다른 덕들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6-7)
우리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뺄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덧셈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덕에 다른 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 덕들 덕분에 모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덧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선덕을 쌓지 않아 악덕에 악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적으로 만들어 배제하는 뺄셈 인생이 있을 겁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고 나는 어떤 인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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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마르12,7)
<하느님의 분노!>
오늘 복음(마르12,1-12)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불순종'을 지적하십니다.
오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밭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내어진 '종들'은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소작인들'은 '유다인들'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소작인들인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결국 당신이 가장 아끼시는 아들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분노!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분노',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유다인들을 향해 서 있는 하느님의 분노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분노는 지금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소작인들인 우리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에게도 향해 있는 분노라고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하느님의 기쁨으로 바꾸어 드립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회개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위해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느님의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하느님 은총'이며, 이 은총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회개하기를,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돌아갑시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루카15,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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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HqcO7xAqZ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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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르 12, 8)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욕심입니다.
다 채울 수 없는
욕심으로
살다가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마저
죽인 뒤에야
비로소 조금
알게 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하느님마저
단칼에 버리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약속을
어기는 쪽은
그래서 늘
욕심 많은
우리들입니다.
아름다워야할
포도밭에
욕심의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거두어들이시는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맞아들임은
넘치는
말들의 허황된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맞아들임의
머릿돌이 됩니다.
욕심의 모퉁이를
지나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보내고 또
보내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내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내면이
새로운 길을
만납니다.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으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포도밭의
행복을 놓치지
않는 새로운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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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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