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 저승사자 찍어 낸 낭군
1. 어사御使 대신 걸사乞士라던
달빛을 가리면서 처가에 당도하여
행랑에 돌아드니 내정內庭은 쓸쓸해도
옛 보던 벽오동나무 반기는 듯 맞아주네
섬 밑에 창송蒼松 녹죽綠竹 옛 빛이 완연하고
단 아래 백두루미 다친 다리 찔룩찔룩
비창 전 누렁이 한 쌍 졸다 깨어 짖어댄다
암상巖床에 굽은 노송 노룡이 굼니는 듯
청풍이 건듯 부니 오리 한 쌍 춤을 추고
대문 앞 버들가지는 유사무사 양류지라
중문을 바라보니 내가 쓴 입춘서라
충성 충忠자 분명한데 마파람에 펄렁이다
중中자는 떨어 버리고 마음 심心만 남겼느니
이토록 황량한 건 모두 다 내 탓이라
동산의 달을 보며 탄식하고 있으려니
어디서 주문呪文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한 걸음 두 걸음씩 소리 근원 찾아들어
무성한 동백 숲에 은신하고 살피려니
장모의 서글픈 거동 눈뜨고는 못 볼레라.
미음을 끓이면서 탄식해 하는 말이
모질고 모질구나 이 서방이 모질구나
위경에 처한 내 딸을 버리려고 하는 건가
책방에 묻혔다고 소식조차 끊어 버린
양반의 사람 괄시 어찌 이리 매정할까
엄부의 시하라지만 편지 한 장 못하다니
울안의 물을 길어 백발을 감아 빗고
칠성단 불을 밝혀 정화수 올리면서
단 앞에 눈물 뿌리며 분향재배 축원이라
천상의 일월성신 사해용왕 팔부신장*
별왕님전 비옵나니 화위동심化爲同心 하옵시고
이년의 절통한 한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 八部神將: 부처님의 한 眷屬으로서 說法하는 자리에 列지어 佛法을 守護하는 여덟 神將으로 八部衆이라고도 함. 즉「天, 龍, 夜叉, 乾達婆, 阿修羅, 迦樓羅, 緊那羅, 摩喉羅伽」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에 높이 올려
무도한 신관사또 찍어 내게 하옵시고
옥중에 무고히 가친 내 딸 춘향 살려 주오
춘향을 곱게 길러 외손봉사 바랬더니
곤장 맞고 기절한 걸 큰칼 씌워 가뒀건만
절개를 아니 굽히니 살릴 길이 없나이다.
빌기를 다한 후에 담배 한 대 붙여 물고
한숨을 몰아쉬다 눈물 쏟아 뿌리면서
춘향 모 슬픔에 겨워 장탄식을 토하느니
저만치 비켜서서 거동을 살피다가
하늘을 우러르며 어사또가 탄식하니
장모의 치성 덕으로 벼슬한 게 아니던가.
노마가 참다못해 안으로 뛰어들며
삼청동 서방님이 오셨다고 소리치니
춘향 모 소스라치며 장승같이 굳히더라.
삼청동 서방님이 오셨다고 하였더냐?
춘향일 구하려고 이 서방이 왔단 말이
어사또 마패를 들고 내려왔단 말이겠지.
노마가 잠시 잠깐 다짐을 잊은 채로
예하며 들어가다 어사또를 살펴보니
두 눈에 쌈지를 틀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어사또 뛰어들며 장모 나요 몽룡이요
마패는 없지마는 춘향 하나 못 살릴까
인명은 재천이라니 살길인들 왜 없겠소.
남 서방 떠난 것이 오늘 아침 일인 것을
어느새 한양 땅을 다녀왔단 말이더냐
전주골 이 풍헌 아들 이 서방을 데려왔나.
장모가 망령이지 날조차 모르시니
백년지객 사위 모습 잠시잠깐 못 봤다고
얼굴도 몰라보다니 섭섭하고 괴이쩍네.
이것이 웬일인가 어쩌다가 이제 오나
봉운峰雲이 기봉奇峰터니 구름 속에 싸여왔나
간밤에 풍세대작大作터니 바람결을 실려 왔나
춘향의 소식 듣고 살리려고 오신건가
방으로 들어가서 촛불 앞에 앉혀 놓고
자세히 살펴보려니 거지 중에 상거지니
춘향 모 기가 막혀 이 꼴이 웬 말이라
양반이 그릇되니 형언할 수 없네 그려
내직內職에 승차하더니 어찌 이리 되었는가.
한양에 올라간 후 가산을 탕진하니
가솔이 흩어지고 벼슬길도 끊인지라
오갈 데 없게 데어서 입 붙이러 온 길이요
부친은 훈장질로 모친은 친가 찾아
다 각기 갈리어서 호구지책 세운 중에
한두 냥 빌어 보려고 내려오던 길이외다
도중에 노마 만나 처가 형편 듣다보니
양가 이력 말 아니라 정강이에 힘이 빠져
예까지 내려오는데 죽을힘을 다 메겼소.
춘향 모 이말 듣고 제풀에 주저앉아
무정한 이 사람아 일차로 이별하고
소식을 끊어 버리다니 그럴 수가 있다던가?
칠성단 모두우고 어사 되길 빌었더니
어사는 어디 가고 걸사乞士가 되어 왔나
기왕에 엎지른 물을 수원수구 뉘게 하리.
홧김에 달려들어 코를 물어 뗄라 하니
이것이 내 탓이지 내 코 탓은 아니잖나
하늘이 무심타 해도 풍운조화 있는 법을.
노마가 참다못해 말 짓을 달려는데
어어어 하려다가 어사또 코를 보고
어사 코 무사하시니 어사 무사하여요.
내 코가 어사 코면 네 코는 무슨 코냐
코라도 성해야지 코까지 떨어지면
코 없이 춘향의 얼굴 무슨 낯에 대면하랴.
춘향 모 기가 차니 심통을 터지던지
양반이 그릇되니 간농奸弄조차 든 거라던
허기진 모양이라니 내 딸 신세 고이하다.
어사또 화난 장모 거동을 살펴보랴
시장해 죽겠으니 밥 한술만 어서 주오
춘향 모 밥을 달라니 없다면서 돌아앉네.
춘향의 옥바라지 맥을 놓고 돌아오다
큰아씨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향단
방 안을 살펴보려니 서방님이 분명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제 서방은 보도 않고
향단이 문안이요 넙신 엎뎌 절을 하며
천리나 머나먼 길에 노독인들 없나이까.
아씨를 모시고서 고생이 자심하지
집안 살림 맡아하랴 내외잡사 챙기면서
아기씨 옥바라지에 무거운 몸 오죽하랴.
소녀는 무탈하오 큰아씨 그리 마소
멀고도 험한 길에 뉘를 보자 오셨는데
아기씨 알아 계시면 생난리가 날 것이요.
부엌에 들어가서 찬밥을 데워 담고
풋고추 볶은 채소 양념 넣은 단 간장에
냉수를 한 대접 떠서 모반 받쳐 올리느니
새 진지 질 동안에 요기나 하라지만
어사또 잡아채며 밥 귀신이 밥을 본 듯
수저는 들지도 않고 맨손으로 쑤셔 넌다.
장모가 하는 양을 보려는 수작이나
허겁지겁 먹는 양에 춘향 어미 탄식하며
얼씨구 밥 빌어먹기 이력이 나셨구먼.
향단이 아기씨의 신세를 생각하여
크게는 못 울고서 체읍涕泣하며 하는 말이
어찌나 어찌할 거나 우리 아씨 어찌해.
소리내 우는 양에 어사또 기가 막혀
운다고 살랴마는 아씨 행실 지극한데
아무리 독하다기로 죽이기야 하겠느냐?
춘향 모 이 말끝에 가슴을 내려 쓸며
그래도 양반이라 오기는 있나보지
도대체 무슨 재주로 춘향이를 살려낸다.
어사또 눈치 보며 노마가 끼어드니
아무리 서방님이 예까지 오셨는데
아기씨 돌아가시게 보시고만 계시리까?
보고만 안 있으면 대신 죽어 줄 거라던
춘향이 살 팔자면 제 서방이 저리 될까
계집의 가없는 욕심 죽음밖에 더 있으랴?
큰아씨 말씀일랑 괘념치 마옵시오
나 많아 노망 중에 이런 일을 당하시어
화 끝에 하는 말이니 진지부터 드옵소서.
어사또 밥상 받고 춘향을 생각하니
분기가 탱천撐天하야 마음은 울적하고
오장이 울렁거리니 밥맛까지 간 데 없다
밥상을 물리고서 담뱃대 털어 내며
여보! 장모 춘향이를 만나는 봐야겠지
춘향을 아니 봐서야 인정이라 하겠는가.
2. 몽룡夢龍이 진룡眞龍 되어
파루*를 친 연후에 들자고 하던 차에
때 맞춰 파루 소리 뎅뎅하고 우는지라
어사또 급한 마음에 나는 듯이 일어서니
* 罷漏: 저녁 二更에 二十八宿을 가리키는 28번, 새벽 五更에 三十三天을 가리키는 33번 큰 쇠북을 쳐서, 통행금지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고 함.
노마가 등롱 받혀 앞장서 인도하고
어사또 장모하고 뒤 따라 돌아드니
인적이 고요한 옥엔 쇄장鎖匠조차 간데없다.
춘향이 꿈속에서 몽룡을 만났는데
몸에는 홍삼이요 머리 위엔 금관이라
오로지 상사일념에 목을 싸고 울었느니
춘향의 눈물 흘러 광한지에 넘쳐날 때
오작선 바람 타고 눈물강을 지쳐 가며
임 그려 비워진 가슴 꿈을 빌어 메웠으리.
옥문을 두드리며 춘향을 불렀으나
꿈속을 헤매느라 대답조차 못하느니
어사또 답답하다며 큰소리로 부르란다.
큰일 날 말씀이라 동헌이 어디라고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 염문 할 거라니
어사또 염문하라며 큰소리로 부르더라.
꿈속을 헤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라
이것이 웬 소리냐 그 목소리 괴이쩍다
어사또 기가 막혀서 내가 왔다 소리치네.
왔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두 눈을 크게 뜨고 어미 모습 살피더니
딸자식 보러 다니다 낙상하면 어이하오
이훌랑 오지 말고 향단이나 보내시오
늙은 어미 염려하랴 제 처지는 잊었던지
꿈속을 넘나드는 듯 제정신이 아닌 거라
왔다고 하시던데 오기는 뉘가 와요
꿈속에 임을 만나 만단정회 풀렸더니
혹시나 서방님께서 내려온단 기별 왔소?
가슴을 두드리며 애끓이는 꼴을 보고
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삭이면서
걸인이 다 된 네 서방 널 보려고 왔더란다.
몽중에 승천하던 청룡을 보았더니
옥황이 하강하여 춘향 앞에 현시顯示했나
몽룡이 진룡眞龍이 되어 이 내 한을 삭이려고
이것이 웬 말이요 서방님이 오시다니
꿈속에 보던 임을 생시에 만날 줄은
문 새로 손을 잡고서 말을 잊고 기색하네.
이 손이 뉘 손이요 아마도 꿈일러라
상사로 그리던 임 이리 쉬이 만날 수야
그토록 매정하더니 어찌 알고 오시었소?
박명薄命한 우리 모녀 서방님과 이별한 후
자나 깨나 임을 그려 일구월심 한 일러니
내 신세 죽게 된 것을 살리려고 오신 거요
그렇게 반기다가 임의 형상 자세 보니
어찌 아니 한심하랴 이 처지가 웬일이요
내 꼴은 팔자려니와 어이 이리 되시었소?
춘향아 서러 마라 인명은 재천인데
무슨 죄 네게 있어 목숨까지 거두겠냐?
내 비록 이 꼴이다 만 너 하나야 못 살릴까.
서방님 귀히 되길 칠 년 대한 가문 날에
단비를 기리듯이 목을 늘여 바라면서
정성을 다했건마는 공든 탑이 무너졌네.
가련한 이내 신세 하릴없이 되었소만
죽어도 저승길에 원이 없게 하옵시고
내 대신 서방님 수발 반듯하게 들어 주오
봉장鳳欌 안 서랍 속에 비단 장옷 들었으니
그 옷을 내다 팔아 한산 세저細苧 바꿔다가
정성껏 손질하시어 물색 곱게 도포 짖고
함 속의 은비녀와 밀화장도 옥지환과
백방사주 긴 치마를 되는 대로 팔아서라
관 망건 한삼 고의를 넉넉하게 들이시오
금명간 죽을 년이 세간 두어 무엇 할까
용장 봉장 팔아다가 별찬 진지 대접하며
나 죽어 없다고 해도 날 본 듯이 섬겨주소.
내일은 본관 사또 생일상 받는다니
취중에 주망酒妄나면 나를 올려 칠 것이나
형문에 장독 깊으니 수족인들 놀리겠소?
흩어진 머리카락 이렁저렁 걷어 얹고
비틀비틀 들어가서 장폐杖斃하여 죽거들랑
내 시신 손수 거두어 등에 업고 나옵시오.
우리가 처음 만난 부용당 언덕 위에
한적한 데 뉘어 놓고 서방님이 염습*하되
혼백이 갈리지 않게 위로하여 주옵시고
* 斂襲: 襲, 小殮, 大斂을 말하는 것으로 襲은 屍身에 옷을 입히는 것이며, 小殮은 衣衾을 바꾸는 것, 大斂은 入棺하는 것임.
관 안에 눕힌 채로 양지 끝에 묻었다가
서방님 귀히 되어 청운의 뜻 이루시면
일시도 지체치 말고 육진장포* 개렴하오.
* 六鎭長布: 함경도 六鎭 지방에서 나는 길이가 긴 삼베.
조촐한 상여 위에 덩그렇게 올려 매고
북망산천 찾아갈 제 앞뒤 산을 다 제치고
한양 땅 선산발치에 아담하게 묻어 주소
비문에 새기기를 수절원사춘향지묘*
여덟 자만 새겨주면 망부석이 아니 될까
가련한 혼령이나마 극락정토 찾으리다.
* 守節冤死春香之墓: 수절하다 억울하게 죽은 춘향의 묘.
불쌍한 우리 모친 날 잃고 어이 살며
울다가 병이 들면 눈물 속에 묻히리니
신원*해 풀어 줍시오 이내 신세 맺힌 한을
* 伸寃: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 줌.
가산을 탕진하고 하릴없이 걸인 되어
집집이 걸식하다 자진自盡하여 죽게 되면
지리산 까마귀밥이 아니 될 수 없으리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수 있느니라
네가 나를 어찌 알고 이렇듯이 슬피 우냐
춘향을 작별하자니 가슴속에 피멍이라.
노마가 어사또를 거들며 하는 말이
호남에 어사 났단 소문이 자자하니
사또가 제목 지키랴 아씨 목을 치오리까.
춘향과 작별하고 삼문 밖에 나온 어사
한밤을 지새우며 문 안팎을 염문할 때
질청에 숨어 들으니 이방이 눈치 챈 듯
여보게 수의繡衣사또 새문 밖 이 씨라니
삼경에 춘향 모와 옥문 앞에 찾아갔던
선비가 폐의파관 한 게 수상쩍은 모양이라
내일 낮 본관사또 생신 잔치 끝난 후에
일십一什을 구별하여 생 탈 없이 행하도록
주변을 두루 살피어 엄히 경계하시게.
장청에 들어가서 행수군관 거동 보니
옥 거리를 바장이는 걸인들이 고이적다
아마도 어산 듯하니 용모파기 자세하라
현사에 들으려니 호장 역시 그러하다
육방염문 다한 끝에 춘향 집에 돌아와서
어사또 하시는 말씀 개개 여신如神이로구나.
춘향이 야삼경에 침침한 옥방에서
그리던 서방님을 번개같이 만나보고
목에 건 칼을 붙잡고 탄식하며 앉았느니
사람이 태어날 때 후박장단厚薄長短 없으련만
내 신세 무슨 죄로 이팔에 이별하고
모질고 모진 목숨이 형장 아래 떨어질까
옥고를 치르면서 서방님만 바라다가
임의 얼굴 보았으나 광채 없이 되었으니
나죽어 황천에 간들 조상 앞에 어이 뵈랴
신세를 탄하면서 수심 속에 묻히는데
노마가 흘린 말이 빛이 되어 스쳐 간다
혹시나 서방님께서 어사또는 아니실까
봉사가 점을 칠 때 서방님이 벼슬하여
청포 입고 말에 올라 청학을 탄 형상이라
말대로 된다고 하면 어사또가 아니시랴
무서운 벼슬하여 한강을 건넜다며
곧바로 내려오는 거동이라 하였으니
서방님 폐의파관 한 게 어사일시 분명하다.
3. 해도 멈춘 어사출도
보름날 조사朝査 끝에 근읍 수령 모여드니
운봉 구례 곡성 순창 진안 장수 원님들과
좌편엔 행수군관이 우편에는 청령사령
주관인 본관 사또 하인 불러 분부하되
관청색* 불러들여 다담상을 올리라니
동헌 안 기치군물이 반공중에 높았더라.
* 官廳色: 地方 고을 首領의 음식을 만드는 일을 맡은 衙前.
차일을 밭쳐 놓고 잡인 이목 금하라며
녹의홍상 기생들은 백수나삼 높이 들어
두둥실환環을 그리며 무병장수 기원하네.
여봐라 사령들아 너희 원전 들어가서
원로에 걸인 하나 좋은 잔치 당한지라
주효를 빌어먹자고 청한다고 여쭈어라.
사령이 막아서며 어느 댁 양반인지
우리 안전 급한 성정 그런 말은 내들 마소
등 밀쳐 쫓으려 하니 어이 아니 청령廳令이랴.
운봉이 보다 말고 본관에 청하는데
의관은 남루하나 양반댁 후예後裔인 듯
말석에 술이나 먹여 보내심이 어떠리까.
양반의 후예라니 그러라 하면서도
말하는 뒷입맛이 사납기 짝이 없다
억지로 분부를 내려 저 양반을 모시란다.
도적은 내가 될게 오라는 네가 차라
단상에 올라가서 단좌端坐하고 살펴보니
기녀를 끼고 도는 게 진양조가 방장이라
어사또 상을 보니 어찌 아니 통분하랴
떨어진 개 상판에 나무 젓갈 달랑 한 쌍
막걸리 반 사발에다 콩나물이 전부라니
술상을 발끝으로 떠 밀쳐 엎어 놓고
운봉의 갈비 한 대 맨손으로 집어 들며
이 갈비 한 대만 주오 주린 배나 채워 보게.
다라도 잡수라며 본관을 향하여서
이렇게 좋은 잔치 풍류로만 놀지 말고
우리가 차운* 한 수씩 올려 봄이 어떻겠소?
* 次韻: 남이 지은 詩에 和答하되 原詩의 韻字, 또는 정해진 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그 말이 옳다 하니 운봉이 운韻을 낼 때
기름 고膏자 높을 고高자 두 자를 내여 놓고
차례로 운을 다는데 어사또가 끼어든다.
걸인도 어렸을 때 글줄이나 읽었으니
좋은 잔치 당하여서 주효를 포식하고
말없이 가기 무렴하니 차운 한 수 하사이다.
그 말씀 반갑구려 바라던 바이외다
선비의 체면으로 어찌 그냥 가시겠소?
시문을 주고받음이 교유부잡交遊不雜 아니리까.
운봉이 반기면서 필연을 내어 주니
좌중에 선장으로 글 두 귀를 지었으되
민정을 들먹이면서 본관을 비꼬았네.
운봉이 얼른 보니,
“금준미주천인혈 金樽美酒千人血
옥반가효만성고 玉盤佳肴萬姓膏
촉루락시민루락 燭淚落時民淚落
가성고처원성고* 歌聲高處怨聲高.”
* 癸酉年譜에 의하면 成以性이라는 사람이 전라도 暗行御史로 갔을 때 호남의 12고을 首領들이 모여서 잔치하는 자리에 끼어 「樽中美酒千人血 盤上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라는 시를 지은 다음 본인이 암행어사임을 밝히고 12고을의 수령들을 懲戒하였다고 함.
금 동이에 넘치는 술 중생의 찌든 피요
옥 소반의 맛있는 안주 만 백성의 기름이고 촛농이 녹아 떨어질 때 민초들이 피눈물을 뿌릴지니
가무가 드높은 곳엔 원성 또한 높으리라.
이렇듯 지었으나 본관은 몰라보고
운봉이 글을 보다 새까맣게 질리면서
어사또 자리를 뜨자 각 청 불러 분부하니
공방은 포진 단속 병방은 역마 단속
관청색 다담 단속 옥 형리는 죄인 단속
형방과 사령을 불러 차례대로 단속한다.
이렇게 요량할 제 본관은 물색없이
운봉은 왜 그러오 소피라도 보신 거요
사또가 주광酒狂이 드니 춘향이를 올리라네.
어사또 군호 할 제 서사보고 눈짓하고
역졸 불러 단속하니 이리 틀고 저리 죄며
손들어 명을 내리니 눈을 들어 받아낸다
분주히 오고 가는 서리 역졸 거동 보소
외올망건 공단싸개 새파랭이 눌러쓰고
집신에 한삼고의를 산뜻하게 입었느니
손목엔 육모방치 녹피鹿皮 끈 감아쥐고
예서 번쩍 제서 반짝 남원부가 우군우군
달 같은 마패를 드니 햇빛 받아 번쩍인다.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를 뒤집는 듯
초목과 금수인들 아니 떨고 어이하랴
수많은 청파 역졸이 물밀듯이 달리는데
사또가 나가시니 역장逆長은 물러서라
삼문 앞 대로상에 도용채를 그려 놓고
폐문 북 세 번 울리며 암행어사 출도야.
하늘을 닫는 해도 발을 잠깐 머무르고
공중에 나는 새가 나래 접고 떨어지니
사대문 출도 소리에 청천하늘 버력이라
공형을 들라 하니 쥐구멍을 찾아들지
육방이 넋을 잃고 땅바닥에 조아리니
공방은 어디 있느냐 보전 들고 들라신다.
공방을 하라더니 저 불 속에 들라느냐?
좌수 별감 넋을 잃고 이방 호장 실혼失魂하니
나졸은 오금을 떨며 오줌 싸기 분주한데
육방의 수령들은 이리 뛰고 저리 기어
인궤 잃고 과질 들고 병부 잃고 송편 들며
갓 잃고 소반을 쓰니 임실 현감 바가지 쓴다
그대로 콱 누르니 바가지가 깨어지고
억지로 갓을 쓰니 오줌이 넘치는지
허리춤 뒤적이다가 칼집 들어 세워 보네
곡성이 급한 김에 거꾸로 말을 타고
채찍을 한번 치니 말이 뒤로 달아나지
이 말이 어인 말이냐 목이 없는 말이 있냐
거꾸로 타셨으니 내려서 바로 타소
어느 결에 바로 타랴 목을 돌려 박아 보라
이렇듯 허둥거리니 별 화상이 다 있더라.
본관은 허둥대다 바지에 뒤를 보고
내아로 뛰어들며 수작을 부리는데
어 추어 문 들어온다 바담 닫으라 하는 구나
이참에 서리 역졸 벌떼같이 달려들어
이리 몰고 저리 틀며 힘을 모아 돌려 치니
깨지고 부서지는 게 거문고요 북 장구라.
이렇듯 야단법석 어디에 있다던가?
잔치가 깨어지니 수라장이 된 동헌에
눈치로 늙은 수통인 어사 앞에 대령한다.
어사또 분부하되 훤화喧譁를 금하라며
대감이 좌정 하던 골 객사로 사처徙處하라
대청에 드높이 앉아 분부 내려 거행하니
본관은 오금 박아 봉고파직 하옥하고
그간에 지은 죄업 사대문에 써 붙인 뒤
옥 형리 불러들여서 옥수를 올리란다.
제각기 문죄하여 무죄한 자 방송한 뒤
저 계집은 무엇인가 형리 불러 하문하니
근본이 기생의 딸로 수절하려 하던 터라
본관이 불러들여 수청 들라 하였더니
정절을 지킨다며 수청 아니 들랴 하고
관청에 포악한 죄수 춘향이란 계집이오.
어사또 분부하되 너만 년이 수절이라
관청에 포악하고 살아남길 바라겠냐?
죽여야 마땅하다만 내 수청도 거역할까
정신이 산란하고 거동조차 버겁지만
어사또 말소리가 설치 않고 귀에 익다
간밤에 익히 들었던 서방님의 목소리라
그 분부 거두시고 이내 말씀 들어 보오
층암절벽 높은 바위 바람 분들 무너지며
늘 푸른 청송녹죽이 눈이 온들 바래리까?
향단아 이 지환을 어사또께 바치어라
이 가락지 짝을 찾아 끼워만 주신다면
백수白鬚를 날릴 때까지 수청 들어 드린다며
눈치로 짐작하고 딴전을 피우려니
목에 건 칼 벗기고 올라오라 하는 구나
춘향이 고개를 들어 대상 낭군 살피더라.
어사또 서방님이 반갑고 고마워도
한 밤을 졸인 가슴 야속하고 서운하다
남 서방 말속이지만 씨를 담아 건넨 것을
반 웃음 반 울음에 어사또께 매달리며
염라국 문전에서 나를 살려 주실 거면
간밤에 찾으셨을 때 귀띔이나 하실 거지
남원에 추절 들어 떨어지게 되였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춘풍 날리시나
꿈인 듯 생신 듯하니 꿈을 깰까 염려로다.
이 사정 모르고서 죽어가는 딸 주려고
미음을 끓여 들고 동헌 앞에 들어오다
춘향이 즐기는 모습 먼발치로 보았더니
대상에 같이 올라 가없이 즐기는데
말로서 이 모습을 어찌 다 설하겠나
춘향의 높은 절개가 빛을 보게 되었더라.
어사또 진력하여 남원공사 닦으신 후
이웃과 작별하고 한양으로 치행할 제
가솔을 헤아려 보니 노마까지 다섯이요
춘향이 모녀하고 향단이 내외에다
뱃속엔 노마 씨가 염치없이 들어 있지
행렬도 찬란하거니 남원부의 경사리라
이렇듯 춘향 모녀 남원을 하직할 때
귀하게 되었건만 정든 고향 떠나려니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일희일비 눈물진다.
내 놀던 부용당아 너 부디 잘 있거라
광한루 오작교를 어느 날에 다시 보랴
춘초는 연연녹하되 왕손은 귀불귀*라
* 王維의 山中送別詩에 “산중에 이별하고 해가 저무니 임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해마다 봄에는 풀이 솟아 푸르건만 떠나간 임은 다시 오지 못하더라.”「山中相送罷 日暮掩紫扉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제각기 이별하니 만세무량 하시라며
다시 보기 망연茫然이라 날로 두고 이름이니
남원골 백성들 중에 뉘라 아니 칭송하랴
이후로 어사또는 전라도를 순읍하여
민정을 살핀 후에 한양 땅에 올라가서
어전에 숙배 하려니 삼당상이 입시한다.
문부를 사정한 후 상께서 대찬大讚하니
그 즉시 이조 참의 대사성을 봉하시고
춘향을 정열부인에 높이 올려 주시었네.
성은에 감읍하여 사은숙배 하직하고
가친을 뵈었더니 성총聖寵을 축수하며
혼례를 올려주시니 정실로 맞음이라
식솔을 거느리고 시댁에 들었으나
반듯한 언행에다 지극한 효성으로
집안에 넘치는 화기 만사형통 하였느니
향단일 피붙이로 거둬들인 정열부인
남 서방을 가르치어 글자 속을 열어 주고
가사를 맡겨 주시니 빈틈 없는 남 집사執事라.
이후로 동부승지 호조판서 지내시고
늙어서 은퇴한 후 정열부인 함께 하니
백수白鬚를 날리시면서 함께 백수白壽 하시었고
슬하에 삼남 사녀 하나같이 총명하야
부친을 압도하고 계계승승繼繼承承 하였으니
자손이 직거일품職居一品에 만세유전 하였더라.
- 끝. -
후기
시조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 시로서, 우리들이 아끼고 가꾸어 보전하고 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기에, 시조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크나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시조를 사랑하고 같이 읽어 주는 독자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니, 보람도 자부심도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독자와 같이 숨 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조,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시조, 그런 시조를 쓸 수는 없을까? 하며 고심하다가 문득 춘향전을 시조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춘향전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소망을 한데 엮은 소설이고 가극으로서 우리들의 민족정서가 녹아 흐르는 소중한 문학작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두루 읽혀 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사랑을 받아 왔으며,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우리 모두의 꿈이고 바람이었으니 말이다. 춘향과 이 도령의 아름다운 사랑에 함께 울었고, 퇴락하는 천기의 딸에서 일약 정경부인의 반열에 오르는 한국판 신데렐라를 그리며 삶의 질곡을 헤어나려 했으리라.
그러나 춘향전이 서민들의 가슴속에 희망을 심어 가면서 읽혀오는 기나긴 세월과 함께 세상도 인심도 많이 변했으니, 이제는 형식이나 내용이 모두 새로운 모습의 춘향전이 나옴직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도령님과 춘향이 아닌 몽룡과 춘향으로,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인 춘향과 이도령의 뒷전에서, 주종의 사슬에 얽혀 항상 뒷바라지만 하던 방자와 향단에게도 한번쯤 제 몫을 챙겨 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습의 춘향전이 선을 보여 왔으니 소설이나 창극, 영화, 연극 등은 물론, 만화나 개그의 소재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조로 춘향전을 써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시조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언뜻 생경한 감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소재가 아닌 춘향전을 주제로 엮어 나가는 것이 흠이 될 듯도 싶지만, 「열녀춘향수절가」의 시적인 구성에 매료되어 춘향전을 시조로 써보기로 했다면, 그리 엉뚱한 생각을 한 것만은 아닐 듯도 싶다.
이제 새롭게 시도하는 「춘화가향 사랑가」 소설을 시조로 쓴다는 것이 생소한 만큼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시조 형식을 빌려 시조가 아닌 소설을 씀으로서, “서정시조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뜻이 있다고 보아 감히 붓을 들게 되었다.
춘향전을 시조로 쓰려고 하나 원전을 시조형식으로 엮어만 놓을 수는 없고, 시조의 특성을 살려 새롭게 틀을 짜려고 하니, 춘향전의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춘향전 본래의 구성을 크게 손상하지 않고, 열녀춘향수절가를 중심으로 남도 판소리의 여러 사설을 상고하면서 춘향전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보려 하였고, 방자가 이도령을 유혹하면서 향단이와 사랑을 일궈나가는 재미를 가미해 보았다. 또 원전인 열녀춘향수절가가 중국의 고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어 그 내용과 용어가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이 많을 것 같아서, 조윤제 편 「교주 춘향전」(을유문화사)과 이가원 주 「춘향전」(태학사)을 참고로 나름대로 각주를 달아보았다.
끝으로 지난 2004년 4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장장 28개월에 걸쳐, 이 춘화가향 사랑가를 연재해 주신 월간 문학공간사의 최광호 주간님 이하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치정으로 눈먼 신관의 잔혹한 형벌을 오직 두터운 사랑의 힘으로 감내하는, 춘향의 아름다운 절개와 사랑의 향기가 온 누리에 넘쳐나기를 바라면서, 대단원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조 한 수를 적어 본다.
천기의 소생이나 출중한 덕색으로
신관사또 곤장 치며 수청 들라 악행해도 강철같이 굳힌 정절 목을 늘여 지키면서 사랑 심어 거둔 열매 꽃이 되어 피어나니
만세에 길이 빛나리라 춘화가향 사랑가.
정해년 원단 一石 박 근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