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전문설명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현존하는 유일한 판각(板刻) 원본이다.
내용은 총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을 4장 7면에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26장 51면 3행에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을 3장 6면에 1자 내려 싣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을 명시하고 있다. 그 해가 바로 세종(世宗) 28년(1446)에 해당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에 친제(親製)하여 동 28년 9월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本書)에서 서문과 함께 역시 정인지(鄭麟趾)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解例)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것에 의하여 한글 제작의 원리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의 자양(字樣)에 있어서도 제정 당초의 모습을 본서(本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합자해
용자례
종성해
비단과종이에싸여있는훈민정음
* 訓民正音 諺解本 -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御旨와 音價 및 運用法인 例義를 번역해
단행본으로 발행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총 15장 30쪽의 "훈민정음 언해본"은
세종 승하후 간행된 月印釋譜(세조5년:1459년) 권두에는 "세종어제훈민정음"의 제목으로 실려 있고
제1장 1행에서 4행의 글짜가 그 아래의 것과 상이한 것은 세종의 廟號를 넣기위해 變改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을 얼마전 문화재청과 경상대 연구팀의 공조로 아래와 같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 하였다 한다.
언해본 5쪽에는 아래의 국보 제70호의 "便於日用矣"와는 다르게 "便於日用耳"로 표기되어 있어
국보 제70호를 발굴할 당시 낙장을 기워넣는 과정에서 "耳"를 "矣"로 오서한 것임을 추정 할 수 있다.
또한, 위의 한문본 어지는 54자로, 이 한문본 어지를 직역한 아래의 언해본 어지 108자의 절반 이다.
108 이라는 수는 불교의 신성수로 당시 세종임금이 불심을 표현한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며,
소피아는 허전합니다.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공산주의 시대 때 지어진 건물은 담백하기 그지 없습니다. 서유럽에서 느껴지는 소박하고도 자유로운, 화려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죠. 그래서 관광지로는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둘러본 유럽 여러 국가 중, 가장 사람 냄새가 펄펄 풍기는 곳입니다. 소피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착하고 순박했습니다.
지하 교회입니다.
몰래 미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모스크 양식이 섞인 교회도 볼 수 있습니다
소피아의 상징, 알렉산더 네브스키교회
인상 좋은 복덕방 할아버지 같은 소피아 대학교 알렉산더 페도토프 부총장
소피아 대학의 내부
한국학과 건물
최근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기증된 한국 관련 서적들
동유럽에서 만난 훈민정음
소피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들
소피아 대학에서 만난 한국학과 학생들. 저학년과는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눠야 했지만, 고학년과는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특히 한자도 잘 알고 있는 학생을 만났을 땐,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소피아의 벼룩시장
선물가게 내부
소피의 교통수단, 트램
소피의 교통수단, 트램
소피아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 트램도 사라지겠죠. 낡은 건물이 무너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박한 마음만은 남겨두었으면 합니다. 소피아 대학에서 만난 한국학과 학생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때 만났던 저학년 학생들, 이젠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해졌겠죠?
다음은 훈민정음에 얽힌 일화에 대한 글들입니다. 역시 원문 그대로 발췌합니다.
"훈민정음에 얽힌 일화"/신부용((주)교통환경연구원 원장, 工博)
한글이 세계 제일의 소리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O X 문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주관식 문제로 내도 우리국민의 99% 는 맞출 것이다. 그러나 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학계에서 조차 의견이 분분할 정도라 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조선조 내내 매일 왕조실록을 작성했으므로 이를 잘 읽어보면 해답이 나온다고 한다. 박문기 선생의 ‘대동이’ 5권에는 세종실록 중 훈민정음에 관한 대목을 자세하게 소개해 놓았다. 또한 박영규선생의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이찬우선생의 소설 훈민정음, 박양춘 선생의 ‘한글을 세계문자로 만들자’ 도 세종실록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한문실력이 없어 내 스스로 직접 세종실록을 읽지 못해 답답하지만 이들 저서를 참고로 하여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정리해 본다.
(여담으로 혹 학문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공계라면 수학을, 인문계라면 한문을 먼저 공부하라고. 나는 한글 전용을 지지하는 한글 애호가이지만 공부를 하려는 학자들은 한문을 필수적으로 마스터해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작품이었는지 아니면 세종의 개인 작품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 답은 명확히 세종대왕 개인 작품이며 신하들에게는 오히려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연구 총괄, 뒤에 문종이 된 동궁 (학자들이 동궁에게 쓸데없는 일(언문작업)을 많이 시킨다고 불평할 정도였음)이 연구 책임자, 그리고 다른 왕자들과 공주들이 연구 보조 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개인적으로 관련 연구과제를 맡은 것 같다.
세종은 1418년 2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으나 좌절한다. 1436년 세종 18년 40세가 된 세종은 병(조갈증 지금의 당뇨)을 핑계대고 정부구조를 육조직계(육조 업무를 직접 결재)에서 정승들이 협의하여 보고하는 의정부사서제로 바꿔 업무를 대폭 줄이고 시간을 번다.
그 이듬해인 1937년 41세 때는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까지 넘겼다. 세무 결재권을 넘길때는 ‘늙어서’ 라는 핑계를 댔다 한다. 그러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밤잠을 안자고 연구를 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440년 44세 때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운학서적을 수집하여 왕실 보유 운학서적의 잘못 된 곳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은 그 간 이미 운학의 대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소를 올린 정창손에게 ‘네가 운학을 아느냐?, 4성 7음에 자모가 몇 개인지 말해 보라. 내가 운학을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하고 다그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신숙주에 음운학을 연구시키기 위해 13번 요동을 방문토록 했다고 하며 정인지도 8번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사서에는 그 직접적인 이유를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이 요동에 귀양을 살고 있어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하나 이 또한 신하들에게 댄 핑계인 것 같고 요동 지역 아니 그 밖 민족들의 언어, 특히 고조선 시대에 쓰던 가림토 문자를 연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글학계에서는 가림토문자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일축하지만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한 가지만 든다면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서,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 여덟글자를 처음으로 지으시어 대략 예(例)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형상을 본 떴으나 모양은 옛 전문과 비슷하고 소리를 따랐으나 음운은 일곱 가락에 들어 맞는다.”라고 한 대목이다.
이는 글자를 만들 때 ‘소리 날 때의 입술, 혀, 이 등의 형상을 본 떴지만’ 결국 옛 전문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범위한 연구 범위를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이리 저리 다 들어맞는 결과를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박문기 선생의 대동이 5권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1443년 12월 세종 25년 “임금이 친히 28글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36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면 7년 걸린 셈이다. 훈민정음 창제 두달 후인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상소를 냈고 이들은 형벌을 받았다. 그 후 1445년 용비어천가를, 46년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석가 일대기)을 번역토록 하는 등 3년간의 시험 적용을 거쳐 46년 정음청을 만들고 9월 훈민정음 해례를 간행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그 후로도 왕권을 적극 활용하여 훈민정음을 온 나라가 사용토록 하였다. 위의 사실을 보면 세종대왕이 그 많은 업적으로 바쁜 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에 큰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반대하는 신하들에 형벌을 가할 정도로 완강함이라든지 후에 문종과 세조가 될 왕자들에게 중요한 과업을 주어 훈민정음이 후대까지 지속되도록 배려한 면밀함을 보면 대왕이 훈민정음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왜 그렇게 훈민정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이 또한 너무나 명백하다.
먼저 훈민정음 해례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창제이유는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자가 많은’ 것이 안타까워서 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법을 몰라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는 억울한 일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해 세종 14년 1932년 (36세)때 백성들에게 ‘율문(律文)을 다 가르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이두로 번역하여 줌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이 스스로 범죄를 피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조판서 허저가 면전에서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면 법을 농간하여 쟁송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윗사람을 능멸하는 무리가 생길 것‘ 이라 반대하였다.
이에 세종은 허조를 무섭게 쏘아보며 “그렇다면 백성들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해 놓고 범법하기를 기다려 벌주게 되면 법이 한낮 술책밖에 더 되겠는가? 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은 성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 뒤에도 세종은 백성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려고 경서에 이두 번역문을 표기하는 방안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 역시 실효성이 없다는 학자들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갔다. 세종이 학자의 반대에 밀렸다기 보다는 아마도 이두로 번역해 보았자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안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종이 이두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났을 것이다.
세종은 이두로 뜻을 이룰 수 없음에서인지 삼강행실도를 그려 백성들이 널리 보고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은 상소문에서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후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됨을 볼 수 없지 않았느냐고’ 결국 훈민정음도 마찬가치 효과를 낼 것이라고 세종을 반박했다.
세종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상소문을 받고 훈민정음 반대 논리는 이론으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려는 세종의 뜻을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 몹시 섭섭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상소문 가운데 한두 가지 말을 묻고자 함이었는데 너희들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특히 정창손)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김문) 그 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며 상소를 낸 신하들을 하루 동안 하옥시키고 그 중 정찬손은 파직, 애초에는 훈민정음 창제가 괞찮은 일이라고 해 놓고 상소에 끼어들은 김문은 말을 바꾼 죄를 물어 곤장 100대에 귀양을 보냈다. 곤장은 벌금으로 바꿔 줬다고 한다.
당시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독점하기를 원했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면 콩이야 팥이야 하고 귀찮게 굴 것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한글학자들도 이들을 배운 탓인가? 필자 같은 비 전문인이 한글에 대해 콩이야 팥이야 하는 것을 가당찮게 생각한다. 다음 번 한글 이야기에서는 필자의 쓴 경험담과 함께 필마단기로 이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박기환씨의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의 옹졸한 지식인들은 세종이 견제해 줬는데 현대의 학자들은 견제해 주는 사람마저 없어 그 피해를 측량할 길이 없다)
한글이 세계 제일의 소리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O X 문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주관식 문제로 내도 우리국민의 99% 는 맞출 것이다. 그러나 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학계에서 조차 의견이 분분할 정도라 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조선조 내내 매일 왕조실록을 작성했으므로 이를 잘 읽어보면 해답이 나온다고 한다. 박문기 선생의 ‘대동이’ 5권에는 세종실록 중 훈민정음에 관한 대목을 자세하게 소개해 놓았다. 또한 박영규선생의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이찬우선생의 소설 훈민정음, 박양춘 선생의 ‘한글을 세계문자로 만들자’ 도 세종실록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한문실력이 없어 내 스스로 직접 세종실록을 읽지 못해 답답하지만 이들 저서를 참고로 하여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정리해 본다.
(여담으로 혹 학문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공계라면 수학을, 인문계라면 한문을 먼저 공부하라고. 나는 한글 전용을 지지하는 한글 애호가이지만 공부를 하려는 학자들은 한문을 필수적으로 마스터해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작품이었는지 아니면 세종의 개인 작품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 답은 명확히 세종대왕 개인 작품이며 신하들에게는 오히려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연구 총괄, 뒤에 문종이 된 동궁 (학자들이 동궁에게 쓸데없는 일(언문작업)을 많이 시킨다고 불평할 정도였음)이 연구 책임자, 그리고 다른 왕자들과 공주들이 연구 보조 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개인적으로 관련 연구과제를 맡은 것 같다.
세종은 1418년 2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으나 좌절한다. 1436년 세종 18년 40세가 된 세종은 병(조갈증 지금의 당뇨)을 핑계대고 정부구조를 육조직계(육조 업무를 직접 결재)에서 정승들이 협의하여 보고하는 의정부사서제로 바꿔 업무를 대폭 줄이고 시간을 번다.
그 이듬해인 1937년 41세 때는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까지 넘겼다. 세무 결재권을 넘길때는 ‘늙어서’ 라는 핑계를 댔다 한다. 그러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밤잠을 안자고 연구를 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440년 44세 때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운학서적을 수집하여 왕실 보유 운학서적의 잘못 된 곳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은 그 간 이미 운학의 대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소를 올린 정창손에게 ‘네가 운학을 아느냐?, 4성 7음에 자모가 몇 개인지 말해 보라. 내가 운학을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하고 다그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신숙주에 음운학을 연구시키기 위해 13번 요동을 방문토록 했다고 하며 정인지도 8번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사서에는 그 직접적인 이유를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이 요동에 귀양을 살고 있어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하나 이 또한 신하들에게 댄 핑계인 것 같고 요동 지역 아니 그 밖 민족들의 언어, 특히 고조선 시대에 쓰던 가림토 문자를 연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글학계에서는 가림토문자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일축하지만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한 가지만 든다면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서,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 여덟글자를 처음으로 지으시어 대략 예(例)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형상을 본 떴으나 모양은 옛 전문과 비슷하고 소리를 따랐으나 음운은 일곱 가락에 들어 맞는다.”라고 한 대목이다.
이는 글자를 만들 때 ‘소리 날 때의 입술, 혀, 이 등의 형상을 본 떴지만’ 결국 옛 전문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범위한 연구 범위를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이리 저리 다 들어맞는 결과를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박문기 선생의 대동이 5권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1443년 12월 세종 25년 “임금이 친히 28글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36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면 7년 걸린 셈이다. 훈민정음 창제 두달 후인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이 상소를 냈고 이들은 형벌을 받았다. 그 후 1445년 용비어천가를, 46년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석가 일대기)을 번역토록 하는 등 3년간의 시험 적용을 거쳐 46년 정음청을 만들고 9월 훈민정음 해례를 간행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그 후로도 왕권을 적극 활용하여 훈민정음을 온 나라가 사용토록 하였다. 위의 사실을 보면 세종대왕이 그 많은 업적으로 바쁜 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에 큰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반대하는 신하들에 형벌을 가할 정도로 완강함이라든지 후에 문종과 세조가 될 왕자들에게 중요한 과업을 주어 훈민정음이 후대까지 지속되도록 배려한 면밀함을 보면 대왕이 훈민정음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왜 그렇게 훈민정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이 또한 너무나 명백하다.
먼저 훈민정음 해례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창제이유는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자가 많은’ 것이 안타까워서 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법을 몰라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는 억울한 일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해 세종 14년 1932년 (36세)때 백성들에게 ‘율문(律文)을 다 가르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이두로 번역하여 줌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이 스스로 범죄를 피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조판서 허저가 면전에서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면 법을 농간하여 쟁송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윗사람을 능멸하는 무리가 생길 것‘ 이라 반대하였다.
이에 세종은 허조를 무섭게 쏘아보며 “그렇다면 백성들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해 놓고 범법하기를 기다려 벌주게 되면 법이 한낮 술책밖에 더 되겠는가? 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은 성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 뒤에도 세종은 백성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려고 경서에 이두 번역문을 표기하는 방안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 역시 실효성이 없다는 학자들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갔다. 세종이 학자의 반대에 밀렸다기 보다는 아마도 이두로 번역해 보았자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안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종이 이두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났을 것이다.
세종은 이두로 뜻을 이룰 수 없음에서인지 삼강행실도를 그려 백성들이 널리 보고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은 상소문에서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후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됨을 볼 수 없지 않았느냐고’ 결국 훈민정음도 마찬가치 효과를 낼 것이라고 세종을 반박했다.
세종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상소문을 받고 훈민정음 반대 논리는 이론으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려는 세종의 뜻을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 몹시 섭섭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상소문 가운데 한두 가지 말을 묻고자 함이었는데 너희들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특히 정창손)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김문) 그 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며 상소를 낸 신하들을 하루 동안 하옥시키고 그 중 정찬손은 파직, 애초에는 훈민정음 창제가 괞찮은 일이라고 해 놓고 상소에 끼어들은 김문은 말을 바꾼 죄를 물어 곤장 100대에 귀양을 보냈다. 곤장은 벌금으로 바꿔 줬다고 한다.
당시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독점하기를 원했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면 콩이야 팥이야 하고 귀찮게 굴 것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한글학자들도 이들을 배운 탓인가? 필자 같은 비 전문인이 한글에 대해 콩이야 팥이야 하는 것을 가당찮게 생각한다. 다음 번 한글 이야기에서는 필자의 쓴 경험담과 함께 필마단기로 이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박기환씨의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의 옹졸한 지식인들은 세종이 견제해 줬는데 현대의 학자들은 견제해 주는 사람마저 없어 그 피해를 측량할 길이 없다)
이런 글 하나 하나를 보면서 훈민정음에 대한... 아니 한국인이라는데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지 않나요? ㅎㅎ
비록 제가 한 일은 여러곳을 다니면서 퍼오고 그것을 저에 맞게 편집한것뿐이 없지만.. 이렇게 좋은 문화제를 만나고 그 문화제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 좋은거 같아요 ㅎㅎ.. 다음에는 국보 33호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그럼 다음시간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