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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글방 스크랩 워킹산행 초보산꾼과 함께 걷는 곳 : 부암동 청계동천과 인왕산 그리고 청계천 걷기
도덕산 추천 0 조회 224 15.05.31 20:4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초보산꾼과 함께 걷는 곳 : 부암동 청계동천과 인왕산 그리고 청계천 걷기

 

일시 : 을미년(15년) 늘푸른달 서른날 흙날          

인원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석파정 ~ 부암동 사무소 ~ 청계동천 ~ 기차바위 ~ 인왕산 ~ 수성동 ~ 청계천

 

오랜만에 3450온누리 산우님들과 떠나는 역사여행겸 힐링산행 인왕산

길상사로 가기 위해 부암동의 북악산 백사실계곡을 건너  북악스카이 웨이를 넘었다면

이번에는 부암동의 또 다른 계곡인 인왕산 靑溪洞天을 걷게된다

대원군의 아호인 석파인 석파정을 비공개인 관계로 담넘어로 눈팅만하고 도로를 따르다

부암동 동사무소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하여 "빈처" "운수좋은날"등을 쓴 빙허 현진건 집터도 만나보고

골목에 있는 안평대군의 정자터인 무계武溪정사 터와  50m만 더 오르면 윤치호의 부암정(傅巖亭)도 눈팅만 하고

인왕산의   靑溪洞天을 따라 올라가면 기차바위코스를 지나 인왕산 정상에서 하산 시작 인왕천 약수터로 내려오면

수성계곡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를 답사하고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돌다리인 기린교도 만나본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462에 있습니다

 

 

석파정에서 옥인동(수성동) 수성계곡까지 등로

 

부암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인왕산 사이에 가늘게 형성된 분지에 위치하여 계곡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부락이 대표적이다

세검정(洗劍亭)쪽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를 넓힐 ? 사라지고 이정석만 남아 있다

서울 복판에 청정히 수풀이 어우러지고 새들의 합창소리가 들릴 듯한 자하문(紫霞門) 밖에 있는 부암동

자하문(창의문)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초고층 빌딩숲을 이루는 서울복판과 달리 천혜의 자연 경관이 펼쳐지는 부암동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조선 시대부터 도성 밖 경승지로 왕족과 부유층의 사랑을 받아 온 곳이다

백사실계곡을 걸으면서 보았던 백석동천과  그리고 오늘은 청계동천에 있는 석파정과 무계정사터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 본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7018, 7016, 1711번 버스를 이용 자하문터널 입구에서 하차

 

석파정에 들르기 위해 자하문터널 입구 도착

 

횡단보도를 건너 서울미술관 건물앞에서 미리 도착한 초향님과 조우하고

 

미술관을 끼고 옆으로 돌아가면 보이는 삼계동 출입문

 

석파정                  더 많은 자료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447에 있습니다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는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중신(重臣)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영해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김흥근이 언제 이곳(당시 삼계동정사로 통칭)을 조영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58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후일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대원군이 이를 인수, 별서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 후기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서의 매매를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자 계략을 세워 아들 고종을 이곳에 행차해 묵게 하였고,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이곳을 포기하자 이에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별서 인수 후 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을 했던 장소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즉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 :  자료 : http://www.seoulmuseum.org/ 서울미술관(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관리하는 관계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넘어로 별서를 담아 본다


계속 큰길을 따르다 보면 부암동 주민센터가 보인다

 

동사무소 직전 골목으로 들어가면 삼거리에서 좌측 자하미술관 이정표 방향으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부암동 골목길이 시작된다

 

골목길로 조금 들어오면 우측으로 무계원이 보인다

 

 

무계원 정문 앞에서 늦게나마 함께 해 주신 설유화운영자님 - 함께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가 안채, 좌측이 행랑채, 우측이 사랑채이다

 

오진암과 무계원武溪園      더많은 자료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451에 있습니다

 

시장논리에 따라 2010년 이곳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려고 하자 부암동 주민과 문화계 인사들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때마침 종로구 익선동의 서울시등록 제1호 음식점인 오진암이 강원도로 팔려가고 그 부지에 관광호텔 신축으로 헐리게 되자

종로구에서 이곳으로 이축하자는 당시 구청장의 이색적인 제안으로 다시 살아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상업용 도시한옥 건축이면서도 건축미가 뛰어났던 오진암의 대문과 지붕 기와등 건축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주차장이 들어서 황량할 뻔 했던 이곳이 이렇게 멋진 한옥건물로 바뀐 눈물어린 과정을 밟은 한옥인 것이다

 

뒤뜰로 가면 장독대도 보이고 담장에 쓰인 돌의 내력을 김창배님으로 부터 들을 수 있다 - 이번에 갯바위로 산악회에 가입하시기로 약조

 

'무계정사'터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장소라고 한다.

안평대군은 이를 화가인 안견에게 이야기를 했고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렸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이곳에 무계정사를 세워 글을 읽고 활쏘기를 했다고 한다

무계정사터는 안평대군 이용집터에서 자세히 만납니다

 

뒷마당으로 나가보면 북악산이 보인다

 

다시 뒷마당에서 앞마당으로 나와 문을 나선다

 

무계원 앞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이정표를 따른다

 

바로 현진건 집터가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현진건 집터          더 많은 자료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449 에 있습니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 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무영탑> 등을 집필하고 백조 창간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사실주의 단편소설의 확립자라고 불리는 소설가이며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맡았던 언론인이기도 했던  빙허 현진건(1900~1943)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함께 할때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당시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치른 뒤 1937년 이곳에 들어왔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결핵마저 악화되자 43년엔 이 집을 팔고 동대문구 제기동 조그만 초가로 이사간 뒤 그해 바로 죽음을 맞는다.

 

집터 안으로 들어가면 뒷뜰로 추정되는 곳에 우물이 관리가 안되고 있는 약수터처럼 생긴 우물이 있다

 

술을 좋아했던 현진건이 아마 아침마다 속풀이겸 해서 한바가지 떠서 시원하게 마셨을 것 같은데... 주인은 어델가고 이렇게 황량한 집터만..

 

현진건 집터를 가로질러 가면 고목나무 한그루가 모진 세월의 풍파를 얘기 해 주고 있다 - 티티님 언제나 역사여행길 함께여서 감사합니다

 

고목나무 앞에 문이 잠겨있는 틈사이로 무계정사터를 담아 본다 - 무계동 (武溪洞)각자만이 흔적을 얘끼 할 뿐...

 

무계정사       더 많은 자료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450  에 있습니다

 

부암동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청계동천靑溪洞天이라 불릴만큼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1447년 안평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의 탄생 무대인 곳이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바위에 새긴 글씨 ‘무계동(武溪洞)’이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현진건 집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오면 좌측으로 무계정사터가 보인다 - 오늘제일 열심히 공부하신 돌쇠님 고맙습니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봤다던 도원을 꿈꾸며 이 곳에 자리를 잡은 후 500여년이 지나고

뭉유도원은 커녕 살기 파팠했던 지독히도 비극적인 현실을 작품으로 남긴 현진건이 또 이곳에 들어서고...

몽유도원을 꿈꾸기 바쁘게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운수좋은날을 꿈꾸었지만 말년에 빈처처럼 병마와 싸우며 가난하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우리 문학사에 길이남을 작품을 남기시고도 이렇게 그의 호처럼 '빙허憑虛'로 남았으니

이런경우를 우린 인생무상이라 할만 하지 않을까

무릉도원을 대신해서 이젠 희뿌연 정체모를 스모그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암벽에 쓰여저 있는 글씨만이 유일하게 이 곳이 무릉도원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부암동 사무소에서 올라오는 길 - 아마 현진건도 술취한 걸음으로 멀리 기차바위를 보면서 올라 왔을 것인데...

 

지금은 카페를 비롯한 군데군데 현대식 별장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길

37년부터 43년까지 현진건이라는 작가가 수많은 사실주의적 단편소설을 쏟아냈던 이 길

드럽게 운수 없는 날이 없기를 바라면서 거나하게 취한 걸음으로 세상사와 함꼐 고민했던 이 길

이제 주인은 간데 없고 휑한 마당엔 여름이 다가 오는데도 찬바람만 득실거린다

 

현진건 집터 우측으로 보이는 무계정사터와 고목나무

 

주인의 체취라도 느껴보고 싶지만 헐러버린 기와집이 그래서 더욱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마당에 있는 잡초야 무슨 죄가 있으리요 저 고목나무만은 그 역사를 알고 있을 터이지만

무심한 나무는 오래 살았어도 말이 없으니

그래서 옛말 하나 틀림없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산다고...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느니...

 

쇠창살에 갇혀 있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

 

한발짝만 더 걸어가면 또 폐허속에 명필이 하나 숨어 있으니 그게 바로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되는 무계정사터이다

쉰도 못넘기는 삶을 살려고 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죽이면서 올랐던 수양대군의 권세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역사의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이지만 아등바등 살아봤자 생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래서 운수좋은 날 들어온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왔지만 먹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던 '빈처'까지

우리가 길상사를 걸으면서 배웠던 것 중의 하나, 놓는 다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것을 움켜쥐고 살기에 미래를 위하고 내일을 위한 저축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기에

놓아야 하는 오늘은 언제고 뒷전으로 밀리고 .. 그렇게 우린 또 하루를 살아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키는 사람 없는 초소가 나오면 우측으로 반계 윤웅열 별장 대문이 보인다

 

반계 윤웅렬 별장 대문

 

반계(?溪) 윤웅렬(尹雄烈) 별장      더 많은 자료는 초보산꾼 여행기 http://blog.daum.net/kmhcshh/2452 에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法部大臣)과 군부대신(軍部大臣)을 지낸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 1840년~1911년)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猩紅熱, scarlet fever)을 피해 지내기 위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
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1865~1945)의 아버지이며 도성 밖의 인왕산 북쪽 으로 창의문 밖 경승지 계곡에 별장을 지었는바,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건축양식이 이 주택에 적용된 사례의 집이며 윤웅렬 대감은 우리나라 제2대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이신 윤영렬씨의 형님 이시다.

 

 

조금 더 올라 이번에는 동제당을 보기 위해 윤웅렬 별장을 끼고서 범혜사 방향으로 좌틀한다

 

첫번? 삼거리를 지나고 두번째 삼거리에서 우틀

 

범해사 절 직전 동제단과 제실인 듯 건물하나

 

 

범혜사  동제당(洞祭堂)    창의문로5가길 23-16 (부암동) 종로구 부암동 353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제를  17세기 경부터 매년 음력 8월 초하루에 마을 윗사람 중에서 추천된 제주가

세검정 일대의 주민과 함께 제사를 모셔왔다고 한다 

동제당은山神信仰  아래가 산제단(山祭壇) 윗부분이 천제단

 

다시 삼거리로 원위치 기차바위를 바라보면서 진행

 

아뿔사 청계동천 을 지나치고 말았다 - 자료 : 초보산꾼

 

靑溪洞天(부암동)     문화재 지정 각자 :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79193

 

창의문 안팎에는 백운동천(白雲洞川 자하문터널 위), 청계동천(靑溪洞天),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계곡)이 각자되어 있는데

'동천(洞天)'은 높은 산으로 그윽하고 운치어린 계곡을 말하며 '산천으로 둘러싸여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뜻을 가진 도교 용어이기도 하다

산천경관이 뛰어나 선경 仙景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산은 물을 떠나서는 존재가치를 찾지 못하는 이치에 따라 인간은 산을 즐기는 속에서도 물속에서 지혜를 배울려는

지덕을 갖추기 위한 이상향을 찾아 이렇게 계곡에 있는 바위에 각자를 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고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山川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생활의 터를 신중하게 골라

이 청계동천 아래에 몽유도원을 꿈 꾸며터를 잡았지만 안평대군의 꿈과 반대로

조선 건국이래 최대의 피바람의 역사를 피해 갈 수 없었으니...

이 청계동천은 지금도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백련봉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청계동천 대나무 숲길도 지나고

 

식음불가 약수터를 지나 상명대 갈림 삼거리에서 간식

 

배가 부를 만큼 간식으로 막걸리 한잔 하고 소나무 숲길을 이어간다

 

백련산을 배경으로 전망대에서 초향님 - ㅡ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홍제동 갈림길을 지나 인왕산 정상을 배경으로 까치 대장님 - 항상 감솨

 

수락산의 기차바위에는 못미치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더하는 인왕산의 기차바위를 올라오고 있다

 

아직도 자하문을 좌우로 현재와 과거가 혼재 된듯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성

 

기차바위 코스와 만나는 성곽길을 따라 올라오면 정상 - 주유천하님 감솨

 

범바위 직전 초소가 나오면 인왕천 방향으로 좌틀

 

인왕천 약수터 내림길

 

인왕천을 지나고

 

석굴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측길을 버리고 좌측 군부대 철조망을 따른다

 

석굴암의 미륵불을 만나게 되는데 서울 시내를 그윽히 바라보고 계신다

 

저번에 왔을 ?는 개방이 완됐는데 오늘은 개방되어  있고 보살님의 친절한 안내까지

 

자연 암반 속에 대웅전을 꾸민 그야말로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 같은 석굴암인데.....

1.21사태 이후 인왕산의 모든 길이 막히고 절과 암자는 대부분 폐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석굴암은 폐사를 면했다고 한다

 

석굴암 - 암벽에 인왕산 산신도를 그린 산신각이 윗부분에 있다

 

인왕산 산신과 호랑이 : 인왕산에 호랑이 살았다는 얘기 들어 봤죠? 인왕산 호랑이 몹시 무서운 대상을 이르는 어휘이다

 

산신각에서 본 석굴암 앞마당  - 호랑이도 물을 먹어야 살지. 그래서 연못? 

 

수성동계곡을 내려요는데 동해바다님의 방가운 목소리 - 석굴암으로 마중나오신단다 - 도로 직전 만남은 이루어지고

 

길을 건너 바로 계곡으로

 

언젠간 한번 걸어야 하는 청운길과  사직길 - 종묘사직 많이 들어본 말인데? 종묘는 많이 들어 봤고 사직? 한번 시간내서 걸어 봅시다

 

청계천 발원지 안내판이 있는 계곡에서 살아 있는 체험을 위해 물고기 삼매경에 빠지신 동해바다님 - 혹시 1급수 도룡룡 발견했나요?

 

아래까지 내려오면 기린교가 보이는 수성동 계곡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선이 그린 수성계곡 그림을 참조하여 공원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수성동(水聲洞)   수성동계곡과 기린교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455 참조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될 만큼 옛부터 사랑받던 계곡

자하문터널위에 각자되어 있는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川)에서 흘러 내려와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수성동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 이라 하여 물소리가 크고 맑아 동네 이름이 조선시대에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다.

수성동의 '동(洞)'은 '골짜기 또는 계곡' 이라는 의미이다.

 

동해바다님까지 함께하니 인왕산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 마지막으로 단체사진

 

마을 버스를 타고 청계천으로 떠납니다

 

펄석담을 시작으로 청계천 걷기에 들어간다  : 청계천은 http://blog.daum.net/kmhcshh/790 를 참조하세요

 

가장 원모습과 가깝게 복원 됐다는 관통교에서 동해바다님 - 한번의 인연을 이렇게 계속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계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웁니다

 

동대문까지 가지 말고 뒤풀이 하기로 결정하고 수표교에서 탈출하여

 

다리 위로 올라오면 앞쪽으로 오늘의 뒤풀이 장소인  민어 전문점이 보인다

 

태마를 겸한 인왕산 힐링 산행이 이렇게 끝을 알린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던 완산대장님과 우달대장님까지 함께 해 주시고...

 

이렇게 하루를 정리 합니다. 감사했습니다

 

 

도성밖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덜 파괴된 모습으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부암동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지만 아직도 뭔가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걸었던 청계동천길

조선조의 역사의 한복판에서 한페이지를 남기신 안평대군과 흥선대원군이 남기신 흔적

무릉도원의 꿈은 사라지고 집터의 흔적까지 사라지고 있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와는 달리

난세 속에 뛰어난 정략가로 26대 고종을 왕위에 올려 놓았던 흥선대원군의 석파정과 석파랑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길상사로의 여행에서 초입에 보았던 전통과 청나라의 양식이 혼재된 석파랑은 구경할 수가 있었지만

석파정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석파정을 비롯한 삼계동 암각을 볼 수 없음이 아쉬웠지만

담넘어로 보이는 별서의 모습에서 옛 선조들의 풍류를 약간은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두 번에 걸친 부암동에서의 여행에서 본 북악산과 인왕산

한양도성을 지을때 북악주산론과 인왕주산론이 서로 맞셨지만 결국 역사는 정도전의 승리였고

스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무학대사의 인왕주산론은 새시대와 어울릴 수 없었던

숭유억불정책으로 태어난 조선의 정치적 선택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 남긴 조선역사의 후유증이 인왕산을 걸으면서 무학대사의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역사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현재도 또 다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인왕산에 올라 그토록 무학대사가 얘기하려 했던 풍수는 잘 모르지만

이미 초보산꾼과 함께 걸었던 낙산산성이 왜 지세가 문제가 됐는지 자료로는 남겼지만

직접 인왕산에서 4대문을 둘러 싸꼬 있는 지세중 유난이 존재감이 없는 낙산을 보고 있노라니

북악산의 옆구리는 허전한데 인왕산은 옆에서 북악산과 남산이 튼튼이 받쳐주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나도 그 정도는 보이던데... 아쉽다

중간중간 산우님들과 이런 대화를 했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요

 

걱정했던 비가 내리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오히려 진행에 더위를 느끼지 못하게 도움을 주고

똑 같은 길을 걸어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모습도 다르고

어디로 발길을 ?기느냐 따라 소중한 우리의 문화를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

작게만 보이는 인왕산의 뒷뜰을 걸었을 뿐인데 너무도 많은 역사적 향기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향기가 더욱 짙게 풍기도록 함꼐 해 주신 산우님들 덕분에 더욱 행복했던 힐링길

일본에 가 있던 몽유도원도를 잠시 전시하는 동안에 그림을 보기 위해  6시간 이상을 기다렸다고 한다

도대체 말로만 듣던 그 몽유도원도이기에 얼마나 기다림의 갈증이었겠는가?

그 배경지를 오르면서 이미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었지만

산을 즐기면서도 물에서 지혜를 배우려 했던 옛사람들의 洞天은 맘에 세길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생각에 따라서는 하나도 재미없는 역사탐방길에

짜증내지 않고 끝까지 함꼐 해 주신 산우니믈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생각지도 않았던 동해바다님의 합산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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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6.01 00:28

    첫댓글 함께한 짧은 시간의 즐거움이 많이 생각나네요.
    모두 만나뵈서 반가웠습니다.

  • 작성자 15.06.01 11:40

    동해바다님 어떻게 일요일 서울여행은 잘하고 올라 가셨는지요. 몽유도원도 산행지에 어울리는 만남이 지금도 몽유도원도에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시내를 걸어오셨다는 말을 듣고 역시 남다른데가 있는 동해바다님이구나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구요.
    갑장님 만나서 반가웠고 잊지 않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즐거운 추억으로...

  • 15.06.01 12:58

    잼있는 역사 이야기와 함께
    즐거운 하루 였습니다
    설명과 사진 봉사까지
    수고 하셨습니다

  • 작성자 15.06.01 15:12

    설유화님 일일총무에 뒤풀이 끝까지 책임지시고...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였다니 다행입니다
    사진은 저녘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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