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명월관 광화문 비각 앞에 있던 회색빛 2층 양옥, 원조 명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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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13. 17:37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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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명월관
광화문 비각 앞에 있던 회색빛 2층 양옥, 원조 명월관
요약 1906년 7월 14일자 <만세지>에 개업 직후의 명월관 광고가 실림, 위치는 황토현 기념비 앞.
광고로 미루어볼 때 주인은 김인식, 개업 당시에는 기생이 없었음.
몇 년 뒤, 주인이 궁중 연회 담당 관리였던 안순환으로 바뀌었고 기생들이 하나 둘 늘어남.
주로 고객은 왕족, 친일파 정객, 일본인 관리, 갑부들이었고 1918년에 갑자기 불이 나 타버림.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명월관
이 건물이 원인 모를 불로 없어진 후로 '명월관'이라는 상호는 도처에 생겨났다. 독립지사나 문인들, 명기들의 일화로 유명했던 명월관은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 있던 곳이다. 이곳 역시 화재로 없어졌다.
갈비집·대구탕집·해장국집·김밥집 등 음식점에는 우리 집이 최초라고 주장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툼이 심해지면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원조 명월관'을 따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기생과 명창 그리고 문인, 정치인, 독립지사에 얽힌 일화로 끝없이 화제를 뿌렸던 명월관. 그러나 그 명월관이 어디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가 곤란하다. 어떤 곳에는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이 실은 명월관이었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관철도 어딘가에 있었다고 적혀 있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병희가 창간한 일간지인 <만세보> 1906년 7월 14일자를 보면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날짜 신문에 개업 직후의 명월관 광고가 나와 있는데, 여기에 명월관 위치가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각종 음식과 술, 담배를 준비해놓고 염가로 배달까지 해주겠다는 것인데, 그 위치가 황토현 기념비 앞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최초 명월관이 세종로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광고로 미루어볼 때 명월관이 개업할 당시에는 기생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은 김인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명월관은 변화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77년 <중앙일보>에서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이난향은 그녀가 13세 때인 1913년 명월관에 들어갔을 때의 그곳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명월관은 황토마루(황토현),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다. 회색빛 2층 양옥으로 된 명월관은 울타리가 없었고, 대문은 서쪽으로 나있었다. 2층에는 귀한 손님들, 아래층에는 일반 손님을 모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꼭 그와 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실(梅室)이란 이름을 가진 특실의 방이 하나 있어 귀한 손님이나 그윽한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아래층은 온돌이었으나 2층은 마룻바닥에 일부는 양탄자, 일부는 돗짚자리(다다미)를 깔았고, 겨울에는 숯불을 피운 화로가 방 가운데 놓여졌다."
이때는 주인이 안순환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고, 명월관엔 기생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였다.
안순환은 궁중에서 연회를 담당했던 관리였다. 말하자면 그는 요리는 물론이고, 접대에 따른 절차도 고급스러운 면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궁중에서 나온 것은 일본인들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합방 후 간섭이 늘어나자 반평생 몸담아왔던 궁중에서 사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명월관을 인수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명월관의 음식은 당연히 궁중의 그것이었고, 술도 궁중에서 맛보던 것이었다. 궁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순환의 퇴직에 따라 명월관으로 자리를 옮긴 궁중 요리사들이었다. 특히 술은 궁중 나인 출신으로 이름을 분이라고 했던 여인이 빚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요리와 술보다 더 시중의 화제가 된 것은 이곳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른바 기생들이었다. 이들 역시 궁중에서 연회를 위해 일하던 여인들이었다.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갈 곳 없는 그들이 몸담기에 명월관은 적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순환이 인수하면서부터 명월관의 주고객은 왕족을 비롯해서 친일파 정객, 일본인 관리, 그리고 장안의 갑부들이었으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1918년 갑자기 불이 나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후 안순환은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서 요정을 하던 친구에게 명월관을 넘겨주고 자기는 태화관 자리에다 분점을 차려 운영했다. 원조 명월관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문화사의 한 단면을 장식하고 있는 명월관은 대개가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 있을 때를 말한다. 이때 시중에는 땅을 팔아서라도 명월관 기생 노래를 들으며 취해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농담이 떠돌기도 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명월관 - 광화문 비각 앞에 있던 회색빛 2층 양옥, 원조 명월관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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