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노래 이야기(비오는 날에 들어볼 만한 노래들)

[그런사람]

비와 노래 이야기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가끔씩 가보는 ‘7080노래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에 들렀더니 ‘삼각지’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이 배호의 <비내리는 명동거리>를 관악산에서 부르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이 카페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관악산에서 주로 7080노래를 직접 공연하는데 그 장면을 찍은 것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이 분은 평소 배호 노래를 아주 잘 불러 ‘관악산의 배호’로 불린다고 한다. 아마 ‘삼각지’라는 닉네임도 배호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따온 모양이다. 동영상을 보니 과연 ‘관악산의 배호’가 부르는 <비내리는 명동거리>는 굵직한 저음과 낮게 깔리는 바이브레이션이 듣기에 아주 좋았다. 마침 그때 비가 내려서 그런지 이 노래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노래를 듣고 나서 더듬어 생각해 보니 우리 가요 속에는 옛날부터 비가 내리는 장소나 지명이 참 많이 나온다. 아쉬운 추억이나 애틋한 사연이 진하게 서려 있는 장소에 쓸쓸한 비가 내리면서 자아내는 아련한 향수(鄕愁)는 대중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가요가 담기에 아주 적절한 주제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서울 유흥문화의 중심지였던 명동은 이런 이유로 가요 속에서 비가 오는 지명으로 많이 등장하였다. 예의 <비내리는 명동거리> 외에도 <명동부르스>에서는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명동에 궂은비가 내렸고, <명동나그네>에서는 낯선 명동거리에 밤은 깊어가고 나그네 가는 길에 빗방울만 뚜둑둑 떨어졌다.

명동 바로 옆 동네 충무로의 쇼윈도 그라스에는 봄비가 눈물로 흘러내리기도 했고(<서울야곡>),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으로부터 너 미쳤니 하는 소리를 듣던 종로거리에도 비가 내렸다(<그건너>). 하지만 광화문 네거리는 언덕 밑 정동길에 남아있는 눈 덮인 교회당의 모습이 제일 먼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걸 보니 이문세 때문인지 비보다는 눈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광화문연가>).

종로와 명동에 비가 내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문득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김동리 선생의 <비 내리는 저녁때>라는 시가 생각난다. ‘비 내리는 저녁때는 어디 있으나 타관’이라는 구절에서는 비오는 날 저녁에 느끼는 시인의 아득함과 절망감이 가슴을 친다. 비오는 날엔 ‘종로 네거리나 명동 한복판 같은 데서 술을 마시고 있어도 가슴 속엔 쉴 새 없이 떠나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서 ‘날아가 앉을 어느 나뭇가지 하나도 없는 한 마리 외로운 새’가 되는 그 심정을 아는 사람은 잘 안다.

강북에서는 그 외에도 밤 깊은 <마포종점>이나 <영등포의 밤>에도 비가 내렸고, 삼각지 로타리에도(<돌아가는 삼각지>), 밤 깊은 덕수궁 돌담장길(<덕수궁 돌담길>)에서도 당연한 것처럼 궂은비가 내렸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카페와 나이트, 카바레, 룸살롱 등 유흥문화의 중심축이 점점 강남으로 옮겨지면서 주현미가 <신사동 그사람>에게 마음을 설레며 홀로 걷는 영동교에 밤비가 내렸고(<비내리는 영동교>), 터벅터벅 걸어가는 <추억의테헤란로>와 <영동부르스> 등에도 밤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는,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비내리는 고모령>)에도 비는 왔고, 원한서린 휴전선의 가로막힌 철조망이 비를 맞기도 한다(<비내리는 판문점>). 그 외에도 노래 속에서 비가 오는 곳은 ‘삼랑진’, ‘남포동’, ‘동성로’, ‘남포항’, ‘삼천포’, ‘광안대교’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정작 노래 속에서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곳은 수많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기찻길이나 역, 정거장 등인 것 같다. 언뜻 생각해도, <비내리는 호남선>, <비내리는 경부선>, <비내리는 서울역>, <비에 젖은 터미널>, <밤의 정거장>,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들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 유명한 <남행열차>도 ‘비내리는 호남선’을 따라 달리는 기차이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는 분위기가 자못 심각한데, 리듬과 멜로디는 오히려 신나고 경쾌해서 묘하게 자극적이다. 그래서 이 노래가 더욱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애환의 장소인 기차역과 정거장 등에서 이별의 배경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정말로 그렇게 애틋하다. 특히나 ‘비오는 밤기차’는 이별의 수단으로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또 너무나도 애잔하다. 이별의 밤기차 노래로는 ‘붙잡아도 뿌리치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목포행 완행열차’(<대전 블루스>)가 가장 유명하다. 여기에도 2절에서 보슬비가 온다.

이별의 밤기차 이야기를 하니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그리스 민중가요가 생각난다. 우리 드라마 <백야>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고, 신경숙의 꽤나 감상적인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모티브가 된 노래이기도 하다.

8시에 출발하는 카타리니행 기차를 타고 떠난 레지스탕스 애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홀로 남은 기차역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그리스 여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해리스 알렉시우, 아그네스 발차 등이 호소력 있는 절절한 목소리로 노래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개인적으로는 해리스 알렉시우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데, 의외로 그리스의 세계적인 메조소프라노인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가 더 좋다는 분들도 꽤 많다. 우리말로 부른 조수미의 노래도 아주 서정적이라 들을 만하다.

비오는 지명과 관련된 요즘 노래로는 ‘브라운아이즈’의 <비오는 압구정>이 있다. 술에 취해 비오는 밤 압구정 골목길에서 좀처럼 오지 않는 연인을 두 시간째 기다리는 쓸쓸한 심정을 보사노바풍으로 노래한 곡인데, ‘그대 목소리를 닮은 서운한 비만 온다’는 마지막 소절이 담백하면서도 인상적이다. 이 노래 주인공은 전화도 하지 못한 걸 보니 그 흔한 휴대폰도 없었나 보다.

비오는 날 전화하는 이야기를 하니 싸이의 <비오니까>가 생각난다. 이 노래 주인공은 비오는 날 그리운 사람이 혹시 나만큼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러 번 망설이다 드디어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가 아주 차가운 반응을 보이자 화들짝 놀라서 이렇게 변명을 한다.

‘비오니까 그러니까 / 그래서 그랬어요 / 이젠 두 번 다시 걸지 않을께요 / 미안해요 / 그대도 나만큼 / 내 전화 기다릴 것만 같아서 / 나 혼자 감정에 복받쳐서’

요즘 젊은이들의 비오는 날 사랑은 역시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하지만 그 변명에는 또한 공감이 간다. 비오는 날은 그리운 사람이 더욱더 그리운 법이니까. 더욱이 오래도록 일방적으로 그리워하기만 한 사랑일수록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감정이 더욱 절실해지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여하튼 비오는 날 고조된 감정 때문에 즉흥적으로 연락했다가 상대편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니 ‘비오니까 그랬는데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마.’ 하고 싹싹하게 돌아서는 요즘 사랑은 확실히 우리와 같은 7080세대의 정서와는 많이 다르다.

말을 아끼고 감정을 꾹꾹 눌러 다스리고 오랫동안의 주저와 망설임 끝에 차마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아 애틋한 마음을 접기로 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리움과 아쉬움만 더해가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는 ‘아님 말고’에 익숙해진 요즘 젊은이들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터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 한 순간 가까웁다 /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 오래도록 그대를 /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기에(이정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러한 어찌 보면 미욱하면서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이제 주변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애절한 이별의 배경으로는 비 이외에 종종 안개가 등장하기도 한다. ‘밤안개’. ‘물안개’. ‘안개비’ 등 안개를 이별의 안타까움과 관련지어 노래한 곡들도 참 많다. 앞길을 잘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자욱하게 낀 안개 역시 속절없이 떠나버린 그 사람의 알듯 모를 듯 답답하기만 하던 그 마음과도 많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예의 배호 노래에도 <안개낀 장충단공원>,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람> 등에서 안개가 나타난다. 하지만 배호 노래에는 안개보다는 비에 대한 노래가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우중의 여인>, <죄 많은 밤비>, <비 내리는 밤길>처럼 제목에서부터 비가 내리는 곡도 있지만, <누가 울어>, <울면서 떠나리>, <사랑할 수 있다면> 등과 같이 대부분의 배호 노래에서는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의 가슴속에 비만 하염없이 내린다. <막차로 떠난 여자>처럼 비와 안개가 같이 나타나는 노래도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일전에 모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배호 노래 중 가사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31곡, 안개가 낀 것은 13곡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이미 몇 곡은 소개하였으니 배호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 시간을 내어 비가 내리는 나머지 배호 노래들을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클라라.]

비오는날은 정말 비에 관한 노래가 많은것 같아여 전 개인적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비오는 날의 수채화" 좋아하지여 글 잘 읽고 가여

[그런사람]

정말 찾아보니 아주 많네요. 한번 본격적으로 다 찾아보시면 어떠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