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79
6월5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기념일/연중 제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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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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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출장으로 새벽에 길을 나서야 해서 이 시간(4일 23:00)까지 올라온 강론글만 정리하여 벌송하오니 해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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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JwAD2jE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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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성경을 배워야 할 지 결정하는 법>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게 될까요?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또 그러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차 물을 끓이면 뛰어나오지 못하고 그냥 익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보면서도 보지 못할까요?
모든 멸망에는 이기적 욕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로마도 지나친 쾌락주의에 빠져 멸망에 이르렀고,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굶은 사람들을 조롱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스승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멸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모세오경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죽은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능력을 나타내는 소개가 될까요? “100억짜리 말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 놀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고 그래서 부활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안 그럴까요? 욕망은 비교할 때 더 커집니다. 인스타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 못 가지고 못 먹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굳이 더 맛있는 것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고 더 잘나가는 셀럽들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로마나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더 극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돈이 부족합니다. 나도 생활 수준이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비경제가 둔화하고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뜨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스승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눈이 머는 이유는 욕망 때문인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욕망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는 이라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성령을 힘입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메주고리예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성모님의 증인 여섯 명이 전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욕망이 완전히 불타버린다는 뜻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는 성모님을 본 분들이 다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모두 결혼하였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는데 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내나 자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십니다. 그러니 욕망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혔다면 그만큼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에 자유로운 예수님과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많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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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십시일반(十匙一飯),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쉬운 일일지라도 함께하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십시일반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본당에 청년 성가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주임 신부님이 오면서 청년들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한주는 성경 공부, 한주는 친교를 하면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성가대가 출범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서 ‘단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마침 본당에서는 한국에 성가책 300권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택배를 부치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처럼 택배비용이 성가책 구매비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10 미사 성가 단장이 한 가지 제안했습니다. 올여름에 성가대원들 중에 한국 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미국 오는 길에 한 박스씩 가져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택배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청년 성가대 단복을 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10박스면 부피도 크고, 무게도 150킬로로 부담되지만, 1박스는 큰 부담 없이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청년 성가대를 아껴주는 어른 성가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멀리 한국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붕을 들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힘껏 펌프를 움직이면 한 바가지의 물로 5천 바가지의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많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십시일반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만나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고, 이웃에게 음식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하니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백지장도 서로 맞드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애벌레는 땅 위를 기어 다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나비는 ㅂ하늘을 ㅉ날아다닙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천사가 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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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8-27: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은 신명 25,5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닌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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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회적 관습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서, 부활 신앙은 죽음 뒤에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남겨진 이들에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영원한 상실은 유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고통이 ‘부활 신앙’ 안에서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돌보셨던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지금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꿉니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간 이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먼저 죽음의 강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과 다시 만나고, 함께 웃으며 함께하였던 오늘을 추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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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1) ‘부활 신앙’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두가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섬기는 이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에게 그런 권능이 없다면, 즉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런 신을 믿고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섬겼던 하느님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도 살아 있으면서 섬기는 하느님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하신 것입니다.>
2)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1코린 15,32) 미래가 없으면 희망도 없고, 누구든지 희망이 없으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생존본능대로만 살게 되거나, 쾌락만 찾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내세도 없고, 하느님의 심판도 없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쓸 이유가 없게 됩니다. 또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도, 선을 지향하면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의 복음도 교리도 신앙도 다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5,12-15)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향해서 “부활이 없는데도 있다고 믿는 바보들이다.”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부활이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바보들입니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는 ‘그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삶’은 ‘현세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들, 욕망들, 갈등들, 다툼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오직 사랑과 평화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있다면, 이쪽 세상에서 이혼하거나 사별한 다음에 재혼하고, 또는 만났다 헤어지고, 그런 일들 때문에 부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황이 많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마르 12,19-23), 부활 후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누구나 다 금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해서, 또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서, 가정이 해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가족의 사랑과 일치가 더 깊어지고 완성될 것입니다.>
4) 루카복음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루카 20,35) 부활을 ‘아무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만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은총을 청하지 않고, 또는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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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부활에 대한 논쟁>
오늘 복음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영생이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 붙잡혔을 때 이 두파의 교리가 대조적인 점을 이용하여 의회에서 연설하여 풀려나온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평신도들이었으나 사두가이파는 귀족이나 부호들 출신이었고 그 대부분은 제사직(사제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되고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지배자들도 나왔습니다.
또 사두가이파는 성문화된 모세 5경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바리사이파가 귀중하게 여기던 구전상의 율법이나 관습, 규정 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두가이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바리사이파 들에게도 질문을 받은 일이 있고 또 사두가이파들에게서도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들은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모세 5경 중에 신명 25, 5-10에 나오는 수혼제도(嫂婚制度)라는 율법을 가지고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신명 25, 5-10을 보면 이 수혼제도에 대해 나옵니다. 즉 여러 형제가 한 집에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형을 위하여 자손을 이어주는 것이 다음 동생의 의무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손이 생기면 본래 남편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가족의 명칭이 유지되고 가족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근거를 둔 이스라엘의 수혼제도를 가지고 부활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하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두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첫째, 부활한 육신은 육체적인 욕망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한 후에는 육체적인 욕망같은 것은 없게 되고 천사와 같은 기쁨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탈출 3, 6을 보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살아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하느님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죽고 또 살아 있지 않다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이 모세 5경에서도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나 그밖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시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해 그 모든 신비가 벗겨진 것입니다.
특히 그분의 부활을 알고 또 믿는 우리로서는 이 질문이 별로 큰 문제는 안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될 때 우리도 예수의 논증과 같이 그 확실한 믿음과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부활시켜 주시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천주님! 우리는 비록 한번 죽게 되더라도 당신의 능력으로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살아 생전에 당신을 믿고 따름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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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정욱 안드레아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진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부유함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마저도 평화와 국가적인 복지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로마의 식민통치에 찬성하고 협조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민족적 주체성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사두가이파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른 성경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모세오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활에 대한 사상을 부정하였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러한 부활에 대한 교리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수혼법에 따라 맏이의 아내였던 형수와 나머지 여섯 동생들이 모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가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인간은 부활 후에 천사들과 같이 되어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시는 하느님, 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두가이파들을 반박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지금 나의 현재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부터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 목적이 현재의 나를 움직여서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가이파들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목적에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현세의 삶일 뿐입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사느냐,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만이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부활이라는 목적을 가진 사람은 현세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목적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현세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가치를 찾고 그분의 뜻을 내 삶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으며”,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되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 비록 고난에 빠지게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것을 희망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바오로 사도의 끈임없이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이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 삶의 자세와 방향이 항상 하느님을 향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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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하느님의 존재방식 : 순수현재>
앞장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주민세(인두세)를 바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다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17절)는 놀랄만한 명답(名答)을 듣고 물러갔다.
오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와서 구약의 수혼법(嫂婚法)을 부활과 관련지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은 구약의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에 근거를 둔 것이긴 하다. 수혼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기 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칠 형제가 모두 맏형의 부인을 두고 자식 없이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너무 과장된 가공(架空)의 질문이라 하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은 사실상 두 가지 측면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 통하던 부활사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된다면 예수까지 난처하게 만들 심상이었다.
우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94번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훨씬 드물게, 모두 14번 등장하는데, 마르코와 루카복음에 각각 1번(마르 12,18; 루카 20,27), 마태오복음에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5번 등장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333년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공한 모든 곳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때까지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크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젤롯당원), 꿈란공동체 등으로 분리된다.
비록 여러 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야훼신앙과 율법준수에 대한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유다인들이다.
헬레니즘 문화와 이교도의 신과 여신의 숭배를 강요하던 희랍의 프톨로메오 왕가와 셀레우쿠스 왕가의 통치는 약탈과 박해로 이어지고, 결국은 유다인들의 무력(武力)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하스모네 가문의 마따니아가 선봉에 선다.
마따니아의 저항운동은 "하시딤"(경건한 자, 율법에 충실한 자들) 무리와 결탁하면서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유다는 마카베오항쟁을 일으켜 셀레우쿠스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해마다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이를 계기로 종교적인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유다의 동생 요나단에 와서 벌어진다. 그와 그 일가는 헬레니즘 세력과 오히려 결탁, 협정 등을 통하여 유다를 통치하는 실세로 둔갑하였고, 다윗 시대 이후로 사독 가문이 맡아왔던 대사제장직을 겸하는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하시딤" 무리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분리된 자",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율법 경건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에세네파" 사람이다.
후자는 속세를 떠나 사해 근처에 모여 꿈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머지는 끝까지 무력으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꾀하려는 열혈당원에 속한다.
결별을 선언한 자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무리들이 바로 하스모네 가문의 후손들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셈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의 대사제장직을 독차지하고 최고의회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자들로서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口傳)된 율법이나 계율, 조상의 전통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오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싹튼 부활사상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사후(死後)의 상벌,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사도 23,8)
원래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날로 많은 추종자를 얻어 가는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의 가공할 질문에 예수께는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먼저 탓하신다. 구약의 수혼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의도를 내포한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육체부활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육신도 함께 부활한다면, 그 육신이 어떤 모양일지는 지금의 육신의 틀을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지하게 더울 때, 시원한 곳을 천국이라는 생각, 무지하게 배고플 때 한 술의 밥이 천국이라는 생각,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유목민들에게는 어렵게 찾아낸 푸른 풀밭이 천국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원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계시말씀(출애 3,6)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 계시가 이미 부활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니 늘 영원하시다. 이를 계시 신학적 언어로 "순수현재"(pura praesentia)라고 한다. 순수현재란 하느님의 존재방식으로 과거와 미래가 없는 늘 순수한 현재(現在)의 상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죽었던, 살았던, 살 것이든, 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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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12,25)
대중음악의 영향력은 우리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때론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들이 예전과 달리 표출되고 있습니다. ‘송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임영웅’에게서 트로트의 인기는 그 절정에 도달한 듯합니다. 그런데 ‘김연자’가 불러 메가 히트를 한 「아모르파티」의 노래 가사 중에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노랫말의 영향력은 사뭇 심각합니다. 이 노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돼 이제는 더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갈 한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대로 가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파티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고 노래하는 가운데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이라는 노랫말은 이 노래 이전부터 일기 시작한 새로운 결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전통적 결혼관에 익숙했던 흐름이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과 결부되면서 결혼관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주었고, 이런 사조에 잘 알려진 미혼 셀렙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잖아요. 헌신과 포기를 미덕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각자 자기의 행복에 집중하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소신 있는 배우 김혜수는 "누군가의 여자 말고 내 이름 석 자를 빛내면서 멋있게 사는 게 좋다." 하고, 영원한 쓰앵님 김서형은 "이미 일과 결혼했다. 결혼엔 관심 없다." 원조 국민 여동생 문근영은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하고 자신들의 결혼관, 곧 ‘비혼’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구약의 신명기에 근거해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후사, 대代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엉뚱한 근거를 들어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는 곧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12,24)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를 포함해서 남녀 수도자와 사제들은 하늘나라를 위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 이전에 하느님의 이끄심과 이런 삶을 살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허락된 이들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이다.”(마태 19,10.~12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은 허락된 이들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섭리이며, 세상에서 독신, 동정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천사적 삶의 예표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물론 사두가이들은 무지했고 아전인수식으로 성경을 해석한 오류를 범했고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상상하는 것조차 불편합니다. 만일! 제 형들이나 동생이 자식 없이 죽었다면, .... 상상하기만 해도 불편한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이런 극단적인 강변을 일축하고 새로운 길과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그 까닭은, 첫째로 하늘나라에서, 부활한 삶은 세상에서처럼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천사들처럼 영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12,25 참조)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12,27)라는 명백한 증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화석과 같은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더 굳건히 함으로써 우리의 잘못과 오류의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하늘나라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이의 한 사람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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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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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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