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사명
제82과 목사(헌신자)의 입지 (딤전 4:12~16)
1. 디모데는 사도 이후 교회 시대에서 최초의 사역자로 성경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다음의 신약교회의 최고 지도자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적 모범도 모범이 되지만 사도의 은사와 직무 중 계시 은사나 능력 은사가 그 후시대까지 그대로 계승된 것이 아닌 만큼 목사와 공통되는 직임자는 “디모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하고 남은 직임을 다모데에게 인계하였습니다(고전 3:10~11, 엡 2:20).
2. 본문에 보시면 디모데가 할 일에 대하여 세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본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착념(몰두)하는 것이며, 셋째는 진보가 있도록 계속하는 것입니다.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주로 말과 행실(실천)과 사랑과 믿음과(믿음으로 시행하는 것) 정정을 말씀하셨는데, 그 외에도 더 있을 것입니다(가정, 자녀, 양심, 이웃과의 관계 등). 다음에는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고 전심전력하는 것입니다. 이 뜻은 복음사역자가 말씀의 칼을 항상 가는 것입니다. 목사 사역의 가장 큰 도구(주 무기)는 말씀 가르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EBS 방송에서 강의하는 선생님들을 보실 것입니다. 영어나 수학이나 물리, 화학이나 역사 등 자기 과목에 대한 것을 꿰뚫은 지식을 갖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서 인기도 얻고 능률이 나는 것처럼 목사가 성경에 몰두하여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네 자신과(자신의 부족도 있은즉 보충할 것) 이 일(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들과 우리들 주위에 본이 못 되거나, 성경, 기도에 몰두하지 않는 목사, 또는 자기의 맡은 일에 계속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지를 살펴서 서로 깨닫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가 대접 받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우선 사랑에 본이 되지 않는 것이고, 또 골방에서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아도 역시 자기의 몰두할 일을 떠나는 것이며, 가르침의 대상이 적다하여 그것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그릇으로 쓰실 때 많은 사람이 자기 곁에 오겠지만 특별한 그릇으로 쓰실 때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처럼 그 대상과 할 일을 특별하게 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사명자는 자기의 위치와 사명에 굳게 서서 자기의 하는 일을 성실하게 계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6절 끝에 보시면 “이것을 행하므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네 자신의 구원”이란 무슨 뜻일까요? 죄사함의 구원은 아닐 것이고, 사명 감담에 대한 완성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제가 이 시간에 목사의 입지(立地 : 있어야 할 위치, 또는 구비조건의 뜻)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사명의 능률을 위하여
1)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이 있으면 육신이 자유롭지 않고, 생활비를 교회에 의존해도 자유롭지 못할 경우가 있으며, 흠 잡힘이 있어도 그렇고, 가족관계가 힘들어도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 생계가 목회와 관련이 되면 좋은 관계에서 생활비를 받아도 직업적 성직자란 오해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돈에 신경 쓸 일 없고, 대인 관계에도 눈치 볼 일 없는 상태,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 없는 상태가 자유로운 입지 아니겠습니까?
2) 의욕과 취미에 끌리는 것입니다. 의욕과 취미에 끌리지 않으면서 억지로 또는 힘들게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 새벽기도를 나간다면 만족도 없고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취미상으로 말씀에 끌리고 기도하는 일이 좋아서 할 수 있는 입지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에 착념하고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성경연구나 기도가 아닌 것은 시간 낭비나 자기 생애의 목적에 손해보는 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씀이 풍성해질 수도 없고(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 말씀에 끌리지 않으면 영적 은혜의 반대인 세속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면 정욕을 통제하는 주사를 맞습니다. 세속을 통제하는 주사가 바로 말씀입니다(선물 받은 새 구두를 10년 안 쓴즉 바닥이 다 삭아있더군요. 좋은 신, 좋은 의복, 좋은 음식, 좋은 차, 좋은 집이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거부감이 생깁니다. 사치, 호강이 두렵습니다).
3) 될 수 있는 한 경건을 이익의 재로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딤전 6:3~5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 아닌) 다른 교훈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교만한 자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이로서 투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는 잊어버리며, 경건(믿음 생활과 성직)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에 관한 교훈(즉 말씀)에 착념하지 않을 때, 모든 세속적이고 허탄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목사의 입지를 정리해 보면 ① 건강, 명예, 물질, 가족, 비양심, 인적관계 등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②경건과 사명에 취미상으로 이끌려야 하며(나는 세상의 좋은 것을 안 누려도 주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좋다 할 정도), ③ 가르쳐야 한즉 말씀지식이 풍성해야 하고, 풍성하려니까 말씀에 착념해야 하는 것이요, ④ 자신이 받은 은사의 성질과 분량을 참작하여 늘 맡은 일(할 수 있는 일)에 계속 정진하는 것입니다(왕하 4:3, 왕상 17:12, 있는 것 활용).
제83과 목사의 부정적 요소들 (딤전 4:12)
“목사의 부정적 요소”를 생각해 봅니다. 정도에 따라 넉넉하고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데, 은사에 있어서 넉넉하면 더 좋고, 더 영광이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목사(디모데)가 업신여김 받지 않기 위하여 말과 행실과 믿음과 사랑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본”이란 평신도 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목사 생활 40년을 지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다면,
1. 무지를 들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초교육을 잘 못 받았어도 적당하게 과정을 거쳐 목사 되고, 또 일을 잘 한다고도 하였지만, 현재는 지식이 넉넉하지 않으면 목회에 많은 불편을 느끼고, 또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지나 학벌 적은 것이 부정적 요소가 됩니다.
2. 급한 성격입니다. 급한 성격은 인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의 실수를 하게 합니다. 말의 실수는 목회상 나쁜 결과를 가져온즉 우선 급한 성격과 교만의 심정을 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급한 성격이 말고의 귀를 치고, 예수님의 일을 훼방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18:10~11). 사탄은 그런 자만 따라 다니면서 밀 까부르듯 유혹합니다(눅 22:31). 급한 성격의 반대는 온유, 인내, 심사숙고이겠지요.
3. 가족의 십자가입니다. 성경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셨으니까 가족을 잘 살피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더 잘 하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목회와 헌신의 지장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지방 교회로는 안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오라 하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는 정신이 이제는 거의 없어진 듯합니다. 예수님은 “부친을 장사지내고 따르겠다”한 제자의 청을 거절하시고(마 8:21~22),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눅 9:62)”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족 부양이 목사의 부정적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요,
4. 교회의 인적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 중에 임의로 대하기 어려운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목사가 그 성도의 어떤 면(재물, 또는 시무 특권 관계 같은 것)을 의존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목회나 설교가 자유롭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인적 관계에 얽혀있는 그 대상을 강하게 교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저는 12년 전에 기성 교회를 나왔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과거에는 어떤 성도가 헌금을 많이 하면서 정치적 위세를 드러낸 경우도 있었고, 또 오래된 교회는 오래된 교인들끼리 단합하여 역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목사가 그 정치적 개인이나 단체를 의식하여 자유롭지 못하다면 바른 목회를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설교(말씀)는 민인에게 공평히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 허약한 몸입니다. 목회 사역은 건강 따라 적당히 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업무가 폭주할 때, 누워서 휴식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목사의 심방을 담임목사의 심방처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담임목사가 심방을 다 하고, 또 설교를 준비할 건강이 남겠습니까? 그래서 더 허약해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찬송을 힘있게 부르고 기도의 목소리를 높여야 교인이 생기를 내는 것 같은데, 허약하다면 어찌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저는 위장이 약하고 허약한 몸에 속하기 때문에 건강한 분에 비하여 10년은 차이가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58세에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목사는 허약하면 60세 정년이, 건강하면 65세 정년이 적당하리라고 봅니다. 피곤하고 능률이 떨어지면 교회의 성장을 막는 결과가 된 즉, 적당한 때에 물러나는 것이 자신과 교회에 유익할 것입니다.
6. 현세욕입니다. 현세욕 강한 목사가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정상적으로 보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만국의 유혹을 이기셨고(마 4:8~10), “자기를 부인하라” 하셨으며(마 16:24), 다니엘이 포도주와 진미를 거절한 이유를 아신다면 목사가 현세욕을 앞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바울사도는 디모데를 권면하실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목회 초기에는 교회에서 대우 받는 것을 동료의 급료와 비교하고, 대우 잘 받기를 기대하였는데, “그것이 다 교만이고 욕심이었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현세욕이 이제는 아주 싫어졌습니다.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음식, 좋은 옷 같은 것은 생각조차 없고, 오히려 적은 비용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기를 바라는 것이 소원입니다.
7. 말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말재주가 없어도 설교만 핵심되는 내용으로 몇 마디 잘 할 수 있으면 되는데, 그것을 잘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과 관계있는 내용만 논리적으로 나타내면 좋은데, 그 논리적 전개를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목사(증거자, 교육자)로서 큰 부정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는 외모와 음성입니다. 바울은 외양이 “등 굽고 키 작은 앵기다리”란 역사적 증거가 있다 하고, 또 “말에는 졸하다(고후 11:6)” 하셨지만 그래도 문필가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아주면서 진리만 배우는 성도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인물 좋고 성량 있으면 인기가 더할 것인즉(사 53:2, 역설적 의미) 외모가 졸한 것도 부정적 요소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84과 목사 임직식 설교 (엡 4:11~12)
나는 어제(2007. 10. 16) 정년 전 마지막 노회에서 목사 임직식 설교를 하였는데,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내용이 떠오르는 것을 정리하지 못하여 증거는 했지만 설교답지 않게 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목사와 교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을 짜임새 있게 몇 가지만 말하고 끝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집필 관계와 홈페이지만 참고하게 하였습니다. 복음사역자가 기록을 남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목사 임직 설교가 중요한 것이라도 30분 전에 부탁하면 할 수 있는 것인데(설교 숙달을 고지하는 뜻), 15일 전에 부탁을 받고 그 사이에 떠오르는 말씀이 많아서 6편의 설교를 준비 하였습니다. 이 뜻은 목사는 항상 말씀이 샘솟듯 해야 할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임직 설교를 준비할 때 “제자 삼아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말씀, “선한 목자라 하신 말씀(요 10:11)” 등이 떠오르는데,
1. 디모데가 목사의 전형적 인물인 만큼 목회 서신에서 뜨거움을 느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목회 서신에 보면 바울이 주님의 긍휼로 직분 받은 것(딤전 1:13), 본이 되게 하신 것(1:16), 감독은 어떠해야 한다는 말씀(3:1~4),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씀(4:5), 연소함을 업신여김 받지 않도록 하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에 착념하고 전심전력하라는 말씀(4:11~15),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데(5:8) 가족의 신앙 수준이 목사와 같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고, 그런 짐 때문에 목회하기 어려운 즉, 목사는 되도록 가족이나 물질이나 대인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운 입지에 있어야 좋다는 것을 말하였고, 딤후 1:6에서 “안수 받을 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할 것과 바울이 고난은 받았으나 말씀은 매이지 않은 것과(2:9), 진리 분변과(2:15), 많이 배우고 확신한 것과(3:1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쓸 것과, 바울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상급을 기다린 일, 추운 감옥에서 겉옷을 가져오라 하신 일, 다 자기 길로 가고 누가만 함께 있은 일(4:2, 7, 9~14), 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괴로움 준 일, 반대로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유쾌하게 한 일(1:15~16)” 등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뜨거울 것을 권한 것입니다(딤전 6:5, 8도 참고, 다 말하지 못했음).
2. 목사의 사명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성경을 가르쳐야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성경은 영적 관계에서 은혜를 전하는 것이므로 다스리는 장로보다도 귀한 직인데, 보통 사람은 교사보다 장로를 더 좋아한다고 지적하였고, 증언자가 모든 말씀으로 살 것과(마 4:4), “다 증거하라(행 5:10)” 하신 말씀에 유의하지 않는 것도 지적하였습니다. 가르치려면 지식이 풍부해야 한즉, 성경에 몰두해야 하는데 끌리지 않고야 어찌 성경, 기도에 몰두하겠습니까? 나는 끌리는 은혜를 50대 후반에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살폈지만 지금은 들을 자가 없어도 성경에 끌려 살핀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목사는 말씀에 끌리는 은사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 하였고, 성경을 증언할 때, 삼천포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그때 나는 삼천포로 끌려갔음).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읽었으면 반드시 개론과 특징과 대의와 핵심과 단어와 의문을 풀어주는 일과 교훈을 말하고 끝내야 하는데, 다른 말을 길게 하면서 본문을 떠나는 것이 “진주로 갈 자가 삼천포로 간다”는 말입니다. 나는 누가 설교를 하면 “저 설교는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의문점이며, 다 설명하면 몇 분이 된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데, 그 설교자는 거기에 적중하지 않으면서 청중의 시간을 낭비시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문제는 설교자의 각성을 촉구한 것입니다. 본문을 설명할 때도 에베소서의 개론과 사도, 선지자 등 용어와 목사, 교사의 뜻과, 목사, 교사를 주신 목적 세 가지(온전한 성도, 봉사, 교회 확장)와 그 방법을 말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목사의 도덕성에 대하여는 말을 못했고,
3. 교회 부흥 비결을 강조하였는데, 그 방법은 말씀 흥왕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란노 서원(행 19:8~20), 베뢰아 교회(행 17:11), 또 말씀의 달음질에 대하여(살후 3:1) 말하고, 말씀 달음질 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 공부에 불이 붙는 것이요, 그 방법은 모든 성도가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점을 글로 적어 제출하면 교사가 그 답을 적어 글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 교사는 성경 공부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교인은 배워 확신케 되며, 나중에는 좋은 문답집이 생길 것입니다. 문답집이 완성되면 그 다음 교육은 더 쉬워지고, 교회는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이 부흥시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행 19:8~20절에서 바울이 3개월 가르쳤을 때, 반항 핍박이 있었지만 다시 힘내어 2년을 계속 했을 때, 역사와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작한 길선주 목사님이 욕을 먹는다고 합니다만 나도 이 문제 발설로 욕을 먹었으면 합니다. 밖으로 돌던 목사님들이 다 성경에 몰두할 때 억지로 끌리는 사람은 욕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 서신의 뜨거움, 말씀에 끌림, 서신문답, 성경 공부로서의 부흥 비결”에 대하여 증언한 것입니다(바울사도는 자기의 깨달은 것을 대강 기록하심, 엡 3:3, 나는 100% 기록하여 홈페이지에 올린다고 하였음).
제85과 구멍 뚫린 생활 (엡 4:27)
성경에 “틈”이란 용어가 22회 나오는데, 엡 4:27에서는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하셨고, 고전 7:5에서는 “기도할 틈을 얻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귀가 성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순간의 허술한 부분을 살핀다”는 뜻이고, 따라서 “성도는 그런 시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빈틈없는 기도로 예방하라”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신앙과 사랑과 교회와 정치 등에서 많은 구멍(틈)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찌하든지 공백을 메꾸고 틈을 주지 않는 신앙 생활을 하였으면 하는 소원을 두고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무슨 구멍이 뚫렸다고 생각합니까?
1. 신앙의 구멍입니다. 아주 큰 구멍인데도 뚫린 줄을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아는 지식이 곧 신앙인데 성경이 말씀한 의도 파악을 옳게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한 것인지 성경의 의도를 간단히 말한다면 “구원의 도리와 예수님”이지요. 그런데 구원의 도리는 따지면서 예수님은 인간적 생각과 문화적 의복을 입혀서 이해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교회가 얼마나 있습니까?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데, 그 반대로 교회 이기주의만 팽배하여 그 영광을 사람이 취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이기주의로 끝을 맺어도 사랑과 봉사로는 끝을 맺지 않는 것이 현실교회라고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을 알림에 대한 구멍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사랑의 구멍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실천됩니까? 많이 미흡하지요.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물질만 줄 것이 아니라 믿음(믿어주는 것)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재물을 주어 보낼 때 저는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 정도가 “아들을 사랑한 믿음이고, 그가 사회에 나가서 실수를 하고 망해도 깨달음의 소득은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즈음 성도 간의 사랑이나 교회라는 단체가 성도를 사랑할 때, 그런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을 반성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아주 가진 것 없으면 물질적 사랑의 의무는 느끼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물질만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얼마든지 같은 환경에서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서로 격려하고, 친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전 13:7을 보시면 “사랑은 모든 것(모든 대상)을 믿는다(믿어 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또 영원히 진실하시니까(히 13:8, 시 146:6) 믿음의 주(히 12:2)도 되셨고, 믿기 쉽지만, 사람은 항상 거짓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믿어 주기 어려운 것이 큰 문제이지요. 이런 형편에서 믿어 주는 사랑을 연습하려면 탕자의 아버지처럼 “상대방이 변질되고 실패해도 깨닫는 것이 있겠지” 하는 타산으로 믿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쉬운 예로 다시 설명하면 “돈을 꾸어 주고 받지 못하게 되어도 할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상대방을 믿어 줄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돈이 있는데도 빌리러 온 자를 의심하여 주지 않는다면 돕지 않는 죄와 의심하는 죄를 다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활에도 틈을 주지 않도록 방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있으면 받은 것대로 활용하셔야 하되, 하나님은 없는 것을 구하시지는 않으시니까(고후 8:12) 경우에 따라서는 없는 것이 더 유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구멍 뚫린 일에 대하여 요즈음 절실히 느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운데 있는 식구들이 서로의 입장을 오해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무료로 방출한 신앙 자료를 10만 명 이상이 열람하고 있지만 감사 전화는 만 명에 한 명이 안됩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거나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타산적이고 희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은 교회를 시무하면서 사례비도 줄이고, 교회 재정을 축내지 않으려 하였고, 또 집필 자료 정리하는 일로 비용을 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은퇴하면서 물질적 이권을 보고 후임자를 소개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었고, 또 교회의 재정에 대하여서도 무슨 부정이 있는 것처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격려해 주고 믿어주는 사랑이 몹시 메마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교인들은 교인 단체의 유익만 생각하고, 선교적 차원에서의 일은 남의 일로 여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가까운 식구들도 이해와 신뢰를 안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들에 비하면 문제가 안됩니다. 마 10:34~36을 보시면 “복음으로 인하여 가족들 간의 불화가 생긴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다시 말하면 사명 생활에 반대하는 가족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 중에도 조금씩 통하는 식구들이 있고, 아주 사사건건 충돌하는 식구들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에서와 야곱의 격차가 생긴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어떤 자식은 아버지를 알되 “자기를 손해 보이고 아버지 이득만 차린다”고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버려진 고아가 부모의 입장을 모르고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부모는 누구나 자식에 대한 희생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모든 물질이나 사업도 맡길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니까요. 가족 간에도 사랑의 구멍이 뚫려 있음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제86과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벧전 3:15)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우선 이 말씀에 근거하여 무궁한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소망에 찬 생활은 모든 이에게도 기쁨과 희망을 줄 것입니다. 또 누구로부터 소망 가진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런 이유로 소망이 넘친다”고 그 이유를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다가 능숙하게 대답하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소망을 갖고 있으며,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였을 때, 마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3일 전에 “신앙 자료 안내”란 내용을 기독 신문에 게재하였습니다. 이것을 게재한 이유는 신앙 자료를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제공하므로 말씀 선포의 보탬이 되고, 또 한 가지는 그 자료가 40년 목회의 전부란 사실과 무사히 은퇴한 것을 전국의 친지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광고를 보시고 전화로 “대단한 일을 하셨다”고 격려를 하면서, “목사님은 40년 목회를 하셨은즉 교회 부흥에 대하여 아시는 것이 많을 터인즉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받고 당황하였습니다. 40년 동안 목회상 부흥의 뚜렷한 체험도 못하였고, 그나마도 글 쓰는 일 때문에 중도하차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대답한즉 “그래도 더 아시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혹 있다 하더라도 전화상으로 갑자기 답하기는 어렵다”하고, 몇 가지 논리성 없는 의견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 전화를 끝내고 마음이 시원스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글을 많이 발표해도 수요자 측에서 원하는 것은 부흥의 비결인데, 나는 그 점에 대하여 체험담이 없구나” 하는 허전함 때문이었고, 또 한 가지는 질문자가 긴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의 신분(교회와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누구이든 신앙 상담에 대하여 응하면 되지만 저와의 대화를 원한 측에서는 반드시 자기 신분을 알리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교회 부흥에 대하여 떳떳하게 말할 만한 체험은 없지만 “그래도 40년 목회의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했을 때, 어떻게 답변할까를 구상한 중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1. 부흥을 정의하는 일입니다. 물량주의 확장은 겉부흥이고,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많게 하는 것은 속부흥이 되겠지요.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다 만족할 때,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적 방법, 또는 건전한 방법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딤후 2:5).
3. 목회자의 자격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미 말씀 드린 일이 있지만
1) 성경 전체를 포괄적으로 능숙하게 알고,
2) 성도의 환경에 따라 쉽게 적용하며,
3) 상당한 경험, 연단에 의하여 자신감을 갖고 임함이 필요한 줄 알고 있고,
4) 도덕성, 특히 겸손과 진실이 중요하며,
5) 허탄한 것들을 바라지 말고(시 24:4, 눅 9:62, 갈 5:24),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6) 기도, 말씀, 전도, 사랑 실천에 몰두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사명자 편에서 할 일입니다. 이상의 방법이 충족되지 않아도 작은교회가 큰 교회 되는 경우는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써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또 목회 여건상 좋은 환경을 복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부흥을 갈망하는 것은 이해되나, 자기의 사역 목적이 꼭 가견적 교회의 부흥에만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흥의 열매는 세월따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가 부흥 안 되면, 새로운 은사를 발견하도록 노력하실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은 뿌리는 자(전도자), 물 주는 자(교육), 거두는 자(성공적 부흥)를 따로 쓰시는 경우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4:5~9). 부흥 그 자체도 하나님께 맡기시고 성심성의만 다 하는 노력으로 만족하도록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제87과 사명 반성과 대책 (딤후 4:7~8)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자기의 사명 생활에 대하여 최후에 고백한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에게는 “사명 반성과 대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세상 떠날 무렵에 자기의 사명 수행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기를 “잘 싸우고 잘 달리고 잘 지켰기 때문에 예비하신 상급만 기다릴 뿐이라” 하시므로 성공적 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경우는 40년 목회를 끝내고 은퇴하였는데, 아쉽고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이 시대에는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사역자들이 많고, 또 어떤 이는 사명을 갈망했지만 쓰심의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과제는 “사명 반성과 (문제에 대한) 대책”입니다. 현실에 직면한 실제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을 반성해 보면 건강과 학력과 인간적 배경에 뒤졌고, 가족 부양의 책임은 컸습니다. 이 부분이 저를 힘들게 한 것이지만 그런 대로 노력하고 성실하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짐이 무거울 때 가벼운 짐으로 교체하는 길도 열어주셨고, 목회적 성공의 욕심을 덜 가졌기 때문에 큰 실수없이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람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 인간 상대로 경쟁을 하였다면 큰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지만 지혜롭게도 그런 경쟁을 피하였고, 하나님이 저에게 독자적으로 주신 은사(집필)에 몰두하므로 나름대로 그 열매을 거두니 보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레위기 강론을 쓰는데, 잠언만 쓰면 성경 66권을 끝냅니다. 현상태에서 나의 성경적 실력을 평가한즉 “이 정도의 실력은 갖고 신앙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나 된 것”이 늙고 사명이 끝났을 때에 어느 정도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모든 젊은 사역자님들이 미리 대책을 세워 사명에 성공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력 많고 성공적으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저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고, 후배님들이나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1.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여러 종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릇이든지 “깨끗하고 거룩하게 예비될 때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딤후 2:21). 이 “깨끗함(거룩)”이란 도덕성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겸손, 진실, 착한 성품, 성실성, 예절, 근면, 근검, 사랑과 봉사심, 화해적 성격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사명자가 도덕성을 확보하려면 현세욕과 허탄한 것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가 허탄한 것에 뜻을 두지 않아야 한다(시 24:3~4)”는 말씀이 있고, “이 세상이나 세상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지 않다(요일 2: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현세적 욕구를 멀리하지 못하면 도덕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그러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마 16:24, 갈 5:24, 고전 15:31, 롬 7:9).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의 목표나 취미나 가족에 대한 인정도 없어지겠지요. 마 8:19~20을 보시면 어떤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으니, 이 뜻은 물욕을 떠나야 한다는 뜻인 줄 압니다. 또 마 8:21~22을 보시면 제자 중 한 사람이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 하였을 때 “죽은 자들로 그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으니, 이 뜻은 “가족과의 인정을 초월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또 마 9:9을 보시면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신즉 그가 “일어나 좇았다” 하셨으니, 돈 잘 버는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뜻입니다. 순결, 도덕성, 자기 부인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4. 그 다음은 실력입니다. 성경실력, 성경교육의 노하우, 여러 종류의 환경에 따른 지도법을 익숙하게 아는 것입니다. 실력에 대하여 학력이 좋으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이 빠르고, 학력이 없으면서 실력이 좋으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이 더딥니다.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학력을 가질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세상 지식으로 키우는 것이 아닌 만큼 성경의 뜻과 적응력을 많이 키워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중요한 적응력은 혼자 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이 연단입니다. 사명자가 연단 경험이 많으면 담력을 갖게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상 다섯 가지에 대하여 착실하게 준비하시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기도이겠지요. 기도만 하는 것도 사명의 일종이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목회할 교회와 강단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줄로 잘못 아신 분이 계시다면 기도로 사명을 대체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을 쓰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타락 경험을 하고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다시 만났지요. 그때 베드로는 퍽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쓰시겠다고 하셨지요.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고, “내 양을 먹이라” 하신 후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고…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이 사람(사도요한)은 어찌 되겠습니까?” 한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므로 사명자마다 독자적으로 가야할 길이 있고, 사명의 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는 동료를 모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독특한 은사에 따라서 자기의 할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릇 준비를 미리 잘 하시면 반드시 쓰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88과 목회자에게 주는 메시지
7월 1일 자정을 넘은 시간에 CTS TV를 본즉 “크리스티 김”이란 젊은 여자 선교사의 설교가 방영되었는데, 내가 다 듣지는 못했으나 감동받은 바가 크고, 또 나의 사상과도 일치하여 그 들은 바의 내용을 대략 기록합니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서 자정에 TV를 본 것인즉, 이 메시지를 접하는 성도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서 그 메시지의 취지를 기록에라도 남겨 전달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분의 설교는 목회자 세미나회집에서 증언하였는데, 이 시대는 소위 글로발 시대라 하여 영어를 잘 하고, 세계를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야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시대라고 봅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가 글로발적인 인물을 지도자로 요구하는 줄 압니다. 필요한 인물과 또 필요한 메시지는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내실 줄 믿습니다. 따라서 글로발적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문제는 성경과 예수님의 사상을 직접 또는 옳게 반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선교사는 말하기를 현실교회가 물량주의와 상관없이 성도들의 신앙이 침체되어 있다고 평하였으니, 그 침체된 상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으로 본다면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자립성이 약하며, 예수님을 닮아 사는 생활이 취약함을 뜻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현실교회 사역자는 너무 바쁘고 피곤한데 (대부분) 프로그램 목회에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프로그램 목회가 필요한 것이지만 자신이 받은 독특한 은혜(은사, 창의력)와 상관없이 모방에만 급급한 것은 문제가 있다 하였고, 또 중요하게 여길 것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제일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대부분) “능력 받고 교회 부흥시키는 일일 것이라” 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제일 계명은 마 22:37~40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오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보다 사역을 더 사랑한다 하였으며, 그것 때문에 열매가 적고 하나님이 쓰시는데도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 복음적 모든 사역도 혼자하실 수 있지만 여기에 인간 사역자를 동원하여 함께 일하시는 것은 “사명자를 사명의 즐거움에 동참하게 하시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저의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무엇을 크게 하고, 성취해야 되는 줄로 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접근입니다. 그 선교사도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일은 하나님 혼자 순식간에 성취하실 수도 있겠지요. 사람이 어떤 관광지에 가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면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나 가족들도 이것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성도를 사명에 참여케 하시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좋은 일에 (또 상 받을 일에) 동참케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강조한 내용은 “사역에만 급급하거나 바쁘지 말고 하나님과의 독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상고와 기도를 하나님과의 독대로 설명할 줄 알았는데, 사역을 위한 설교 준비는 독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는 “하나님을 자기 홀로 즐기고 만족하는 일이라” 하였고, 자신은 기도를 움직이면서, 즉 활동하면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도 나의 뜻과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다음 시간에 또 한다고 하면서 방영이 끝났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사명 반성과 대책”이란 설교를 썼습니다. 함께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명, 설교, 교회부흥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가 사명자가 되고 설교 잘 하기를 힘쓰며, 교회부흥을 염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교역자들은 시설을 좋아합니다. 깨끗한 예배당, 짜임새 있는 성구, 스크린 설교, 교육기관 같은 것이지요. 그 방도로서 어떤 효력을 줍니까? 제 생각으로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린 성도가 “깨끗하고 시설 좋은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그 시간에 좋은 설교가 나가면 감동을 받겠지만 자기 마음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씀에 끌리는 일은 시설이나 한 두 번의 설교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설교를 많이 구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말년에는 작은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15명 정도의 성도가 저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저의 설교에 감동받고 끌려오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설교나 교육의 열정이 적었거나 방식이 나빠서가 아니고, 성령님이 듣는 자의 마음을 열어 말씀으로 끌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가 홈페이지 인터넷을 통하여 12만 명 가까이 열려지고 있는데, 그 12만 명 중 만 명당 1명 쯤이 저의 메시지를 접하고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가슴 뜨겁게 감동을 받는 모양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서 격려 전화가 오기도 하고, CD를 구하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만 명 중 한 명에 해당합니다. 저는 그 마음 열린 성도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록하지 않습니까? 결론은 사명자가 사업적 목회나 프로그램 시행이나 모방에 바쁘지 말고, 하나님을 즐기는 독대에 들어가라는 것이 증언자의 메시지였습니다. To do 하기 전에 To be가 되라는 말도 있듯이 무엇을 한다는 목표를 세우기 전에 또 무엇을 얻겠다는 타산에 목표를 두기 전에 “타산없이, 개인적 욕구없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독대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89과 설교의 중요한 요건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의 역사는 120년의 연륜을 갖고 있으면서 영적은혜, 성경지식, 또는 교회부흥과 목회의 노하우를 유지해 왔고, 따라서 설교학도 중요한 몫을 한 줄 압니다. 설교학대로 잘 하면 틀림없는 좋은 성과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아직도 설교학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없거나 바른 설교관을 갖지 못한 후배들이 계시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주제 넘은 말 같고, 나는 설교를 못했지만 배우는 분들의 유익을 위하여 간단히 몇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설교자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주제 파악을 하신 후에 감동 줄 만한 노력을 근거로 하라는 것입니다.
1. 주제 파악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읽으신 성경 말씀을 본문적으로 더 이상 설명을 안 해도 될 만큼 증거하는 것입니다. 연속되는 강론은 시간의 구애를 안 받지만 한 번 설교에 인용하는 성구가 길면 본문 설명에 시간이 부족하겠지요. 이럴 경우를 생각하여 본문 분량을 짧게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0분 설교를 하신다고 가상할 때 충분하게 본문 설명을 하시는 것으로 가상하여 10분쯤 잡으면 좋을 것입니다. 본문 설명의 중요한 것은 간단한 개론(본문 기록의 시기, 저자, 목적)과 역사적 또는 문구적 해석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개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설교를 듣는 분이 없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기본 공식을 모르면 다음 단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설교도 그렇다고 보셔야 합니다.
2) 본문과 그 시간에 설교하실 주제와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감사 설교 제목을 잡으셨다고 하면 “이 본문의 어떠 어떠한 부분이 감사의 생활에 교훈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으로 선택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회개하라”는 제목을 정하시고, 세리 삭개오의 본문(눅 19:1~10)을 읽으셨다면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란 사람이 예수님을 몰랐고 토색을 일삼던 사람인데 그가 회개한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회개를 권면하는 본문에 적합하여 읽었습니다” 라는 식의 본문과 주제와의 연결된 공통점을 반드시 설명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듣는 분들이 그 시간의 주제와 본문과의 관계를 흐트러트림 없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나 “본문과 설교와 상관없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들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3) 강조하고 싶은 주제(내용)입니다. 감사설교이면 감사 드리는 방법 같은 것을 핵심적으로 증거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실제 생활과의 접목입니다. 여기에 단순하지 않은 조건도 많고, 증거는 강조했으나 실제적 실천에 있어서 가능성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저부터 많이 고민해 온 부분입니다. “소경이 인도자 될 수 없다(마 23:16)”는 뜻은 모범적 실천없이 교훈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설교자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겠지요. 모범을 보였다 하더라도 재물있는 성도 앞에서 “헌금을 많이 하라”고 강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구제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도덕적 설교는 “얼마큼 또는 어떻게 사랑행위로 나타내십시오” 한다든지, 교리적인 설교같으면 “부활과 내세의 심판을 믿으니까 어떻게 하십시오” 라고 증언하셔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증거자와 청중이 가장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신령한 은혜와 내세의 소망을 증거했으나 성도들은 세속욕을 떨구지 못하는 경우이고, 또 한 가지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밥그릇 나누는 사랑만 하고 실권적인 것은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읍시다” 하고 설교를 했다면 성도의 무질서한 생활 부분에서 “무엇 무엇은 시정해야 합니다” 하는 식으로 증거한 말씀이 실제 생활과 접목되어야 할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제 파악에 대한 것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2. 감동 줄 만한 노력이나 근거를 가지셔야 증거에 호소력이 있고, 성령님도 밀어 주실 것입니다. 설교는 잘 하지만 재래적 타입의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고, 또 변화를 일으켜서 교수식, 만담식으로 나가는 경우도 봅니다. 설교는 입으로 증거하는 것이고 귀로 듣게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글자로 보는 시대가 더 확장될 줄 압니다. 감동 줄 만한 가장 큰 근거는 기도나 헌신이나 학력, 경력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은 증거자의 모범적 생활이 한 몫을 할 것입니다. 영력을 받기 위하여 특별기도(40일 금식)를 하시고, 초췌한 모습으로 강단에서 입을 열었을 때 많은 성도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쏟는 경우도 과거에는 있었습니다. 설교와 함께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실 수 있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이 감동을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90과 증거의 핵심 (요 1:6~16)
제목은 “증거의 핵심”입니다. 무엇이 증거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진리 증거의 사명이 있습니다(마 28:20, 행 1:8). 성도 중에 복음 사역자는 더욱 진리 증거의 사명이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진리 증거에 열심하는 줄 압니다. 저 또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누가 저를 보고 진리 증거를 소홀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증거한 모든 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100권이 넘습니다. 많이 증거했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증거할 핵심을 잘 증거하고 있느냐? 할 때, 핵심이 아니라도 진리이니까 성경을 증거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핵심적 증거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교적 사명, 사회적 사명, 문화적 사명, 글로발적 변화의 사명에 대하여는 많은 메시지가 나타나지만 정작 꼭 필요한 내용은 증거에서 빠지는 경우가 있어서 이 시간에 그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증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과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알리고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 66권을 다 증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증거의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롬 8:29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셔서 아들을 삼으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도리는 간단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는 일(죄사함 받고 천국가는 일)도 간단하게 성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닮는 일은 많은 지식과 연습과 연단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결심과 시작을 잘 하여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 닮는 사람도 있지만 본래 세속과 현실에 익숙하였던 사람이 변화를 받고 성령 충만을 사모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현실적 정욕을 억제하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과 생활을 닮으려면 힘든 고비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도가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의 인격 닮은 것을 격려해 주고, 또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면 아직도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일깨워 주고, “어떤 분이 예수님을 가까이 닮은 분이니까 유의해 보신 후 본받으라” 하시고, 누구와 누구는 예수님을 닮아 살기 위해서 “어떤 결단을 내렸다”고 소개하여 모범을 보여주는 그런 지도와 설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거의 없어서 핵심 설교가 희귀한즉 성도의 지상 과제인 “예수님 닮고 본받는 일”을 언제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증거의 핵심은 “예수님의 인격(성품, 지식)과 생활과 사역”입니다.
2. 본문 말씀에는 세례요한이 출현하자마자 예수님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력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 자기의 증거로 빛을 깨닫고 믿게 하려 왔다. 세례요한 자신은 빛이 아니다. 빛은 곧 창조자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신분만 증거한 사람입니다. 제가 70세 가까이 되어 손자를 보았는데 이 놈이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외손자들은 매주일 집에 와서 보는데 친손자는 7개월째 못 봅니다. 금주에 볼 듯합니다. 자주 전화로 손자 크는 모습을 대화로 나눕니다만 데리고 와서 실물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 66권이 곧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 자체에 대한 설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의 생활에 대한 모범도 잘 증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닮은 자가 쉽지 않고, 내가 예수님 닮은 자이니까 나를 보시오” 할 사람이 희귀하며, 또 누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어떤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고 보여 줄 모범도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저부터도 “내가 예수님 닮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노력을 했습니다” 할 것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빈약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닮은 자가 희귀한 것은 한국 기독교 안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경으로 계시된 예수님을 증거의 핵심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적 메시지도 좋고, 세계적 선교와 교육 운동도 좋지만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과 사명을 증거하는 핵심 증거가 한국 교회 강단에 있어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예수님과 비슷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증거자가 예수님과 비슷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상을 가지신 분이고, 이렇게 사시다가 이렇게 돌아가신 분입니다” 하는 것을 강하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 교회에 증거의 핵심이 빠진 대신에 사회복음주의, 성도의 현실주의, 물질중심주의 세계선교 같은 것이 판을 치니까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과 비슷하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을 나타내고 빛을 발하여(마 5:14) 증거해야 할 성도와 교회가 핵심적 증거 내용을 외면하거나 멀리하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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