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
장정일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챠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세태고발적, 비판적
◆ 표현 : 담담하면서도 냉소적인 어조
화자의 주관과 판단을 배제하고 독자로 하여금 비판의식을 갖게 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녀석 → 시적 대상으로, 이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이 모두 외국것임을 보아 외래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녀석의 성향을 알 수 있다.
*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 녀석이 서구물질문화에 취해 빠져 있는 상태를 나타냄.
* 꼼짝도 않고 → 서구문명에 찌들고 의식마저 잠식당하여 비판의식을 완전히 상실한
오늘날의 젊은이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임.
◆ 화자 :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나열하여 보여주는 담담한 목소리
◆ 주제 : 서양 문화에 빠져 있는 현대인과 사회에 대한 비판
서구문화에 경도된 젊은이의 의식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8행 : 방 안에 널려 있는 서구 문물들
◆ 9~10행 : 비판의식 없이 서구 문명에 경도된 젊은이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어느 개인이 겪은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체험 속에 화자가 처한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 '녀석'이라고 불리는 어떤 인물의 하숙방을 눈으로 훑듯이 소개하고 있다. 화자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녀석의 의복, 사전과 담배, 음악, 주류와 기호품들을 하나 하나 늘어 놓는다. 그리고 녀석이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는 모습을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 시는 녀석이 일상적 삶 속에서 소비하는 여러 물품들의 공통점과 녀석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시인의 창작 의도를 밝혀낼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서구식 물품으로,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녀석은 이것들을 매일 매일 소비하며 하루의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녀석은 여러 물품들의 집합적 총체인 서구 물질 문명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잠이 들어 있다. 반성적인 거리감을 갖고 자신의 삶이나 자신을 둘러싼 서구 외래 문물을 돌아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녀석은 이러한 문물, 또는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증발되어 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의식이 내재되어 있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외래문화에 젖어 주체성과 정체성을 상실한 젊은이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젊은이들의 경박한 세태와 풍조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무런 '걸러내기의 장치'도 없이 서구의 물질문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서양 문화에의 경도 또는 종속성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이 시는 특이한 방법으로 한 시대의 사회 문화적 속성을 시의 배경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 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복 이후 미군이 주둔한 이래 우리나라에는 서구문물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봉건적 사고에 물들어 살던 사람들에게 이 서구 문물은 우리의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우리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가치 없는 것, 따라서 버려야 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무비판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외래 문물을 받아들였다. 더구나 과학 문명과 결합된 서구 문물은 우리의 삶과 가치관까지 크게 흔들어 놓았다. 영어를 한두 마디라도 할 줄 알고 외제 물품을 가지고 다니면 마치 특권층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시는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사용하는 의식 없는 젊은이를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서구 문물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되었던 삶으로부터 다시 주체성을 각성하고 우리의 전통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우리 것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그 자각은 밀려드는 서구 문명 앞에 미약하기만 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이런 반성이 좀더 깊이 있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장정일[ 蔣正一 ]
<요약> 우리 사회의 위악성을 폭로하면서, 독자들에게 의도적인 불편함을 조성하고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던 전면적인 자기 폭로의 길을 걸어 온 것이 장정일 문학의 특이함
출생 : 1962년
출생지 : 국내 경상북도 달성
데뷔 : 1984.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 발표
1962년 경북 달성 태생. 1977년 성서중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문학 수업.
1984년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악마적 결벽성으로 사회의 위악을 폭로’하는 시인으로 주목되기도 하였고, ‘자해적 테러리즘’ 에 빠져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자기가 추구하고 싶은 대로 꺼릴 것 없는 작품세계를 추구해 왔다. 1987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된 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중졸’에 그친 학력에도 불구하고 시‧음악‧연극 등 문화 전반에 걸친 백과 사전적 지식은 그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증폭시켰으며, 일탈적인 그의 작품세계는 그의 삶의 이력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1990년 소설집 『아담이 눈 뜰 때』를 내면서 장르를 넘나드는 문학적 다양성 면에서도 화제를 뿌렸으며, 그의 작품들이 연이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이라 할 만한 새 흐름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장정일 소설의 문제성은 자기 파괴를 통한 전달방식의 혁신성에 있다고들 한다.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는 우리 사회의 위악성을 폭로하면서, 독자들에게 의도적인 불편함을 조성하고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던 전면적인 자기 폭로의 길을 걸어 온 것이 장정일 문학의 특이함이요 특출함이다.
그는 1996년에 출간한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음란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에 오르게 되면서 구속되기도 하였다.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주목을 받다』(2005)와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 『보트하우스』(2005)가 있으며, 희곡집 『긴 여행』(1995), 『고르비 전당포』(2007)이 있다.
<학력사항>
성서중학교
<수상내역>
1987년 작품명 '실내극'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
작품명 '햄버거에 대한 명상' - 김수영 문학상
<작품목록>
성 아침, 햄버거에 관한 명상, 펠리칸, 고잉 투 캘리포니아, 실크 커튼은 말한다,
길 안에서 택시잡기,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카프카에게 존경을,
삶과 문학간의 간격 메우기-이기철론, 이유들-‘무림일기’, 유하 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상복을 입은 시집, 아담이 눈뜰 때, 이하석-시인연구,
정보화 사회의 시학-‘비디오‧천국’, 하재봉 저, 아담이 눈 뜰 때,
다원주의 문학에 대하여, 지하인간, 천국에 못 가는 이유
인공 시학과 그 계보-김춘수‧이하석‧박기영, 개인기록, 긴 여행, 내게 거짓말을 해봐,
펄프 에세이 : 작가 장정일의 문학탐색, 보트 하우스, 중국에서 온 편지
[네이버 지식백과] 장정일 [蔣正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첫댓글 자화상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 잊지 마실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