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⑧ ‘콘푸레이크’의 흥미로운 역사
세계일보 2020-12-01
환자 건강식으로 출발… 세계인들의 아침식사를 책임지다
19세기 중반 식습관 변화 소화불량 증가
요양병원 운영하던 존 하비 켈로그 박사
현대인 질병 치료 위해 메뉴 개발 나서
육류 피하고 곡물 중심으로 식단 구성
밀가루·귀리·옥수수 배합 시리얼 발명
동생인 윌리엄 켈로그가 상품화 성공
켈로그 콘푸레이크의 초기 포장(1906년). ‘미시간주 배틀크리크’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가끔 영화나 책으로 접하는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Prohibition, 1920∼1933)은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발상처럼 느껴진다. 한 나라에서, 그것도 미국처럼 자본주의 국가에서 술을 금지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가능했고, 그래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황당해 보이는 법이 만들어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19세기부터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은 술이 사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이에 알코올중독자가 급증하면서 가정이 파괴되었다. 지역사회를 망가뜨리는 마약이 그렇듯 술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술이 왜 갑자기 문제가 되었을까? 과거의 술은 도수가 아주 낮았다. 미국의 농가에서는 2∼3도짜리 술을 큰 통에 넣어두고 추운 새벽에 일하러 나가기 전에 국자로 퍼서 들이켜고, 집에 돌아와서도 마셨다. 하지만 알코올 함량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 비싸고 귀했던 독주가 대량 생산되면서 값이 낮아지자 문제가 발생했다. 도수는 올라갔지만, 매일 마시는 습관은 바뀌지 않았고 그 바람에 알코올중독자가 급증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식생활, 특히 아침식사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에 처음 정착한 유럽인들의 아침식사는 단순하고 보잘것없었다. 전날 저녁때 먹고 남은 음식을 먹거나, 포리지(porridge)라 부르는 죽을 먹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중서부를 중심으로 육류산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신시내티 같은 도시들은 중서부 농장에서 대량으로 사육된 소, 돼지 등을 거래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저렴한 육류가 미국 가정의 식탁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베이컨, 소시지 등을 곁들인 거창한 아침식사가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가난을 막 벗어난 1970, 80년대에는 TV, 라디오, 신문에 소화제 광고가 실리는 일이 흔했다. 나아진 식단으로 소화불량이 흔해졌던 탓이다. 미국에서 그와 비슷하게 소화불량(dyspepsia)이 증가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이런 생활습관의 변화를 사회가 고쳐야 할 심각한 문제로 생각한 사람이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1852∼1943) 박사다. 우리에게 ‘콘푸레이크’라는 이름의 시리얼로 유명한 바로 그 ‘켈로그’다.
배틀크리크에 위치한 켈로그 본사. 배틀크리크는 중서부의 소도시지만, ‘시리얼의 수도’라고 불린다. 시리얼의 양대 제조사가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존 켈로그 박사는 미국인들의 나쁜 식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콘푸레이크를 만들어냈지만,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뒷얘기가 있다. 신흥종교의 건강에 대한 신념, 형제 사이의 다툼, 그리고 의사와 환자 사이의 경쟁이 지금은 ‘미국인의 아침식사’로 알려진 콘푸레이크 탄생의 배경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미국 미시간주의 작은 도시 배틀크리크(Battle Creek)에서 일어났다.
배틀크리크는 인구 5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흔히 ‘안식교’라 불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eventist Church)의 탄생과 성장에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다.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던 1863년, 몇몇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종파인 예수재림교회를 설립한 제임스 화이트는 자신들과 신앙을 같이하는 의사가 커뮤니티 내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똑똑한 젊은 청년을 골라 장학금을 주어 의대에 보냈다. 그 청년이 바로 존 하비 켈로그다.
뉴욕에서 의사가 되어 돌아온 존 켈로그는 미시간주로 돌아와 배틀크리크 새니태리엄(Sanitarium)이라는 기관을 설립한다. 한국에서는 ‘위생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했던 새니태리엄은 병원과 요양소를 겸한 일종의 요양병원이었고, 결핵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장소로 유명했다.
이 요양병원을 운영하던 존 켈로그는 현대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식사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류를 피하고 곡물을 중심으로 한 식단을 구성하되, 강한 맛을 내는 향신료를 빼고 아무런 맛이 없고 밋밋한 식사를 강조했다.
사실 이런 식사는 ‘강한 향신료는 성적, 도덕적 타락을 부른다’는 초기 기독교인들 특유의 사고방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특히 존 켈로그는 성행위, 특히 자위행위를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도 미국에서는 “콘푸레이크가 자위행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그렇지는 않다.)
존 켈로그는 이 원칙을 적용해서 기름진 아침식사를 대신할 메뉴를 만들어내기로 했고, 밀가루와 귀리, 옥수수 가루 등을 배합해서 구워낸 반죽을 잘게 부순 ‘시리얼’을 발명해냈다. 물론 한 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너무 딱딱한 나머지 환자들의 치아가 부러지는 사고도 있었고, “먹을 만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리얼은 요양병원에 머물던 환자들뿐 아니라 병원 외부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우유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고, 소화가 잘되는 이 새로운 아침식사는 점점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있던 미국에서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현대적인 식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콘푸레이크 시리얼이 인기를 끌자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업의 기회를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가 존 켈로그의 동생 윌리엄 켈로그였다. 윌리엄은 의사인 형 밑에서 일하면서 콘푸레이크 개발의 실무를 담당했는데, 형의 그늘을 벗어나 콘푸레이크를 상품화하는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윌리엄 켈로그는 형과 함께 만들어낸 레시피를 좀 더 맛있게 개선한 후 1906년에 훗날 켈로그라고 불리게 된 ‘배틀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를 세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형제 사이에 ‘누가 콘푸레이크를 만들어냈느냐’는 분쟁이 생겼다. 사실 여기에는 두 형제뿐 아니라,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여럿 가세했다. 그중 한 사람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C W 포스트라는 환자였다. 가난했던 포스트는 입원비를 지불할 돈이 없어 병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것으로 입원비를 대신했는데, 그 과정에서 콘푸레이크를 함께 만들게 됐다.
그는 병원으로부터 콘푸레이크 제조기계의 특허를 사들였고, 그것으로 오늘날 켈로그와 경쟁하는 기업인 ‘포스트’를 세웠다. (한국에서 켈로그는 ‘콘푸레이크,’ 포스트는 ‘콘후레이크’라는 다른 표기법을 사용한다)
존 켈로그의 종교적 신념과 건강에 대한 19세기식 사고방식이 결합된 콘푸레이크는 21세에도 여전히 미국과 세계 각국의 아침 식탁에 오른다. 하지만 존 켈로그는 자신이 고안한 시리얼을 토대로 만들어진 상업화된 제품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설탕을 입혀서 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한 건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동생 윌리엄과 포스트는 생각이 달랐다. 형이 주장한 밋밋한 시리얼은 너무나 맛이 없어서 “설탕을 입혀서 달게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먹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