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9일 (목) 촬영.
피카소 전시회를 보려고 예술의 전당을 방문했다.
평일이고 이른 시간인 10시경에 도착하였음에도, 표를 구매한 후,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미술사를 바꾼 세기의 예술가 피카소, 그의 신화 속으로.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1881~1973,스페인)는 1907년 파리 몽마르트의 작업실 바토라부아르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한다.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르네상스이래 서양미술 400년 전통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며
회화 역사의 대혁명을 일으킨 걸작으로 기록되었다. 20세기 미술은 피카소에 의해 시작되었고 피카소의 세기
였으며 피카소를 위한 시대였다.
본 전시는 세기의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삶과 예술을 총 망라하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시이다.
(좌) 꿈, 마리 테레즈, 1932. (우)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2.
프랑스 파리 국립피카소 미술관 소장 걸작 110점 국내 최초 단독 전시
"나에게 미술관을 다라, 나는 그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프랑스 파리 소재의 국립피카소미술관은 단일 작가 미술관으로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미술관이다.
피카소 사망 후 유족에게 부과된 막대한 상속세를 대신해서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작품들을 모아1985년 문을
연 피카소미술관은 5천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다. 또한 피카소 전 생애를 아우르는
회화, ㅘ, 판화, 데생, 도자기,자료 등 방대한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프랑스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의 소장품 110여 점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피카소 예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이다.
이번 전시는 유화, 판화,조각, 도자기의 다양한 자으의 작품을 연대기 별로 관람할 수 있다. (출처- 리플렛에서)
1. 바르셀르나에서 파리, 혁명의 시대
2. 질서로의 회복,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3. 볼라르 연작
4.새로운 도전, 도자기 작업
5. 피카소와 여인
6. 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
7. 마지막 열정
아비뇽의 처녀들 / 1907, 캔버스에 유화, 243.9 x 233.7 cm,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피카소는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은 입체파(큐비즘)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이 추구해온 전통적인 양식들과 파격적인 차이를 보였다.
선과 형태는 매우 단순화 됐고, 원근법이 무시됐으며 명암의 표현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이러한 회화 양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본 모습들을 하나의 평면에 담았다는 이유로 입체파라고 불렸다.
이를테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그 코는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몸은 등을 보이고 있는데 그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든지 하는것이다.
실제와 똑같이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원뿔, 원통, 구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이용하여 그림을 구성했다.
피카소의 친구인 막스 자코프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비뇽 거리의 유명한 사창가를 지칭하여 붙여준 작품의
제목처럼, 이 작품은 충격적이면서 날카롭다. 아름다운 여성상이 아니라 매춘부들인 것이다.
가면처럼 그린 얼굴 중 세 여인의 얼굴은 아프리카의 전통 가면처럼 표현했다.
피에로 복장의 폴 / 1925, 파리, 캔버스에 유화, 130 x 97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폴(또는 파울로)는 러시아 발레단의 무용수였던 첫 부인 올가 코클로바 사이에서 1921년 2월에 태어난 아들로
피카소의 유일한 적자이다. 그러나 피카소와 올가의 부부관계는 폴이 태어난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첫 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올가가 마리 테레즈와 피카소의 밀애 관계를 알게 된 1935년에 둘은 별거 상태로 돌입하게 되고 급기야 올가가
아들 폴을 데리고 남프랑스로 떠나면서 피카소의 작품 속에 자주 모델로 등장하던 아들 폴의모습은 어린 시절로
국한된다. 폴은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취미 생활인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평생을 바치며 살았다.
아버지 피카소보다 훨씬 큰 키에 머리숱이 많았던 그는 두 번의 결혼을 하였고 첫 결혼에서
파블리토(1949~1973)와 마리나(1950~)를
두 번째 결혼에서 베르나르(1959~, 스페인 말라가 피카소미술관 설립자)를 낳아 세 자녀를 두었다.
피카소 사망 2년 후인 1975년 폴은 54세의 나이로
피카소의 유일한 적자로서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을 남긴 채로 파리에서 사망한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 / 1937. 1, 6, 파리, 캔버스에 유화, 100 x 81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마리테레즈 발테르(1909~1977)는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로 1930년대 전반기 주된 모델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45세의 피카소가 17세의 어린 마리 테레즈를 만난 것은 1926년경이다.
오랜 시간 부인 몰래 지속된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연인 관계는 새로운 연인 도라 마르가 등장하기까지
약 십 년간 지속되었다.
1930년에 피카소는 그녀를 위해 노르망디의 부아젤루에 작은 성을 매입하여 함께 지내며 그녀를 모델로
유화뿐만 아니라 조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둘 사이에 딸 마야가 출생한 이후 피카소가 젊은 여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나면서 둘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1937년경에 마리 테레즈와 연인 관계는 종지부를
찍는다. 피카소는 이후 평생 동안 마리 테레즈와 딸 마야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후 남프랑스의 주앙레펭에 살던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사망 4년 후인 1977년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했다. 딸 마야는 사후 소송을 통해 피카소의 유족으로 인정받아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게
된다.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는 피카소와 연인 관계가 시기적으로 중첩되는 이유로 1935년에서 1937년의
여러 작품에 얼굴이 다른 두 여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보브나르그의 식탁 / 1959. 3. 23~1960. 1. 23, 칸느-보브나르그, 캔버스에 유화, 195 x 80 cm, 피카소미술관.
칸느의 빌라에 거주하던 피카소는 1958년 9월에 엑상프로방스 동쪽 15킬로미터 떨어진 셍 빅투아르 산
끝자락에 위치한 1,100헥타르의 드넓은 대지 위에 18세기에 지어진 보브나르그 성을 구입한다.1962년까지
이곳에서 작업하며 머물던 그는 마지막 거주지 무젱에서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보브나르그 성 계단 앞에 안장되어 있다.
피카소 사후에 부인 자클린이 물려받은 이 고성은 그녀가 1986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그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카트린느 위탱 블레이에게 상속되어 오늘날 그녀의 소유로 되어 있다.
셍 빅투아르 산은 세잔의 작품으로 미술사의 성지가 된 유명한 산이다.
세잔에 대해서 찬사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77세의 나이에 이르러 세잔의 숨결이 깃든 이곳에
정착하면서 또 다시 창작열을 불태우게 된다. 이 성을 구입하자 마자
피카소는 그의 화상 칸바일러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잔의 셍 빅투아르를 샀다" 라고 했다.
그러자 칸바일러가 세잔의 그림을 산 줄 알고 "어떤 걸 샀느냐"라고 되묻자 피카소는 "진짜" 라고 답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1961년에 정식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자클린과 살며 그가 개인 소장하고 있던 세잔의 작품을
비롯해서 마티스, 르누아르, 드가, 미로, 모딜리아니,뷔이야르 작품으로 집안을 장식했고 가구는
엔티크 가구로 했다. 그 가구들 중에 작품에 등장하는 바로크 양식의 찬장이 다이닝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식탁 장식장은 피카소의 여러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하곤 한다. 폭이 3m에 가까운 흔치 않은 크기의
이 초대형 캔버스에는 여인과 어린아이와 개 한마리가 실물보다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피카소가 집안에 키우는 달마시안 종의 페로는 검고 무거운 찬장과 대조적으로 흰 바탕에 점박이 무늬가
돋보인다.
작품의 주된 모티브는 식당 중앙을 차지하는 찬장이며 의자에 앉아있는 움직이는 아이와 꼿꼿한 자세로
않은 여인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 전체에 골고루 사용된 초록은 이 시기의 피카소가 즐겨 쓰던 색이다.
찬장에 대한 묘사에 중점을 둔 듯
찬장은 채색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고 인물은 세부 묘사를 배제한 채 실루엣 처리만 하였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59년 3월에 시작하여 칸느와 이곳을 옮겨 다니면서 제작하였고
약 10개월의 작업 끝에 이듬해 1월에 보브나르그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캔버스 뒷면에 이 작품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제작한 날짜와 장소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SJS
머리 손질 / 1938. 3. 22, 파리, 캔버스에 유화, 57 x 43.5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여성의 머리 손질을 소재로 한 작품은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머리 손질>이란 제목을 가진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의 1906년 작이다. 장미시대의 흔적이 다분한 이 작품은
인상주의풍의 구도로 인상파의 대표 작가 에드가 드가(1834~1917)나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즐겨
쓰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피카소 작품은
여자 모델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소박하면서도 단출한 가족의 분위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1938에 그려진 이 작품은 고전주의와 입체주의의 흔적이 혼용되어 화면을 의도적으로 3차원화 하려고 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모델의 얼굴측면 프로필을 표현하고 있지만 화면 왼쪽의 눈과 코는 정면을 향해 있다.
1930년대가 피카소의 인물화 가운데 우측으로 시선 처리한 그림에서는 얼굴의 왼쪽 부분이 정면을 향하고
오른쪽이 측면을 차지한다.
반면 이작품은 왼쪽이 프로필을 오른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유난히 과장되게 그려진 눈과 코가 인물의 반을 차지함으로써 입ㅌ체파적 구성에 피카소의 과장된
고전주의풍이 혼용된 작품이다. SJS
시계를 찬 여인 / 1936
팔레트에 여인의 두상 / 1937, 12. 18, 파리, 목판에 유화, 22.3 x 16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1937년은 피카소의 삶에서 가장 특별한 해이다.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의 콘도르항공대는 프랑코의
요청으로 대서양 연안 바스크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무차별적 원정 폭격을 감행한다.
이 폭격으로 천 여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낸 비극적 참상을 접한 피카소는 5월부터 <게르니카> 제작에
돌입하였고 연
그리고 역사적 대작으로 남을 이 작품은 같은 해 7월 12일에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
되었다. 피카소를 20세기 미술의 가장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리게 되는 상징적 작품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게르니카를 완성한 그해 여름에는 남프랑스의 무쟁에서 도라 마르와 함께 지내며 1930년에 시작한
볼라르 판화 100점의 완결판을 7년 만에 완성한다.
12월에는 뉴욕 현대미술관 초대관장 알프레드 바(1902~1981)가 피카소의 큐비즘의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구입함으로써 미술사를 바꾼 대작은 뉴욕에 영구히 자리한다.
전시 작품은 그해 12월 파리에서 그린 그림으로 작품 속 인물은 도라 마르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관계 청산이 완전하지 않았던 마리 테레즈도 간간히 모델로 등장하는데 도라 마르의 특징은
강한 눈매를 가진 여인임을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마리 테레즈가 청순함이 서린 가녀린 얼굴이 특징이라면 도라 마르는 격동의 시기를 피카소와 함께하며 숱한
작품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인물이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시대였기에 그러한 불안한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모델로서 피카소가 도라 마르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미술도구인 팔레트에 도라 마르의 얼굴을 등장시킨 이 작품에서는 게르니카의 치열한 비극은 볼 수 없다.
오히려 얼굴은 고전주의적 표현방식을 사용해 선명한 윤곽선에 볼륨감을 입혀서 잘 그려져 있고
마치 석고 조각상처럼 테이블에 얼굴을 앉혀 놓은 형상이다.
다양한 색색의 물감들이 흩어져 있는 팔레트는 모델의 얼굴을 더 화려하게 장식는 듯하다.
팔레트라는 미술도구를 이용한 이 작품의 포커스는 얼굴에 맞춰져 있다.
머리에 빨간 장식띠를 두른 모델, 두툼한 입술과 오똑한 코, 선명한 눈동자와 윤곽이 뚜렷한 턱선은
초현실주의 풍의 마법 회화와 고전주의의 끝을 알리는 습작이라 보여지는 작품이다. SJS
소파에 앉아 턱을 괸 채 꿈에 잠긴 여인 / 1933. 3. 9, 파리, 동판에 에칭, 44.4 x 33.2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에우로페의 납치를 표현한 조각 군상과 함께 있는 조각가, 소년 그리고 모델 / 1933. 3. 30, 동판에 에칭, 19.5 x 27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투우 / 1922, 목판에 유화와 연필, 13.6 x 19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염소 / 1950, 발로리스, 청동, 120.5 x 72 x 144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칸느 해안 / 1958. 4. 19 - 6. 9, 칸느, 캔버스에 유화, 130 x 195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피카소는 지중해라는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화가이다.
그가 태어난 스페인의 해변도시 말라가, 젊은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 모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20세기 초 유럽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 지낸 양대 전시기를 제외하면
1948년부터 생의 절반은 지중해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지냈다.
일찌기 이방인 피카소의 청년 시절을 함께보낸 기욤 아포리네르는 그를 두고
"라틴의 영혼과 아랍인의 리듬을 지녔다"고 피카소의 전형적 남부 유럽인의 기질을 평가한 바 있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온화한 기후와 사시사철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에 매료되어 앙리 마티스는
1915년부터 일찍이 해변 도시 니스에 정착하였고,
지중해 연안의 크고 작은 도시는 르누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말년을 보낸 보낸 곳이다.
파리에 살던 시절부터 피카소는 정기적을 여름 휴가를 지중해에서 보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이 60대에 들어서는 완전히 지중해 연안에 정착하였다.웃통을 벗고 작업하는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의 피카소,
파란 줄무늬 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궐련을 입에 물은 모습,
남 프랑스의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 경기를 즐기던 모습,
이 모두가 지중해를 사랑하는 피카소의 기질을 대변하는 모습들이다.
남프랑스는 또한 그리스 로마 문명의 흔적이 서린 곳으로
서양미술의 역사 속에서 끝없는 영감을 찾아낸 피카소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학살 / 1951, 110 x 210, 유화,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1951년, 피카소는 우리나라의 6,25 한국 전쟁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작품을 남겼다.
"한국에서의 학살"에는 힘없이 학살을 당하는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얼굴을 가린 채 무기를 사용하여 그들을 제압하려는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팔을 벌린 여인 / 1961, 칸느, 함석, 물감, 183 x 177.5 x 72.5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1961년 칸느에서 제작된 <두 팔을 벌린 여인>은 파블로 피카소가 1957년에서1965년 사이에 철판을 절단하고
구부려 만든 100여 점의 조각들 중 하나이다.
1961년 11월 2일에 있었던 라디오 인터뷰에서 피카소는 이러한 작품들의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나는 먼저 종이를 접고, 또 접고, 형태에 맞추어 자르고, 또 접는다.그러나 종이는 약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형태가 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종이로 한번 해본 뒤에 종이보다 조금 더 강한 철판으로 똑같이 해본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철판으로 다시 한번 해보고, 계속해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중략)
이것이 기본적으로 내가 실험실에서 하는 일이다."
작품의 재료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작품의 크기도 함께 변한다.종이, 마분지, 철판으로 만든 이 작품의
최초 시제품은 크기가 36~40 cm에 불과했지만,
이후 금속 가공 전문 기업의 도움을 받아 사람의 키만 한 철판으로 두 차례 확대 제작되었다.
그 중에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에 소장된 1점이 본 전시회에서 선보여질 예정이다.
피카소는 또한 조각의 색칠된 부분에 텍스처의 효과를 주기 위해 그릴 조각을 자르고 용접해서 붙였다.
1962년 피카소는 노르웨이의 조각가 칼 네르자르와의 협업을 통해, 화상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의 별장 정원에
놓을 용도로 이 작품을 대형<콘크리트 조각> 작품으로 확대 제작했다. J P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 1961 초, 칸느, 함석, 물감, 128 x 60 x 35 cm,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첫댓글 요즘 방학과 휴가철이 겹쳐 관람객이
많은가 봅니다
전 7월 9일 다녀왔는데 바로 입장했습니다.
피카소가 천재라는 것을 매번 느꼈으나
이번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더욱 천재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피카소의 여인들 스토리도 흥미 있었습니다. ㅠㅠㅠ
다시 기억하고 감상할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진정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일찍 다녀오셨군요.
저는 관람객들이 많아서 늘 기달려야 한다고 해서
늦게 찾아 갔는데도,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기다린만큼
피카소에 대해서 이번에 새로운 것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진으로만 접하다가. 실물을 보니 절로 감탄하게 되더군요.
생각했던 만큼 대작들은 없었지만 작품이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란 것도 이번 전시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유럽 여러군데에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데요. 파리 미술관에 골목골목 찾아 갔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지~~ 그리 감흥은 없었네요.
그림들이 이상해서요. ㅋ
유럽에서 직접 보셨군요.
감흥이 없다는 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남들이 좋다고 해도, 나는 싫을 수도 있는거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늘 좋은날만 있기를....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거사님 덕분에 잘 감상했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불하소서_()()()_
영한사전님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