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차 문학기행 시인 이육사편(경북 안동, 8/4 ~ 8/6)
이번 문학기행은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안동에 있는 시인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8월 4일 인천을 출발한 우리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금강송 숲길(일명 외씨버선길 중 일부 구간)을 걷기 위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후문에 있는 도산3리 마을회관에 도착을 했다.
금강송이란 금강산에서부터 경북 울진, 봉화와 영덕, 청송 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를 말하는데,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역에 따라 춘양목, 황장목, 안목송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금강송은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쳐서 근래의 국보1호인 남대문 증개축을 위시해서 문화재 보수에 귀중하게 쓰여 지고 있다.
마을 회관에서 동네 아낙들한테 길을 물어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좁은 산길로 이어지며 철조망으로 된 울타리를 따라 외씨버선길이란 안내표지판을 따라 춘양목 솔향기 길을 걸었다.
이 구간은 춘양목에서 뿜어내는 천연 피톤치드와 솔 내음이 가득한 길이며 널찍한 흙길에 바닥에는 솔 갈비가 융단같이 깔려 있으며 듬성듬성 쉼터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 길이다.
그래서 국립수목원 뒷길은 외씨버선길 중에서도 가장 걷기 좋은 솔향기 길이다.
30여분을 걸어 올라가니 트래킹을 하고 있는 무리를 만나기도 했으며, 조금 더 걷다보면 숲 해설가의 간이 사무실에 도착해 외씨버선길 및 금강송 숲길에 대한 자세한 안내도 받았다.
숲길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서 길게 걷지는 못했지만 금강송 특유의 곧게 뻗은 적송(赤松)들이 주는 시야의 기쁨과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덥지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서둘러 하산한 우리는 봉화군 가곡면에 있는 이종사촌 누이네 향토방 집에서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 누이네 식구들과 안동 이육사 시인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에 위치한 문학관은 현대식 사각형의 문형을 살려 단순하면서도 회색계열의 색깔을 입혀 안정감을 주었다.
문학관은 두 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며, 로비가 잇는 곳이 2층 그리고 한 층을 내려가면 1층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이육사의 생애를 살펴보며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 그리고 본명이 이원록인데 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배경 등 각종의 자료들을 잘 정리해서 전시해 놓았다.
문학관 건물 오른쪽으로 2km를 걸어 올라가면 이육사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소설가나 시인들의 작품과 생애를 살펴보면 독자들은 간혹 작품 속의 인물과 작가를 곧잘 혼동하는 수가 많은데, 그러나 정말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올곧은 삶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는 작가 또한 없지는 않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1944년에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삶을 마친 이육사(李陸史) 시인이다.
그는 일제 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깨끗하고도 맑은 언어로 꺼지지 않는 독립 의지를 노래하는 한편, 나라를 위해서는 몸을 던져 싸움으로써,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적 문학인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1904년 4월 4일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났으며, 친가와 외가 쪽 모두가 일제에 항거한 엄숙하고도 애국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조금 늦게 신학문에 접하게 된 그는 1920년 4월 보문의숙에 들어가며, 이어 대구 교남학교에서 배운다.
1925년 육사는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항일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1926년 잠시 귀국해 문예운동 창간호에 시 “전시(前時)”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 무렵에 발생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된다.
1929년에 출옥한 그는 이듬해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의열단 등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해 학업과 항일 운동을 겸하게 된다. 또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 쉰(魯迅)과 교유하며 문학적 자극을 얻어, 1930년 4월에는 국내의 “대중공론”에 3익(翼) 12방(房)이라는 시를 보내 게재한다.
육사가 본격적으로 창작에 힘을 기울인 것은 1933년 귀국한 뒤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벌인 투쟁 활동과 구금 체험 끝에 그가 희구하게 된 것은 민족정기보다는, 민족을 초월한 인류 평화와 부드러운 안식이다.
이듬해인 1934년부터 그는 ‘신조선사’ · ‘중외일보사’ · ‘조광’ · ‘인문사’ 등에 다니며 언론계에 종사한다.
아울러 1935년 “개벽”에는 ‘위기에 임한 중국 정계의 전망“ 같은 논문을 발표하고, 시와 시조 및 번역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낸다. 1937년에는 신석초 · 김광균 · 윤곤강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내고 여기에 노정기(路程記), 교목(喬木),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하며, 이어 1939년 “시학‘에는 연보(年譜), ”문장“에는 청포도 등을 발표한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시인은 청포도를 통해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 세계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한편 ‘청포도’라는 사물 속에는 화자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으며, 선명한 색채감도 드러나 있다.
여기서 ‘이 마을 전설’은 잊혀 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찾아올 청포도와 같은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화자는 청포도를 푸른 바다와 연결 지으면서 미래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가 바라는 손님은 그가 기다리는 대상으로, 미래 세계를 상징하는 소재이다.
역사적으로는 광복을, 일반적으로는 평화로운 세계를 상징한다. 희망한 평화의 세계가 찾아온다면 화자는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을 만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치열한 정치 활동과 지난한 항일 투쟁 속에서도 그는 문학을 통해 소망이나 신념은 호소하되 직설조의 구호를 토로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전통적이고 목가적인 어조와 더러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징과 은유는 쓸지언정, 어릴 적에 익힌 한학과 가풍에서 비롯된 선비 정신, 그리고 베이징 유학 시절에 접한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시에서도 독립지사다운 품위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는 유교적인 선비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시라고도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 여기서 육사의 항일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그의 항일운동은 1925년부터 시작이 된다.
대구의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애국지사들과 함께 신문화 강좌를 연 것이 발단인 셈이다.
이듬해 봄, 그는 이정기(李定基)와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애국지사들과 독립 운동을 벌이며 자금 모집 방법 등에 대해 협의하고 돌아온다.
그는 곧 사촌형 원기(源棋)와 사촌동생 원일(源一)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한다.
1927년 네 형제는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일경에게 검거된다.
2년 6개월 만에 풀려나 요양을 하던 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검속되었다가 풀려난다. 이런 옥고를 거푸 치르면서 육사의 건강은 심하게 훼손된다.
1932년 이육사는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10월 22일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들어간다.
1936년에는 만주 목단강(牧丹江) 쪽에 머물다가 귀국한 뒤 다시 검거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된다.
육사는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1944년 1월 16일 오전 5시, 이육사는 마흔 나이로 이국 땅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가 숨진 다음해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렇게 이국의 하늘아래에서 숨을 거둔 시인 육사의 시집은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 신석초를 비롯한 문우들에 의해 생전에 써서 남긴 시들이 정리되어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서울출판사’에서 나온다.
이후 한참 후인 1968년에 고향인 경북 안동의 낙동강 안동댐 언저리에 이육사 시비(詩碑)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생전의 행적과 시 “광야(曠野)”가 새겨져 있으며 뒤쪽에는 조지훈의 추모의 글이 담겨있다..
이렇게 “광야”라는 시는 시인이 죽은 뒤 시인의 동생 이원조가 수습한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위의 시에서 광야(廣野)는 잃어버린 고구려 땅인 만주 벌판의 회복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그의 애국심이 풀린다.
적어도 육사가 노래한 광야의 뜻은 한반도에 국한된 식민지 조선의 회복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고 우리 역사의 근본적인 회복은 만주와 고구려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음이 스스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옛날 고구려 땅을 되찾고자 당장 나설 수야 없는 일이 되었지만 적어도 결코 잊지는 않고 있어야 될 것이다.
이상은 내가 쓴 산문집 “바람처럼 재즈처럼” 중에서 힐링의 천제단에 삽입된 부분을 일부 인용한 것이다.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이 시에서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은 바로 그 자신이고, 그 초인의 가슴속에 들끓던 고단한 삶 속의 결연한 의지가 바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아니었을까.
그의 삶은 북방의 칼날 같은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나 고고히 향기를 뿌리는 한 떨기 매화(梅花)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이육사의 시들은 웅장하고 활달한 상상력과 남성적이고 애국지사적인 절조와 품격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의 시들은 다소 관념과 추상에 빠져 시적 깊이를 얻지 못한 데 반해서, “절정”, “광야” 등의 후반기 시들은 절제된 시어로 일제의 군국주의에 맞서는 강인한 저항 정신을 유감없이 표출한다.
특히 “절정”에 나오는 “매운 계절의 채찍”이나 “서릿발 칼날진” 같은 시구는 식민지 지식인이 당면한 현실의 가혹함을 말해준다.
이처럼 암담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 “강철로 된 무지개”를 꿈꾸는 선비의 꼿꼿한 정신적 결기를 보여준다.
이육사 시가 아우르는 정신의 드높은 경지와 독립지사다운 절조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민족 시인’, ‘저항 시인’이라는 호칭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입증한다.
그는 드물게 문학과 삶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 사람이다.
일제 말기에 이 땅의 문인들은 대거 친일 대열에 끼여 제 잇속과 영달을 챙기는 데 급급하며 누추함과 비굴함으로 얼룩진 훼절의 삶을 산다.
그렇지만 이에 비해 고결한 정신과 올곧은 신념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긴 이육사의 깨끗한 삶은 그가 남긴 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청포도, 광야를 쓴 시인으로서의 이육사.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서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이육사의 짧지만 반듯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는 동안 나라를 잃은 일제통치의 오랜 질곡의 상황에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펜으로도 저항시를 써가면서 끊임없이 보여준 그의 민족정신, 저항정신은 우리들 후세가 길이길이 간직하고 기억을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즈음에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한국인들을 모아 엮은 친일인명사전이 2009년 1월 6일에 3권으로 된 인쇄본이 발간되었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학인들(소설가, 시인 등등)이 많이 들어있다.
왜 그 친일인명사전이 생각이 났을까?
분명 이번에 문학관 기행을 통해 육사의 생애를 되돌아 본 결과이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격언 중에 중학교 때 배웠던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즉 ‘펜이 검보다 강하다“ 라는 뜻인데, 문학이 폭력보다는 더 강하다, 그만큼 글이 칼이나 검보다는 더 영향력이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문장이다.
그랬다, 육사는 비록 해방되기 바로 한 해전에 베이징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저항 시들은 지금까지도 아니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