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2
6월8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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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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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SUIxTi3xRE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준정 리차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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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진 특별한 소통 방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파스카 축제는 다른 그 어떤 축제나 명절보다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세세대대로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따라서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운신이 가능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축제를 지내러 이스라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축제 전후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그날이 오면 가정마다 파스카 음식을 차리고 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율법에 충실했던 모범적인 유다교 신앙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도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매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 12살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해도 성가정 구성원들은 어김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순례 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작지만 꽤 난감한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소년 예수님이나 마리아 요셉이나 양측 다 실수랄까 과실을 저질렀습니다.
12살 소년 예수님께서 축제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홀로 남아버린 것입니다.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부모로서 귀가길에 인원 점검을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소년 예수님께서 또래들과 어울려 잘 돌아오겠지, 하고 나자렛을 향한 하룻길을 걸어와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인지한 마리아와 요셉은 당혹해하며 사흘내내 아들 예수님을 찾아 사방팔방을 헤매다닌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갖은 걱정과 후회와 탄식 끝에 사흘만에 아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아냈습니다. 놀랍게도 소년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 사이에 앉아 너무나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기도 했던 마리아는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아들 예수님께 말을 건네고, 소년 예수님도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데,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대화와 소통 방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소년 예수님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한 예수님께서 12살 정도 되니, 슬슬 메시아성이 드러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늘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양육자로서 책임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메시아시니, 알아서 하시겠지? 당신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든, 다 맞는 말일테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있겠어?’라고 단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그의 영적 인간적 메시아적 성장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특별한 한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
보십시오. 소년 예수님은 슬슬 자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도 넌지시, 이제 제가 부여받은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 수행을 위해 떠나갈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반응에 마리아께서 보인 태도를 보십시오.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침묵과 기도 속에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정말이지 억울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든 소년 예수님 12살 체험이었지만, 예수님의 태도를 또 한번 보십시오. 하실 말씀을 하셨지만, 더 이상 과하게 어머니를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또 다시 20년 세월을 침묵과 기도 속에 살아가셨습니다.
마리아와 소년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와 소통 방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지 모릅니다. 때로 분노가 일기도 했겠지만, 결코 분노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하고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상호 동반자로서, 상호 교육자로서 두 분 사이에 언제나 넉넉한 완충 지대를 건설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매사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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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1cShTS7G1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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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마음은 찾는 마음이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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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 비슷한 말씀으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밀을 심었는데 밀밭에 누군가 가라지를 심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키운다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좋은 나무입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알곡을 맺는 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 하느님의 숨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밀인 하느님의 숨을 가라지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반도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은총의 불이 켜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불이 꺼집니다.
아직은 그 실체가 잘 규명되지 않지만, 미래의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학문 중의 하나가 ‘양자역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물질은 어느 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물질이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관찰자가 바라보면 물질이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시선을 돌리면 물질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만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를 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로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부피를 알 수도 없고, 크기를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좋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알곡을 맺는 밀이 되기도 하고, 쭉정이로 버려지는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도 합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면 극한의 환경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마음을 가지면 풍족한 환경에서도 근심의 어둠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제 마음을 잘 드러내는 말이 있습니다. ‘잘했네! 잘될 거야!’ 저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어려운 문제들이 해소되곤 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했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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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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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교회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우리의 죄로 상처 입으신 마음과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뜻한다면, 성모님의 성심은 하느님을 향한 순명과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을 뜻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온전히 일치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시면서,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성모님의 성심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은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조건 없이 무엇이든 다 내주는 그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온 삶을 아드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셨고, 지금은 그 사랑으로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풍부한 은총을 청하여 얻어 주시기에 우리는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성모님의 모성에 호소하며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지적인 면에서 제대로 잘 성장하려면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도 모든 인간은 모성적인 사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부성적이고 모성적인 사랑에 자신을 맡기지만, 성모님의 모성적 돌봄을 통한 전구도 청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체험이 우리 신앙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돌봄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인류를 향한 거룩한 마음을 닮아 갈 것입니다. 세상을, 특히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전구하시는 성모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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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1-46)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루카 2,48)
1)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자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본성이고, 그 자체로 순수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무슨 복잡한 신학적인 설명이나 성서학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고, 필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애타게’ 찾아다닌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걱정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애타게’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과 같고, 주님과 성모님 입장에서는 자녀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애타게’ 우리를 찾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여러 곳에서 발현하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시면서 인간들의 회개를 호소하신 것은, 인간들이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식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입으로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바리사이와 같은 교만이고 위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교만과 위선도 큰 죄입니다. 성인 성녀들 중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성인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끊임없이 회개한 분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주님과 성모님께 큰 기쁨이 되는 훌륭하고 거룩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회개를 멈추지 않는 분들입니다.
2)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창세 4,8), 그들의 어머니인 하와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크게 겪었을 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당연히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살인자가 되어서 하느님 앞에서 쫓겨난 카인의 처지도 하와에게는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 다 하와에게는 사랑하는 아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점만 보면, 야곱과 에사우의 일은, 카인과 아벨의 일과 비슷합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어머니 레베카가 야곱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베카는 큰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의 형 에사우가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달아나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 너에 대한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형이 잊을 때까지만이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 내가 어찌 한날에 너희 둘을 다 잃을 수 있겠느냐?’”(창세 27,42-45)
이 말은, 어머니의 심정과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들들 중에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사랑하는 아들들일 뿐이고, 둘 다 똑같이 지켜야 할 아들들일 뿐입니다. <여기서 둘 다 잃을 수 없다는 말은, 하나라도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3) 지금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일과도 같고,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일과도 같습니다.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이냐?’는, 또는 ‘누구의 죄가 더 크냐?’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 상황 자체가 성모님의 큰 고통일 것이고, 큰 슬픔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는 인류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전쟁은 무조건 중단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사는 교회는(신앙인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기만 하고, 누가 더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만 하면서,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전부 다 죽여서 제거해버리면, 참 평화를 누리게 될까? 참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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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한창현 모세 신부님]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승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승입니다. 곧 예수님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그분은 가장 철저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성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제2독서의 내용,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 주교의 강론을 언급해 봅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시는 천상의 신비를 받아들였기에 성령으로 풍요해 진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티 없이 깨끗하신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모님을 가장 낮은데서 가장 높은 데로 들어 높이고 빛나는 모습에서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성령이 내재하시어 알고 듣고 본 것들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성모님의 마음은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의 뜻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내적으로 믿음을 위한 지혜가 지시하는 대로 외적으로도 육신의 봉사를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몸소 거처하실 교회의 집을 지으시면서 계명을 지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며 겸손의 규범과 영신적 봉헌의 모범을 지극히 거룩한 성모님 안에서 발견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뜻하는 바가 다 있습니다. 내가 즉시 아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 수 없다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마음은 바로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보는 하루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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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될까 봐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제의 부모가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성모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시어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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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톨릭 신앙에서 성모님은 모든 신심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라면 한번쯤은 성모님을 무시하려는 개신교 신자들을 만나 당혹감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지를 그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복음서를 통틀어서 예수님의 인격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사신 분이 누구였는지 물으면 됩니다.
성모님은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잃은 아들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고, 다소 퉁명스러운 예수님의 대답을 듣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라면 적지 않게 당혹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예측하지 못했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당혹감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우리가 분주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멈추어 돌아보는 묵상과 관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신 분입니다.
복음서는 성모님에 대해 아주 짧은 이야기만 남겨 두었지만, 사실 성모님의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섭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티 없이 맑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모습, 하느님의 뜻을 찾아 평생을 기다리며 사신 분. 그런 분을 공경한다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큰 신앙의 모범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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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48~51)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를 잊어버리기에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녀들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자녀들이 일정한 나이(=사춘기)가 되면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부모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부모는 막무가내로 부모의 말에, 말대꾸한다, 고 야단을 칩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나 말대꾸가 아니라 어엿한 한 사람으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단지 걸러 지지 않은 채(=이성적인 사고가 정립되지 않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곧 엄마의 모태에서 일차적으로 육신적 탯줄을 끊고 태어난 자녀가, 이제 성장해서 이차적인 심리적 탯줄을 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장의 아픔이 동반하는 민감한 시기입니다. 이미 경험한 부모들이기에 따뜻하게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면서 성장통을 함께 나누기(=친구가 되어주기와 대화하기)보다는 야단이나 핀잔만 한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과 사이에 간격과 간극 만을 넓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성장에 따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년 예수의 언행은 이제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가족들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겉으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그림의 내면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젠 예수는 더 이상의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는 성모님의 표현에는 아직도 자기 아들이 어엿한 한 사람이라기보단 어린아이로 자신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고 의식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어머니의 의도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기보다 분리의 선언이고 성인이 되었음을 통보하는 것이고 선언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는 말의 이면에는 “당신들이 제게 삶의 본으로 보여 주었고 이제 때가 되어 저 역시도 제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고자 하는데, 아직도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까.”라는 응답이라고 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고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반문과 함께 그 진정한 해답을 넘기신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표현’처럼 예수님은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신앙 교육을 이해했고, 그 깨달은 바를 때가 돼서 실행한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12살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어머니 마리아도 내심 놀라고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써 내 아들이 이렇게 어른이 다 되었나. 더 이상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다, 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따른 당황스러움! 예상하셨겠지만 너무 빨리 그때가 온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이것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식이 부모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분리의 아픔입니다. 홀로서기의 순간입니다. 이젠 예수님은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때가 되면 자식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불린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나야 합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참된 부모의 역할을 본으로 보여 주신 분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범처럼 자식의 말을 따지지도 말고 추궁하지도 말고 단지 이 모든 일을 묵묵히 마음에 간직하여 그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성모님과 요셉처럼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들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있습니다. 그 길에서 자녀들을 잃고 방황할 때, 그리고 자녀들을 다시 찾을 때, 자녀들이 우선 하느님의 뜻인 참된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정향定向할 수 있도록 함께 머물러 주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때가 될 때까지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기다려 주어야 하리라 봅니다. 분리의 아픔이 곧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부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침묵 가운데 아들 예수와 동행하면서 어머니인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마침내 십자가 밑에 서 계신 그 순간이 바로 성심이었습니다.
제가 좋아서 사제가 되었지만, 제 어머니는 저로 인해 사제의 어머니로 말 못할 어려움과 힘듦을 기꺼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고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 대못을 박아드렸음은 미안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보다 더 참된 사제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제와 수도자의 어머니는 다 사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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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배우자와의 잦은 다툼으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친한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가 집단 상담을 권유합니다. 그곳에 한 다섯 번만 나가보고서 결정하라는 것이었지요.
집단 상담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어려움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이혼할 수밖에 없음을 맞장구쳐 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자기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들 대부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도 이혼해요? 자매님이 더 잘못했네요.”
뜻밖의 대답에 자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이야기의 확장이 싫어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줄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가 모범을 삼아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결코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셨던 분,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을까요?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자기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상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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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를 가득 채워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성모마리아는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 주십니다. 성모마리아는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경청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면 매우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장19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장 52절에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뜻 앞에서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이, 겸손하게 서 있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고요하게 움직이시는 사려 깊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께서 당신을 완전히 차지하시고 당신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끔 자신을 성령의 손에 내어 드리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경청, 의탁의 자세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 서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게끔 내맡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성모님 안에서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였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속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기도와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92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것의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계셨고, 이제는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사랑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주검을 품에 안으셔야 했던 어머니,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전념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어머니를 닮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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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루카 2,41-51 (예수님의 소년 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마음으로만
당신을
품습니다
언젠가
이 마음이 곧
내가 되리라 믿기에
마음으로만
품을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지 않고
마음으로나마
품을 수 있음에
고마움과 기쁨으로
살며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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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대축일과 기념일이 극명한 대조를 이룸에서 성모님의 겸손을, 또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저절로 예수성심 신심과 성모성심 신심을 비교하게 됩니다.
성가숫자만 보면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235-279)이 45곡, 예수성심에 관한 성가들(199-210)이 11곡이니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얼마나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받아온 성모성심 신심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성모님의 적자들로 상징되는 역대 교황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열렬한 성모신심을 대하게 됩니다.
오늘 성모성심 기념일의 유래를 간략히 나눕니다. 무엇이든 뿌리 확인이 우선입니다. 성모성심은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 에우데스가 시작하였는데, 이는 예수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성모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따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성심 공경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합니다. 이어 경신사성은 1996년 1월1일자 교령으로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인 바로 오늘 선택 기념일로 지내 오던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성모성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 및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저는 성모님의 사랑과 지혜의 마음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실 참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지혜와 함께 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인 자비와 지혜가 함께 가듯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일화입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때 마다 예루살렘에 아들 예수님을 대동하던 예수님의 부모를 통해 그분들의 깊은 신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큰 일이 생긴 것입니다. 부모는 소년 예수님이 함께 있으려니 여겼는 데 하루 여행길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없음을 뒤늦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겠는지요!
예루살렘에 되돌아온 후 사흘 뒤에야 부모는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드님 예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율법교사들과 대화중 듣는 이들은 모두 소년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고, 이를 발견한 부모는 무척 놀랐다 합니다.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대화가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였고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고결한 영혼의 특징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성모님의 반응은 조건반사적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의 반응입니다. 사태의 진실을 모를 때는 섣불리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둔채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며 묵묵히 바라보는 무관심의 관심의 사랑과 지혜가 제일입니다.
성모님의 침묵의 사랑, 인내의 지혜가 빛납니다. 분명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며 침묵중에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을 성모성심입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말마디처럼 어진 사랑이 산처럼 높고. 지혜가 바다처럼 깊었을 성모성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그대로 보고 배웠음을 입증합니다. 순종하는 예수님에게서 순종의 사랑, 순종의 지혜임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성모님께서 얼마나 하느님께 잘 협조하여 소년 예수님을 키우셨는지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늘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아드님 예수님을 대하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성모성심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요, 영성적으로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지닌 재산이라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뿐이겠습니다. 성모님의 찬미가 마니피캇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전 화답송은 동병상련처럼 생각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미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찬미가는 그대로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늘 푸르른 성모성심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 바로 여기있습니다. 바로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성모성심은 물론 우리의 사랑과 지혜의 성심의 형성에도 결정적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아나뷤의 후예답게 날마다 시편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년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처럼 저는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지성이자 연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로마의 아파트 차고에서 30가정의 남녀노소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황님의 성모님 공경은 해외 사목차 출국과 귀국시 꼭 성모경당에서 인사드리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부분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기사 제목은 “교황 프란치스코 로마 아파트 차고에서 교리교수를 하다”였습니다. 교황님은 안락의자에 앉아있고 평범한 남녀노소의 사람들은 교황님을 에워싸고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폭풍들(storms)’에 의해 좌절케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본질적인 세 말마디를 잊지 마십시오. 미안합니다(sorry), 좋습니다(please), 감사합니다(thank you).”
“유일한 것은 증거(testimony)를 통해서이다. 여러분은 역사를 전달할 책임이 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중의 하나는 그들이 곧바로 일어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끄러진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지지 않는, 노인들이 무시되는 교구는 진짜 신자들 공동체가 아니다. 잊지 마라. ‘노인들은 기억이고 아이들은 약속이다(the elderly are the memory and the children are the promise)’”
“증거(testimony)이다. 주로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첫 조언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가 서로 사랑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 만일 너희들이 다툴일이 있으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고, 아이들을 침대로 보내고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다투라.”
“결코 아이들과 대화를 멈추지 말라. 교육은 대화중에 일어난다. 그들은 혼자 남겨주지 말고 압박하지도 말며, 자유롭게 하라. 삶의 공부는 가정에서 이뤄진다. 무엇인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누가 아니다.”
다양한 질문들에 교황님의 답변 몇만을 인용했습니다. 교황님의 친절한 사랑과 지혜로운 답변들로 가득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끊임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장 많이 사람들을 접견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89세 노령의 사랑과 지혜 가득한 교황님의 성심이 침으로 경탄스럽습니다.
말그대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처럼, 성모성심을 닮은 예수님 성심이요, 교황님의 성심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성모성심, 예수성심을 닮아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내 고유의 성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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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비어서 깨끗한? 채워서 더 깨끗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 티 없으신 성모 성심 축일을 지냄은 당연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실 것이고 그 이유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을 가장 완전히 따르신 분이 어머니 마리아시니 예수 성심과 제일 많이 닮은 분도 당연히 어머니 마리아시지요.
그런데 거룩한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두 분의 마음이 같지만 그 거룩함이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성모 성심에는 ‘티 없이 깨끗하신’이라는 말이 붙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모 성심은 깨끗하심/정결에 방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주님을 위한 거룩한 마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성심이 주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마음에 상처받으시면서도 인간구원을 위해 당신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 곧 인간을 향한 마음인 데 비해 성모 성심은 주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고, 주님을 위한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니 즉시 생각나는 것이 빈 구유입니다.
비어서 깨끗한!
주님께서는 더러운 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안에서 곧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그런데 성모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일절 없어서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런 것들을 마음에서 다 비어내어 깨끗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모셔서 깨끗한 것입니다.
빈 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님을 모신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러므로 저는 오늘 강론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비어서 깨끗한!
채워서 더 깨끗한!
욕심을 비어서 깨끗한!
사랑으로 채워서 더 깨끗한!
주님을 모셔 들여서 더욱더 깨끗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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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하나의 마음!>
오늘 복음(루카 2,41-51)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1-52)
어제는 '예수 성심'을 기억하고, 오늘은 '성모 성심'을 기억합니다. 어제는 '아들의 마음'을, 오늘은 '엄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교회가 '예수 성심'에 이어서 곧바로 성모 성심을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성모님의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성모님께서 아들의 마음에 온전하게 합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년 전 이정숙 사비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님의 유품 중에서 영정사진과 어머님 일기장과 성경 필사노트만 갖고 내려왔습니다. 어머님 일기장은 이 죄인(사비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자녀들에 대한 간절한 기도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루카 사제가 사제의 길을 잘 걸어가게 해 달라는 것과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해달라는 간절하고도 단순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어머님의 모든 일기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엄마의 마음은 늘 아들(자녀)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엄마들의 보편 마음'입니다. '성모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 성가 248번'의 가사처럼, '성모 엄마'는 한생을 아들 예수님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걸으셨고, 항상 아들 예수님 마음 안에 있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 엄마의 마음은 아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였습니다.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은 하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모 성심을 닮아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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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X9tFfJUB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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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성모
성심입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하십니다.
끝을 모르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가족이 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돌아가는
우리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마음을
가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만나셨습니다.
성모 성심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전구하여 주시는
어머니를 향합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예수 성심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성모 성심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신앙입니다.
오늘도
성모 성심과
함께 하느님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는
찬미와 찬양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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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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