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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매화(1)
버들가지와 매화에 걸린 러브스토리
李 退溪-崔 孤竹의 로맨스
인간에게 있어 로맨스만큼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체온을 끌어올리며, 꿈을 꾸게 하는 촉매제도 들물 것이다. 서양과 달리 한국적인 로맨스는 스토리텔링이 특이하고 애잔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찮은 버들가지와 매화가 왜 로맨스(romance)를 빚어내는데 끼이는가? 로맨스란 단어는 중세기 프랑스의 로맨스 어로 씌어진 전기담(傳奇譚:연애 이야기, 情話, 연애사건, 음유시인들이 부른 서정성-서사성 짙은 노래 곡조, 감미로운 정조를 가진 小樂曲 따위의 총칭)들을 말한다.
버들가지는 아직 봄이 오기 전, 막 얼음이 풀리려는 개울가의 물소리를 들으며 피어나 개지를 날리고, 봄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선 버들은 산골짝 개울가 등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고, 제법 번식력도 강해 아름드리로 자라기도 한다. 최근엔 이 버들이 항암제로 쓰인대서 수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에선 이 버들가지가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매화는 버들에 비교하면 제법 향기도 배어있고, 색깔도 청홍백으로 다양하다. 봄을 시샘하는 눈발이 들이쳐도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매운바람에도 버티는 힘이 있어 시인 묵객들의 예찬 소재가 되었다. 앙상한 가지를 매단 매화 화분은 기품 있는 선비들의 차가운 서재에 놓여 있기도 했고, 꽃잎이 흐뜨러지게 핀 매화그루는 정자 가까운 뜨락이나 울타리에 심어진 경우가 많다. 설중매는 조신한 여성을 상징하기도 하며, 반면 홍매는 헤픈 여자에 비유된다. 그런가 하면 청매의 파르스름한 컬러는 너무도 청아해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다. 아무튼 우리의 문화풍토에서 매화는 정조 지키는 여성, 또는 특이한 로맨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버들가지를 노래한 아름다운 詩句는 우리의 고교 古文 교과서에 등장한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窓)밧긔 심거 두고 보쇼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이 시조의 지은이, 그녀를 누가 모르랴. 기생 홍랑(洪娘)인 것을. 그녀의 무덤은 경기 파주군 교하면 청석리에 있다. 교하중학교 앞길에서 서쪽으로 난 2차선 포장도로를 한 오리쯤 가다 보면 길가에 청석교회가 나오고, 그 곳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그 마을 뒷산에 홍랑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그의 애인이자 남편이었던 孤竹 崔 慶昌의 시비가 서있는데 바로 같은 돌 뒷면에 <홍랑노래비>가 새겨져 있다.
물론 홍랑이 최 경창의 부인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최 경창을 홍랑의 남편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워낙 그들의 사랑이 애틋하여 최 경창의 본향인 해주최씨 문중에서 그녀를 받아들이고, 신위까지 받들고 있으니 그를 남편이라 해도 큰 망발은 아닌 듯 하다.
홍랑의 묘비는 1981년 뜻있는 문인들의 손으로 세워졌다. 묘비도 아름다워 이르기를 <詩人洪娘之墓>. 가인의 산소답게 글씨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워 예찬하는 이들이 많다. 바로 그 위가 孤竹 최 경창의 묘다. 이 묘에는 최 경창의 부인 선산임씨가 합장되어 있다. 남편과 부인이 한 무덤에 들어 있고, 그 아래에 남편의 애인 무덤이 있는 것이다. 남편과 애인은 전대미문의 연애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부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아니 최 경창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내일까? 홍랑은 또 어떤 여인이었을까? 고죽 최 경창의 풍류 반려. 그는 퉁소를 기막히게 잘 불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고죽은 지금 오히려 홍랑을 통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내게도 풍류 반려가 있었던가?
시인 李白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왜 푸른 산에 사냐고 묻는다면(問余何事棲碧山)
말없이 웃을 뿐 마음 한가한데(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아스라이 흘러가는 구나(桃花流水渺然去)
사람 사는 세상은 아니네(別有天地非人間)
홍랑이 누어있는 무덤가의 아름다움은 이백의 시가 무색할 것같다. 홍랑의 무덤을 베고 누워 한바탕 꿈을 꿔보고 싶은 마음도 울어난다. 홍랑의 본명과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함경도 출신으로 시문에 뛰어나 시조는 물론 漢詩 절품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지조가 굳고 불타오르는 정열을 지니되 두려울 바가 없었다고 한다.
최 경창이 北道評事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막중에 머물며 정이 들어 이듬해 최 경창이 서울로 귀환함에 쌍성(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까지 따라와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마침 봄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치밀어 오르는 사모의 정을 참을 길 없어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조이다. 이 시조를 버들가지와 함께 인편에 보내니, 이 연시를 읽은 최 경창이 한역하여 애모의 글과 함께 답장을 띄웠다고 한다. 아래에 옮긴 이 친필 연서는 1981년 김 동욱 교수가 발굴 소개한 것이다.
“만유 계유(1573년)가을, 나 북도평사로 부임했을 때 홍랑 그대도 나의 막중에 같이 있었소. 다음 해 내가 서울로 올라올 때, 홍랑이 따라와 쌍성에서 이별했었소. 헤어지기 전 咸關嶺에 이를 적에 날이 어둡고 비가 캄캄하였소. 을해년(1575년)에 내가 병을 앓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을 때, 그대 홍랑은 이를 듣고, 일곱 밤낮을 걸어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소? 그때는 함경도 사람들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령이 내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면직이 되고, 그리고 홍랑은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소....”
둘의 사랑은 나라의 금령까지 어겨가며 병든 정인을 찾아 나서게 했고, 그로 인하여 관직을 박탈당한 정인은 일고의 후회도 없이 그녀를 기리는 답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홍랑은 3년의 侍墓살이를 하고 수절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정인의 발아래 묻혀있다. 마치 퉁소를 불고 있는 사랑하는 이의 발아래 몸을 던지고, 음률을 헤아리고 있는 듯 하다. 430년 전 버들가지와 함께 들려 보낸 시한 수. 그 러브 스토리가 후대 문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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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매화(2)
이제 화제를 매화가지로 넘겨야할 듯하다. 이 퇴계의 매화음(梅花吟)과 두향의 러브스토리도 따지고 보면 매화가지에 걸린 심장박동의 박차가 만들어낸 작품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퇴계는 알고 보면 매화에 홀린 선비였다. 또한 요즘 말로는 매화마니아 아니었을까?
옛 그림에 심매행(尋梅行)이 있다. 봄이 되면 선비들이 겨울의 주름을 털어내기 위해 매화꽃을 보려고 나들이에 나서는 것이다. 요즘과 달리 심매행은 대단한 호사였다. 몸종으로 견마잡이 세우고 선비는 술동이를 진 노복까지 따라 붙인 폼이 가관이다.
퇴계 만큼 매화를 사랑한 이도, 매화에 미친 이도 드물 것이다. 조선 시대의 매화송이 3백여 수나 되지만 그 중 퇴계가 남김 것이 1백 여수나 되었다. 그는 매화음(梅花吟)을 많이 남겼다. 그가 수양매를 보고 지은 시는 특이한 데 수양매는 꽃잎을 아래로 드리우고 속을 내보이지 않은데서 붙인 이름인 듯 하다.
한 송이가 등 돌려도 의심스런 일이거늘 (一花纔背尙堪猜(纔;겨우 재. 堪;견딜 감)
어쩌자 드레드레 거꾸로만 피였는고 (胡奈垂垂盡倒開)
이러니 내 어쩌랴, 꽃 아래 와 섰나니 (賴是我從花下看(賴;힘입을 뢰)
고개 들어야 송이송이 맘을 보여주는구나 (昻頭一一見心來(見心來;꽃심이 보였다)
퇴계 그는 앵돌아진 여인의 마음을 타박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가 살며시 다독였다. 그에게는 가까이 두고 어루만진 매화분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거처가 탁해지면 매화분을 먼저 씻기고 옮겨 놓는, 일은 잔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그의 진정이 구석구석 숨어 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杜香이 그런 경우 아닌가 생각된다.
관기 두향이 퇴계를 사모했지만 그 사내는 그녀를 곁에 두지 않았다. 두향의 애간장이 녹을 건 당연지사. 마침내 퇴계의 마음을 얻은 것은 조선 천지를 뒤져 찾아낸 기품 넘치는 매화 한그루였다고 한다. 두향은 그 매화를 퇴계에게 바쳤고, 퇴계는 단양군수 시절 동헌에 심어놓고 애완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로부터 두향에게도 곁을 줬다고 한다.
두향의 매화는 퇴계가 새 임지로 떠나면서 도산으로 옮겨져 명맥을 이었다. 단양에 홀로 남은 두향은 수년 뒤 퇴계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죽음에 얽힌 설이 분분하지만, 앉은 채로 숨이 딱 멈춰버렸다고 한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 편 산자락에 남아있다. 그 묘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했다는 것인데 퇴계의 후손이며 국학자인 李 嘉遠이 두향의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탓이다.
수몰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이 가원의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 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두향의 일편단심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매화가지에 홀린 퇴계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은 “저 매화에 물 줘라.”였다고 전해진다.
매화음(梅花飮)도 좋을 일이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退溪의 梅花詩帖에서 옮김.
우리는 이 각박한 자본 상업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컴퓨터는 온갖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내고, 그 사이를 바이러스라는 괴물이 휘졌고 다니며 불랙박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참으로 혼미하기 짝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젠 옛날 같은 로맨스도, 러브스토리도 스러진지 오래되었다.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라는 홍랑이나 “물에 잠겨서라도 이 곳에 있겠소”라고 한 두향은 어떤 여인이었나? 금령까지 어기고 정인을 위한 사랑에 눈먼 최 경창이란 사나이는 또 뭐냐? 임종을 맞으며 “저 매화에 물 줘라.” 고 여유를 부린 退溪는 지금 저 세상에서 杜香과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