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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서 새댁 시절에는 콩나물국을 맛나게 끓일줄을 몰랐었다,
어디 콩나물 뿐이리 김치도 지대로 담을줄을 몰라서
하아~~~끼니 돌아오는게 무섭게만 느껴졌으니까,
결혼 하기 전까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직장에 다닌다고 빨래한번도 해본적이 없는것 같다.
흑흑 엄마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
우리 엄마는 고깃국 같은거 과일 같은거 드실줄 모르는줄 알고 살어왔으까
어머니 78세 정정한 연세임에도 병원한번 안가시고 살으셨는데 돌아가실 무렵
속이 쓰리고 아프셔서 병원에 가셨는데 그게 위장 내시경 이였던가보다
지금 같으면 좋다는 음식이라도 찾아 챙겨드렸으련만 흑흑 돌아가실 연세가 되셔서
아픈줄 알고 올캐가 병원에 모시고 다녀왔는데 그게 위암이셨었는데
아무런 조치도 하지않고 오빠 집에서 드시기 편한 죽을 쑤어 드렸었다.
나는 그때 시집살이를 하느라고 맘고생을 디지게 하면서도 애들 뒷바라지 하면서
할수 있는 일이 신문배달 하는 일이였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흑흑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겠구나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녀지는것 같았었다.
막내딸 시집 보내놓고 얼마나 맘을 조리시며 살으셨는데 사니 못사니 애를 태웠으니
어머니가 아프시던 시절에는 모두가 시골에서 올라온지 얼마 되지않아서
오빠도 형편이 어려웠고 좀 사는 큰 오빠네는 올캐언니가 아주 시집 알기를 진짜
우리 시어머니 말씀처럼 발고락에 때만큼도 못하게 여기었었다.
그런 올캐를 이해가 가는건 우리 큰 오빠가 생 고집쟁이 에다 직장이 없었고
올캐가 직장에 다니면서 가장 노릇을 했고 나중에는 오빠랑 같이 기름집을 냈지만
맨날 만나기만 하면 꽝꽝 부디치는 쇳소리가 나는 오빠 부부였다.
좀 산다고 어찌나 시집 알기를 우습게 알던지 이담에 엄마 돌아가시어도 못오게 할꺼라고
맘을 단단히 먹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저기 뚝섬에 방하나를 얻어서 큰 오빠랑 엄마랑 나 그리고
오빠의 돌이 갓지난 둘째딸을 오빠가 데리고 나와서 우리랑 함께 살았다.
.이야기를 하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둘쩨 오빠가족이랑 시골에서 같이 살았던 엄마.내 위에 오빠
나 동생까지 이사를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둘째 오빠는 생활이 어려워서
큰 오빠가 방이라도 얻어 주자고 했던지 반대를 하는 올캐하고 싸우고 조카를 데리고
나와 버린것이다 그때 큰오빠는 뚝섬에 있는 양말 공장 에서 공장장 직업을 가지고 게셨었다.
내 어머니를 안모시겠다면 내가 나가서 어머니랑 살겠다 하고 고집을 부리시고 나오신 것이다.
나는 서울로 이사오면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봤었다.
내위에 오빠는 어디 직장에서 잠자고 내 동생은 이종사촌이 경영하는 농장으로 뿔뿔히
헤여지게 되었다 . 그래도 시골에서는 부자 소리 들으며 선비출신인 집이라
새벽이면 아부지 글 읽으시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오곤 했고 일 도와주는 머슴오빠가
두사람이나 있었는데 문을 열면 연탄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작은 부엌이 있고
그안에 방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오빠랑 엄마 나 조카가 살게 된것이다.
돌이 갓지난 조카를 업고 뚝섬 공장 지대를 돌아다니며 공순이 구하는 광고가 붙었나
두리번 거리며 길도 익힐겸 다니다 보니 바로 집앞에 여공 구함 00명 이라고 써잇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시골 촌년이 등에는 조카를 업고 수위실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 모집 하나요 하고 물으니 수위 아저씨가 나를 위로 아래로 한번 흘터 보더니
애기는 어떻게 하고 일 다닐라고 그라요 하시는 것이였다.
ㅎㅎㅎㅎ
마침 그때 오빠가 일하는 공장에서 아랫사람이 오빠에게 잘 보일려고 반지 하나를 사다 주더라네
지금 생각해 보니 새빨간 비취 보석반지였는데 올캐하고 단단히 토라진 오빠가 옛다 너나 껴라
하고 주시길래 또 끼여보니 꼭 맞아서 구냥 끼고 댕겼는데 으미 그게 아기 엄마인줄 알고
아기는 어쩔거냐고 ㅎ하하하하
수출하는 쇄터를 짜는 공장이였고 미싱 기술이 없는 아가씨들은 실팝을 뜯어내거나
목부분을 가위로 잘라내는 일을 했고 나도 그일을 하는데 아가씨들이 흘깃 흘깃
아줌만가 아가씬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곤 했엇다.
지금 같으면 한바탕 떠들어 댈 내가 그때는 아주 말이 없는 촌티가 풀풀나는 가시나 였다.
시골에서 이사오고 바로 다음날 취직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하고싶다 ㅎㅎㅎ
아이고 앞대가리가 먼 야그였는데 옆길로 한참을 새불고 말었네
아차 ~~콩나물로 시작을 했지 ㅋㅋㅋㅋ
중간은 생략을 하고 1970 년 10월 달에 서울로 올라와 공순이로 살다가 시어머니와 언니 소개로
지금 남편이랑 결혼을 하고 결혼한 날부터 시어머니는 야단을 치기 시작을 하셨다.
결혼식장이 봉천 3동 사거린가 있었는데 집에서 아주 가깝거든
ㅎㅎㅎ 결혼식 마치고 한복을 입고 걸어서 집으로 왔더니 야단 야단이 난것이다.
택시라도 태워서 한바퀴 돌고 와야지 새댁을 걸어오게 했다며 우리 언니 또 눈치 없는 남편한테
야단 야단을 치시는 것이다.
야단 맞어도 싸것네.
시댁은 봉천동 달동네 찻길에서 몇개단을 올라가면 고만 고만한 집들이 게딱지 처럼
다닥 다닥 붙어있고 구중에 한집이 남편과 시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일자로 된 집인데 방이 세게 둘은 월세를 주었었는데 며느리를 맞이 하면서
방을 빼셧다. 가운에 작은 토방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두갠데 하나는 부엌이 달린방
하나는 연탄광이 붙어있고 길쪽으로 퍼새식 화장실이 있었다.
퍼새식이랑 연탄광 위가 장독대 였고 이런 집들을 시유지 집 즉 땅은 시의 땅인데
건물만 본인들 것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진작부터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다가 아들이 군대에서 돌아오자 그만 두시고
심심 풀인지 돈버는 일 때문인지 연탄이 꺼지면 넣고 살리는 숯하고 콩나물을
길러서 팔으셧다. 덩달아 며느리인 나는 콩나물을 팔게 되엇는데
아침이면 바가지를 들고 이웃아줌마들이 할머니 콩나물 주세요 20 원 어치요
30원 어치요 이랬는데 ㅎㅎㅎ 세상 물정 모르는 며느리는 뭉텅 뭉텅 퍼주었다.
연탄도 질이 안좋았던지 동그랗게 쌓아서 묶은 숯이 한 50개는 되나
ㅎㅎ 그걸 팔리는게 아니라 연탄불 잘 껴트려 먹는 며느리가 다 쓰다시피 했으니
야단 야단을 맞을수밖에 ....
집에서는 누구한테 야단이란걸 맞어 본적이 없이 살다가 날이면 날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니
아...어디론가 훌훌 날아가 버렸으면 ...
남들처럼 센스가 있나 인물이 이쁘기를 하나 시어머니 비위를 맞출려고 여우짓을 하나
곰같은 며느리가 눈에 가시처럼 보이셨는지 날마다 며느리 괴롭힐 궁리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서 나중에는 쫑달 쫑달 말대꾸를 하고 날잡아 잡수쇼 하고
대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도 없는 며느리였던것 같다.
홀시어머니로 아들하나 달랑 낳아 키우면서 얼마나 애지 중지 하셨을 탠데
며느리년 한태 아들을 뺏겨버렸으니 뭔가 트집을 잡아서 괴롭혀 주고 싶으셨겠지
근데 아주 미련햔 생각이셨다. 당신 아들이 편하려면 그러지 말으셧어야지
어머니랑 살아온 23년 동안 ㅎㅎ 어머니는 호랑이띠 남편은 소띠 나느 토끼띠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 거리고 말이 없는 소는 그러거나 말거나
했어도 속이 탔던지 그때 사진을 보면 피골이 상접해서 산송장 같다.
싸움속에서 자란 아들과 딸아이에게 내가 간이라도 꺼내줄 만큼 잘해주고 싶은것은
한참 자랄때 느그 때문에 내가 발목이 잡혀 산다고 원망아닌 원망을 햇고
애들이 커가도 이쁜줄을 모르고 참 철이없는 엄마로 살아서 많이 미안하다.
시어머니는 고기를 좋아하셧고 나랑 남편은 채소를 잘먹고 고기는 싫어했다.
여유롭지도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자주 만들겠는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끼니때마다라도 고기 반찬을 해드리면 생트집도 안잡으시고
우리 며느리 우리 며느리 하고 이뻐라 하셨을지도 모르는데
나중에는 당신 아들보다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 돈도 잘벌고 재태크도 짱나게 잘해서
지금 이렇게 당신 아들 일 못하게 하고 공기좋은 곳에서 사는거 보시면
에구 장한 며느리 하고 다독여 주시지는 않을까, (착각은 자유 잉께로 ^^)
콩나물 야기 한다믄서 사설이 참 길기도 하다.
친정에서는 시골이라 콩나물을 키울때 짚을 태워 그 재를 콩놓고 재놓고 이렇게
밑둥이 뚜러진 동이에 담은 다음 방에다 검은 천을 씌워놓고는
물을 줄때마다 밖으로 내놓곤 해는데 시어머니는 콩나물을 어머니 방에다 두시고
수시로 물울 주셨다.
그생각이 나서 큰 고무통에다 나무 토막을 놓고 밤에 잠이 깨면 물을 퍼주고
또 퍼주고 시어머니처럼 콩나물 시루를 밖에 내다가 물을 주지 않으니 참 편하다.
콩나물 말고도 청국장 만드는 방법도 시어머니 하시는걸 보고 배웠다.
친정에서는 청국장이라는 이름도 들어본적이 없거등
전라도 에서는 청국장도 해먹지 않았고 만두라는것도 서울가서야 먹어봤다는거 아닌가.
처음 시집가서 설에 만두를 만들었는데 떡국에다 만두를 넣고 또 고기를 볶아서 넣었는데
우엑~~~~~~~~~~~~~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다.
친정에 살때에도 오빠랑 올캐 또 조카들은 고기를 안먹으면 머라드라 허기가 진다고 하드만
나는 집에서 소고기국을 끓이면 수저를 따로 감춰놓고 밥을 먹어야 햇었다.
으~~~~소 냄새~
지금은 어쩌다가 먹기는 하지만 남편하고 나는 여전히 고기 체질은 아니다.
해산물은 바지락 낙지 문어 전어 조기 갈치 다 잘 먹는 종류지만 왜? 그 큰눈을
껌벅거리며 순해 터진 소를 죽여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먹어도 조금씩만 먹으면 소들이 유행하는 병에도 안걸리고 닭이나 오리도 마찬가지
항생제가 들어간 사료를 먹지도 않을것인데 ㅎㅎㅎ 이조시대 여인인감^^
시골와서 염소를 길렀는데 사료를 주지않고 풀만 먹이느라 방목을 해서 잘도 키웟다.
남편은 사료를 먹여야 한다고 우겼지만 됫당께요
우리 자랄때 염소하고 소는 풀만 묵고도 잘만 살었당까라 하고 이겨 먹었다.
사료도 안먹고 풀만 먹고도 까만 털이 반들 반들 윤이 나는 염소를 또 키우고 싶은데
아그~~여행다녀야 하므로 집을 자주 비우니 팔아버렸는데 야호~~
이제는 뒷집이 있으니 서로 집 봐주므로 염소 키워도 되것네
엊저녁에는 밥 묵고 좀 지나서 바로 쿨~~했더니 11시에 깨서 또 글썼나 ?
글고 잤는데 꿈을 꾸다가 깨었다.
꿈에 아부지가 잘 보이지 않는데 엊저녁에는 아부지가 나오셔서
올캐가 밥을 차려주지 않아서 그런다며 콩잎을 뜯어와 밥을 드시고 계셨다.
아부지~ 오빠가 용돈을 안드리나요 하면서 아부지 고향인 넙도 에 아부지
친척이 없으시냐고 물어봣다. 그랬더니 부엌에서 언니딸 조카뇬이
머시라고 하는데 작은 올캐처럼 하는게 아닌가. 머여^^
글고 아부지라는 사람은 어째 큰오빠 모습이였을까이 아무래도 납골당에
아부지 어머니 작은 아부지 작은 엄마 큰 오빠가 함께 계시는데
그안에서 싸움을 하고 계시는건 아닐까 ㅋㅋㅋ
십 남매중 딸 여섯은 납골달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올캐들하고 오빠 동생들은
모두 한통안에서 같이 살어야 하는데 조용히 지나가는날이 있을라나 ^^
클랐네 날마다 요라고 캐캐묵은 이야기 늘어놀라고 허는디
사람들이 징그럽게 잘도 지꺼린다고 머시라고 할꺼 같은디 우찌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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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풀꽃사랑님.
힘드신 세월 잘 버티셨습니다.
우리들 살아온 세월들은 왜 그리도 힘들고
가난 했었는지요?
고생도 많았고 가족사에 눈물도 많았습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부모형제를 챙겨야하는 마음
요즈음 시대 같으면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상상도 못할 일들입니다.
가난해 고생은 하셨지만 지금은 그 시절을
생각하며 웃을수 있으니 성공하신 삶이
되셨습니다.
남은 삶 건강 하시고 좋은 날 보내십시요.
지난 세월 진솔한 이야기 고맙습니다.
솔체님 진심으로 손잡아 주시고 다독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만큼 시린 날들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 동갑들끼리 모임도 갖고
마음을 나누며
행복이다 라고 소리 지르고 싶도록 여유로워진 날들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다지 많이 남지 않는 날들은 웃음 가득한 날들로 채워가도록 하자구요
고운 나날 되시어요 ^^
지도 한참을 읽다가 앞대가리가 먼 이야기 인지 까 묵었심더 ㅎㅎㅎ
중간에 정신을 차리시고 다시 봐로 잡으셨네요 ㅎㅎㅎㅎ
지는 콩나물 시루는 보기도 싫심더. 종가에 종부로 들어가서 제사가 너무 많으니 일년내내 콩나물 시루는 방윗목을 차지하고 살았심더
제삿때 마다 콩나물 한시루가 들어갔다 카면 믿겠심껴?????ㅎㅎㅎㅎ
그래서 콩나물은 보기도 싫드만 요즘은 이상하게 얼큰한 콩나물 국이 자주 생각이 납미더.ㅎㅎㅎ
아이고 무상초님도 하하하하^^ 하도나 길다란 주절거림을 늘어놓다보니
무슨 이야기였더라 다시 한번 윗글을 보고서야 ㅋㅋㅋ
주제를 알게되는 주책바가지 입니다.
종가에 종부로 살으셨으니 저는 게임도 안되는 고생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우리 나이때는 고생을 고생이라 여기지 않고
그냥 주어짐에 열심히 사는것이려니 하고 숙명처럼 살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하하하 제가요 요즘은 콩나물 깍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씹어먹어요 고소하더라구요 ㅎㅎㅎ
어머니의 간절함이 베어있네요.
저두 2년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만
맘놓고 울지도 못했답니다.
엄마에게 너무 잘못한거 같아서요.
맘놓고 울수있는것도 행복이란걸 느꼈답니다.
그 시절 대부분 어려웠지요.
요즘처럼 풍족한 시대에 뭐가 아쉬울게 있습니까.
제 얘기를 보는듯하여 차곡 차곡 읽었습니다.
이제 웃을수 있으니 그래도 지난세월이 그립지요.
건강하세요..
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였던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자기만을 알기에 무서운 일들이 서슴없이 일어나고
죄의식도 못느끼고요
어렵게 살아오긴 했지만 선한 사람들이
선한 마음으로 살았던 때가 그리울 때가 많아요.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 이젠
정말 행복하다고 늘 자랑을 하게 되네요
긴글도 읽어주시고 정성어린 마음 너무 감사드립니다
단숨에 단편소설 한권을 읽은듯 감독적으로 읽었어요.
지난 세월속에 서러운 편린들~
우리모두의 이야기예요~
풀꽃사랑님~이제 맘 맞는 이웃과 어울려
염소도 키우고 토종닭도 키워 계란도 얻고 병아리도 까고
알콩달콩 멋진 전원생활 이야기 자주 자주 들려 주세요~
물레미님 바램대로 날마다 오손 도손 새날을 맞이하며
파란 하늘처럼 푸른 생각을 하며
지금은 아득한 옛이야기 꿈인듯 돌아보며
긔리 노을처럼 곱게 저물러 가려고 합니다
고마워요 지루하셨을텐데도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동받고 갑니다
모진 고생을 하셨어요. 그런데 글을 읽다가 생각을 했지요. 정말 잘쓰신글이다. 음식으로 치면 아무 조미료를 넣지않는 순수 그대로 입니다. 미사여구없이 오직 진실만을 썼다고 할까요. 정말 긴글이지만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시어머니가 저세상에서 우리며느리 예쁘다고 맨날 하실 겁니다.
동홍아빠님 칭찬에 용기가 하나더 생겨낫습니다
맛갈난 삶이라고 스스로 만족해도 되겟네요
구질 거리지만 마당에 풀포기 뽑으면서도 행복하고
아침마다 솟아나는 밝은 햇살도 어찌저리 곱답니까요
아침 인사를 이렇게 합니다
차암 평화로운 아침이네요
그동안 맘고생 많았다고 좋은 이웃을 보내주셨나 봅니다
동호 아빠님을 만남도 행운에 속하니까요 ^^
우리 모두의 살아온 이야기 같습니다.물론 여성의 이야기이며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이야기가 주가 된것 같습니다
60년대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가감없이 쓰신이야기같습니다.누구나 서울에 올라와서 여자들은 공순이 남자들은 공들이 이런식으로 호구지책을 해결했지요. 그리고 서울의 달동네에서 방하나에 부엌이 달린 집에서 연탄을
피우면서 세끼를 해결하기 급급한 삶을 살아왔지요.이야기를 읽다보니 구로동에 수출공단이생각이 납니다.
달동네에서 공동수도물을 아침일찍히 줄울 죽서서 기다리며 물지게로 저서 먹었던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아하 물지게로 물을 길러다 드신 새대는 아니였답니다 수도물이 나오긴 했는데 오밤중에 나오면
물 받느라고 밤잠을 못자곤 했지요.
공순이 시절에도 아줌마 시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 보살피며
부업을 하여 반찬거리라도 사려고 했었고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아온것이 오늘에 평화를 가져다 준것 같네요
모두다 그렇고 그런 시절을 살아온 우리들 입니다
이제는 그 보상을 받느라고 노후만은 편안하지 않나 싶네요
배드로 용상님 긴글 읽어주시고
진심으로 공감하심에 감사드립니다
60년대 옛추억을 더듬게 하는 리얼한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역시 한시대를 공유하면서 살아왔기에 느끼는 감정은 동일한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지요 한 세월의 단편소설이네요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그렇게 힘이드셨군요
돌아가신 시어머니께 큰절아라도 하고싶군요 막내라 그런지 저는 얼굴을 붉히며 야단을 맞아본 기억이 없담니다
도은님 맘고생하지않고 살으셨으니 복이 많으신 분이신가 봅니다.
어찌보면 시집살이도 자기 하기 나름인것 같어요.
좀 살랑거리고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더라면 좋았을걸
고지식한 탓에 아닌건 아니라고
ㅎㅎㅎ 이제는 모두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 뒤돌아 보며 웃음을 짓게 하네요
도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