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根源)에서 우리 다시 만나리 김병규(金秉圭) 선생을 보내며
鄭 鏡 그날따라 꽃들은 사무치도록 곱게 피어 있었다. 영결식을 올리던 교정이, 마지막 안식처로 향하던 고향길이, 바다가 한눈에 들어서는 장지가 온통 구름 같은 꽃으로 자욱했다. 하늘은 꽃과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시던 고인의 뜻을 헤아렸는가보다.
갑작스런 부음을 들은 것은 4월 4일 오후 1시였다. 평생 봉직하시던 대학의 제자로부터 전화가 있었다. 현석(玄石) 김병규(金秉圭)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법원에 있는 선생님의 제자가 또 전화를 했다. 그날 아침 6시 30분 일본 나고야의 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말하고 있는데 야 더 이상 물을 계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날벼락 같은 운명소식은 우리에게 덮쳐왔다.
꿈만 같았다. 며칠 전, 그렇다 바로 3일 전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즐겁게 통화했던가. 내가 참석했던 한국수필문학회 제정 제 18회 현대수필문학상 시상식 소식을 전하자, 선생님은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썼던 대학 교재의 출간 소식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다음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되어있는 부부동반 여행이야기는 비치지도 않으셨다. 오로지 수필이야기와 학문 이야기뿐이었다.
얼마 전부터 선생님은 부산에 거주하는 마음에 드는 수필가들로 수필문학회를 만들고 싶어 하셨다. 나 같은 무명이야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그런 일을 의논할 수 있을 만큼 나를 가깝게 생각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만한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친정아버지와는 대구사범 선후배 간이셨다. 게다가 몇 년 전 모교 재직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의 가장 존경했던 스승이기도하다. 청렴하기로 널리 알려진 또 한분의 제자 조무제 대법관과 함께 세 분은 지극히 서로를 아끼는 사제지간이었다. 지금도 남편이야기만 나오면 선생님의 눈가는 젖어든다. 심성이 여리고 따뜻하기 때문이리라. 선생님은 남편의 묘비명을 이렇게 써주셨다.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근원에 이르르면 거기엔 기쁨도 슬픔도 없어질지니 우리 그곳에서 다시 만나리 그렇다. 결국 죽음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의미가 되리라. 카톨릭에서는 먼저 가는 죽음을 주께서 넋을 거두어가는 반가운 것으로 본다. 그것은 앞서 간 제자에 대한 뜨거운 헌사(獻詞)이자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 애사(哀詞)는 아니었을까.
선생님의 시신은 이튿날 오후 세시 김해 국제공항으로 운구 되었다. 선생님께서 현해탄을 넘어오던 날은 몽고에서 휘몰아치는 흙바람으로 공항 벌은 안개 속처럼 희뿌옇게 눈앞을 가렸다. 마치 선생님의 마지막 수필집 『바람이 부는 길목에 서서』란 제목 그대로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 붙인 제목 같기도 하다.
선생님은 평생 출판기념회라고는 가진 적이 없었다. 수필뿐만 아니라 법학, 철학 등 많은 저서를 펴냈음에도 출판기념회를 권유받았을 때마다 ‘수필은 겸손의 미학’이라거나 ‘숨어서 사는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으로 극구 사양했다.
자녀의 취업문제도 집안 대소사 심지어 자녀 혼사까지도 주변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셨다. 이번 여행만 해도 팔순을 기념하는 뜻에서 자녀들이 억지로 보낸 여행이라고 한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꼭 황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날 영안실을 들러 어디를 어떻게 해서 집으로 왔는지 모른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제자들과 가족, 대학 측, 부산시 문협 관계자들과의 의논 끝에 문협장을 치르기로 했다는 기억밖에 없다. 격으로야 현직 이사로 계시는 대학의 학숙장이 더 빛날지도 모른다. 한때는 대학 부총장으로, 재단 이사장으로 계셨던 분이 아닌가. 하지만 모두들 선생님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문필가요 문협장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작년 가을이었다. 여류 수필가 한 분과 선생님을 모시고 서울 나들이에 나선 적이 있었다. 평소 여행을 워낙 좋아하셨기에 사양을 않으셨다. 종횡무진의 지식과 풍부한 화제를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종종 선생님을 모셔왔으나 장거리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목적은 부석사, 희방사를 둘러 죽령을 보는 것이라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서울 수필계를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것이 아니었나싶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권유로 오창익 선생이 주재하는 <창작수필> 워크 샵에 참석하였다가 장소를 달리하여 <에세이문학>의 박연구 선생을 만나도록 해 주셨는데, 그때의 만남이 없었어도 오늘 내가 이 글을 쓸 기회가 생겼을는지는 의문이다.
그때 인상에 남는 장면은 법학교수로 있는 내 동생의 서가를 구경하면서였다. 전공인 법학 쪽 보다는 문학원서들로 들어찬 책꽂이를 보시더니 “여기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있구나. 하기야 법학가지고서야 어디 창작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야 말이지. 평생 방황하느라 결국 둘 다 어정쩡하고 말았으니”라고 독백처럼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나는 왜 선생님이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평생 돈과는 거리가 먼 문학에다 열정을 쏟아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가난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는 듯싶었다.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인생을 배운 기회였다. 수필은 자연과의 친화력이라고 하신 말씀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식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명색이 약용식물학을 전공했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보는 것마다 시요 수필이 된다. 희방사를 지나 죽령을 넘을 때였다. 황금빛 낙엽송이 무리 져 있는 소백산 줄기를 바라보시며 기다렸다는 듯이 키다하라 하쿠슈의 <낙엽송>이란 시를 읊었다. 낙엽송 숲을 지나 낙엽송을 골똘히 보았네 낙엽송은 쓸쓸하였네 노년의 심사가, 아니 심안(心眼)으로 본 인생관이 그토록 쓸쓸함을 느끼게 했던 것일까.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그동안 부산시 문협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부산 예총 회장이신 최상윤 선생과 부산문협 회장이신 이문걸 선생은 그 바쁜 중에도 문협 이름으로 신문에 부고를 낸다, 문상객을 맞는다, 만장을 준비한다, 노고가 고맙기 만했다.
뿐인가. 한국수필문학진흥회에서는 공덕룡 회장 명의로 조화를 보내 오셨고 <에세이문학>에서는 매원 박연구 선생이 직접 문상까지 와주셨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필생을 건 일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평소 선생님께서는 박선생의 수필 문학에 대한 혼신의 정열을 화제로 삼았는가하면, 매원 선생 또한 수필이 신변잡기로 매도당할 수 없는 대표적인 작가로 선생님을 꼽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 비어진 자리가 어떻게 메꾸어질까.
영결식은 4월 8일 오전 8시 평생 봉직하시던 동아대학교에서 거행되었다. 예총회장과 문협회장 두 분의 문인다운 조사는 가뜩이나 젖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흐느끼게 했고, 선생님의 문학을 진정으로 흠모하며 따랐던 유병근 선생님의 눈물 젖은 헌사는 선생님을 잃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하지만 꼭 슬퍼만 할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제 아무리 화려한 생애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릴케는 삶을 ‘육신의 옷을 걸친 불치의 고통’이라고 했다. 병고를 모르고 평생 창작의 기쁨에 취하다 가신 선생님의 생애가 초라할 리 만무하다.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근원에 이르기를 바랐던 분이 아니신가. 신록이 움트고 꽃들이 찬란한 이 계절을 택하여 가신 뜻 또한 그러리라 여겨진다.
영구는 이어 대학 설립자의 동상이 있는 교정으로 이어졌다. 바로 3년 전 남편의 영구가 섰던 그 자리다. 그토록 못 잊어 했던 제자와는 하마 상봉하신 것은 아닐까. 축하잔치라도 벌리듯 4월의 봄은 꽃을 무더기로 실어 나른다. 병풍처럼 둘러싼 대학 뒷산에서는 지금 막 화사한 파스텔화를 한창 그려 대고, 두 분이 평생 같이 학문을 논하며 드나들었을 교정에는 소복한 여인 같은 목련이 줄지어 섰다.
연분홍 벚꽃 잎이 이별가처럼 휘날리는 대학가를 뒤로 하고 행렬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신평동 본가에 갔다. 낙동강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의 15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음에도 박연구 선생도 유병근 선생도 기어이 올라가신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선생님은 노구에도 운동 삼아 매일 걸어서 이 계단을 오르내리셨다고 한다.
책과 서화뿐인 서재에는 문학과 학문에 일생을 쏟았던 자취가 역력하였다. 책상 위에는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쓰셨다는 미완의 원고가 450쪽 번호가 매겨진 채 그대로 쌓였고 자료용 복사물 더미로 주변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전화로 말씀하시던 그 원고인가 보았다. 제자에게서 부탁받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은 이미 출간하였고, 그 나머지 부분이다. 새 학기에는 그 책으로 강의하게 되었다면서 그토록 좋아하시더니. 무심한 원고는 말이 없는 채 학문을 향한 선생님의 심정만이 뜨겁게 우리들 가슴에 새겨 든다.
그러나 산 자가 죽은 자의 정열에 눌리어 언제까지나 감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은 그런 걸 원하실 정신의 소유자도 아니셨다.
장지는 선산이 있는 고성(固城)이라고 했다. 벚꽃 축제가 한창인 진해를 지나서 가는 것이었다. 마침 진해는 유병근 선생님이 해군으로 복무하시던 곳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처럼 맞아떨어질까. 박연구 선생 역시 진해 벚꽃 축제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산도 거리도 시가지 전체가 화염(火焰)에 불타는 듯했다. 가는 곳마다 꽃인 것이 왠지 예사롭지가 않다. 아무리 화장을 권유받는 시대라 할지라도 현석 같은 석학에게만은 매장이 용납되는 것이 옳겠다는 박연구 선생의 농담 아닌 농담까지 곁들인다.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용암산 기슭에 마련한 선생님의 유택(幽宅)은 지관이 아닌 사람의 눈에도 틀림없는 명당자리로 보였다. 먼저 가신 두 형님을 든든하게 모시고 아래로는 생가, 멀리로는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위해 살아온 선생님에 대한 보상인 듯 풍취가 빼어났다. 과연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 죽음도 생각하니 나름인가 보았다.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서러움과 아쉬움, 또 한편으로는 존경심과 안도감을 선생님 묘소에 함께 묻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귀로에는 과문불입(過門不入)할 수가 없어서 이 고장으로 낙향해 살고 계시다는 김열규 선생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 선생은 오던 도중 진해 벚꽃 구경을 했다는 우리 예기를 듣고는 “벌써 김병규 선생님 음덕을 입으셨군요”하신다. 그분다운 말씀이셨다. 선생님 마당에는 희귀종에서부터 야생종까지 꽃이란 꽃은 다 모여 있는 듯이 보였다. 집 앞에는 호수처럼 생긴 바다가 섬을 껴안고 조을 듯이 앉아 있고...
하기사 우리가 꽃구경으로 하루해를 지냈듯 인생도 결국 구경하다 가는 것인가. 선생님의 쓰다 만 원고가 말해 주고 있듯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꽃으로 향기로 빛으로 저마다 최선을 다하고 떠나면 , 그때 우리도 근원에서 다시 만날 것을... [김영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