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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이수일李守一 1554 ~ 1632 신도비-이경여/묘표-김집. 묘지명-송시열. 시장-이경석
李侯 守一 遺愛碑銘 幷序-송정 하수일
遺愛有三。曰國於功。民於德。政於廉。如斯而已。具是道吏于世者。其惟我侯乎。南顧睿念。重於吾州。吾州受兵。甚於列邑。王曰。守一汝其往城。守一拜稽首。退役節度軍。未歲而訖。截然重城。有同金湯。禦暴保民。永賴萬世。功非國歟。城旣崇矣。民無一日役。役旣勞矣。軍無一人怨。德非民歟。夫有功有德而政又廉平。非貢獻。不徵一物。非官事。不私一卒。惟我百里。若懷二人。眞遺愛者夫。遂爲銘曰。
火不禁。尙歌詠。善有三。疇不敬。命資憲。賞功懋。用龜龍。圖不朽。
北道節度使李公守一去思碑 -동악 이안눌
公字季純。鷄林人。故高麗門下侍中李齊賢從兄之後。以萬曆癸未秋。武擧進。壬辰。討海賊。有大功于嶺南。己亥夏。使防禦咸鏡。其秋。授節鎭北道。皆上命也。公爲人仁。有廉操。民戴爲父母。及任滿當遞。籲于朝留之。其明年壬寅秋。謝病而去。又留之不得。乃相與號泣立碑。銘曰。
唯將尙嚴。公仁以漸。膏露與沾。彼饞無懕。公簡而廉。罔取毫纖。公時能諴。有瘼則砭。孰露靡苫。唯北蒼黔。苦寒而炎。式謳以恬。公不我淹。言旋于南。唯澤是涵。我懷德曷堪。于石有鑱。萬世攸瞻。
계림부원군 이수일[李守一]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이경여(李敬輿)
옛날부터 방패와 창을 잡고 변경(邊境)을 편하게 하고 화란을 진정시킨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많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는 사람을 얻어 인장(仁將)이라는 말을 듣고 경사를 그 후손에게 물려준 사람의 경우는 당(唐)나라의 곽분양(郭汾陽)과 송(宋)나라의 조무혜왕(曹武惠王) 뿐일 것이다. 우리 동방도 건국한 이래 신라와 고려를 거쳐서 조선조에 들어오는 동안에 대장이 되어 임금이 준 부월(斧鉞)을 받아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적지 아니하나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선조조(宣祖朝)에 들어와서 남쪽 왜적이 침범하여 들어와서 삼도(三都, 서울ㆍ평양ㆍ개성)가 기울어지고 7년 동안 난리에 갑옷을 입고 칼과 창을 잡고 군대에 종사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공을 도운 사람도 한둘로 세기가 어렵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인(仁)으로써 위엄을 삼고 의리로써 용기를 삼아 사랑이 넉넉하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을 이루었는데도 더욱 겸손하여 곽분양과 조무혜의 풍도를 방불케 하는 사람은 오직 계림공(雞林公)일 것이다.
공의 휘(諱)는 수일(守一)이고, 자(字)는 계순(季純)이며 계통은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시조 이알평(李謁平)이 신라 시조를 도와서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었고, 신라 말엽에 이거명(李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에 이르렀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유명한 사람과 큰 벼슬이 많았다. 국조에 들어와서 이성중(李誠中)은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정순공이 이원(李瑗)을 낳았으니 통정 대부(通政大夫)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냈으며, 부사가 이혁손(李赫孫)을 낳았으니 생원(生員)인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생원이 이오(李塢)를 낳았으니 벼슬이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서 병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판서가 이자침(李自琛)을 낳았으니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진사로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만나서 충주(忠州)에 숨어살다가 집을 세워 영구히 살았다. 찬성이 이난(李鸞)을 낳았다. 취학하였으나 성공 못하고 일찍이 하세하였다. 영의정 보조 공신(補祚功臣) 월성 부원군을 추증받았는데 3대의 추증은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정공이 단양 우씨(丹陽禹氏)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과 혼인하였으니 좌의정(左議政) 우인열(禹仁烈)의 6대손이며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4월 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의표(儀表)가 괴걸하고 준수하며 기국과 도량이 침착하고 조용하여 보는 사람이 다 크게 출세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운이 호방하여 글공부는 멀리 하였고 활잡기를 많이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에 소속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소농보(小農堡)의 권관(權官)으로 부임하였다가 바뀌어서 남방 절제사(節制使)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절제사 신각(申恪)이 군무 일체를 공에게 맡겼는데 다 잘 처리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발탁되어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무비(武備)에 유의하여 태평 시대라고 하여 조금도 느슨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ㆍ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왜적의 우두머리 풍신수길이 대거 침입하여 들어와서 부산(釜山)을 유린하고 동래(東萊)를 함락시켜서 그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듯 하였다.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궤멸되고 신입(申砬)은 충주(忠州)에서 전사하여 각 진영이 와해되어 한 사람도 적과 창을 마주하고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때 오직 공이 동지와 함께 극도로 비통하여 울먹이며 뭇 사람과 맹세하고 우뚝이 붉은 기를 세워 왜적을 맞이하여 힘껏 싸워 전후에 걸쳐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다. 그 일이 위에 알려지자 선조(宣祖)가 가상하게 여기고 품계를 몇 계단 뛰어 올려 우병사(右兵使)로 제수하였다. 같은 반열에 있던 사람이 공의 공(功)을 시기하여 공이 보고한 공로는 차이가 난다고 무함하여 마침내 이전의 명령을 취소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공의 억울함을 알았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승진되었고, 얼마 뒤에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로 전보 발령되었다. 공이 강개하여 명을 배수하고 더욱 분발하여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기를 떨쳐서 앞장서서 올라가니 적이 자취를 멀리 감추었다. 바닷가의 여러 고을이 공을 의뢰하여 온전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고 글을 내려서 포양하기를, “순국하는 선비가 반드시 후한 녹을 먹고 거듭되는 은혜를 받는 구신(舊臣, 노신(老臣))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평소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하였고, 이어 이르기를, “그대와 같은 신하가 한두 사람만 있었더라면 오늘날 내가 어찌 창졸(倉卒)한 꼴을 당했겠느냐? 또 그대로 하여금 일찍부터 군사를 장악하도록 하였더라면 승전의 보도를 어찌 오늘에 이르러 처음 들었겠느냐? 다만 그대를 늦게 안 것이 한이 된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선조[宣廟]가 뜻을 기울인 것이 다른 제장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왜적이 남부 지방에 둔치고 있어서 제때에 경작을 못하였고, 또 전쟁 뒤에는 기한과 역병에 걸려서 길에는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다른 백성들도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공이 사이사이에 둔전을 설치하고 틈을 타서 김매고 가꾸도록 하고 전죽(饘粥)으로 곤궁한 가운데서 서로 구제하게 하여 추수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덕택에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1만 명이나 되었다. 선비들 중에 남쪽에 온 사람들이 공에게 의지한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이 그 덕에 감동하여 밤에 찾아와서 소맷자락에 넣고 온 토지와 노비의 문서를 내놓으며 말하기를, “덕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원컨대 이것으로 재생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하였지만, 공이 엄숙하게 물리쳤다. 사람들이 사지1)(四知)의 금(金)을 물리친 데 비교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임금이 공을 중히 여겨서 금혁제(金革制)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누누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기복(起復)하여 황해 감사의 직을 맡겼다. 공이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고 군함을 수리하여 수군과 육군을 장악하여 왜적을 만나는 대로 격파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그만 두고 돌아가서 여막에 나아가 집상(執喪)하였다. 가을에 탈상도 하기 전에 상복을 벗게 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제수하였다. 조정의 공론이 남방의 염려가 그치기 전에 공을 북방에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자, 임금이 이 의견에 따랐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제수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성주(星州)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하고 공을 불러서 중권(中權)을 맡도록 하였다. 마침 성주 목사가 결원이어서 이 상국이 공을 추천하여 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명나라 장수 24명이 성중에 머물러 있어서 조정에서 오는 사신들이 들락날락하여 붐비었고 서류는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공이 좌우로 대응하고 처리하여 환심을 샀으며, 분석하고 결단함에 막힘이 없어서 책상의 서류가 씻은 듯이 깨끗하였다. 또 금오 수장(金烏守將)을 겸직하였는데 갑옷을 수리하며 성첩(城堞)을 보완하여 위급할 때 의뢰할 수 있게 하였으므로 상국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정유년에 영남에서 호남 지방으로 향하던 적(賊)이 도로 군사를 돌려 성주 지경을 압박하였다. 공이 재차 적산(赤山)과 고양(高陽) 사이에서 적을 무찔렀으므로 왜적이 감히 1백리 가까이는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가을에 북도 방어사로 제수되었다가 조금 뒤에 본도(本道)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북방 변수가 난리에 새로 쪼개져 인심이 안으로 흔들렸는데, 공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무마하여 진정시키니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그때 노토 부락(老土部落)에서 우리나라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를 경멸하고 있었다. 공이 한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국위를 펴 보고 싶어하였으나, 조정의 공론이 불화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여 난색을 표명하였다. 공은 순찰사 상국 윤승훈(尹承勳)과 같은 뜻이 있어 누차 조정에 청원하였더니 선조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이 정예 기마 4천을 선발하여 강을 건너 멀리 습격하여 정화려(丁火廬)를 무찔러 죽이고 전군이 돌아오니, 오랑캐 종족(種族)의 부락 사람들이 비로소 명성과 위엄을 두려워하여 서로 이끌고 귀화(歸化)하였다. 이에 선조가 공에게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더하여 포창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특별히 1년을 더 유임하게 하였으니 백성의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절부(節符)를 반납하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제수되었다. 영(營)이 창원(昌原)에 있었는데, 조정 공론이 진주(晉州)가 후일의 방어지로 적당하다고 하므로 공도 공론에 따라서 영을 진주로 옮겼다. 공은 가시밭을 헤치고 성부(城府)와 누로(樓櫓)와 치첩(雉堞)을 건립하였는데, 전면이 대단히 화려하였으나 백성에게 폐단은 없었다. 조정에서 품계를 더하였으니 곧 정경(正卿)의 품계이다. 방백(方伯)과 어사가 서로 계속하여 공의 공적을 보고하니, 임금이 옥새를 찍은 유서(諭書)와 포백을 내려 표창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선무훈(宣武勳)을 책록하는데 공의 일에 앞선 충성과 적을 격퇴한 공훈이 다른 장수들보다 앞섰지만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의 저지하는 바가 되어서 단지 정헌 대부(正憲大夫)만을 더하게 하였으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보답이 억울하다고 남들이 말하였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두 재상도 처음에 공을 몰랐다. 선원이 상주(尙州)를 지키고 학곡이 어사로서 경상도를 안렴하였는데 다 공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공을 위하여 불안하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모두 아량이 있는 명망가인데 어찌 사람을 해치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두 공이 전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듣고 하여 공에게 마음을 허락하여 뜻이 상합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길주 목사 겸 방어사에 임명되었는데, 전일에 공을 꺼리던 사람들이 밀쳐낸 것이었다. 공이 공법(公法)을 받들고 백성의 해독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안도하였다.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수원 부사로 제수되었다. 수원은 면적이 넓고 사람들은 토호(土豪)여서 전원(田園)이 법제를 초과한 것이 많았으므로 공이 한결같이 법에 의하여 한계를 지었다. 또 한번은 왕자가 국고미 1백 포만 빌려 달라고 청원하니 공이 말하기를, “지방에 있는 신하가 어찌 사사로이 왕자와 교제하여 국고미를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옳은 말이어서 왕자도 감히 꾸짖지 못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나라에 큰 불상사가 일어나서 옥사가 잇달아 조정이 바야흐로 위태롭게 되자 공에게 들어와서 궁궐을 지키라는 명이 내렸는데, 대개 공의 위엄과 명망을 빌리려고 한 것이었다. 광해가 처음 등극하자 제주 목사를 제수하였다. 공이 수질(水疾, 수토(水土)의 병)로 사직하여 체임되었으나 전직은 그대로였다. 여름에 북병사(北兵使)로 제수되었다. 공이 더욱 원대한 계획을 넓혀서 목전의 계획만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북방을 중대시하여 만기가 되었지만 다시 공을 유임시켰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돌아와서 서추(西樞) 겸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포도 대장(捕盜大將) 원유 제조(苑囿提調)에 임명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평안 병사로 제수되었는데 군사나 민사를 모두 함경도에 있을 때나 다름없이 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또 만기가 되어 돌아와서 서추(西樞)에 제수되었으며 겸직은 평안 병사가 되기 전과 같았다. 또 숙위(宿衛)를 총괄하고 무기고를 관장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노고로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인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조정의 공론이 오랑캐의 형세가 매우 강하니 공이 아니면 진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함경도 절도사로 제수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중국의 누군가가 세 차례 화양(華陽)을 장악한 데 비유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명나라 군사가 패하였다. 서북이 크게 놀랐는데 오랑캐 사신이 압록강에 와서 우리에게 힐난하기를, “이미 강화해 놓고 어째서 명나라를 돕느냐?” 하니, 공이 다시 답하기를, “명(明)나라는 곧 부모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원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여 문책하느냐? 그리고 또 양국이 이미 화해하였으니 곧장 요새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어야지 호의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니, 오랑캐가 감히 다시 힐난하지 못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 마땅히 체직되어야 하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가정에 연달아 슬픈 일이 있었기에 변경에서의 청원을 누차 조정에 아뢰었으며 체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오히려 나오지 못하였음은 후임자로 그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이 되었다. 선전관이 달려서 성 밖에 다다랐다. 공이 기치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당상에 앉아 장사를 집합시키고 성문을 닫았다. 자전(慈殿, 인목 대비를 말함)이 복위되고 구주(舊主)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갑옷을 벗고 명을 받들었다. 공이 비상시에 처하는 것이 평상시 같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탄복하였다. 서추(西樞)로 되돌아왔으며 겸직도 전과 같았다. 또 묘당 회의에 참석하여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의 자리에 올랐더니 임금이 북방의 대책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북방이 지금 군대는 쇠잔하고 백성은 흩어지고 없으니 오직 읍에는 수령을 가려서 임명하고 진(鎭)에는 장수를 선택하여 임명하여야만 선후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밤 이경[二鼓]에 임금이 편전에 임어하여 군신을 불러서 대책을 강구하며 부원수를 차출하여 역말을 타고 역적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모두 “이수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임금이 곧 공에게 사도 부원수(四道副元帥) 평안 병사로 제수하였다. 공이 새벽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 창졸간에 임명을 받았으니 미처 조병도 못하고 단지 옛날 부곡(部曲)과 금군(禁軍)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서 서흥(瑞興)에 도착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적군이 길을 막고 나섰다. 그 형세를 막으려 하고 헤아려 보았으나 적군은 많고 관군은 적어서 모두 위험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은 충의로 격려하여 반드시 죽기로 다짐하며 돌아올 마음이 없었다. 적은 산골길로 피해 나가서 공의 후미 쪽으로 돌아나갔다. 그때 원수가 적의 후면을 추격하며 당도하였다. 공이 수하에 군졸이 없다고 말하니 원수가 군사 천여 명을 주었다. 공이 원수와 만나고 나서는 나아가고 물러서며 천천히 하고 빨리 하는 것을 독단적으로 하지 못하고 함께 장단(長湍)으로 왔으며 대가가 남쪽으로 파천했고 적의 선봉이 서울에 접근하였음을 들었다.
원수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후속 계획을 상의하였다. 공이 눈물을 뿌리며 먼저 나와서 부하를 독려하여 먼저 출발하였다. 원수도 선봉 정충신(鄭忠臣)ㆍ남이흥(南以興) 등을 뒤따라 보내고 공과 함께 먼저 안현(鞍峴)을 점거하였다. 두 장수는 왼쪽에 있고 공은 오른쪽에 있으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날 새기만 기다렸다. 과연 적이 대거 침범해 왔다. 공이 북을 울리며 군사를 독려하여 한참 동안 합전하다가 거느리고 있던 가볍게 무장한 군사를 모두 내 보내어 적의 중견(中堅)을 꺾었다. 이들은 바로 항복한 왜(倭)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던 자들이었다. 적세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꺾이어 드디어 패배하였다. 원수가 뒤를 따르고 공이 먼저 행재(行在)에 가서 승리를 아뢰었다. 그리고 제장을 독려하여 적을 추격하여 경안(慶安)을 핍박하니 역적의 괴수들은 그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다. 공이 군사를 걷어 진에 돌아왔다. 서울의 승리 보도를 처음 듣자 공에게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더하였다.
임금이 환도하자 원수는 백의를 입고 공은 고건(櫜鞬)을 갖추고 한강 건너편에서 대가를 맞았다. 임금이 수레를 멈추고 위로하기를, “경의 힘에 의뢰하여 역적을 숙청하였소.” 하자, 공이 울면서 사죄하기를, “죄가 실로 많습니다. 신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였다. 이 정벌에서 원수가 공에게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다가, 논공을 하는데 이르러 원수가 공을 3등에 두려 하였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이목에 듣는 바나 보는 바에 의하더라도 부원수의 공은 마땅히 제일에 있어야 하겠거늘 어찌 3등으로 떨어뜨리려 하오?” 하였다. 원수가 강압하여 2등에 두도록 하니 여론이 다 한탄하며 억울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하고 진솔한 마음이었으며 입으로 반란 평정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대수 장군(大樹將軍)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휘하 군사들이 논공에서 누락된 사람이 있어 창을 메고 격분하여 말씀을 아뢰어 하소연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안현의 승리는 선왕의 혼령에 힘입은 것이다. 나와 원수는 공이 없기가 일반이다.” 하면서 적극 말렸다. 공이 공훈도 사양하고 평안 병사도 사양하였으나 소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진무(振武)라는 공신호가 내려지고 계림군(雞林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그로 인하여 철옹(鐵甕)에 부임하였더니 평안도 백성들이 재차 공의 창과 깃발을 보고 범을 피하여 어머니 품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다. 가을에 계림 부원군으로 체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삽혈(歃血)하며 회맹(會盟)하였으며 잔치를 내리고 또 토지ㆍ종ㆍ은ㆍ비단ㆍ말ㆍ그림ㆍ단청(丹靑, 물감) 등을 내렸다. 그리고 통제사로 제수되었다. 통영(統營)은 재부(財賦)가 여러 진 중에서 으뜸이어서 자기 뱃속을 채우고 권문세가에 아부하는 일이 다 여기서 나왔으므로 자신을 단속하고 쓰기를 절약하며 공인(工人)의 사역(私役)을 정지시키고 상름(常廩)의 절반을 줄이며 삼남(三南)의 허부곡(虛簿穀, 이중 장부를 하여 그에 의하여 가외로 거두어 들이는 곡식)이 수천만 석을 없애니 뇌물이 요직에게 들어오지 않아 영내가 숙연하였다. 여러 도에서 편하게 여겼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임금이 강화도에 행행하였다. 공이 수군을 동원하여 들어가서 호위하였다. 난리가 그친 뒤에 배에 실었던 곡식과 연(輦, 왕의 수레)에 사용했던 베는 사농(司農)에서 보태어 쓰도록 하였다. 만기가 되어 충주(忠州) 본가로 돌아가서 선조의 구업을 가다듬으며 세상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다가 횡성(橫城)에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조정으로 달려갔더니 구봉(舊封)으로써 다시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의 겸대(兼帶)를 겸직하게 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문서는 까다롭지 않고 송사에는 원망이 없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로 제수되었다. 공이 극력 사양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 여름에 병이 위중하자 특히 내제(內劑)를 내리고 의원을 보내어 병을 진찰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특별한 대우였다.
이해 5월 27일 자택의 정침에서 천수를 다하니, 향년 79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철조(輟朝)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렸다. 또 비기(秘器)를 내리고 2등의 예로써 충주 북촌 금생리(金生里) 석교(石橋)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자리에 안장하였으며 뒤에 의정(議政)을 추증하였다.
공은 완산 이씨(完山李氏)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 4대손 장원감(長原監) 이귀년(李貴年)의 딸을 배위로 맞이하였다. 부인은 아름다운 덕과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계모(繼母)가 사랑하여 주지 않았으나 마침내 화평하게 하여 효도를 다하였다. 형제 중에 혼자 된 사람이 있으면 남녀를 막론하고 의식을 더불어 같이하였다. 성품 또한 근면하고 검소하여 고운 옷이나 단장을 몸에 베풀지 않았다. 경강(敬姜)이 길쌈2)을 하던 것처럼 지위가 높아도 근본을 잊지 않고 늙어서도 손에 놓지 않았다. 제수(祭需)와 제주(祭酒)를 정성껏 마련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으며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며 무마하고 기르는 것이 하인들에게까지 미쳤다. 규문(閨門) 안에는 환희가 찼고, 종당(宗黨)들은 법을 삼았다. 공보다 16년 뒤인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 봄에 대단치 않은 병으로 하세했는데, 향년 85세였다. 4월에 풍수의 말에 의하여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기축년(己丑年, 1649년 효종 즉위년)에 공의 묘소에 합폄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정(李淀)은 통정 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이고, 다음 이용(李溶)은 일찍 죽었으며 좌랑(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다음 이완(李浣)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판서(判書)이다. 장녀는 군수(郡守) 최위(崔褘)에게, 다음은 군수 한필후(韓必厚)에게, 다음은 좌랑에 추증된 채계주(蔡繼周)에게, 다음은 대사헌(大司憲) 이시해(李時楷)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 1남 3녀가 있으니 아들 이재(李滓)는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 장군(折衝將軍)이고, 장녀는 봉사(奉事) 이형(李泂)에게, 다음은 사과(司果) 조문발(趙門發)에게, 다음은 부사(府使) 장훈(張曛)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정은 참판(參判) 김반(金槃)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이인석(李仁碩)은 현감(縣監)이고, 다음 이인하(李仁夏)는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이며, 딸은 수찬(修撰) 홍주삼(洪柱三)에게 출가하였다. 이용은 참의(參議)에 추증된 유헌증(兪憲曾)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완은 현감 정민구(鄭敏求)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식이 없고, 서자(庶子)인 이인걸(李仁傑)과 이인척(李仁倜)이 있다. 한필주는 2남을 낳았으니, 한여해(韓如海)는 찰방(察訪)이고, 한여두(韓如斗)는 감역(監役)이다. 채계주는 2녀를 낳았으니, 도사(都事) 이성전(李晠傳)과 학생 윤민행(尹敏行)이 사위이다. 이시해는 3녀를 낳았으니 학생 한석현(韓碩賢)과 지평(持平) 원만리(元萬里)와 진사(進士) 정유악(鄭維岳)은 사위이다. 이재는 지사(知事) 강복성(康復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며, 이형은 5남 3녀를 낳았고, 조문발은 2남 3녀를 낳았으며, 장훈은 2녀를 낳았다.
공은 인후함을 안으로 쌓아 화순함을 밖에 나타내었다. 난리를 만나서는 의기가 더욱 분발하였고 적에 임하여서는 행동 거지가 더욱 안온하였다. 병졸들의 제일 아래 사람과도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적은 물건도 나누어 썼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이 다 쓰여지기를 즐겁게 여겼다. 적정을 헤아리고 기회를 맞추었으며 계략을 먼저 세운 뒤에 행동에 옮겼다. 수십백 번의 전투를 치렀으나 패한 적이 없었던 것은 이러했기 때문이었다. 전후하여 동부(銅符, 부사의 신표)를 차고 도절(桃節, 대장이 가지는 털로 장식한 기)을 잡은 것이 40년이 넘었으나 스스로를 검약하게 하고 절조를 가다듬어 청빈과 각고로 스스로를 지탱하였었다. 당시의 무장들 가운데 부귀가 하늘을 겨루는 사람이 공을 꺼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또 공에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또 가정내의 행실이 돈독하여 종족이나 친구가 가난해서 불을 지펴 밥을 짓지 못하거나 자녀를 장가보내고 출가시키지 못하거나 또는 죽어서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공에게 의뢰하였다. 공의 백씨(伯氏)와 중씨(仲氏)가 일찍 졸(卒)하였으므로 그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하여 다 독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풍속이 혼탁하매, 평상시에 스스로 사대부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재물을 탐내고 세속에 물들며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치는 자가 적지 않았지만 공은 홀로 옷을 걷고 멀리 피하며 발을 들어 높이 디뎠기에 무인 중의 원우(元祐) 연간의 완인(完人)이라 할 수 있다. 나라 운수가 창성해지자 위에서 대우함이 더욱 융성하니 조정의 명사들이 이러한 점에 있어서 공을 높이 평가하고 모두 함께 종유(從遊)하여 간격이 없이 지냈다. 공은 겸손하고 공경함으로 자신을 수양하며 물러나 사양하므로 자신의 귀한 지위를 잊고 성의를 다하여 사람을 접하는 것이 한미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다투며 붙따랐다. 일찍이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위엄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들추어내는 것으로 현명함을 삼지 않았으나 아래에서 속일 수가 없었고 일 또한 잘 성취되었기에 병사나 백성이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그래서 영남의 진주ㆍ성주 및 통영과 경기도의 수원과 함경도의 경성 같은 데에서 모두 비(碑)를 세워서 덕을 기렸다. 화려한 꾸밈이나 교만하고 인색한 빛은 마음에 싹을 틔운 적이 없으며 밖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
내가 일찍이 공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낙산 밑 본댁에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는데 공이 예로 낮추기를 너무 심하게 하므로 내가 괴이하게 생각하여 묻기를, “공은 일대의 명장이고 공훈과 지위가 이미 높은데 소관을 대하면서 어찌 그렇게 공손합니까?”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내 명색은 장군이고 그대는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니 장수로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면 이것은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수신(帥臣, 주장(主將))이 조정을 가벼이 여기면 나라의 복이 아니고 또 내 몸에도 해로운 것이 아니겠소?” 하였다. 내가 어리둥절하면서 공은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내가 외람되게 경연(經筵)의 자리에 올랐는데 공도 임금에게 등대하였다. 임금이 변방 문제를 묻자, 공이 이해 관계를 분석하여 촛불로 밝히듯 숫자로 계산하듯 아뢰었다. 나고 들고 오르고 내리는 태도가 온화하여 학사나 대부가 아침저녁으로 섬세한 모전에 앉아 있는 듯 하니 전상(殿上)에서 모시는 군신들이 흔연히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에 내가 명을 받들고 영해(嶺海)에 갔는데 그때 공이 마침 횡해(橫海)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제수되었다. 삼변(三邊)의 선비와 부녀자까지도 기뻐서 부르짖고 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영공(令公)이 오셨다.” 하였다. 바닷가의 백성이 어찌 다 공이 베푸는 은덕의 여파를 입었겠는가? 대체로 공의 인애(仁愛)하는 명성이 사람들 마음속 깊이 파고 든 것이 이와 같을 수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탑전(榻前)에 아뢰니 임금도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였다.
내가 이른바 곽분양(郭汾陽)과 조무혜(曹武惠)의 풍도와 방불하다고 한 말이 잘못된 말인가?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은 같지 않다.’고 한다. 곽분양은 당나라 조정을 위급한 가운데에서 재조하여 그 공이 천지에 가득 찼으니 공을 여기에다 비교한다면 간혹 조금 양보해야 할 점이 있다고 하겠으나 그가 사치와 욕심을 극도로 하였으니 공의 검약함을 잃지 않은 것과 어떤 것이 낫겠는가? 곽희(郭晞, 곽분양의 셋째아들)가 부친의 가르침을 어기고 나라의 법을 범했으니 공의 의로운 방향으로 자제들을 교훈한 것과 어느 것이 낫겠는가? 아버지의 교훈을 받들어 가업을 이룬 한 아들은 순량한 관리가 되어 다스린 공이 더욱 드러났고, 또 한 아들은 대장이 되어 나라의 조아(爪牙,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와 같다는 말)가 되었으니 조무혜 집안의 찬란한 구슬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고 같지 않음이 과연 어떠하다는 것인가? 공의 자제와 손자들이 만약 공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 더욱 더 독실하게 겸손하고 공손하여 공의 유훈을 저버리지 않고 시종 쇠퇴함이 없으면 이씨(李氏) 집안의 복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공을 안장한 지 25년 되던 해에 공의 자제 판결사공(判決事公)과 판서공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명(銘)을 청하기를, “선인의 산소에 묘목(墓木)이 울창하게 자랐소. 그런데 아직 비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대개 때가 있는 것 같소. 이 세상에서 우리 선인을 알기는 공 만한 이가 없으니 원컨대 한 마디 말씀으로 인멸하지 않도록 부탁하오.” 하였다. 내가 일찍이 연참(鉛槧, 문장(文章))에 종사하지 않아 글이 남만 같지 못하니, 사실을 인멸되지 않게 하고 인물을 인멸시키지 않게 하는 일을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공을 인멸되지 않게 하는 것이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누차 사양하였으나 두 공이 끝내 들어 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세계(世系)와 벼슬ㆍ봉호ㆍ자손 그리고 졸(卒)하고 장사지낸 월일(月日)을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시(詩)에 조예 있고 예(禮)를 즐겼으니 대장 극곡3)(郤穀)과도 흡사하구나. 전략을 다진 뒤에 전투에 나아가니 한(漢)나라 조충국(趙充國)의 지혜를 본받았네. 공이 아울러 다 배웠으니 거기에다 어짐조차 취한 듯하네. 군사 중에서 가장 길함은 지휘관을 잘 만나야 만족하네. 마침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분연히 일어서서 일신을 안 돌봤네. 시위를 당기고 칼날을 무릅쓰며 이 영 저 영에다 붉은 기치 세웠도다. 육지에서는 뱀처럼 긴 적의 행렬을 잘랐고, 바다에선 고래처럼 도망하는 적을 제압했도다. 공훈은 국난 극복에 참여하였고 지위는 열경[卿月]의 장수였네. 함경도 병사 직을 세 번 잡고 보니 자물쇠로 잠근 듯이 튼튼하였네. 평안도 병사를 재차 맡아 다스리며 왕의 위엄을 먼 데까지 드날렸도다. 역적이 평안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창을 휘두르며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밤중에 분연히 일어나 창졸간에 역적을 토벌하는 부원수에 임명되었네. 내가 내 목을 내놓고 두려움 없이 곧장 범의 소굴을 가리켰네. 깃발을 돌려서 뒤를 밟다가 북쪽 산에서 무찔러 버렸네. 노시(弩矢)와 극독(戟纛)을 삼엄하게 하여 한강 가에서 임금의 수레를 영접하였네. 숙청한 공은 서평(西平)과 방불하였네. 임금이 그 공적을 장려하며 대려(帶礪)를 두고서 맹서하였네. 사직의 편안과 위태로움이 앞뒤에 걸쳐서 공에게 의뢰하였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던가? 인(仁)과 지(智)가 합쳐져서이네. 더구나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니 마음은 적고 공은 크도다. 몸으로 가려주고 경사를 물려주니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이치 희미하지 않구나. 한강의 상류 백운봉(白雲峰) 남쪽 터에 울울한 가성(佳城, 묘소)있어 영혼 편히 모셔져 복을 내리네. 단단한 비석에다 공로를 기재하고 동쪽을 향해 새겨서 크게 보이니, 나의 말 아첨함이 아니어서 천년토록 징험이 되리라.
각주
1) 후한 때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來太守)로 전보될 때 창읍(昌邑)의 수령(守令) 왕밀(王密)이 금(金) 10근(斤)을 밤중에 가지고 왔다. 양진이 물리치니 왕밀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어떠냐고 하므로 양진이 “하늘이 알고 땅(혹은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오?” 하고 물리친 고사임.
2) 노 문백(魯文伯)의 모친 계경강(季敬姜)을 말함. 문백이 퇴조(退朝)하여 보면 그의 노모가 늘 길쌈을 하고 있었다. 문백이 자기의 효도가 부족하므로 그런가 물었더니 “너 같은 사람이 노(魯)나라를 섬기니 노나라가 망하겠구나. 왕후(王后)라도 일이 없을 때는 길쌈을 해야 한다.”고 아들에게 꾸짖는 고사임.
3) 극곡(郤穀) : 춘추 시대 진나라 사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즐겼으므로 추천받아 대장이 되었는데 과연 성과를 거두었다.
鷄林府院君李公神道碑銘 幷序
粤自古昔。執干戈安邊境定禍亂者。指多屈矣。至若不妄殺一人。得人死力。以仁將稱。貽慶厥後。則於唐郭汾陽。在宋曹武惠王而已。我東方亦建國。自羅曁麗。以及本朝。登壇授鉞。大建勳業。非少其人。亦無有與於斯者。逮我宣祖朝。南寇侵純。三都傾覆。七年搆亂。其時被堅執銳。從事戎行。以贊重恢之烈者。難以一二數也。能終始一節。仁以爲威。義以爲勇。愛克而人畏。功成而益謙。彷彿於汾陽,武惠之風者。其惟鷄林公乎。公諱守一。字季純。系出鷄林。鼻祖諱謁平。佐新羅始祖。爲開國元勳。羅季有諱居明。官至蘇判。其後數百年間。世多名人大官。入我朝有諱誠中。官至左政丞。諡靖順。靖順生諱瑗。通政。延安府使。府使生諱赫孫。生員。於公爲高祖。生員生諱塢。長興庫主簿。贈兵曹判書。判書生諱自琛。贈左贊成。以進士遭己卯士禍。隱遯于忠州。仍家焉。贊成生諱鸞。就學不成。且早逝。贈領議政補祚功臣月城府院君。追榮三代。以公貴也。議政公娶丹陽禹氏。贈貞敬夫人。左議政仁烈之六世孫。參奉聃齡之女。以嘉靖甲寅四月一日生公。公儀表魁偉。器宇沈靜。見之者皆知其遠到。氣豪去書。才多執弓。參癸未武科。初隷訓鍊院。丙戌權管小農堡。遞赴南帥幕下。主帥申恪擧戎政委公。事皆辦。庚寅拜宣傳官。辛卯擢拜長鬐縣監。公留意武備。不以時平小弛。壬辰。倭酋秀吉大擧入寇。躪釜拉萊。勢如破竹。李鎰潰于尙州。申砬沒于忠州。列鎭瓦解。無一人與賊交鋒者。公與同志。泣血誓衆。屹然立赤幟。邀賊力戰。前後斬級甚多。事聞。宣廟嘉之。超秩拜右兵使。同列忌其功。誣公以上功差。遂寢前命。後朝廷知公枉。癸巳陞拜密陽府使。俄遷本道水使。公慷慨拜命。益自奮。親冒矢石。賈勇先登。賊皆遠跡。濱海諸郡。賴公完。是冬。加公嘉善階。賜書褒之曰。始知徇國之士。不必出於食厚祿承洊恩之舊臣。而乃出於平昔不知爲何狀貌者也。且曰。有如爾一二臣。則予豈有今日之倉卒。而使爾早寄制閫之任。則奏捷之音。豈但始聞於今日。只恨知爾之晩也等語。宣廟之注意。非諸將比也。時賊屯南徼。民失耕種。鋒鏑之餘。又罹飢疫。道殣相枕。孑遺將盡。公間設屯田。乘隙耘治。煦沫饘粥。以俟有秋。所全活滿萬。人士之落南者亦多依歸。有一人感其德。袖土田臧獲之倦。夜授公曰。無德不報。願以此報公再生恩。公嚴辭斥之。人比之却四知金。乙未丁內憂。上重公。命行金革制。公屢辭。上終起之。仍畀海營之任。公收拾餘燼。葺理戰艦。控扼水陸。遇賊輒破。丙申遞歸。就廬守喪。秋又奪情。拜會寧府使。廷議謂南憂未已。公不宜北。上從之。丁丑拜羅州未赴。李相國元翼以體察開府星州。辟公主中權。適州守缺。相國擧公以代。是時天朝二十四將方住城中。朝廷使价旁午。薄牒堆積。公左右接應。皆得歡心。剖決無滯。案牘如洗。兼莅金烏守將。繕甲完堞。緩急足恃。相國大奇之。丁酉賊之自嶺而湖者。還兵逼州境。公再鏖于赤山,陽之間。由是賊不敢近百里而爲寇。己亥秋。授北道防禦使。已而移拜本道節度。北圉新刳於亂。人心內撓。公仁威竝行。撫摩鎭定。人皆悅服。時老土部落知我國有艱。有輕我心。公欲以兵一震之。以張國威。廟謨皆以開釁難之。公與巡察使尹相國承勳意同。亟請于朝。宣祖始許。公選精騎四千。渡江遠襲。殱丁火廬。全師以還。藩胡種落始讋威靈。相率歸化。宣祖加公嘉義階以褒之。辛丑特借寇一年。從民望也。壬寅納節南歸。癸卯拜慶尙右兵使。營在昌原。朝議以晉州可爲他日保障。且從公議。乃移營于晉公。披荊棘建城府。樓櫓雉堞。大侈前觀。而民不病焉。朝廷爲加一資。正卿秩也。方伯御史相繼上公績。上璽褒賜帛。乙巳錄宣武勳。公首事之忠。克敵之勳。冠當時諸將。而爲當略所沮。只增正憲終朝之禠。人皆稱屈。仙源,鶴谷兩相公初不識公。仙源守尙州。鶴谷衣繡按本道。皆不善公。人或爲公危之。公曰。皆雅望。豈害人者哉。厥後兩公▒其所未聞。皆許公相得甚。丙午除吉州牧兼防禦。前日忌公者擠之也。公奉公法去民害。民始安堵。及秋辭疾。罷歸桑梓。丁未拜水原府使。水原地臣人豪。田園多踰制。公一以法繩之。王子乞貸官粟百包。公曰。外臣豈可與王子私交。國廩何可擅與人。辭直。王子亦不敢誚公。戊申國有大戚。臨獄繼起。朝廷方危疑。命公入衛。蓋欲藉公威望也。光海初服。拜濟州牧使。公以水疾辭。遞仍舊。夏拜北兵使。公益恢遠圖。不爲目前計。鎖鑰克壯。朝廷重北。及瓜後留公。辛亥歸拜西樞兼知訓鍊捕盜大將。園囿提調。壬子拜平安兵使。兵民之政。視北無替。甲寅秩滿。還拜西樞。兼帶如未酉時。而又揔宿衛掌武庫。丙辰以勞加崇政。丁巳廟議以虜勢張甚。非公無以鎭之。更以北節畀公。世以三掌華陽擬焉。戊午王師敗績。西北大駴。虜使臨江詰我曰。旣和於我。何助兵中朝。公復曰。天朝卽父母也。子而救父。何異而問也。且兩國旣和。旋撤藩胡。好意安在。虜不敢復詰。己未當遞而不許歸。公連有家戚。玉關之請。屢達於朝。遞命雖降。猶不出代。難其人也。癸亥改紀。宣傳馳到城外。公建旗鼓坐堂。集將士閉城門。及聞慈殿復位。舊主出置。始釋甲受命。公處非常如常。聞者咸服。以西樞還。兼帶如舊。又參廟謨。嘗以特進官登筵。上問北路事。公對曰。北路兵殘民散。唯邑擇守鎭擇將。可期善後。上稱善。甲子西帥擧兵叛。夜二鼓。上御便殿。召群臣計事。命出副元帥。乘傳逆討之。僉曰。非李守一莫可。上卽授公四道副元帥平安兵使。公平明陛辭。蒼卒受委。未及調兵。只率舊時部曲及禁兵二百而西。馳到瑞興。住兵當道。擬遏其勢。賊衆我寡。人皆危之。公忠義激勵。必死無還心。賊避就峽徑。遶出公後。時元帥躡賊追到。公言手下無兵。元帥與卒千餘人。公旣與元帥會。進退遲速。不得自專。偕到長湍。聞大駕南遷。凶鋒已傅京師。元帥聚諸將議後圖。公灑泣先出。督部下前發。元帥亦追遣先鋒鄭忠信,南以興等。與公俱先據鞍峴。兩將在左。公在右。猗角以待。平明賊悉衆來犯。公鳴鼓督衆。合戰良久。公悉發所將輕卒。以挫賊之中堅。卽降倭之致死於我者也。賊勢由是大衂。遂致敗北。元帥殿後。公先奏捷行在。督諸將追賊。進薄慶安。逆魁等爲其下所殺。公罷兵還鎭京城。捷書初至。卽加公輔國。上還都。元帥以白衣。公具櫜鞬。迎謁于江外。上駐駕勞之曰。賴卿之力。肅淸宮禁。公泣謝曰。罪實多矣。臣何力焉。是役也。元帥不快於公。及論功。元帥欲置公三等。大臣曰。以耳目所覩記。副帥功當居一。何屈於三也。元帥強處公第二。輿情莫不嗟冤。而公怡然坦懷。口不言平吳。咸以大樹稱之。公麾下士有功者亦漏。皆負戟而奮。欲上言自訟。公曰。鞍峴之捷。繄王靈是賴。我與元帥無功等耳。力止之。公辭勳。且辭西閫。不得請。賜號振武。邑啓鷄林。仍赴鐵瓮。西民再瞻戟纛。如去虎歸母。秋以府院遞還。乙丑歃血會盟。賜宴錫土田臧獲銀綵廏馬圖畫丹靑。拜統制使。統營財賦冠諸鎭。肥己媚竈。皆從此出。檢身節用。停工手私投。減常廩幾半。罷三南虛簿穀數千萬。苞苴不到要津。營中肅然。諸路便之。丁卯上幸江都。公發舟師入衛。亂已。船粟輦布。用助司農。秩滿。歸忠州舊居。治菟裘擬終老。聞橫城變作。疾馳造朝。以舊封復兼。癸亥兼帶。戊辰拜刑曹判書。文不深獄無冤。辛未拜南漢守禦使。公力辭不獲。壬申夏疾亟。特賜內劑。遣醫視疾。異數也。以是年五月二十七日。考終于私第之正寢。享年七十有九。訃聞。撤朝賜賻祭。又賜祕器。以二等禮葬于忠州北村金生里石橋子坐午向之原。後贈議政。公娶完山李氏。恭靖大王四代孫。長原監貴年之女。夫人有懿德至行。繼母不慈。終諧以孝。兄弟之鰥寡者衣食與共。性又勤儉。鮮服靚粧不加於體。敬姜之績。至老不釋手。粢盛酒醴篤於奉先。慈惠撫育下逮臧僕。歡洽閨門。宗黨取式。後公十七年丁亥春。以微恙終。享年八十有五。四月因山家說權厝。己丑合窆于公墓。有三男四女。男長曰淀。通政判決事。次曰溶早亡。贈佐郞。次曰浣。武科判書。女長適郡守崔椲。次適郡守韓必厚。次適蔡繼周贈佐郞。次適大司憲李時楷。側室有一男三女。男曰滓。武科折衝。女長適奉事李泂。次適司果趙門發。次適府使張曛。淀娶參判金槃女。生二男一女。男仁碩縣監。次仁夏武科兵使。女修撰洪柱三。溶娶贈參議兪憲曾女。浣娶縣監鄭敏求女。無子。有庶子仁傑,仁倜。韓必厚生二男。如海察訪。如斗監役。蔡繼周生二女。都事李晟傳,學生尹敏行。李時楷生三女。學生韓碩賢,持平元萬里,進士鄭維岳。滓娶知事康復誠女。生一男二女。李泂生五男三女。趙門發生二男三女。張曛生二女。公仁厚內畜。和順外著。遇難意氣奮發。臨敵擧止安閑。與士卒最下者折甘分少。士皆樂爲之用。料敵中機。先算後戰。身經數十百戰。未嘗敗衂者以此也。前後佩符秉節餘四十年。約己厲操。淸苦自持。當時武將之富貴薰天者。莫不公忌。而亦莫不公愧也。尤篤內行。宗族親舊之窮不能擧火者。貧不能嫁娶者。死不能殮葬者。皆於公取資焉。伯仲早沒。撫孤如己出。使之各有所歸。世亂俗汚。平昔自以士夫爲期者。鮮不崇貨染跡。辱名喪身。公獨褰裳遠避。擧足高蹈。得爲武弁中元祐完人。運屬昌辰。注意彌隆。薦紳名流以是多公。皆與之從遊無間焉。公謙恭自牧。退讓忘貴。推誠接人。不異寒賤。人以是爭附焉。未嘗用人命爲威。亦不以抉摘爲明。下不能欺。事亦克濟。軍民愛戴。如嶺之晉州,星州,統營。畿之水原。開北之鏡城。皆䝂貞石頌德。紛華之飾。驕吝之色。不萌於心。不形於外。余嘗慕公之爲。拜公于駱第。公禮下之已甚。余怪問曰。公一代名將。勳位已高。待小官何恭也。公曰。我名是將也。子人主之侍臣也。爲將而不敬近君之人。是輕朝廷也。帥臣輕朝廷。非國之福。抑身之賊也。余撫然自失。益知公之非今世人也。余忝升講筵。公亦登對。上詢問邊事。公奏陳利害如燭照數計。進退升降。雍容若學士大夫之朝夕細氈者。群臣侍殿上者莫不灑然歎服。其後余銜命到嶺海。其時公適授橫海之節。三邊士女無不懽呼踴躍。咸曰李令公來矣。海隅黎庶。豈皆被公之沾漑餘波。蓋公之仁聲仁聞入人之深能若是也。余歸啓榻前。上亦嘉歎。余所謂彷彿於汾陽,武惠之風者非耶。人有恒言。古今人不同。汾陽再造唐室。勳塞天地。比公於此。雖或少讓。窮奢極慾。孰如公之不失於約也。郭晞之違敎犯憲。孰如公之勑以義方。趨庭考室之兒。一爲循良吏。治跡克著。一登具禮之壇。爲國爪牙。無愧於武惠家璨,瑋。古今人同不同。果如何也。公之子若孫。若能以公之心爲心。益篤謙恭。毋負公遺訓。不替終始。則李氏之福其未艾也。公葬之二十五年。公胤子判決公曁判書公。以公家狀造門。涕泣而請曰。先人之墓木拱矣。墓道尙闕顯刻。蓋有待也。世之知吾先公莫如公。願以不朽請。余未嘗從事鉛槧。文莫吾猶人。曷敢當不朽事。不朽人且不敢。況不朽公乎。以此累辭。二公終不釋。余辭不獲。遂次世系官封子姓卒葬日月如右。銘曰。
敦詩悅禮。郤縠之帥。先謀後戰。營平之智。公焉幷取。又如其仁。師中之吉。足以長人。値時板蕩。奮不顧身。張弓冒刃。赤幟諸營。陸斷長蛇。海掣奔鯨。勳參剋復。卿月將星。三秉北節。鎖鑰克壯。再莅西閫。王靈遠暢。歷陽稱兵。揮戈南向。中宵拊髀。倉卒授鉞。吾戴吾頭。直指虎穴。回旌躡後。殪之北山。弩矢戟纛。渭上迎鑾。肅淸之功。彷彿西平。王懋乃績。帶礪是盟。社稷安危。前後繄賴。曷爲其然。仁與智會。矧爾謙恭。心小功大。庇身貽慶。福善弗昧。漢水上流。白雲南趾。有鬱佳城。妥靈產祉。貞石東刋。功載丕視。我言非諛。庶徵千祀。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공(李公) 수일(守一) 의 묘표 –신독재 김집
옛날 우리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시절에 큰 난리들을 진정시키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를 위해 바삐 뛰면서 힘을 보탠 신하가 한두 사람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두 시대에 걸쳐 할 일을 다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명(功名)을 세워 끝마무리를 잘한 분으로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공(李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공은 휘가 수일(守一)이고 자가 계순(季純)인데,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난(李鸞)의 아들이자 좌의정을 지낸 정순공(靖純公) 이성중(李誠中)의 6대손이다. 공은 소년 시절 문(文)을 버리고 무(武)의 길을 택했는데, 장기(長鬐)에서부터 자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임진년(1592)의 거센 적을 막아 내다가, 급기야 수사(水使)가 되어서는 적들을 소탕하는 데에 주력하여 우리나라 왼쪽 변방의 바닷가 여러 고을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그에 대한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는데, 그때 상은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정유년(1597)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계청으로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맡았는데, 공이 부임한 뒤 번거로움을 참고 대중을 제어함으로써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빈틈이 없도록 하였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나 군대를 동원하는 일이 모두 질서 정연하였다. 적산(赤山)에서 적을 한번 물리치고 고양(高陽)에서 거듭 개가를 올리자 적들이 무서워서 끝내 성주 근처는 범접하지 못하고 피해 갔다. 남쪽의 걱정이 풀리자 이제는 또 북쪽을 맡았는데, 이때도 역시 남쪽에서 하던 그대로 북쪽을 다스려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크게 얻었다. 그리고 노토(老土)를 토벌하고 마을능주(亇乙能主)를 무찌르고 수을허(水乙許)와 교로(交老)를 섬멸함으로써 변경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집시키자 오랑캐 무리들도 겁에 질렸으므로 십수 년 동안 적의 출현을 알리는 경보가 없었다. 공은 그 후로도 그곳에 두세 번 부임해 갔고 기한이 차면 또 연기까지 했는데, 이는 그 지방 백성들의 여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이사이로 경상도와 평안도의 군정을 맡기도 했지만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겼다. 영남에서는 난리가 끝난 후 영문(營門)을 진양(晉陽)으로 옮긴 일이 있었는데, 공이 손 놀릴 사이 없이 일을 하여 백성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전에 있던 영문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어 놓았다. 그리하여 관방(關防)이 마치 자물쇠로 잠가 놓은 것처럼 튼튼하게 되어 그것이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고, 국가에서는 공의 작질(爵秩)을 높여주고 또 습의(襲衣)를 하사하여 포상하기도 하였다. 공은 서쪽, 남쪽, 북쪽에서도 이렇게 힘써 일하였다.급기야 이괄(李适)의 난이 터지자 갑자기 또 명을 받았는데, 당시 상황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고 또 안팎으로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다만 충의(忠義)로 군대를 격려하여, 전세(戰勢)가 불리한 상황에서 북산(北山)을 먼저 점거함으로써 결국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으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아, 공이 한 일은 마치 조물주가 물건 만들어 내듯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갑자년(1624) 난리에 만약 공의 그 싸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거의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 공로는 그렇게 크게 치는 데 반해, 거리도 멀고 형세 또한 느슨했던 그때 서쪽, 남쪽, 북쪽에서 한 일에 대하여는 왜 과소 평가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한쪽 지방의 적을 막기 위해 미연에 대비하는 일은 일시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일로서 국경 밖에 긴 성을 쌓는 격이지만, 바로 겨드랑이 밑에서 변란이 생기고 금방 서울을 삼킬 재액이 닥쳐서 국가의 존망이 하루아침에 판가름나게 된 급박한 상황에서, 남들은 다 지켜만 보고 있는데 혼자 나섬으로써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다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안정시켰다는 것은 당(唐)의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를 숙청했던 일보다 훨씬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더구나 공은 그 공을 이룬 후에는 평복 차림으로 집에 돌아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오직 겸양한 태도로 지냈으니, 겸손하기로 유명했던 한(漢) 나라의 대수장군(大樹將軍) 풍이(馮異)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공이 세운 그 공로만을 가지고 공을 말할 뿐이며, 공이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다. 공은 인자하고 온화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강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찰찰(察察)하게 하지 않았지만 관리들은 감히 그를 속이지 못했고, 각박하게 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감히 죄를 범하지 못했다. 5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지방관을 여덟 번이나 지내고 병부(兵符)를 다섯 차례나 찼지만, 집에는 사방의 벽 외에 다른 재물이 없었다. 나라가 있는 것만을 알았고 자신이 있는 것은 몰랐기에, 직임을 맡으면 그 직책에 최선을 다했고 일을 하면 그때마다 충절을 바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 시대에 걸쳐 할 일을 다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명을 세워 끝마무리를 잘한 분으로는 계림부원군뿐이다.’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공은 가정(嘉靖) 갑인년(1554)에 태어나 세상을 뜨던 해까지 79년을 살았고, 장지는 충주(忠州) 금생리(金生里) 석교(石橋)에 자좌(子坐)로 된 둔덕의 새로 잡은 자리이다.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이고, 부인은 이씨(李氏)인데 국성(國姓)으로 장원도정(長原都正) 이귀년(李貴年)의 딸이다. 아들들 가운데 맏이 이전(李淀)은 부사(府使)이고, 다음 이용(李溶)은 일찍 죽었는데 좌랑을 추증받았으며, 다음 이완(李浣)은 무과 출신으로 참판이다. 딸들 중 맏이는 군수(郡守) 최위(崔椲)에게, 다음은 군수 한필후(韓必厚)에게, 다음은 좌랑(佐郞) 채계주(蔡繼周)에게, 다음은 승지(承旨) 이시해(李時楷)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 이재(李滓)는 역시 무과 출신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이고, 세 딸들은 정(正) 이형(李泂), 주부(主簿) 조문발(趙門發), 부사(府使) 장훈(張曛)에게 각각 시집갔다.이전의 아들은 이인석(李仁碩)과 무과 출신으로 감찰인 이인하(李仁夏)이고, 사위는 생원(生員) 홍주삼(洪柱三)이다. 이완의 서자는 이인준(李仁俊), 이인걸(李仁傑), 이인척(李仁倜)이고, 한필후의 두 아들은 한여해(韓如海)와 한여두(韓如斗)이다. 도사(都事) 이성전(李誠傳)과 학생(學生) 윤민행(尹敏行)은 채계주의 사위들이고, 학생 한석현(韓碩賢)과 생원 원만리(元萬里)와 학생 정유악(鄭維岳)은 이시해의 사위들이다. 이재는 1남 4녀를, 이형은 5남을, 조문발은 3남 3녀를, 장훈은 2녀를 두었다. 나머지 증손들과 현손들은 쓰지 않았다.내가 다행히도 공과 한 시대를 살아 공의 한평생에 관해 익히 들었으므로, 숨겨진 내용을 세상에 드러내 놓으려 했던 공자(孔子)의 뜻을 좇아서 갑을(甲乙) 양론을 놓고 대략 이렇게 추려 엮어 보았다.
鷄林府院君李公墓表
昔我宣仁兩祖。克戡大難。再造家邦。時則有一二臣奔走效力。而考其訖庸兩朝。善處功名。有始有終者。惟鷄林府院君李公一人而已。公諱守一。字季純。贈領議政鸞之少子。左議政靖純公誠中之六代孫也。少棄文就武。發跡自長鬐始。提孤軍遏壬辰方張之賊。曁爲水使。勦捕愈力。左徼濱海諸邑。獲免魚肉。朝廷褒陞嘉善階。有不知何狀貌之敎。丁酉。李體察使元翼啓署星州牧。公至則耐煩制衆。巨細靡遺。治民用兵。條緖不紊。一却赤山賊。再捷於高陽賊。乃畏避終不敢近星界。南憂旣弛。復受北閫之任。一以治南者治之。大得軍民心。討老土剗亇乙能主。殲水乙許交老。以固圉安民。諸胡慴服。十數年間。刀斗無警。後再涖三涖。每秩滿。又加年。從民望也。間帥慶尙平安兩道。俱有聲績。時嶺南新去亂。有移營晉陽之役。公多般拮據。百度具備。無墜前制。無害民力。關防鎖鑰。永世是賴。增秩賜襲衣以褒嘉之。公之勤勞於西南北蓋如此。及至适變。倉卒受命。衆寡不敵。中外無恃。徒以忠義激厲於事去之後。先據北山。以辦不世之勳。何其偉也。噫。公之於事功。猶造化之於物。隨所遭而效績。人謂甲子之亂。微公一戰。國幾不國。功斯爲大。若西南北之宣力。地遠而勢緩。此功反小。何也。一方之軋敵。未雨而綢繆。特一時之能事。域外之長城爾。固不若變生肘腋。禍及京闕。存亡迫於朝夕。事機急於斯須。人皆觀望。我獨直前。一交兵而安國家於旣危。李晟之肅淸。無過此矣。況夫功成之後。角巾歸第。肫肫退讓。有而若無。不知古大樹如何耳。然而人皆知以已然者論公。而殊不省公之所以致此者有原。仁和有餘而剛果相濟。未嘗察也而吏不欺。未嘗刻也而民不犯。立朝五十年。入建節五佩符。而家徒四壁。知有國而不知有其身。斯其所以所在稱職。隨事效忠者也。若是而稱曰。訖庸兩朝。善處功名。有始有終者。惟鷄林李公。不亦宜乎。公生於嘉靖甲寅。距卒之年。七十有九。葬忠州金生里石橋子坐之原。新卜也。先妣丹陽禹氏。夫人李氏國姓。長原都正貴年之女也。男長淀府使。次溶早死。贈佐郞。次浣武科參判。女長適郡守崔椲。次適郡守韓必厚。佐郞蔡繼周,承旨李時楷。又其次也。側室男滓。武科僉使。女三人。適正李泂,主簿趙門發,府使張曛。淀男曰仁碩。曰仁夏武科監察。女卽生員洪柱三也。浣庶子曰仁俊,仁傑,仁倜。韓必厚二男。如海。如斗都事。李誠傳,學生尹敏行。蔡繼周女也。學生韓碩賢,生員元萬里,學生鄭維岳。李時楷女也。滓男四女。李泂五男。趙門發三男三女。張曛二女。餘曾玄未盡載。集幸廁一世。獲習公終始。略辨甲乙之說。竊自附於闡幽之遺意云。
鷄林府院君李公墓誌銘 幷序 -송시열
國家自多事以來。功宗名將。步武相接。或以智謀。或以雄勇。其無於二者之名。而二者自然不可及者。其惟鷄林府院君李公守一乎。公以嘉靖甲寅四月一日。生于忠州之西村。少孤力學。久而無成。遂投筆。以弓馬取宣廟朝癸未科。丙戌。爲三水小農堡權管。公早有名。自擢第。輿望日隆。朝夕當大用。物論至是稱屈。而公無幾微見乎色。惟盡其職事。日以撫摩繕修爲務。識者尤以爲巨人長者。考滿而遞。士卒皆涕送之。仍以褊裨隷帥幕。帥盡委以邊上機宜。庚寅。始拜宣傳官。辛卯。被不次之擢。除長鬐縣監。人吏迎觀皆曰。此非久於吾縣者也。壬辰。倭寇大入。公召集義旅。移檄旁邑。斬獲甚多。寧海府使韓孝純上公首級于行在。時道路梗塞。久後始達。宣廟甚嘉之。超拜慶尙右道兵馬節度使。諸將有恚媢者。誣以無功倖冒。朝廷入其言遂反汗。公仍涖原任。後行朝因諸軍啓牒。得其實狀。癸巳。遂自長鬐陞密陽府使。已又擢授本道水軍節度使。公益自感厲。每戰。身先士卒。矢石不避。以功是冬加嘉善階。其敎書曰。只恨知爾之晩。當共山河之誓。甲午。南土大饑。餘民至父子相食。公不以侵官爲嫌。多方濟活。又廣設屯田。且戰且耕。儲蓄漸裕。飢民繈屬歸之。人士之落南者。公館接無倦。有一士人夜袖契券以遺曰。蒙德旣深。無以相報。公謝曰。干戈未定。安用此臧獲爲。其人慙沮而去。乙未丁憂。上特命起復。辭不獲命。時我人俘在倭陣者不億。而莫能自脫。公以厚賞募人。使入賊中。潛授方略。自是逃歸者相屬。丙申遞歸。始襄母夫人喪。仍廬墓下。又起復拜會寧府使。大臣言李守一熟諳倭情。不宜處北。遂召還。俄拜羅州牧使。未及陛辭。體察李相元翼啓請自屬。開府于星州。會星缺牧使。體察擧公代之。兼金烏城大將。時天朝二十四將駐兵于星。事務叢積。公外應求責。內撫軍民。動皆合宜。天將來者。例以幣交。公一以充軍實。不入私橐。李相益加敬重。丁酉。倭兵自湖南侵及州境。公戰于赤山,高陽。皆獻捷。人民賴安。適忤使星。被誣下吏。上察其冤。特原之。初公對吏。州民相率守闕。及蒙宥。則歡呼擁馬而歸。己亥。拜咸鏡北道防禦使。仍陞節度使。先是亂民鞠敬仁等。謀執王子以附賊。事定。人人自疑及誅。潛渡水以投北胡。公慰諭懷綏。期月之間。物情大安。庚子。將兵深入胡界。勦滅其部落。蓋自壬辰。諸種知我有艱。時時抄劫以嘗我。公以爲不一翦刈。終至難圖。故力請討之。師罷。賞加嘉義。秩滿當遞。北人借留。壬寅。始解歸。癸卯。拜慶尙右兵使。建請移鎭晉州。至晉。收拾壬辰餘燼。未期月。綽有成績。御史及監司相繼褒聞。又加一資。特賜品服以奬之。朝廷錄壬丁平難功。公忤時相。卽從刊削。只進正憲秩。乙巳瓜遞。翌年有北警。時相憾猶未已。以公爲防禦使兼吉州牧。非善意也。公旣到。則邊虞亦銷矣。公專以惠愛爲心。杖王子奴豪橫者。使不得侵擾。未幾以事罷。旋敍爲水原防禦使。王子臨海君請糶百包米。公還其書不許。戊申。光海卽位。移公濟州牧。病不赴仍前任。已拜咸鏡北道兵使。每條上邊機。力言老酋志不在小。陰雨之備。不可少緩。朝廷素信公。有請必從。將代以北人之安。公復仍其任。辛亥還朝。知樞府事。兼知訓鍊捕盜大將及廏苑等別職。壬子。出爲平安兵使。旣遞。除忠壯衛將。蓋秉銓者惡而左降也。復知樞府。兼都摠管別職。有加於前。丁巳。復爲北道兵使。時北戎生心。人皆規避。故公不免差遣。北人聞公來。竹馬相迎。戊午。我師渡遼全沒。老酋使詰公曰。何以發兵助大明。公曰。我國於大明。有父子之道。助兵何問爲。虜又以歲給責限。公曰。爾若壤奠以誠。則我賜不患其違例也。時公聞子女婦相繼夭死。傷悼嬰疾。玉關之請甚切。而以無肯代者。故旣遞而不得歸者三歲。至癸亥仁祖大王卽位。然後始交割。時有傳新王卽位。使者將至。公卽戒嚴拒使者立城外。遣人往復數三。明知仁祖大王以大妃命承統。光海出處于外然後始拜命。還朝復舊踐。以特進入侍。上問北路事。公對曰。請擇遣將吏。上深然之。甲子。李适叛。以公爲四道副元帥兼平安兵使往討之。時事甚倉卒。只分禁衛二百及與舊時部曲卽發。時賊報日急。适腹心之偵伺者。交錯於道路。人甚危之。而公固夷然也。馳到瑞興。爲遮截計。賊由他路直向京城。蓋适嘗以舊將事公久。素知公所在得衆。聞之大懼。公會元帥張晩。元帥與卒千餘。遂追賊至長湍。賊不與交兵。時大駕已南幸。元帥會諸將謂曰。賊已據都城。我軍單弱。猝難攻拔。吾入坡州山城。休兵以勤王。諸公各歸任所。抄兵齎糧。以俟更擧。公不答起出曰。以賊遺君父。義所不忍。遂率手下兵。日沒到鞍嶺西麓。元帥先鋒鄭忠信,南以興據鞍嶺上。翌日平明。賊由城南門出。直向鞍嶺。公卽馳上嶺頭。据胡床整兵以待。賊先犯鄭,南軍。鄭,南殊死戰。俄報矢砲且盡。公悉以手下精兵。急擊其頭曲盡殲之。頭曲卽降倭之勇捷者。賊敗遁。還入都城。公卽飛捷於行朝。賊是夕東走。公率輕銳追之。賊爲其下所斬。以奔行在。大駕還都。公帕首𩊓靴。具櫜鞬以迎于漢江之南。上駐駕勞公曰。賴卿之力。宮禁肅淸。公雪涕謝曰。小臣何力焉。大駕在公州時。言者力請張元帥縱賊之罪。至是張元帥白衣待罪於路左而慰寵恩。言又有隆殺之差。由是頗有二王平吳之釁。而公謙虛退遜。務爲消融保合之道。諸將頗爲公稱屈。而公自悠然如不知有鞍嶺之事者。及論功。公在第三等。有大臣爲言以當時露布。參以師言。李守一當爲第一。遂陞二等。公參佐或欲上書訟功者。公力止之。時稱大樹將軍。公辭勳甚力。又辭西任。皆不許。及定功。賜振武功臣號。封鷄林府院君。後賜宴會盟。賞賜如例。皇朝褊將毛文龍先是開府于椵島。請見我人議事。上命公行。與論備虜方略。秋遞歸。乙丑。拜統制使。前後爲是任者。日役工匠。造作奇衺。以事權貴。其費月以千計。公悉罷之。軍儲之名存實無者。皆驛聞貰免。列邑便之。蓋公嘗惡債帥苞苴之習。終不以一錢尺帛以問當路。然公自是已有休退之志。丁卯瓜熟。則築室忠州之舊居。鑿沼種木。以爲終焉之計。適聞橫城有李仁居之變。遂促裝還朝。朝廷悉處以舊職。戊辰。拜刑曹判書。議讞平允。人以無冤。先是丁卯虜變。上幸江都。公自統營遣舟師入衛。至是朝廷將以江都爲保障。使備局重臣往見形便。上曰。李守一宿將也。可使同往。辛未。置南漢城守禦使。命公句管。公力辭不許。壬申。疾益甚。上遣大醫齎藥以視。五月二十七日。公卒于建德坊里第之正寢。上輟朝賜槨。祭賻有加。贈左議政。諡忠武。其年八月日。禮葬于忠州北村金生里石橋子坐之原。公長身秀骨。器宇宏深。心氣安和。喜怒不形。起居言動。自遠鄙悖。循循有退讓君子之風。平居寬綽渾厚。若無可否。及至制事斷義。則毅然有不可犯者。嘗有族孫從适爲逆。及賊敗。左右以公舊。嘗撫育欲全之。公立斬之曰。去順效逆。惡莫大焉。何可顧私。平生樂善好義。內仁宗黨。外盡賓客。伯仲早沒。撫育其孤。昏娶以時。而其爲己。則不立貲產。位躋崇班。蕭然如寒士家。子弟服飾稍美。則必戒以身災。所育姬妾。不敢恃恩無禮。自同婢使。其家法之嚴如此。其居官。不務聲名。爲其所當爲者。實惠徧普。旣去則人益稱思。勒頌恐後焉。至其接物之際。則雖幼稚卑賤。必開心見誠。不設畛域。親舊有急。必盡心周恤。不計有無。性不喜飮酒。晩築一室于駱山之麓。公退之暇。角巾藜杖。終日逍遙。倦則披閱書史以自娛。嘗論一時人物曰。某也如此。某也如此。後當然後皆果然。适未顯時。公愛其才氣。而其戒飭亦深切。适常信服如神明。其後漸不聽用。未幾竟陷大逆。公在光海朝。益愼其操履。及際明時。名節愈著。以身爲國家輕重者五十年矣。嘗戒子弟曰。居官須約。持己須謙。與人須忠。又曰。榮落有時。難容人力。故長子淀祇愼有立。季子浣克繩前武。爲世名臣。至其諸孫。亦皆尙義遠恥。公之敎。深且遠矣。蓋公醇德。始卒無玷。人至比於郭汾陽,曹武惠。雖未知必班乎二公。而可見人心之誠服矣。公字季純。慶州人。上世有謁平。漢宣帝五鳳年間。佐羅祖有大名。其後昆世爲卿相。本朝。有諱誠中。官左政丞。其孫生員赫孫。是公高祖。自是不甚顯。公旣貴。追贈曾祖主簿塢判書。祖生員自琛贊成。考鸞領議政。而妣丹陽禹氏。亦贈貞敬夫人。夫人參奉聃齡女。配李氏。恭靖大王五世孫長原監貴年之女。有至行。幼繼母李氏待之少恩。夫人始亦無怨。旣歸公爲大家婦。志物之養。終始無缺。性又儉勤。綺羅錦繡不加於身。女紅之執。不以貴而少懈。後公十六年丁亥正月十三日。壽八十五而終。越三年己丑。遷其墓祔于公左。生三男。淀進士判決事。溶早死。浣武科判書。兼諸衛大將。四女壻郡守崔椲,典籤韓必厚,贈佐郞蔡繼周,大司憲李時楷也。側出男滓折衝。三女爲奉事李浻,司果趙門發,府使張曛妻。判決事娶參判金槃女。男仁碩縣監。仁夏兵使。女適修撰洪柱三。判書娶縣監鄭敏求女。無育。庶男仁俊,仁傑,仁倜。女長適靑平令重胤。季幼。典籤二男。如海察訪。如斗縣監。佐郞二女。適都事李晠傳學生尹敏行。大司憲三女。適學生韓碩賢,持平元萬里,文科鄭維岳。內外曾玄不能盡記。余年輩後。未及見公。然聞公之熟而服公之深則久矣。仍又與判決事伯季游好甚篤。今承幽誌之託。雖不敢當。而竊喜名附其間。乃敢屬辭比事。而以所聞於前輩者論之曰。公未嘗爲明也。而能見人之所未見。未嘗爲威也。而能服人之所不服。不自以爲惠也。而馴悍稚耋皆誦其仁。不自以爲功也。而廝儓輿隷皆戴其賜。而其隱德陰功。又多有人不知者。此當於古賢中求之。尙可以智勇名之哉。無已而名之。則其不智之智不勇之勇乎。嗚呼。可尙也已。可尙也已。銘曰。
於記有之。有趙文子。不仁見利。不智幷植。猗嗟鷄林。隨武其幾。死而可作。惟公與歸。
鷄林府院君贈左議政李公諡狀 -백헌 이경석
公諱守一。字季純。其先慶州人也。新羅開國功臣謁平之後。羅季有曰居明。爲蘇判。羅麗之間。簪組蟬聯。入我朝。有曰誠中。官左政丞。諡靖順公。靖順之子曰瑗。通政大夫延安府使。卽公之五代祖也。高祖諱赫孫。成均生員。贈都承旨。曾祖諱塢。長興庫主簿。贈兵曹判書。祖諱自琛。弘治己卯。以大學上庠。遻士林禍。屛于忠州。因家焉。贈左贊成。考諱鸞。早卒。贈領議政。封補祚功臣月城府院君。妣丹陽禹氏。贈貞敬夫人。左議政仁烈之後。參奉聃齡之女。公以嘉靖甲寅。生于忠州之西村柹谷里。姿狀異凡兒。少失怙。兄弟三人。奉養慈親。公力習擧子業。久不成名。會萬曆癸未。北鄙聳。宣祖大設武科。於是去書。中試戍北。同戍者不敢名。舍館主人亦敬之。邊上官吏皆厚遇之。期之以北兵使。戍還。隷訓鍊院。爲權知奉事。例也。累擬宣傳官而不利。出爲三水小農堡權管。堡甚凋弊。公手鍤繕壁。捐俸厲兵。與疲卒同甘苦。官滿而歸。無不涕洟。至今稱爲李令公。兵使申恪留置幕下。軍旅錢穀。咸屬于公。整飭籌營。多所裨益。庚寅。拜宣傳官。辛卯。用不次之薦。監長鬐縣。初至。老吏竊相語曰。非久於此者也。壬辰之亂。列郡震駭。人皆雉鳥散。公乃糾合義旅。與寧海府使韓孝純檄諭郡邑。出沒剿賊。韓孝純以公所獲首級。募人啓聞。到伊川。道阻梗不得達。呈號召使黃廷彧。廷彧亦無以致。以其狀啓聞。而兩閱月始達行在。時宣祖駐龍灣。甚嘉之。陞孝純爲號召使。加公通政階。擢拜慶尙右道節度使。左兵使忌之。誣公無功。降其資秩。還莅長鬐。無何。諸軍門白其狀。癸巳。陞使密陽府。尋擢本道水使。益自感發。奮不顧身。馳突戰陣。挫其角距。使不敢肆。左徼濱海之邑。大有賴焉。是年冬。朝廷嘉其功。進階嘉善。敎書中多有褒美之語。聞者榮之。甲午。大饑民相食。公詰戎之餘。廣開屯田。謹覘諜勸耕鋤。爲之粥以食之。望哺者爭趨。田亦有秋。所活甚衆。人士之播流嶺表者。亦多依歸。館置廩給。久而益勤。乙未春。丁內艱。命起復仍令節度水軍。屢辭不聽。時賊蹈躪海上。無復戰艦。公募得私船數十艘及水手。且以族人之壯而勇者。編於行間。出入海陸。剿翦充斥之賊。我人男婦之俘擄者。彌漫賊營。公重賞其逃還者。使之偕入告諭之。出者相續。當是時。諸將皆讓能焉。丙申春。遞歸先山。始克襄奉廬墓。八月。又命起復使會寧府。居無何。大臣以公宜南不宜北。請召還。丁酉春。拜羅州牧使。未及行。李相國元翼以體察使開府星州。辟公中軍。星素煩劇。重以天朝遊擊留州者二十有四。責應益難。牧使許潛及瓜而遞。體察薦公代之。兼授金烏山城大將。兵民之政。輻湊雲委。李相公恐不能辦。使人覵之。左酬右應。沛然有餘地。天將星行。俱得其歡。相公甚器之。丁酉。倭再猘略湖南。一枝兵轉入嶺南侵州境。再敗於赤山高陽。賊不敢近。州民謳曰。微我使君。吾其肉矣。有一接伴使求妓。公不納之。其人誣言待唐將薄。就理對簿事得辨。還州。州民之將訴于朝者。莫不懽欣。瓜滿歸。民樹石頌德。己亥秋。拜咸鏡北道防禦使。尋遷北道節度使。是時甫去大亂。且當鞠敬仁逞兇之餘。邊氓疑懼。或有陰托蕃胡者。公以撫綏爲先務。威惠竝施。邊上帖然。庚子春。引疾辭不許。自壬辰以來。深處野人。時出攻掠我人。耕種不得以時。老土又倔強之尤者。公深以爲憂。欲伐之。時故相尹公承勳爲觀察使。公與之議。請于朝。朝廷慮開邊不卽許。公再三請始許之。遂調輕騎。請京砲及降倭領四千餘名。分路直擣。蕩覆其穴。擒斬甚多。又有麻能主兩種落。分據險要。廬帳蕃熾。移師滅之。不數日而旋。宣祖嘉之。賞功有差。加公嘉義秩。邊塵久不驚。公之力也。辛丑。瓜滿而留。因軍民之請借也。壬寅辭遞。軍民爲立去思碑。癸卯秋。拜慶尙右兵使兼昌原府使。時故相李公德馨爲體察使。西平府院君韓公浚謙爲之副。金公信元爲巡察。請移兵營於晉州。朝議重其役。公以爲若論保障。晉勝於昌。於是朝廷許之。晉城新經屠陷。白骨撑積。城塹夷塞。公指揮繕葺。未期訖功。御史啓達。特加資憲階。李公時發繼按本道。又以治行聞。賜表裏。乙巳。錄宣武勳。公當與焉。而忤時相。只進階正憲。去後。州人立頌德碑。丙午春。時相外托公議。以北方有警。除公使吉州牧兼防禦使。其實逞宿憾也。公言於朝曰。守令而兼防禦。有礙號令。於是改批以防禦兼牧使。公至邊事已定。字惠州民。州民晏如。有疾再辭。廟堂倨其控辭白罷之。丁未春。歸先山下。夏敍拜水原府使兼防禦使。戊申。宣祖禮陟。光海初政。移濟州。公以水疾辭。仍莅本任。夏遷北兵使。再赴而軍情益悅。及瓜而又留。從民望也。辛亥夏病遞。拜知中樞知訓鍊捕盜大將,苑囿提調。壬子春。爲平安兵使。甲寅遞歸。以正憲將忠壯衛。忤西銓也。公不以爲卑。惟思勤謹。頃之。移知樞兼都摠管知訓鍊捕盜大將軍器苑囿提調。丙辰。進崇政階。以捕盜之勞也。丁巳。又拜北兵使。加崇祿階。以捕獲宣祖時逃匿逆䜿也。時北事多虞。且有白蝶南飛之變。人皆避北。廟堂以公福將。曾有遺惠。遷拜之。凡三至而政益修。民益安。至己未爲三年而又加一年。以廟議也。公連遭膝下之戚。仍纏疾恙。懇辭蒙遞。而三年不得歸。蓋人人圖避也。癸亥反正後。始得交龜而還。拜知樞兼都摠管備局軍器提調捕盜大將知訓鍊院。一日。上御經筵。公以特進官入侍。承上問對北方事甚悉。因陳蘇民之急務。莫如擇守令邊將。上深納焉。甲子正月。适賊反報至。上夜御便殿。命選平安兵使兼副元帥往討之。是時賊潛結外內。本兵難其人。僉議以爲無出公右。卽拜四道副元帥節度關西兵馬。受命而西。所率惟舊部曲及輦下卒二百而已。見都元帥張公晩請益兵。以海西編伍千餘兵配公。公初欲遮遏於中途。以至瑞興。賊已取徑路急趨京都。趕到長湍。灑泣趣行。先鋒鄭忠信,南以興先據鞍峴南嶺。翼朝。賊兵來犯。公卽馳上鞍峴。賊以降倭爲前行。與南嶺兵交戰。公聞官軍矢砲盡。盡遣手下京砲以助之。賊遂潰走。公與諸將逐賊而東。賊將守白,益獻。斬适,明璉頭。犇行在。在鞍峴賊初遁。公報捷先至於行在。命加公輔國階。及賊魁斬。公以罷兵聞。且詣行朝。命留都以待旋軫。於是兩司論元帥。命白衣從軍。車駕之還也。公戎服櫜鞬。迎于江外路左。上駐駕使近侍勞公。稱公之績。公涕泣拜謝曰。小臣何力之有。及勘勳。公居三等。大臣稱其屈。遂錄於二等。賜振武功臣號。封鷄林府院君。節度西閫仍舊。公屢辭勳不獲。辭閫亦不獲。時毛文龍以都督軍椵島。要見摠兵。公承命見之。禮遇甚款。是年秋辭遞。仍帶勳封。乙丑春。爲統制使。四月。會盟靖社振武兩功臣訖。合宴于明政殿。大加錫賚。旣按海營。去苛細尙寬大。軍情大悅。丁卯。秩滿歸。軍民立頌烈之碑。就忠原爲閑住計。橫城李仁居逆變猝起。公聞卽馳趨朝。勳爵如故。兼都摠管知訓鍊捕盜大將備局提調特進官。公以老病屢辭而不許。戊辰。判刑曹兼禁火提調。獄訟稱平。庚午。命備局重臣往江都察形便。蓋將以爲保障也。公病不行。上謂公宿將。令與之偕。辛未。城南漢山。置守禦使。隷七邑軍。公膺委寄。辭之甚力而不聽。壬申春疾篤。夏革。賜之內藥。醫問繼至。是年五月二十七日。卒于建德坊所居第正寢。壽七十九。上輟朝。賜槨致賻。弔祭如儀。禮葬于忠州北村金生里石橋面午之原。後贈左議政。公天性寬厚。宇量崇深。長身偉貌。望之魁梧。平居色不喜怒。辭氣溫愨。謙謙有儒素味。不爲崖異之行。而亦不詭隨。臨危處事。有確乎不可奪之志。常戒其子弟曰。持身須遜。待人須厚。居官須約。以驗公之平生。無一違焉。伯仲遺孤。撫如己子。聘各以時。隨才勸勉。俱登龍虎榜。親舊婚喪。盡力顧濟。任眞隨分。不事矯飾。爲星州也。體相問衙料多少。公對之以實。體相多其無隱。蓋前牧使許潛行簡太甚。歸時衆妾跣足行。非人情也。體相以此益取公。唐將之之南者。相屬於道。輒見公而禮之。所與物。毫無私取。以佐軍需民賦。體相敬重之。及爲慶尙兵使。有一二名公之任事者憾恨公。不相屈下。人或危公。公不動曰。豈有雅士而害人者哉。公政績修擧。無可疵。憾恨者反與之相善。在吉州時。人不畏法。公私應役者。困於徵貢。殆無遺物。公以爲憂。會有王子家奴來作弊者。縛而杖逐之。州民賴以安。爲水原。不饒豪右。杜絶干囑。臨海君欲受百斛糶米。折簡遣奴。公謂其奴曰。王子書非外官所敢答。倉穀非王子所可受。乃還其書。其公嚴如此。再掌北兵。知老酋終必爲患。條上綢繆之策。多所設施。三掌而當遼陷時。老酋使人詰曰。修好久矣。助明兵何也。公譯復曰。我國於中朝。君臣而父子也。義當助兵。何用致訝。旣曰。和好而盡撤藩胡。此何意也。老酋不復詰。後又送言曰。歲貢當以某月納。賞賜亦須趁期。公答曰。貢物近欠精備。若擇呈則可卽頒賞。乃以此意馳啓曰。虛暍約貢。計在連和。雖無目前之警急。必爲日後之大患。願優之以賞。無失其歡。此等陳啓非一再。其遠慮類此。及仁祖初卽位。明川府急報宣傳官馳向營門。公卽命擊鼓。會諸將以待。宣傳至城外。歷問得詳然後。始乃開門。衣朝衣拜命。急遽之中。整暇如此。統營所屬僕隷工匠。皆仰給營廩。月不下千餘斛。公至。惟軍器戰艦是修。其他工匠盡放之。省費甚多。穀物之散在三南者。虛簿居多。郡邑病之。査啓虛實。可蠲者悉蠲之。爲統帥者。造船載米。餽遺權門。自昏朝而然。前後滔滔。公痛洗舊習。倉庫充羨。丁卯之蘊。資送舟師。以衛江都。大駕回鑾。輸進米布。以供國用。其節儉奉公。蓋素所蓄也。嘗與一家人論一代文武士曰。某不吉。某貪饕。某驕傲。必不令終。皆如其言。公在北時。适爲明川縣監。公每以謹愼善終之意訓之。适之爲西帥也。過辭。公論禦敵之策。适曰。抄聚降倭京砲。竝與西土精壯。鍊習一年。則可以橫行虜中。旣去。公語家人曰。敵鋒方銳。而适易言之。非細憂也。滔天凶逆。固不可以常情測知。而其爲可憂之狀。可謂先識之矣。及适反。聞公爲副帥。謂其徒曰。李某仁將。素得人和。不可輕犯。錄鞍峴之勳。公麾下力戰者。一無得參。群情慨然。欲訴于朝。公力止之曰。鞍峴之捷天也。吾屬敢言功乎。其謙退有大樹風。西閫遞歸後。擬大將及閫帥望。前後四十餘而不利。蓋昏時得官高下。視金多少故也。有扳聯宮禁者。欲爲公圖之。公笑而斥之。戊午以前。西土不見兵久。官府豐裕。公之制閫。加以節省。財穀益饒。窮族歸之如家。子弟諫其太煩。公曰。節吾之用。以活饑族。何傷於廉。公仁于親戚而恩不掩義。有族孫鞠育于公而中武科。從适反敗。縛至軍前。左右欲釋之。公痛疾厲聲趣斬之。寬以禦衆而嚴於家法。子弟不敢以不衷之服見。有鍾愛姬妾。而亦不敢爲褻慢容。兢兢如小婢之畏敬。當官盡職。不立生產。嘗在嶺徼水營。有一人德公之收恤。昏暮。袖臧獲文倦以納。公笑却之曰。干戈未定。何用此爲。況賑以國穀而爲己德乎。其人愧服。歷典城市邑。爲連帥亦久矣。而被服無芬華。田園無所增。在關西。衣皁綈坐公廳。守令之服美者。輒赧然自退。爲節度而北也。室家無所依。知舊諸人。各捐財爲市宅以居之。晩卜築于駱山之下。公餘。輒角巾蕭閑。書史在案。名公卿多與之還往。其病也。問之者日疊迹。其卒也。弔之者噎巷。比葬。無問疏戚。京外宗黨。畢至哭之哀。立朝五十年。廉謹退讓。終始如一。盡誠於公。不私於家。成功而不伐。見得而思義。處昏濁而獨潔。居崇高而不變。存而國倚以爲重。歿而人惜其云亡。若公者。雖方諸古名將。殆無愧矣。夫人李氏。恭靖大王五代孫長原監貴年之女。孝敬而儉。享年八十五。有三男四女。男長淀。大丘府使。次溶。早亡。贈佐郞。次浣。武科判尹。女長適郡守崔椲。次適郡守韓必厚。次適蔡繼周。贈佐郞。次適大司憲李時楷。側室有一男三女。男曰滓。武科折衝。女長適奉事李泂。次適司果趙門發。次適府使張曛。淀娶參判金槃女。生二男一女。男仁碩縣監。次仁夏武科兵使。女修撰洪柱三。溶娶贈參議兪憲曾女。浣娶縣監鄭敏求女。無子。有庶子仁傑,仁倜。韓必厚生二男。如海察訪。如斗監役。蔡繼周生二女。都事李誠傳,學生尹敏行。李時楷生三女。學生韓碩賢,持平元萬里,進士鄭維岳。滓娶知事康復誠女。生一男二女。李泂生五男三女。趙門發生二男三女。張曛生二女。謹据家狀。摭其著者撰定如右。以請易名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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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