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가 다가오면서 마음은 벌써 안동에 가 있는 한 주이다. 이번주 묘제도 하고 벌초를 하러 가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속으로라도 지금의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선조님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일은 말로표현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이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성묘 떠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
부산으로 이주를 안왔더라면 아마 지금도 이곳을 지나면서 살고 있을 안동을 한번 더 그려본다.
한산이씨 문양공-판중추공-해산공-수은공파의 입향조 되시는 수은 휘 홍조 선조님을 기리는 한산이씨 영모재를 아시는 분은 많이 없는 것 같아서 아래 기사를 삼가 글로 소개하고자한다.
물론 한산이씨 수은공파 일명 소호문중의 서산서원 고산서원 수은종택 대산종택 소개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않은 아래 기사가 안동박물관에서 안동의 제사라는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후손으로써 반가운 소식이며 안동의 제사를 책자 글로 소개해준 안동박물관에도 감사를 드려야 할 기쁜일이다.
또한 아래 기사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 소개하고 있지만 정확한 출처나 게시를 밝히지 않아서 이글을 작성하는 본인도 출처를 몰라서 애태운 지난날을 생각하면 애완도 있지만 많은 사료를 찾아보다가 안동의 제사라는 책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나니 너무나 행복한 하루이다.
한산이씨 영모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산이씨 영모재 / 안동시 일직면 명진리(더붓골)
1. 유래
안동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의성 방향으로 약 20㎞ 가면 미천(眉川)을 가로지르는 세천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미천 제방을 따라 우회전하면 명진으로 가는 길이다. 명진교를 건너면 냇가마을인 망진(望津)인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1km쯤 내려가면 영모재가 있는 더붓골이다. 이곳은 옛날 대나무가 많아서 대나무골로 불리다가 더붓골 또는 덕동으로 불린다. 명진보건진료소에 못 미쳐 현재는 덕동안길이라 표시된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영모재가 있다.
영모재는 한산이씨 안동 입향조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공을 위한 재사로 묘소는 재사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명진리는 한산이씨의 서원인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는 원리의 남쪽이고 동쪽으로는 광연리와 맞닿아 있다. 또 광연리 앞 미천을 건너면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현판
한산이씨 종택이 있는 망호리이다. 이처럼 재사 주위에는 한산이씨 관련 중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홍조 공의 자는 여곽(汝廓), 호는 수은으로 선조 28년(1595) 호남 함열(咸悅)에서 태어났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을 지낸 문영(文英)이며, 어머니는 풍산 류씨(豊山柳氏)로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딸이다.
공은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6세 때 형 이창조(李昌祚)가 외가인 안동으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꽃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아주고 갔는데,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늘 그 꽃가지를 안고 울었다. 꽃이 시들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자 이를 본 사람들이 장차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한 군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
8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안동 하회에 가서 외할아버지인 서애 류성룡에게 인사하고, 그 앞에서 글을 읽었다. 음과 토가 분명하고 정확했으며 질문에 확실하게 그 뜻에 대해 답하자, 류성룡이 보고 재능이 있다고 여겨 더욱 사랑하였다. 이후 13세 때부터는 막내 외삼촌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에게 학문을 배웠다.
광해군 7년(1615) 21세 때에 한양 본가인 낙선방(樂善坊)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극진한 효성으로 몸이 많이 상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자 친척들이 걱정하여 절제하기를 권했지만 끝까지 그만두지 않고 삼년상을 무사히 마쳤다.
동 9년(1617) 이이첨 일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는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함으로써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삼강이 끊어져 가는구나.” 하며 탄식하고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외가인 안동으로 내려와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에서 자연과 서책을 벗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인조반정 이후 몇 차례 향시에 입격했으나 서울에서 치르는 성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강직하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다음 일화에서 그러한 성품이 잘 드러난다. ‘공이 하루는 빙계서원에서 글을 읽을 때 서원의 심원록(尋院錄)에 이이첨의 심복인 정조(鄭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칼로 도려내어 버렸는데, 경상감사가 된 정조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그렇게 한 장본인을 찾도록 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두려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전혀 동요됨이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했다.’고 한다.
한산이씨영모재.hwp
43세이던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안동 인사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처사(處士)의 신분으로 중책을 맡아 군을 모집하고 독려함에 빈틈없고 과단성 있게 처리하였다.
이홍조는 “임금이 산성으로 피난하는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비록 초야에 묻힌 몸이지만 어찌 감히 일사를 늦출 것인가.”라고 하며 서둘러 의병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였다. 도중에 참판 전식(全湜)이 영남의병대장이 되어 문경에 머물고 있음을 듣고 달려갔다.
그리고 함께 군사를 모의하고 의병을 격려하고서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을 서두를 즈음, 적에게 항복하여 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동 16년(1638) 영남의병대장이었던 전식의 추천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고, 이후 상의원직장을 거쳐서 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회인현감(懷仁縣監)으로 있을 때에는 고을의 악습을 없애고 몸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회인현감으로 재직 중에 딸의 혼인을 맞게 되었는데, 간신히 경대와 단장하는 기구 등을 어떻게 몇 개 마련하고 나니 출가할 딸의 장물이 하나도 없었다.
부인인 영양남씨(英陽南氏)가 딸의 결혼 때문에 탄식하며 근심하자, 그는 웃으며 “우리의 도가 진실로 이러한 것이니 무얼 그리 탄식할 것이 있겠소.”라며 오히려 가난한 삶을 당연히 여겼다.
현감으로 있은 지 3년이 지났어도 부임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옷이 낡고 때 묻어서 보기가 민망했다. 친구들은 그러한 지나침을 그가 병들어 그런 줄로 여겼으나 정작 그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쟁으로 세상이 들끓자 동 24년(1646)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 때 집안의 곡간이 텅텅 비어 노자(路資)로 쌀 두어 말만을 전대 속에 담고 홀연히 안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로부터 번다한 세상사의 굴레를 벗어나 산수를 소요(逍遙)하며 물고기와 새들을 벗하여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며, 효종 7년(1656) 사포서별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했다.
공은 친척이 높은 관직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를 멀리하였다. 그의 종숙 이현영(李顯英)이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예조․형조판서에 있었고, 그 재종제인 이기조(李基祚)는 나라의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참판에 있었으나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또한 항상 청빈함을 추구해 재물에 대해서 담담했으므로 집은 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형 이창조가 죽은 뒤에 물려받은 노비가 바친 공선을 고스란히 형 집으로 보내고 자기는 포목 자투리 한 조각도 차지하지 않았다.
살림이 궁핍하여 한 번은 가족들이 그 절반이라도 집에서 쓰기를 청했으나 “홀로 계신 형수께서 어려운 살림을 꾸리기에 그것을 다 드려도 넉넉지 못할 형편인데 어찌 차마 그것을 나누겠는가. 내가 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공은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뒤 일월산 아래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현종 원년(1660)에 진보의 방전촌(方田村)에서 세상을 떠나니 경자년 3월 13일 향년(享年) 66세였다.
공의 행장은 밀암(密庵) 이재(李裁)가 지었고 후손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행장에 후서(後序)하였다. 이홍조공은 한산이씨 안동 입향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외조부인 서애 류성룡으로부터 퇴계학파(退溪學派)의 학맥을 이어받아 가학의 큰 흐름을 일으켰다.
공의 후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밀암 이재의 문인으로 학문을 크게 이루어 사마시와 문과를 거쳐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내고, 대석산(大石山) 아래 대산서당에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써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조선 후기의 대유였다.
이상정의 아우 이광정 역시 학문으로 영남에 이름을 떨쳤으며, 이상정의 사촌동생인 약와(約窩) 이현정(李顯靖) 역시 진사와 문과에 합격하고 교리를 지냈다.
이상정의 아들 이완(李埦) 역시 뛰어난 학자로 정조 때 문과를 거쳐 교리를 지냈으며, 이광정의 아들 면암(俛庵) 이우(李堣) 또한 가학을 이은 학자로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영남 선비들의 만인소(萬人疏)를 주도한 소수(疏首)였다.
이상정의 손자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은 순조 때 현감을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이 있었고, 그 동생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주부를 지냈다.
이상정의 현손인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는 류치명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 때 이조참판을 지냈는데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났다.
2. 건물의 구성과 배치
영모재는 산자락과 동네가 이어지는 경계에 세워졌으며, 좌향은 남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재사는 강당인 영모재와 주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축대를 높게 한 정사각형 담장 안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기와집이다. 건물의 조성은 화강석을 쌓고 시멘트로 마감한 약 1m가 넘는 기단 위에 사각주초를 놓고 각주를 올렸다.
전면의 반 칸은 모두 마루이고 양쪽 옆으로 각각 한 칸씩 방을 꾸몄다. 가운데 한 칸짜리 마루는 사분합 세살창문을 달았다. 강당의 왼편에 입구인 일각문이 있다.
강당의 우측에 위치한 주사는 주건물 본채 1동과 창고로 이용한 듯한 부속건물 1동으로 이루어 있고, 강당과는 달리 담장을 하지 않았다. 현재 관리인이 살고 있지 않아 많이 퇴락되어 있다. 본채는 강당과 동일 축선상에 자리 잡아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그 앞쪽에는 이것과 세로로 연접한 창고가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주사의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크기로 一자형 팔작지붕집이다. 실구성은 좌로부터 부엌과 바로 붙은 방이 있고, 가운데 마루와 방이 배치되어 있다. 부속 창고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창고의 우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측간이 자리 잡고 있다.
<< 출처: 안동의 제사 <위 내용의 저작권은 안동의 제사라는 책자에서 퍼왔으며 저작권관계는 많은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리며 삭제요청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가오는 한가위 성묘길에 한산이문의 안녕과 건강 및 선조님의 높은 행적을 다시금 기리며
수은공파 대은 이수영 후혼 이대원 삼가 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참고로 수은 선조는 안동 소호문중에서 불천위로 모시는 두 분 중 한 분이신데 다른 한 분은 공의 현손되는 대산 휘 상정 선조이십니다. 대산 선조가 먼저 불천위가 돠신 후에 1932년 문중과 사람의 공의가 있은후 입향조인 수은 선조도 곧 불천위가 되어 소호문중의 위상과 정체성을 높이셨습니다.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하시고 물질에 욕심내지 않으시고 평생을 깨끗하게 사신것은 나중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형님 공감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위 영모제가 상주 아마 창곡공파의 토대로 가져왔다는 설도 보이던데 사실 확인이 안됩니다
@대원 창곡공파와는 혈연적으로 가깝고 예전부터 왕래가 잦았으니 그럴수도 있겠네. 참 한국국학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경기도지역에서 불천위를 모신 종가는 모두 64종가 총109위에 이른다고 하네. 여러 한산이씨 종가들이 경기도에 있으나 오직 휘 자 음애공 종가만이 음애공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하니 불천위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수 있음. 벼슬이 높다고 시호받았다고 다 불천위가 못됨.
경기도 용인의 양도공파 후손 이이장 선조께서도 불천위를 나라에서 받으셨습니다. 이이장 선조는 유명한 실학자 서유구의 외할아버지로 서유구를 지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실학자라고 하면 다산 정약용을 최고로 알 고 있으나, 실은 다산보다 더 훌륭한 실학자는 서유구입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식민사관자들이 서유구를 조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조선 최대의 백과산전으로 어머어마한 양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압권입니다. 정약용은 일제가 을사보호 직후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목민심서를 일어로 번역 출간하였기에 식민사관자들이 열광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경기도 불천위 조사에서 제외되었으나,충청도에서 충장공과 그 아드님 부자가 불천위를 나라에서 받았습니다. 아주 귀한 경우입니다.
참 경기도 고양시가 근거지인 휘 훈 안소공파 종가에서도 안소공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읽은 조사보고서에서 왜 안소공의 종가가 소개되지 않았는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경기도 분당에도 아천군이 불천위입니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내리는 불천위와 그 문중에서 사적(私的)으로 모시는 불천위로 구분됩니다. 나라에서 내리는 불천위가 진정한 불천위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정해주는 국불천위에 조상이 오른다면 더한 영광이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이조말 200년동안 소외당한 지역, 특히 영남 남인의 경우엔 사불천위 및 사림이 공의해 정해주는 향불천위에 의존해 문중의 위상을 높이는 경우가 많았던 걸로 압니다. 위상은 물론 국-향-사 순입니다. 전국불천위 279위중 반이상이 넘는 152위가 경북지역에 집중되어있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영남지역 불천위 종가들 종손들은 몇년전 영종회란 친목회 (모체는 영지회)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하네요.
@이주원 (周遠) 불천위 제사 정말 요즈음시대에 말로 표현못할 정도로 힘든 절차입니다 그렇다고 예와 법도로 안할수도 없는 현실 그래서 저는 사견으로 정말 불천위 모시는 종택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그래서, 나라에서 불천위로 정해짐과 동시에 상당한 사패지를 내려 제사를 봉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원 안그래도 젊은 차종손들 사이에선 (불천위) 제사를 간소화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하네. 그것만이 종가를 살리는 길이라고 하던데. 그렇지 않으면 외국으로 도피이민을 가는 종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겠다더구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