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카롤로 르왕가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열대 지방에서 청년들과 여러 가톨릭 활동 단체의 수호자이다.
그는 바간단 지도자인 므왕가의 "동성애 요구"로부터 동료 시종들을 보호했고,
그들이 동성애 요구를 거절했다고 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가톨릭 신앙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가르쳤다.
자기 자신이 부도덕한 행위에 복종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또 자기 친구들의 신앙을 보호하려는 노력 때문에 카롤로는 므왕가의 명령으로
1886년 6월 3일 나무공고에서 화형되었다.
카롤로는 처음에 마울루궁구 추장의 거처에 있는 두 명의 시종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웠다.
그가 예비 신자로 있을 때
그는 추장의 시종장인 요셉 무카소의 조수로 추장의 거처에 들어 갔다.
무카소가 므왕가에게 저항하도록
아프리카의 청년들을 격려했다는 이유로 순교하게 된 날 밤,
카롤로는 세례를 자청하여 받았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감옥에 갇힌 카롤로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용기는
그들이 정결하고 충실하게 머물러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22명의 순교자들은 1964년 10월 18일 교황 바오로 6세 때 시성되었다.
설명 ;
카롤로 르왕가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 생활의 표양으로써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증인이 되고 스승이 된다.
우리는 모두 말로든 행동으로든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불림을 받은 것이다.
윤리적, 육체적 유혹을 당할 때 우리 신앙을 용감하고 흔들림 없이 유지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신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인용 ;
1969년 아프리카의 순방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22명의 젊은 우간다 개종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1885~1887년 사이에 우간다의 무왕가왕은 종교를 증오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이 중에 어떤 이들은 왕의 궁전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또 어떤 이들은 왕의 개인 수행원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롤로 르왕가와 21명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톨릭 신앙을 열렬히 신봉하여
왕의 불순한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몇몇은 참수형으로,
또 다른 이들은 화형으로 순교했다.
우간다의 순교자 시성식에서 행한 교황 바울로 6세의 강론에서(AAS 56[1964], 905-906)
순교자들의 영광은 재생의 표지입니다.
이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승리자들의 목록인 이른바 순교록에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더해 줍니다.
이들은 옛 아프리카의 그 놀라운 이야기들과
참으로 어울리는 합당한 페이지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미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결코 되풀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실리의 순교자들, 카르타고의 순교자들, 성 아우구스띠노와 프루덴시오가 말해 주는
우티카의 "흰 군대"라는 순교자들,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가
큰 공경심으로 기록하는 에집트의 순교자들,
그리고 반달족의 박해 시에 순교한 분들-
이분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후에 이에 못지 않게
용감하고 찬란한 새로운 행위가 뒤따르리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순교자와 성인들, 즉 치쁘리아노, 펠리치따스, 뻬르뻬뚜아,
그리고 위대한 아우구스따노와 같은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에다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가롤로 르왕가, 마티아 물룸바 칼렘바와
그 동료 20명의 이름을 더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 간 성공회의 다른 형제들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참으로 새시대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종교 박해와 종교적 충돌의 시대가 아닌 새로운 그리스도 생활,
새로운 사회 생활로 이룩된 새 시대를 말합니다.
새 시대의 첫 열매인 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아프리카 대륙은
자유를 얻어 독립된 아프리카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도 참혹하고 너무도 보배로웠던 이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들을 앗아간,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하고 깊은 뜻을 지닌 이 비극은
새로운 민족의 윤리교육과 새로운 영신적 전통의 기초를 위해
충분한 몇 가지 대표적인 요소들을 제공해 줍니다.
이 비극은 위대한 인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약한 타락으로
노예가 되어 얼룩지고 병들어 버린 원시적인 생활 방식으로부터
더 나은 정신적 표현과 더 나은 사회형태를 향해 열려 있는
새로운 문명에로의 전환을 상징해 주고 또 증진시켜 줍니다.
★성 다비노 Davinus 06.03 증거자 루카 1051년
★성 라우렌티노 Laurentinus 06.03 순교 아레쪼 251년
데치우스 황제 치하에서 큰 박해가 수차례 일어났을 때,
아레쪼 지방에서는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들 가운데 위의 두 순교자는 형제지간으로서 이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귀족 출신인 이 성인들은 학생 신분으로 체포되어,
집정관 티부르시우스 앞으로 끌려갔다.
귀족 자제이고 또 어린 나이를 보아 쉽게 배교시킬 줄 알았던 관리는
그들의 굳은 믿음에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서 참수시켰던 것이다.
★성 루칠리아노 LUCILLIAN 06.03 순교자 니코메디아 273년
그는 원래 이방신을 믿던 사제였으나, 연만한 나이에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아우렐리우스의 박해 때에 니코메디아에서 체포되어 집정관 실바누스에게 끌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 커녕,
돌로써 그의 얼굴에 타박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채찍으로 맞고, 목이 달리는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는데 여기서 4명의 신자들을 만나 서로를 격려하였다.
결국 그는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리파르도 Liphardus 06.03 원장 오를레앙 550년
그당시 유명한 변호사이던 리파르도는 40세가 되었을 때
세상을 등지고 수도자가 되기를 결심하였다.
오를레앙에서 그는 처음으로 미씨에 있던 성 메스민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은수생활을 더 꿈꾸던 그는 은둔소를 짓고 철저한 고행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음식은 소량의 빵 뿐이었는데, 이것도 3일에 한 번만 먹었다.
이리하여 주위에서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오를레앙의 주교는 그를 사제로 서품하고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다.
그는 73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성 모란드 morand 06.03 선교사 알사스남부지방 1115년경
독일의 보름스 교외에서 어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보름스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 후, 코포스텔라로 순례하였다.
그 후 그는 성 후고의 지도를 받으며 끄뤼니에서 베네딕또 회원이 되었다.
그는 주로 오베르뉴의 클루니악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1100년에 알사스 남부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이 초청은 프레데릭 페르즈 백작의 요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곧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성덕으로 뛰어났으며,
신자들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여 못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지냈다.
그가 포도제배업자와 양조업자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그가 사순절을 지낼 때 음식물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나
포도 한송이는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 안드레아 ANDREW 06.03 수도자 스펠로 1254
안드레아 까치올리는 원래 스뽈레또 교구의 사제였으나,
그의 모친과 누이가 죽고난 뒤인 29세 때에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천사적 사부님의 72제자 중의 한분이시며, 사부 성 프란치스꼬의 임종 자리를 지켰고,
또 그분의 마지막 축복을 받은 덕있는 형제였다.
1223년에 프란치스꼬회의 유명한 총회가 개최될 때, 그는 스페인에 있었는데,
기근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구제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롬바르디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하였고,
성 프란치스꼬의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려는 소위 "영적인 형제들" 그룹에 속한 사람이다.
이때문에 그는 두 차례나 투옥된 바 있으며, 스펠로 글라라회의 지도를 맡기도 하였다.
만년에 그는 아씨시 교외 까르체리에서 지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관상에 바쳤다.
★성녀 올리바 Oliva 06.03 동정 아나니
★성 요셉 므카사 joseph mkasa 06.03 순교자 우간다 1886년
우간다의 순교자인 그는 성 가를로 르왕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참수치명하였다.
★성 요한 John 06.03 은수자 카르모나 1600년
요한 그란데는 카르모나의 안달루시아 사람인데,
15세 때에 부친을 잃고, 세빌레로 가서 포목상을 하던 친척집에서 지냈다.
그는 사업수완이 뛰어났으나, 세상 일이 그의 정신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22세 때에 그는 소유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마르세나 교외의 은둔소로 갔다.
어릴적부터 불우한 생활을 하였지만,
자신은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자처하고 그늘진 구석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엘 그란데 페카도르"로 자처하며 지냈어도,
안달루시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하루는 길가에 쓰러진 두 사람의 걸인 환자를 도와준 뒤부터,
은둔소보다는 이런 사람에게 봉사하는 길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은둔소를 떠나 30여 년 동안이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또 그는 자주 탈혼상태에 빠졌고, 또 예언도 하였다.
★성 요한 그란데 John Grande 06.03 자선가 소읍 1600년
그는 카르모나의 안달루시아 소읍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15세 되던 해에 부친이 사별하자, 세빌리야로 가서, 친척 가게에서 일을 거들며 지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는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22세 때,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에,
마르세나 교외의 은둔소로 잠적해 버렸다.
어느 날 그는 길가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부랑자를 보자마자,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움막으로 데려와서 따뜻이 돌보아 주었다.
이런 일이 여러번 반복되자, 그느 하느님의 뜻이 이런 곳에 있음을 알고 은둔소를 떠났다.
그는 세데스로 가서 죄수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3년 동안 그는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들을 위해 구걸하고 봉사하다가, 병원일을 맡게 되었다.
이를 보고 감동한 어느 부유한 부부가 병원을 지어주자, 그는 젊은이들을 모았다.
또한 그는 가난한 처녀에게는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고,
영국과의 전투에서 상처입은 스페인 군인들을 치료하는데 헌신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의 영성생활은 어느 누구도 넘볼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성 이사악 Iassc 06.03 순교자 꼬르도바 852년
스페인의 꼬르도바 출신인 그는 크리스챤으로서 아랍어에 능통하였고,
무어인들의 지배하에서 공증인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꼬르도바 교외의 타바노스에서 수도자가 되기 위해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직책을 사임한 죄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성 제네시오 Genesius 06.03 주교 클레르몽 660년경
그는 클레르몽의 좋은 가문 출신으로 그의 학식과 덕행 특히 그의 자비심이 뛰어났으므로
주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이때문에 그곳의 주교가 서거하자, 성직자와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5년 후에 그는 스스로 사임하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으나,
교구 사람들의 강압에 못이겨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교구를 마치 현명한 아버지처럼 지도하여 위대한 사목자란 이름을 들었다.
★성 체칠리오 Cecilius 06.03 사제 로마 248년
로마 순교록에 보면 성 체칠리오는 성 치쁘리아노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심어준 카르타고의 사제로서 이 날에 기억한다고 적혀있다.
체칠리오 당시에는 크리스챤 종교가 대화 형식으로 전파되고 있었는데,
어느 대화 모임에서 미누치오와 옥타비우스 그리고 체칠리오가 참석하였고,
여기서 나온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참 종교라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가 신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통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활동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는 자존심과 오류들을 극복하여 진리를 얻었고 끝까지 지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 케빈 Kevin 06.03 원장 아일랜드 618년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아일랜드 렌스터의 화이트 파운틴 포트에서 태어난 왕손이다.
그는 성 크로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 베트록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글렌다루그의 계곡에서 은수자로 7년을 살다가,
제자들의 성화를 이기다 못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로마를 순례하였고, 성 키에란의 친구였으며, 국왕 콜만의 아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120세까지 장수하였다.
★성 크로난 Cronan 06.03 증거자 617년
★성녀 클로틸다 Clotilda 06.03 황녀 리용 545년경
부르군디의 국왕 칠페릭의 딸로서,
프랑스의 리용에서 태어나 492년에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국왕인 남편을 크리스챤으로 개종시켰는데,
이 일은 왕이 "클로틸다의 하느님"께 기도하여 패할 듯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496년 성탄절을 기하여 일어난 것이다.
국왕이 511년에 죽자, 그녀는 세 아들과 함께 살다가,
뚜르로 가서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다가 여생을 조용히 마쳤다.
★성녀 파울라 Paula 06.03 동정 순교 니코메디아 273년경
★성 페르젠티노 Pergentinus 06.03 순교 아레쪼 251년
데치우스 황제 치하에서 큰 박해가 수차례 일어났을 때,
아레쪼 지방에서는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들 가운데 위의 두 순교자는 형제지간으로서 이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귀족 출신인 이 성인들은 학생 신분으로 체포되어, 집정관 티부르시우스 앞으로 끌려갔다.
귀족 자제이고 또 어린 나이를 보아 쉽게 배교시킬 줄 알았던 관리는
그들의 굳은 믿음에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서 참수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