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가짜 명품시장인 일명 ‘짝퉁시장’의 규모는 진짜 명품시장을 능가한다.
이 가운데 위조업체들이 가장 많이 모조하는 브랜드중 하나가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가죽가방인 ‘모노그램 백’이다. 루이비통의 모노그램(두개이상의 글자를 하나의 글자처럼 도안한 것)문양은 영문자 L과 V자가 겹쳐 있고 꽃과 별무늬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디자인이다. 이 문양은 루이비통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쏟아지는 가짜와 진품을 가려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지금은 루이비통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국내에 모조 루이비통제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루이비통에 열광하는 마니아가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루이비통은 한국에서 자사제품을 모방하는 사례가 빈발하자 명품업체로는 이례적으로 가짜 제품을 제조, 판매한 서울 남대문시장의 한 가방 제조업체에 대해 상표권 침해금지 청구소송을 낸 적이 있다. 이 업체는 대담하게도 L자와 V를 겹쳐 사용한 루이비통 고유의 모노그램 디자인을 도용했던것.
루이비통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명품브랜드로서 루이비통이 갖는 대표성 때문이다. ‘여행의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루이비통 탄생의 신화는 150년전인 1854년으로 돌아간다. 프랑스에서 6대째 목공소를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비통은 상류층의 여행붐에 착안해, 100% 가죽으로 된 여행용가방을 만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여행가방이 반원형의 뚜껑 모양인데 비해 루이비통은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고 변화무쌍한 기후에 견딜 수 있도록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었다. 이 가방은 반원형 뚜껑때문에 많은 짐을 넣을 수 없었던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루이비통은 1854년 자신의 가게를 열고 실용적인 아이디어 제품들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루이비통의 탄생이 ‘실용성’과 ‘장인정신’으로 가능했다면 루이비통의 발전은 고도의 ‘명품마케팅’ 전략 덕택이었다. 루이비통은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명품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도도하다 싶을 정도의 ‘역(逆)대중화 마케팅 전략’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비통 직매장을 가본 사람이면 항상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쉽게 볼수 있다. 한때 국내에서 문제가 됐던 ‘루이비통 아르바이트생’등 한국인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루이비통이 고객들의 쾌적한 쇼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매장안에 3~5명 이상의 손님을 한꺼번에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손님 한명이 나가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들여보낸다. 외국인이 하루에 살수 있는 상품도 2개로 제한하고 있다.
스타마케팅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 ‘사이코’의 감독 히치콕이 애용하던 가방, 지휘자 스토크프스키가 악보와 타자기를 넣어가지고 다니던 책상 트렁크, 1920년대 프랑스의 여가수 릴리 풍이 36켤레의 구두를 넣어가지고 다니던 트렁크가 모두 루이비통의 가방이었다. 루이비통은 최근 국내에서도 맞춤 수제품시장을 열어 축구선수 안정환, 영화배우 이미연,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 등을 위한 가방등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장인정신과 고도의 마케팅 전략으로 루이비통은 1987년 가죽가방뿐 아니라 시계, 샴페인등 30여개의 브랜드를 거느린 LVMH 그룹으로 다시 태어나 세계 명품업계의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
비싼 가격 때문에 꼭 하나만 명품만 가져야 한다면 그 대안은 명품의 대명사를 소유하는 것이다. 한국의 수많은 명품마니아들이 루이비통에 열광하는 이유다.
샤넬-상류층 ‘멋내기 필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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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생전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것과 함께 잔다고 말했던 ‘샤넬 No5’ 향수. 어깨끈을 최초로 도입해 지금은 명품 핸드백의 대명사로 통하는 ‘2.55’ 숄더백. 20세기초 파리의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본명 가브리엘 샤넬, 1883∼1971·사진)의 작품들이다.
오늘날 명품의 상징이자 최상류층이 가장 애호하는 명품중의 명품브랜드인 샤넬이 창시자인 코코 샤넬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지금도 아이러니다. 샤넬을 상징하는 디자인과 아이콘의 바탕이 된 그녀의 불행한 성장사는 다음과 같다.
샤넬의 부친, 알베르 샤넬은 이곳 저곳을 누비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였다. 그는 폐병으로 아내가 죽자 세 딸을 수도원 부속 고아원에 맡긴다. 이때 샤넬의 나이는 겨우 열두살이었다. 수도원 기숙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살의 샤넬은 기병연대가 주둔하는 도시 ‘물랭’의 뮤직홀에서 가수로 일하며 ‘코코리코(코코를 아시나요)’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는다. 시골 클럽의 가수지망생, 샤넬의 애칭 ‘코코’는 훗날 ‘C’ 2개를 교차시킨 샤넬의 로고가 된다.
옷과 치렁치렁한 체인을 매치하는 샤넬 고유의 패션은 그녀의 고아원 생활에서 비롯됐다. 스위퍼스(바닥까지 끌리는 길이의 드레스)를 입었던 샤넬은 체인으로 스커트를 묶어 올려 바닥의 흙이나 왁스가 묻지 않도록 기지를 발휘했다. 고아원 소녀의 이 소박한 아이디어는 훗날 샤넬의 옷과 가방 뿐 아니라 목걸이, 팔찌, 발찌에 이르는 독특한 ‘체인 패션’의 원조가 된다. 샤넬의 고유한 투톤(two tone) 컬러는 수녀원의 절제되고 검소한 건축과 미술 양식에서 차용됐다. 샤넬의 상징으로 통하는 까멜리아(동백꽃)와 꼬메뜨(별) 문양 역시 자신을 홀로 남기고 떠난 부모님을 그리며 하늘만 바라봤던 불우한 소녀의 어린 가슴에 각인됐던 이미지였다.
지나친 화려함과 관능미를 거부했던 샤넬의 패션세계는 친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성장한 가난한 가수지망생, 보조양재사를 거쳐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우뚝선 샤넬의 생애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샤넬이 ‘20세기 패션의 혁명가’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녀가 그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 최고 디자이너가 됐다는 성공신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능의 탁월함도 빼놓을 수 없다.
명품족의 필수품이 된 ‘2.55’(1955년 2월에 탄생했다는 의미) 숄더백은 긴 어깨끈을 달아 여성이 손으로 핸드백을 들어야 하는 불편함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벗기고 재킷에는 포켓을 달았으며, 긴 스커트를 잘라 발목이 보이도록 했고, 치렁치렁한 머리는 경쾌하게 자르게 했다. 보석장신구를 모조품으로 만들어 많은 여성들이 즐기도록 했으며 남성복의 편리함을 여성복으로 옮겨왔다. ‘아름다움보다 기능이 우선한다’는 샤넬의 스타일이 20세기 여성에게 ‘자유’를 선물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동시에 샤넬이 단순함과 실용성으로 여성에게 패션이상의 자유를 남긴 20세기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로 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품엔 장인정신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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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명품, 명품족의 전성시대다. 페라리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2년간 라멘(ラ-メン)만 먹고 산다는 일본 직장인들의 얘기가 남의 일이 아니다. ‘명품계(契)’가 만들어지고, 명품열풍에 힘입어 ‘짝퉁(가짜명품)’시장이 활개를 친다. 명품은 불황을 타지 않는다. 충성심(로열티)이 강한 매니아들이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품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명품〓장인(匠人)정신’이란 등식이 ‘명품〓사치, 호화’로 변질된 탓이다. 세계적인 명품브랜드의 성공요인을 통해 명품이 갖는 본래의미를 되새겨본다.
■ 많은 제품들이 ‘명품’이라는 레테르를 훈장처럼 달고 있지만, 과연 무엇이 명품인지 자신있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지막지하게 비싼 수입품? 자기 과시의 수단? 명품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귀하고 값진 물건’이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모두 명품이 되는 건 아니다. 명품은 상품가치와 함께 예술적 가치및 사용자의 품격을 중요시하는 장인정신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명품은 역사의 검증을 거쳐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샤넬, 루이뷔통, 셀린느, 에트로, 에스카다, 발리, 티파니, 쇼메, 이브 생 로랑, 시슬리, 아베다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품은 각기 독특한 탄생스토리와 노하우를 갖고 있다.
국내 명품의 역사는 1990년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의 탄생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 갤러리아 명품관 물건의 절반 정도는 국내 제품이었다. 하지만 값싼 국내제품은 명품대열에서 하나 둘 탈락해갔고 수입품이 그 자리를 메워나갔다. 국내명품시장이 유럽, 일본시장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하면서 명품브랜드들의 한국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이 변했다. 세계 명품브랜드의 최대 경연장인 파리 컬렉션에서 갤러리아 명품관의 바이어는 VIP로 최고 상석에 초대받고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명품에 열광할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핸드백이나 지갑을 사본적은 없다해도, 1000원짜리 컵라면을 먹고 후식으로 40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게 전혀 어색하지 않는 사람은 일단 명품족 대열에 낄 준비가 돼있다. ‘베블론 효과’로 유명한 베블론은 명품소비를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재산 겨루기’와 자신을 아래계층 사람들과 구별짓기 위한 ‘혐오스런 자만’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21세기에 그 어떤 행위보다 소비가 중요해졌다는데 동의한다면 명품을 사치품쯤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뭔가 허전하다. 젊은이들은 왜 명품에 매료되는가. 프라다 핸드백, 에르메스 스카프를 사는 사람들은 그 물건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명품에 부여된 이미지, 즉 동경의 대상인 성공의 상징을 사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포기했지만 명품을 통해 부자의 상징 일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치의 대중화, 호사의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획득하고 소비하는 일이 현대생활에서 가장 상상력 넘치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이 됐다는 점에서도 명품신드롬은 면죄부를 얻는다.
“자본주의는 부자라는 영광의 목표를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나카무라 우사기, ‘나는 명품이 좋다’에서) ‘부자되세요’가 새해인사가 되버린 한국사회에서 명품족을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변명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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