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있는 부산 지역 목사님들의 모임에 나갈 기회가 생깁니다. 외적 조건으로 보아선 끼여 들 여지가 없는데 참여하게 된 것 자체가 복된 모임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에 대해 다듬게 되고, 폭 넓게 생각할 기회도 얻게 됩니다. 어떻게 큰 일을 의논하는지에 대하여 통찰을 얻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능숙하게 풀어가는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바쁜 일들 가운데서도 여유롭게 사람을 대하고 웃을 수 있는 마음가짐도 본 받을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모임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좋은 배움이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는 작은 개척 교회 목사에겐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대단해 보이는 분들 틈새에 끼여 때론 눈치도 보고 어느 순간엔 스스로 너무 작아 보일 때도 있답니다. 일테면 이런 식입니다. 괜히 누군가 입은 양복과 제 양복을 함께 살펴 보는 겁니다.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교가 됩니다. 내 양복은 마트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분들의 양복은 할인 마트에선 구경할 수 없는 것이다 싶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막히는 문제들을 만나면 스스로 풀어버리는 모습들에선 내가 참 작아 보입니다. 회의가 난관에 부딪힐 때 쯤 되면 느긋하게 물어 봅니다. "얼마 정도면 될까요?" 그리고는 흔쾌히 자기 교회에서 그것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두어 달 예산 정도는 족히 될 듯 싶은 액수인데 말입니다. 참 시원 시원하다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 끝에 작아 보이는 내 모습을 느낍니다.
속물 근성이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내가 작은 사람이어서 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괜히 잘 되는 사람에 대한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어 그런 것일까요? 아니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잠간씩 흔들리는 연약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동차로 회의 장소를 떠나는 목사님들을 보내고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선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무엇으로 나의 나됨이 견고해지는 것일까?' 그렇게 외적 조건을 비교함으로 내 모습은 튼튼해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교는 오히려 나를 더 작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곁에 서서 그와 비슷해지려는 마음가짐으로는 나를 나 답게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나여야 한다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나는 나 다와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나는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 보다 더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함께 모이는 시간에 살펴 본 바로는 부산에 참 귀한 목사님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산이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분들의 소중한 사역으로 인해 부산이 밝아질 것을 생각하며 마음의 짐을 덜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훌륭한 목사님들이 김상건 목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분들은 그들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고 김상건은 또 자신의 부르심이 있을 터입니다. 그 부르심이 사람됨의 가치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누구든 부르심을 따라 섬기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대단하고 탁월하진 못해도 부르심에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남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중합니다. 다른 이의 열매와 환경에 대하여 부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 깨달음이 나를 세웁니다. 누군가의 넥타이보다도 싼 양복을 입고서도 나는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비교할 필요 없이 나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첫댓글 인간사회에서 자의건 타의건 비교당하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나 살아야지... 다만 비교당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더 큰 진전이 있고 없을뿐인 것을...
도 닦으시는 분 같으세요. 후후...... 용태의 생각을 들여다 보이게 하는 댓글이네. 용태는 생각이 참 깊은 사람인 듯 하다. 비교에 대한 소중한 생각..... 고마운 댓글입니다.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