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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세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만력 연간의 당쟁
최규빈 추천 0 조회 96 15.04.11 12:21 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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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4.14 22:35

    첫댓글 사료 내용에 보면 당시 재야에서는 동림당이 성장하는 한편, 관료 사회에서는 제당,절당, 초당이 싸우고 그 틈새에 선당과 곤당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동림당도 파벌 싸움에 휩쓸리면서 동림당대 비동림당의 싸움으로 발전하여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결국 명이 망하게 된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여러개의 당의 어떻게 동림당과 대립되는 비동림당으로 묶이게 되었는지 이들과 동림당이 대립되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21:51

    질문감사합니다. 신종은 장거정 사후에 친정 체제로 들어갔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조정의 신하들은 각기 붕당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였는데요, 즉, 올시교(兀詩敎)의 제당(齊黨), 관응진(官應震)의 초당(楚黨), 탕빈이(湯賓伊)의 선당(宣黨), 고천준(顧天俊)의 곤당(崑黨), 요종문(姚宗文)의 절당(浙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야에는 동림당(東林黨)이 있었는데요, 동림당은 이부 문선랑이었던 고헌성(顧憲成)이 파직당하고 무석(無錫)으로 돌아가 고반룡(高攀龍) 등과 함께 동림 서원에서 강의하였는데, 시정(時政)을 논하여 조정 안에도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정치 세력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두 파로

  • 작성자 15.04.19 21:51

    분열되었습니다. 이들이 크게되립하게된 사건은 바로 황태자 책봉문제였습니다. 당시 태창제(광종)는 만력제의 장자였으나, 만력제는 자신의 3남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복왕 주상순을 매우 사랑하여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싶어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도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두 파로 나뉘어 정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에서 차남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에도 장자인 그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한 동림당의 반대로 인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은 허락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20세의 나이로 태창제는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정격안 사건을 계기로 하여 황태자의 자리를 굳혔고 이

  • 작성자 15.04.19 21:52

    후 주상순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앞선 정격안(挺擊案)을 비롯하여 홍환안(紅丸案)·이궁안(移宮案), 즉 이른바 '3 대안(大案)'이 일어났고, 이를 기화로 동림당과 비동림당은 치열하게대립하게 됩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65143&cid=42975&categoryId=42975
    http://ko.wikipedia.org/wiki/%ED%83%9C%EC%B0%BD%EC%A0%9C

  • 15.04.19 22:15

    @최규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15.04.16 23:34

    이 사료는 명통감으로 하섭이 명사의 많은 부분에서 진실이 빠진 것을 불만으로 여기고 100권으로 찬술했다고 나와있는데요, 대표적으로 명사에서 진실이 빠진 부분은 어디였는지 궁금하구요, 또한 어떤 내용을 서술했을 때 진실이 가장 많이 빠졌는지 궁금합니다.

  • 15.04.17 12:36

    고생하셨습니다. 만력 연간에 당쟁에 대해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요, 이러한 당쟁에 환관 세력도 깊이 관여했을 것 같은데, 환관세력이 당쟁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즉 당쟁시기에 그들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06:44

    질문감사합니다. 만력제당시의 환관과 당쟁의 이야기는 크게 언급되지 않고 이후 희종때에 유명한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나타나 희종의 유모 객(客)씨와 결탁하여 희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병필태감이 되고, 또한 동창마저 감독하여 전권을 장악하게됩니다. 여기에 비동림당은 위충현과 연합하여 동림당에 대항하게 되는데요, 따라서,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閹黨, 환관)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동림당에 대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게됩니다. 이렇게 반동림당이 환관 위충현(魏忠賢)과 결탁하였던 시기는 1625∼1626년으로 대탄압을 가하자 동림당 대다수가 체포되어 옥사했고, 동림서원도 폐쇄하게 됩니다. 1628년(숭정제 1) 위충현이 단죄된

  • 작성자 15.04.19 06:45

    후 동림당은 다시 세력을 잡았으나 이와 같은 혼란은 만주족의 세력 증대를 가능하게 하여 명나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됩니다. 따라서 환관세력은 당시의 반동림(비동림)당과 연합하여 당시의 당쟁에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큰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림당 [東林黨]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당쟁 (중국사, 2008.6.20, 미래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4117&cid=40942&categoryId=3164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65143&cid=42975&categoryId=42975

  • 15.04.17 15:12

    이번 사료는 만력 연간의 당쟁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중국의 당쟁을 보면서 떠올랐던 것이 조선시대의 당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4대 사화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4대 사화가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이러한 큰 이름들이 붙여진 당쟁간의 싸움들이 있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 작성자 15.04.19 06:27

    질문 감사합니다. 당시 정치 세력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두 파로 분열되어있었는데요, 조선시대의 사화와 비슷한 사건은 신종·광종(光宗)·희종(熹宗) 사이에 궁 안에서 정격안(挺擊案)·홍환안(紅丸案)·이궁안(移宮案), 즉 이른바 '3 대안(大案)'이 있습니다. 이를 기화로 당쟁이 일어났는데요, 정격안은 태자궁에 장차(張差)란 남자가 막대기를 들고 들어간 사건으로, 그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을 동림당이 했으나, 장차는 미친 사람이므로 배후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비동림당이 주장하여 결국 비동림당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홍환안이란 광종이 즉위한 다음 병이 나 홍환, 즉 붉은 환약을 먹고 그 다음 날 죽은 사건인데요, 이에 동림당은

  • 작성자 15.04.19 06:27

    원인 규명을, 비동림당은 광종의 몸이 허약해서라고 원인 규명에 반대하였습니다. 이궁안은 광종이 죽자 선시(選侍) 이(李)씨가 수렴청정하려고 건청궁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 동림당이 그녀를 다른 궁으로 옮기도록 한 사건으로, 비동림당은 이궁을 반대하였는데 결국 동림당의 뜻대로 선시 이씨는 별궁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당쟁 (중국사, 2008.6.20., 미래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65143&cid=42975&categoryId=42975

  • 15.04.20 03:35

    @최규빈 답변 감사합니다.

  • 15.04.17 20:39

    사료의 내용을 보면 '제당(산동), 절당(절강), 초당(호남,호북)이 싸우고 그 틈새에 선당(안휘), 곤당(강수)이 더해졌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각각 지역별로 당파가 결성된 것이 인상적인데요. 이렇게 지역별로 당파가 결성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가요? 또 이러한 지역적인 당파가 동림파와 비동림파라는 파벌간 싸움으로 휩쓸리게 된 배경이 내용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작성자 15.04.19 23:19

    질문감사합니다. 당시에 동림당(東林黨)은 주로 왕공·훈척·권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비동림당(非東林黨)은 중소지주·중하급관리와 일부 지주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비동림당의 경우에는 각 지역의 중소지주나 중하급관리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하여 마음이 맞는사람들로 구성된 여러 당파들이 모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이러한 당파들의 싸움이 활발해진 것은 장거정의 사후에 주로 나타나는데요, 장거정의 혁신통치기간에는 그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던 관료들이 그가 죽자 반장운동에 이해를 같이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만력제는 장거정 사후에 정치

  • 작성자 15.04.19 22:22

    @최규빈 에 큰 뜻을 두지 않게 되니 상황자체가 관료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붕당을 만들고 세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나갈 좋은 상황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당쟁의 쟁점은 황태자책봉문제, 환관파견에 의한 광세-상세징수, 그리고 3대안(정격, 홍환, 이궁)이 중심이 되면서 이에 대한 이해관계가 달라지자 동림파, 비동림파로 나뉘어지게 되고 이들은 서로 당쟁에 휘말리게 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신채식, 동양사개론 p576~581p 참조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3213b002

  • 15.04.18 14:21

    사료를 보면 고헌성을 따르며 함께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으나 미워하는 자도 나날이 많아졌다고 나옵니다. 고헌성에 대해 찾아보니 초야의 동지들과 강학활동에 전념하여, 강한 실천적 의욕으로 정치문제를 논하여 조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왜 이러한 고헌성을 싫어하는 자가 나날이 많아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23:14

    질문감사합니다. 고헌성을 미워하는 자도 나날이 많아졌다고 하였는데 이에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정확히찾지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책과 제가찾은 자료들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고헌성은 강학활동을 하면서 명말의 정치적 혼란과 불안한 사회를 바로 잡으려하며 정치와 사회개력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합니다. 또한 신종대의 태자 책봉, 3안의 처리등 현실적으로 황제의 뜻에 거역하는 민감한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는데요, 이러한 부분에서 고헌성에 반하는 자들이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고헌성은 동림당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반동림당입장에서 대부분 그를 미워하거나 반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으로

  • 작성자 15.04.19 23:14

    생각됩니다.
    신채식, 동양사개론 580~581p 참조

  • 15.04.19 23:16

    @최규빈 답변 감사합니다!

  • 15.04.18 22:26

    저도 사료의 내용을 보면서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 떠올랐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은 4번의 사화를 당했어도 재야세력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붕당정치를 이끌었는데 동림당은 여론의 지지도 상당히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결속해 세력화할 수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22:37

    질문감사합니다. 우선 동림당이 긍정적인 평가부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동림당은 신종시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와 사회개혁을 일으켰는데 이를 동림운동이라합니다. 동림운동은 동림당의 지도사 고헌성이 황태자 책봉문제로 신종의 노여움을 받아 파직하고 고향에서 동림서원을 재건하여 강학활동을 하였던 일을 말합니다. 동림당은 강학활동을 통해 정치적 혼란과 불안한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함과 동시에 민감한 정치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동림당은 정치와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고 환관파와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

  • 작성자 15.04.19 22:38

    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 자체가 비타협적 도덕주의로서 당쟁을 격화시켜서 결과적으로 명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장거정의 개혁정치에 대해 동림파는 아무런 대안없이 이를 반대함으로써 현실적인 난제를 외면한 이상주의적 개혁주장이 갖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희종의 암우와 환관 위충현의 공포정치로 동림파는 축출되어 핵심인물이 주살되고 조정은 환관파 일색이 되면서 재기가 힘들게 됩니다. 물론 이후 의종때에 위충현을 비롯한 간신을 주살하고 동림당을 등용하기도 하

  • 작성자 15.04.19 22:39

    였지만 당시는 명의 말기로서 각지에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기에 제대로 재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채식, 동양사개론 579~581p 참조

  • 15.04.19 22:41

    @최규빈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 15.04.19 17:21

    발제 감사합니다. 사료의 내용을 보면 장거정 사후 황태자 책립 문제를 시작으로 당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보통 장자가 황태자로 책립되었을텐데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21:37

    질문감사합니다. 당시 만력제의 뒤를 이은 황제였던 태창제는 중국 명나라의 14대 황제(재위 : 1620년). 이름은 주상락(朱常洛)이고, 묘호는 광종(光宗). 만력제의 장자였습니다. 이처럼 만력제의 장자였으나, 만력제는 자신의 3남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복왕 주상순을 매우 사랑하여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싶어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도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두 파로 나뉘어 정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에서 차남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에도 장자인 그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한 동림당의 반대로 인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은 허락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20세의 나이로 황태

  • 작성자 15.04.19 21:37

    자에 책봉되었으며, 정격안 사건을 계기로 하여 황태자의 자리를 굳혔고 이후 주상순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릴 수 없게됩니다. 하지만 태창제는 재위 29일 만에 승하하게 되는데요, 이사건이 바로 광종이 즉위한 다음 병이 나 홍환, 즉 붉은 환약을 먹고 그 다음 날 죽은 사건인 홍환안(紅丸案)이 되겠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D%83%9C%EC%B0%BD%EC%A0%9C

  • 15.04.19 17:24

    발제 감사합니다. 이번 만력 연간의 동림당과 비동림당의 당쟁을 보면서 저는 왜 황제가 이러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조선을 보면 숙종의 환국이라던가 영조, 정조의 탕평책등에서 국왕이 당쟁을 어느정도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의 황제는 이러한 당쟁을 제어하기 위한 방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 작성자 15.04.19 23:40

    질문감사합니다. 조선시대처럼 왕이 당쟁을 제어하려는 정책을 펼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신종(만력제), 광종(태창제), 희종(천계제), 의종(숭정제-명의마지막황제)들이 차례로 어떻게 즉위하게되었는지 배경을 알면 당쟁을 제어하려는 정책이 왜 펼쳐질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종때 초기에는 장거정이 개혁정치를 하면서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그 강한 통치아래 당쟁이 일어날 수 없었는데요, 장거정이 사망한 후 신종이 정치에 대해 손을 놓게 되면서 당파가 나뉘어지고 당쟁이 점점 심화되었습니다. 이상황에서 신종은 당쟁에 대해서 이렇다 할 정책을 세울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즉위한 광종은

  • 작성자 15.04.19 23:40

    즉위하자마자 한달도 되지않아 병에걸려 붉은 환약을 마신후 사망하게 됩니다. 광종역시 당쟁에 대해 이렇다할 정책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즉위한 희종은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게되면서 즉위하게 되었는데요, 아버지부터 할아버지(만력제)에게 냉대를 받았기에 희종 역시 이렇다할 황제가 되기위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황제가 되게됩니다. 그는 황제가 되고서도 목수 일에 집중을 하고 대부분의 정사를 당시의 환관이었던 위충현에게 위임하다시피 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역시 희종이 당쟁 제어를 위한 정책을 세울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황제가 된 희종의 이복동생인 의종은 개혁의 큰

  • 작성자 15.04.19 23:41

    뜻을 품고 있었지만 당시 전국적으로는 걷잡을 수 없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리고 결국 의종때에 명이 망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역시 당쟁 제어를 위한 정책을 세울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채식, 동양사개론 578~581p 참조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455835&qb=7Z2s7KKFKOeGueWulyk=&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gMI7spySDwssbfmEz4sssssstZ-412650&sid=5cpQn%2BgnJ6tufI5FsxLmCA%3D%3D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65143&cid=42975&categoryId=42975

  • 15.04.19 20:51

    사료 내용을 보면 오직 언로가 한 번 공격하면 그 사람이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대간의 세력이 강하여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간의 세력은 명대에 개편된 도찰원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고, 또 대간의 세력들 또한 황제의 임명으로 구성된 관료이며, 감찰하는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이르러 당쟁의 도구로 전락하였는지 궁금합니다.

  • 15.04.19 23:38

    고헌성은 만력제와 황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갈등을 빚었는데요. 고헌성이 적자가 없으면 장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왕석작이 내각수보에서 물러나면서 고헌성이 왕가병을 추천했는데, 왕가병 또한 고헌성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만력제의 분노를 돋구어 관직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고헌성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타 신료들은 없었는지, 고헌성과 뜻을 같이하는 일련의 세력이 모일 수 없었던 배경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15.04.20 00:03

    발제문의 내용 가운데 "만력제는 자금성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채' 궁녀와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실로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관료들의 만력제에 대한 결제보고는 항상 힘들었는데.." 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실제로 만력제가 조정 회의에 참석했던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황제인 만력제와 관리들간의 힘겨루기는 어떤 양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15.04.20 00:11

    발제문 감사합니다. 사료의 저자인 하섭은 명사의 많은 부분이 진실이 빠진 것을 불만으로 여겨서 명통감을 지었다고 책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하섭이 명나라 말기 만력 년간에서 약 200여년 정도 후대의 사람인데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명사에 진실이 빠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 빠진 진실을 어떤 사료를 통해 보충하여 명통감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명통감이라는 사서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하섭의 의도와 같이 명사에 누락된 진실을 보충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15.04.20 01:36

    발제문 감사합니다. 명통감이 명사에서 진실이 빠졌다고 생각하여 찬술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명통감과 명사가 다루는 내용에서의 차이와 명사에서 만력 연간의 당쟁 부분에 관한 서술이 명통감의 서술과 차이가 많이 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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