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같은 제자
정 안 석
명절이 다가오면 교직 8년 차에 담임했던 제자 최 군으로부터 잊지 않고 반가운 안부 전화를 받게 된다. 최 군과의 인연은 80년대 말 근무하게 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학부모회가 있던 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학교 매점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한숨을 쉬고 난 할머니는 “나는 최○○의 외할머니입니다.”라고 말문을 여시더니 최 군의 가정환경에 대해 이런저런 사연을 들려주셨다. 사업 실패로 최 군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는 세상을 떠나고, 그 충격으로 엄마는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 지금까지 자신이 최 군을 키워왔다고 하신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부여잡고 불쌍한 외손자 잘 살펴달라고 당부를 하셨다.
최 군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과묵한 편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 거리가 꽤 멀었지만,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이어가는 학생이었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한 실업계 고등학교는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목적 없이 방황하던 학생들이 많은 편이었다. 담배 피우는 학생도 있었고, 패싸움에 휘말리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런 환경에서 최 군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최 군을 따로 불러 ‘장거리 통학을 하느라 힘들지 않은지? 학교생활에 어려움은 없는지?’ 하며 관심을 가지고 최 군을 대했다. 다행히 최 군은 친구들과도 잘 지냈고 학교생활도 즐겁게 해나갔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는 최 군이 기특했고 심지가 굳은 학생으로 여겨졌다. 그런 최 군에게 학업에도 충실할 것을 부탁하며 대학노트 한 질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최 군은 시외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수업이 끝나면 버스 시간 맞추느라 상담할 시간이 여의치 않았지만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당부하였으며, 특히 건강을 잘 챙기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가도록 계속 격려해 주었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 면학 분위기 조성과 생활지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학급 종례 시간과 교과 진도 나가기 전 5분을 할애하여 명심보감의 간단한 구절을 적어 학생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한 학기 지날 즈음에는 앞 구절을 칠판에 옮기면 뒤 구절을 읊는 학생들도 생겼다. 학생들이 공감해 주어 덩달아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만기가 되어 인문계고등학교로 이동을 했다.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진학지도를 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졸업 시즌이 찾아왔다. 교정에는 밤새 내린 눈이 햇살에 반짝이며 졸업 분위기를 한껏 높여주었다.
졸업식을 마치고 교정을 걸으며 학부모와 학생들이 기념 촬영하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선생님!”하고 최 군이 불쑥 나타났다. 깜짝 놀라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후배의 졸업을 축하할 겸, 선생님을 뵈러 찾아왔다고 했다. 6개월 남짓 함께 실습한 후배의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먼 부산에서 포항까지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최 군이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했다. 직장 생활 초기라 본인도 적응하느라 바쁜 시기였을 텐데도 후배를 챙기는 최 군에게 감동이 느껴졌다. 거기다 전근한 옛 담임을 찾아주니 더없이 고마웠다.
최 군은 수산 가공 관련 회사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 전문대학을 졸업했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믿음직한 사회인으로 성장을 해나갔다. 몇 년이 지나 대구의 홈플러스 모 지점에 정식으로 입사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런 최 군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내 일처럼 기뻤다.
어느덧 제자들도 가정을 꾸리는 시기가 되었다. 최 군으로부터 주례를 부탁하는 전화가 왔다. 최 군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고3 담임 선생님이 주례하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제안했다. 고3 담임은 또 고향의 대학교수님을 주례로 추천했다고 한다. 결혼식장에 도착해 보니 대학 시절 사회학을 지도해 주신 교수님이 와 계셨다. 교수님의 주례로 최 군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선한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최 군을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고 마음이 든든했다. 첫 딸 돌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돌잔치에는 고3 담임과 주례를 해주신 교수님도 와 계셨다. 교수님은 최 군의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여 돌잔치에도 오셨다고 한다.
최 군 어머니의 부고장을 받았다. 평생을 의료원에서 지내다가 운명하셨다고 한다. 장례식장에는 사회 친구들이 많이 와 조문하고 있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최 군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외할머니의 근황을 물어보니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담임 손을 부여잡고 외손자의 앞날을 걱정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평생 홀로 외손자를 애지중지 길러주셨던 외할머니, 그분의 사랑으로 최 군은 이렇게 훌륭하게 장성한 것이다.
인연을 맺은 지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매년 명절 일주일 전에는 빠지지 않고 안부 전화와 함께 선물 꾸러미가 택배로 도착한다. 담임으로서 제대로 도움을 주지도 못했는데 잊지 않고 기억해 주니 고맙고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가을이 되면 직접 농사지은 청도 반시를 포장하여 맛보라고 보내곤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따뜻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하고 외할머니 슬하에서 사춘기를 지내며 성장한 최 군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외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온 최 군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위대한 인간 승리라 여겨진다. 그에 비해 나는 가족의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편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좌절과 실의에 빠져 지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항상 최 군을 가슴에 떠올리곤 한다. ‘내가 너무 나약하구나. 최 군도 저렇게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굳건하게 살아야지!’ 하고 다짐해 본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을 두고 부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최 군, 지금은 울산에서 홈플러스 모 지점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자이지만 오히려 내 인생의 스승같이 여겨지는 최 군! 모진 비바람을 잘 이겨내고 굳세게 살아가는 최 군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과 행복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